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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 디아스포라영화제] 폴 토마스 앤더슨 Paul Thomas ANDERSON,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혁명 너머가 아닌 혁명 이전의 시간으로
    REVIEW/Movie 2026. 7. 5. 14:13

    혁명의 의식 없는 두 번째 삶

     

     

    폴 토마스 앤더슨 Paul Thomas ANDERSON,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사진 제공=디아스포라영화제](이하 상동).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하나의 혁명이 실패하고 또 다른 혁명을 그려보는 것으로 나아가는, 곧 두 개의 단락된 혁명의 시기가 연결되는 구조를 취하는데,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있고, 이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이뤄진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아버지가 있다. 첫 번째 혁명은 과격하고 급격하게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먼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교량을 지나는 첫 번째 장면의 지배적 이미지는 그 첫 번째 여성, 레지스탕스 집단 프렌치 75의 퍼피디아로, 그의 내레이션으로 그는 혁명의 닫힘과 자신의 세계의 종식을 동시에 선고한다. 경찰에 붙잡혀 감옥행의 기로에서 동료를 밀고한 그는 쓸쓸하고 무력한 퇴장을 하며, ‘과거역시 그러하다. 실제로 그는 살아있지만 정신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생존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영화는 잃어버린 동력을 되찾아와야만 하는데, 그것은 기억 상실의 은유로 지지되는 실재적인 지연의 사태로 찾아온다. 곧 퍼피디아 사이에서 딸을 낳고 키우며 퍼피디아의 혁명 전선에서 갈라져 나와 충실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가정을 운위하던 팻 칼훈은, 이제 윌라 퍼거슨을 혼자 키우는 밥 퍼거슨으로 분해 있다. 그 둘을 좇는 록조의 명령을 따른 부대 차원의 추격이 시작되면서, 밥 퍼거슨은 16년만에 프렌치 75의 연락을 받고, 집결지 소집을 명받지만, 그는 암구호를 대지 못하고, 집결지 장소 역시 기억해 내지 못한다. 곧 집결지라는 일종의 암구호를, 프렌치 75의 언어 체계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의 쩔쩔매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비치는 이 긴 장면은 원리원칙주의()의 융통성 없음을 경유해 내집단의 폐쇄성에 대한 상징적 은유 대신에, 혁명분자로부터의 이탈과 해이한 정신을 혁명의 엄격함과 대비시키면서 그 간극을 실재의 지연된 작용으로 드러내는 것이다그들이 과거에 있다면, 밥이 있는 시간은 진정한 현재인 것인가. 그러니까 그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그가 내집단으로서 그를 인정하지 않는 원칙의 수호 역시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요원이 지닌 기계적 이성의 비인격성은, 오히려 단절된 역사의 불가능성을, 그가 멀어졌던 혁명의 요원한 시간이 실재임을 그야말로 뼈저리게 알려주는 차원에서 오직 밥을 주체로 구성한다. 그것은 결코 자동응답 전화의 수동성만을 띠지 않으며, 그가 기억해 낼 것을 간절히요청한다. 하지만 그의 진정성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작동하는데, 일종의 긴급 사태에 대한 총회 같은 암구호를 그가 기억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상부 요원이 된 탤리의 내밀한 진실, 그 당시에만 공유되었던 자신들만의암구호를 댐으로써 그는 과거와 연결되게 된다

     

    사라지는 매개자,

     

    하지만 이러한 기억으로부터 좌충우돌하는 밥의 모습은 이전의 혁명분자의 모습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현재 우리의 모습 그 자체를 대입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곧 무고한 시민에 가하는 비인간적 응답인 것이다. 혁명은 이미 분쇄되었으며 찬란했던 순간에서 종식되었다. 임신으로 부푼 배를 까뒤집고 기관총 난사를 하는 퍼피디아의 신화적 차원에서의 전사로서 상징적 이미지는, 윌라가 전사의 모습으로 재형성되는 과정에서 결정적 이미지로 제시되는 기관총 난사에서 환기된다. 이 겹쳐짐은 어머니-딸의 유전적 겹쳐짐의 합목적성을 띠면서 또 다른 혁명에 대한 희망찬 미래를 예비하지만, 동시에 실패한 혁명의 그림자 아래 허무하고도 환상적으로 기입된다

