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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희수, 〈창 불 흐르는 MELTING FIRE ICEMAN〉: 이미지들의 틈 혹은 이미지라는 물질
    REVIEW/Movie 2026. 3. 11. 20:04

    권희수, 〈창 불 흐르는〉[이미지 출처=https://ex-is.org/screening-2024-1/-melting-fire-iceman-heesue-kwon](이하 상동).

    권희수 작가의 〈창 불 흐르는〉은 영화에 접근하고 영화를 활용하며 나아가 영화를 서술하고 정의한다는 점에서, 영화 자체에 대한 영화, 곧 메타 영화와도 같다. 필름이라는 영화의 물리적 근간의 요소와 맞세우는 근원적 요소를 더하고 이에 비추어 영화를 전유하고자 하는 데서 서사가 출발한다. 제목은 자신의 영화가 지닌 서사의 구조를 간직하는데, 가령 불(FIRE)과 물(MELTING)의 원자적 요소의 대립은 이미지의 흐름(ICEMAN)이라는 질서 아래 통합된다. 또는 이미지의 흐름으로서 불에 탄 필름과 극장, 점액질의 운동성의 각각의 궤적은 모두 흐르는 속성을 가진다.

     

    이미지들은 뒤섞이면서도 어떤 서사의 지침 아래 묶이려다가도 벗어나며 그 자체로 지시되는데, 느슨한 결속 또는 의도적인 나열성은 불완전한 이 영화의 속성을 결정짓기보다 이 영화의 서사적 방향성 혹은 서사의 구조의 의도된 자의성을 드러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의미를 띤 각각의 무질서한 그럼에도 더 큰 비가시적 질서로 환원되는 기호가 된다. 곧 영화의 무의식이 영화와 신체의 무의식적 결속이라는 신체 현상의 원리임을 드러내면서 이를 영화의 정의라는 하나의 서사로 환원시키는 과정에서 모든 이미지는 평등해진다. 곧 이미지는 무한한 무의식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비선형적으로 추출되는 잠재적이고 자의적인 속성을 가진다.

     

    영화의 무의식은 무의식의 한 단면을 이루거나 무의식에서 나온 그것에 상응한다. 영화의 궤적이 영화의 잔상이 된다. 곧 영화의 무의식을 우리의 무의식으로 뒤바꾸는 것이 이 영화의 수행성이라고 하는 부분을 전제할 것이다. 한편, 이미지들은 서사의 의식적 표면으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구조 아래 나열되는데, 또한 불과 물의 메타포 아래 각각의 불순물처럼 생성된다. 불에 탄 (불이 난 극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포함한) 초기 영화의 파편적인 이미지들은 혼합되고 변주되며 안정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유하는 불순물과도 같고, 이와 같은 전반적인 양상에 다시 불순물 자체의 물질적 이미지로서 침투하는 영화의 표면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영화의 물리적 구성 요소를 활용하는 방식이 곧 영화의 작동 원리를 이루는 구조 영화의 방식들을 ‘가져오되’ AI 기술의 창조력을 활용한 이미지의 재배치와 생성 방식을 또한 도입함으로써 영화를 이루는 과거와 미래(?)의 질서를 통합한다. 대략 점액질의 운동을 표현한 그래픽적 이미지로부터 초기 영화의 극장에 불이 나서 대피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다룬 일부 이미지 파편들, 불에 탄 유비로서 제시되는 구멍 난 혹은 열화된, 불투명의 막들로 향하거나 그것에 덮혀 있는 파운드 푸티지―셀룰로이드 영화 필름과 초기 영화―의 비계열적 몽타주, 그리고 다시 초반의 운동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몇 개의 덩어리의 구분이라는 구조적 양상을 보여주는데, 영화의 구조, 이념, 나아가 메시지까지를 전제하는 초반 잠깐의 내레이션은 그 구조를 인준한다.

     

    여기서 불탄 극장의 재현적 이미지를 짧게 반복하는 것에 비해 그 너머 대부분의 시간은 불탄 이미지 자체를 간직하는데, 전자가 서사에 대한 직접적인 참조의 이미지이면서 반복, 각인됨으로써 마치 영화 이전의 하나의 원형적 기억이 되려는 것처럼 보인다면―잃어버린 기억의 되찾음과도 같다.―, 후자는 즉물적으로는 이미지 자체의 내용보다는 이미지‘들’의 불탄 흔적이라는 지표로서의 특성을 보여주는 데 가깝다. 이는 분화되고 지연되는 이미지 계열체로서 자리한다. 이처럼 여러 파운드 푸티지로 구성된 이미지들의 (자의적 질서를 띤) 고고학적 아카이브는 영화의 역사로서의 형상이다. 곧 영화는 영화라는 하나의 이념으로서 몽타주를 시도한다. 동시에 불탄 극장은 비가시적‘이었던’ 극장의 신체, 극장 바깥과 영화 이후의 관객의 “꿈”의 다음 구조적 요소로 이어지는 서사의 계열을 만든다. 이는 내레이션을 통해 추정 가능한 부분이다.

     

    따라서 아카이브의 자의적 측면은 극장의 통약 불가능한 이미지의 축적, 꿈의 무질서한 연결, 종합의 차원에서 극장의 또는 관객의 이미지 자체가 투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여기서 이미지‘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또는 이미지들의 연결과 새로운 구문의 생성 역시 중요하지 않다. 단지 이미지들이 무의식의 이미지 계열체임이 중요해 보인다. 곧 이미지-대상이 아닌 이미지의 주체를 변환하려는 타자의 꿈, 혹은 타자로서의 꿈으로 이양하려는 게 그 시도가 꿈꾸는 것 아닐까. 이른바 고고학적 몽타주를 바슐라르 버전의 몽상적 실체로 체현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미지들은 연결되면서 매끄러운 서사의 부분으로 녹아드는 대신, 물질적인 흔적으로 남거나 투사되고 있음의 부분들을 대체하며, 대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 대한 은유로서 저장되기 위해 세계 혹은 영화라는 더 큰 범주에서 추출한 계열화된 이미지들은 투사라는 행위 자체에 의해 완성된다. 이미지는 솔기이며, 순간이자 순간의 반복들이고, 유사한 것들의 겹침과 사라짐이다. 이미지는 물질의 흔적에 대한 이미지(라는 내용)이면서 물질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보면, 〈창 불 흐르는〉은 그 둘을 결합하려는 시도이다.

     

    “창”, “불”, “흐르는”은 ‘불’을 제외하면, 즉물적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나아가 번역과 함