     

    폭탄 제조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 팻과 그를 유혹하는 퍼피디아의 둘만의 밤은, 밥과 윌라가 위기 이후 안온한 밤에 함께 있는 장면결정적 편지를 건네주기 직전으로 반복된다. 하지만 그 역시 과거와 겹쳐지지만 과거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암구호 소통 지연 과정의 밥은 절대적인 주인공 퍼피디아의 사라짐 이후, 그것을 재소환하는 (것의 불가능성의) 지점에서 지연된 주인공의 대체 입장을 위한 시간 끌기였으며, 그에게 윌라가 물리적 그의 딸이든 아니든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그가 진정한 아버지임을 결코 부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가 실은 애초에 그가 혁명과 멀어졌으며, 주요한 인물이 아님을, 따라서 굳이 그 사실을 알 필요가 없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그는 혁명의 과업을 단지 어머니에게서 딸로 옮겨주면 되는 인물이다

     

    이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밥은 궁극적으로 사실 그 혁명이 이미 실패했음을 붙들고 있는 인물이었음으로 드러나며, 그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냐?”라고 묻는 혁명을 배반한 퍼피디아의 편지를 뒤늦게전달해 주며, 그것이 딸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실망을 안겨주지 않음으로써 그 어머니가 아닌, 딸을 위한다는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이미 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명분 아래 적절하고도 윤리적으로 전하는 것과 같다. 이때 윌라는 밥의 사랑을 깨닫는데, 그것은 혁명보다는 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아버지의 일관됨에 대한 찬사와도 같다

    그러니까 그 편지에는 실은 혁명의 실패에 대한 반성은 없으며, 그에 따라 가족으로의 봉합은 일시적이며, 어떤 혁명을 위해 집을 나서는 윌라는 그 전의 퍼피디아가 되었고, 거기에는 혁명과 가정이 분기되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조금 더 이상적인 모습이 연출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 무언가가 일어날 것은 아니다, 아마도! 실상 아버지의 애끓는 또는 기괴한 모정 사이에서 엉뚱하고도 우연적인 결말에 도착하는 것이, 혁명의 단절 이후의 거의 모든 것인데, 또 다른 아버지, 진짜 윌라의 아버지는 퍼피디아를 체포했던 록조 대위였던 것이다

     

    여성에(의 혁명)의 실패

     

    초반 프렌치 75의 이민자 구금소 습격 과정에서 퍼피디아는 록조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의 성기를 세울 것을 계속 요청하는 가운데, 그가 자신을 묶고, 걸어나오게끔 한다. 이때 록조는 기꺼이지배당하게 되면서 원초적인 성적 경험이 각인되는데, 그것이 실은 퍼피디아의 발목을 묶는다. 그의 어머니가 팻과 퍼피디아가 어울리지 않으며, 자신의 딸의 발목을 그가 잡을 것 같다고 한 말은 즉물적으로는 퍼피디아가 아닌 팻이 애를 낳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차원에서 적용되지만그리고 퍼피디아는 자신이 아닌 갓난아이 딸에게만 신경을 쓰는 팻에게서 깊은 우울을 느낀다., 그것이 직접적 원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퍼피디아의 산후우울증이 여성의 신체성의 예민함과 특정성을 고려하지 않는 차원에서 혁명이 꺾일 수밖에 없었음을, 따라서 실은 퍼피디아의 변덕스러움을 초래했다고 보며 그를 정당화하는 건 어찌 보면 여성주의를 향한 유일하게 진정한 논거인 듯 보이지만, 그것은 그 이전의 형상, 곧 그의 제어 안 됨이, 혁명을 향하는, 그 혁명의 신화화된 궤적에 내속되는 것 같은 그의 활화산 같은 면모가 급격한 꺼짐의 자연스러운 결과를 가져옴을 보여주는 지점이 너무나 허무하다는 지점에서, 곧 잘 처리되지 않는 지점에서 그러함이 이미 너무 결정적인 것이다

     

    곧 그는 혁명에 절대적인 존재인 것 같지만, 아이에 대한 필연적이고도 갈급한 사랑을 갖는 어머니의 상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기에 앞서, 그 혁명이 일종의 자기 과신과 무모함, 독단성으로 전화할 수 있음에서도 거리낌이 없다. 그러니까 그 산후우울증과 배반의 역학 관계는 인과적이기보다 그 둘의 예측할 수 없음, 자의적이고 즉흥적인 여성의 기질로 환원되는 동일성의 차이로 향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불분명해지고 길을 잃는데, 그것은 여성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습을 혁명의 배반과 직접 이어 붙이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로부터 비진정성의 여성을 창조함으로써 혁명이 아닌, 여성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혁명은 악마와 싸운다.” 그리고 그 악마가 서로”, 곧 자신을 포함할 때 그는 마치 역사의 당연한 결과에 내속된 주체로 각인되고, 곧 객관적이어야 할 내레이터의 위치 역시 배반한다그것이 영화 자신의 변명이다. 곧 혁명의 진정한 차원이 아니라 혁명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의 지점에서 여성의 숭고함과 여성의 특정성은 여성의 비이성적 모습으로 너무 쉬이 전이되는데, 그의 머뭇거리는 마지막 편지의 음성을 봉합하는 건 결국 그것을 뒤늦게 알맞게 꺼낸 팻의 진정성과 같은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혁명의 실패 이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경유해 혁명의 현재적 불가능성을 그 딸의 외출에서처럼 환상으로 적당하게 보여주면서, 그 혁명이 진짜 끝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어렴풋한, 거짓 신화에 대한 믿음을 만드는 것으로써 봉쇄하려는 데 있다. 혁명에서 진정 중요한 건 퍼피디아가 말한 자율성이 아닌 것이 아닐지 모르는데, 그것은 단지 공동의 차원에서만 진정한 것이 된다

     

    공동체, 적대, 대결

     

    밥이 집결지 대신 도움을 청한, 멕시코 이민자 사회의 지도자격인 세르히오(베니시오 델 토로)의 지휘 아래 분주하고 피난을 준비하는  공동체 사회는, 앞서 밥의 첫 번째 홀로 대피하는, 집 아래의 터널을 기어 어느 숲속에 도착하는 기억 상실의 모호한 시간성을 체현하는 이 구간 이후, 두 번째로 출현하는 기억 복구를 위한 노력이 한데 동원되는 구간으로, 이는 처음 약국의 장면으로 출발하는데, 이때 약국의 상품은 상비 물품의 재원으로의 가능성을 띠게 된다. 그것은 열린 공동체 사회가 자본주의를 초과하는 희미한 단서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세르히오는 그 자신의 동기는 딱히 없는, 밥의 탈출을 돕는 보조자이자 매개자로서 자리하는데, 오히려 그가 이민자 사회를 이끌 때 멕시코어로 말하는 부분, 이 부분이 번역되지 않음으로써, 곧 의미화되지 않음으로써 실재 그 자체로서 제시되는 것에서, 그의 역할이 진정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때 지속되는 원 테이크형 건반을 통해 긴장이 지속되는데, 이는 기억의 지연 작용에 대한 은유로서 성립하는 시간의 지연을 보여주며,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여성에서 여성으로 주도권을 넘겨주기 전의 하나의 전주 구간으로서 자리한다

     

    록조의 지배력과 침투는 매우 선명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혁명들을 달성해 가던 초반 팻과 퍼피디아의 모습이 그의 망원경 안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러하다그 직전 혁명의 빠른 전개 양상과 함께 다른 프렌치 75의 구성원들, 흑인-백인 커플이 자동차에서 키스를 하는 순간에 비로소 오프닝 타이틀이 나오는데, 이 두 인물은 기억 상실 되었다가 프렌치 75의 재탄압이 시작되는 순간 스쳐지나간다. 이 둘은 혁명을 외부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또는 상기시키는 희미한 매개자다.

    록조가 달리던 차 안에서 총을 맞으며 전복될 때, 마치 퍼피디아의 밀고, 그리고 주류 사회로의 편입의 기회를 누리는 대신에 사라지는 선택을 할 때, 그리고 그의 내레이션이 중첩될 때 영화가 힘을 잃었던 것처럼, 영화는 음악을 멎춘다. 이는 퍼피디아와 록조의 유사성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그 둘의 동등함, 영화적 동력으로서 공통된 결정적 모티브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미궁에 빠지는데, 곧 지연되는데, 이는 작열하는 사막의 태양 아래 놓인 롤러코스트 고속도로를 따라,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서 고용한 살인청부업자 팀 스미스가 록조를 저격한 이후, 마저 그의 딸인 윌라까지 죽이러 쫓아오는 광경에서, 다시 딸을 찾아 둘의 추격선상을 잇는 밥이 더해지고, 이때 퍼커션의 긴장감을 더하는 마찰의 사운드는 오르막에서 꺾이는 구간에 차를 세워두고, 마침내 스미스가 거기에 충돌하고 난 뒤 멈추며, 이때 충격으로 차에서 쏟아지듯 나와 절뚝이던 스미스가 윌라의 암구호에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사살된다

     

    사랑이라는 보편 특정성

     

    그리고 이는 한 번 더 반복되고, 이번에는 긍정성의 차원으로 뒤집히는데, 역시 암구호를 대고 처음에는 그저 아버지임을 항변하다 이어 정색한 후 암구호를 대는 밥에게 윌라는 누구냐고 소리치는 장면에는, 신비스러운 음악이 재출현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가지고 있던, 그리하여 밥이 윌라를 쫓아올 수 있었던 믿음의 장비가 일정 거리 안에 서로를 감지함으로써 동시에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입자들이 진동하는 것 같은 음악, 선형적이지 않은, 선형적이기 전에 공간적인, 정위되지 않는 입자들로 뒤덮이는, 그것들이 오르내리면서 반복되는 이 음악은 식별에서 수용으로 향하는, 인지에서 정서의 차원의 고양으로 흐르는 주체의 내면을 체현한다

     

    혼란의 감정에서 다시 아버지를 수용함은, 아버지의 자리를 재정초하는 결단을 내리는 것과 같고, 두 번째의 진정한 물음은 곧 무너진 자신의 입구를 소급해 가는 자신에의 격발과도 같다. 하지만 그 격발과 함께 그는 완전히 아버지를 향해 기울어진다. 그리고 드디어 아버지와 격렬한 포옹을 한다, 마치 그 전에 존재하지 않던 어떤 기원에 근접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는 퍼피디아와 밥의 해후를, 그 불가능성을 미리 해소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퍼피디아의 편지가 이 둘이 다시 돌아온 둘만의 집에서 밥에 의해 전달되고, 그것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환영 같지만, 둘의 중심을 더는 흔들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로 그렇다

     

    밥은 그로써 혁명의 실패를 긍정하는가, 아니 긍정할 수 있는가. 아니 그는 혁명 이전의 시간으로 소급해, 생명의 탄생과 사랑의 짧은 그 순간으로 곧 되돌아가, 그 혁명의 실패 이후의 시간을, 곧 그에게 사실 혁명의 성사는 부차적인 것이 된 이후의 시간을 견뎌내는 숙명을 긍정한다.앞선 쇼파 위에서 윌라와의 평온한 시간은 그것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밥에게 혁명의 멍에를 그가 망각했다는 데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어머니의 자리, 생명을 긍정하는 혁명 너머의 또 다른 정신을 그가 체현하기 때문이다. 너머는 실패를 형해화한다. 마치 윌라가 지난날의 암구호를 즉자적으로 대입한 직후 그것을 꺼뜨리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따라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밥이라는 인물이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가질 수 있는 상상력이 아니라, 혁명이 이미 지난 자리를 수용하는 자들을 긍정하는 자리이며, 사실은 그것이 혁명 이전의 자리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다시 퍼피디아와 밥이 그사이에 갓 태어난 윌라를 바라보고 있는 행복한 장면은, 윌라와 밥의 사이를 경유해 되돌아올 기미를 보이는 듯한데, 이 장면은 이미 혁명이 끝날 것임을 이야기하는, 전사의 모습이 해체되고 긴박한 혁명의 급격한 힘의 역량이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혁명 이전의 근본적인 자리로서 어떤 순간을 구성하고 있다

     

    얼룩과 잔여의 시대착오적 이미지

     

    그리고 동시적인 둘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퍼피디아는 실패했으며 비겁하게 숨었지만, 밥은 처음 윌라를 마주했을 때의 행복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윌라는 자신의 어머니 퍼피디아처럼 다시 집을 나서며, 그것은 자못 어떤 위기나 긴장 없이 긍정적으로 전화된다. 곧 기실 어떤 혁명에 대한 강렬한 희망도, 그 혁명의 메시지도, 가치도 예전 같지 않은 시대를 기입한다그는 퍼피디아와 달리 다시 집에 돌아올 것이다

     

    그 전에 록조가 먼저 처리되는데, 그는 언청이와 같은 얼굴이 된 채, 크리스마스 클럽에 다시 불려가 마지막으로 해명을 하고, 그가 기대했던바 정식으로 그곳에 들어가게 되는 대신, 독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타자의 얼굴을 형상화한다. 이른바 홀로코스트 유대인의 이 형상은, 구시대적 차원의 시간이 고스란히 작동하는 시대착오적 광경으로, 윌라와 밥의 끈끈한 친연성을 순수하게 정립하는 데 먼저/최종적으로 지양될 대상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단지 외설에 그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둘의 정다운 시간은 그것과 무관하지만, 동시에 혁명의 맹점, 이민자구금소에서 자본주의 상징으로 이어지는 혁명의 과제에서 빠진 보수주의자 극렬 우파에 대한 최종적 자리를 빠뜨리게 된다

     

    이 구조적 대비는 허술한 밥에 대한 긍정으로써도 사실 봉쇄되지 않는 잔여 같은 것으로, 결국 록조를 화장하기에 이르며, 그의 얼굴부터 시신이 장치로 향하는 것으로 소거된다. 그것은 다소 공허한 장면이 된다. 록조는 윌라를 납치해 그의 딸임을 증명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후 그 딸의 운반을 맡긴 남자의 배신으로 인해 딸은 수갑이 묶인 채 탈출하게 된다

    이 납치는 퍼피디아에게 먼저 수행된 것으로, 이는 퍼피디아가 총구로 위협을 가하면서 자신에게 성기를 세우도록 한 명령이 원초적 쾌락의 순간이 되었던 것이 전도된 결과이다. 이 방종적 성의 쾌락이 내부에서 발동해 외부를 끌고옴으로써 혁명의 틈새를 벌린다. 한편으로는 혁명의 에너지를 발동시키고폭탄이 터지기 전에 퍼피디아가 밥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것처럼, 다른 한편으로는 균열을 가하게 된다퍼피디아는 록조의 아이를 임신한다.

     

    그리고 록조의 타동적 얼굴은 결국 홀로코스트의 얼굴로써 또 한 번 반복된다. 그 충동의 여파 안에서 퍼피디아는 환상적으로 소거되고, 록조는 실재적으로 제거된다. 그렇게 과거는 추억이 되고, 시대착오적 역사의 장면은 섬뜩한 미래로 연장된다. 반면, 무지한 밥은 순수한 상태로써 퍼피디아와 윌라 모두를 (록조로부터) 수용하게 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곧 부재하는 어머니의 자리를 대리하는 영화, 가부장적 아버지의 모습도 실재의 아버지도 아니지만, 아버지의 자리를 근본적으로 시험 받게 되며 곤궁을 겪는 인물이 소거된 어머니의 자리를 메우는 영화이다. 밥은 비로소 자신이 전쟁의 한가운데 있음을 뒤늦게 인식하고, 결국 가부장의 아버지가 기각된 상태에서 어머니의 자리를 재탈환하는 동시에 과거의 망령적 혁명의 이미지의 시간이 아닌 현재의 시간을 사는 주체로 재구성된다

     

    윌라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고, 윌라의 바깥은 실재가 아니며, 결코 오지 않을 실재일 것이며, 아마도 안온한 이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거기에는 비로소 응시가 있고, 영속적인 엄마의 자리가 (시련을 겪어낸 이후) 굳건하게 있으며, 그것이 곧 영화가 말한 하나의 전쟁 이후의 또 다른 시간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밥이 윌라를 구해낸 게 아니라, 윌라가 밥을 대상으로 쟁취했다. 곧 윌라는 이제 퍼피디아의 실수를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밥을, 가정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혁명의 단절 이후의 시간이 아닌, 혁명 이전의 순간, 혁명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자리한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진정한 시대착오적 제스처일 것이다. 유예된 미래가 망각한 과거와 그로 인한 환상적인 희망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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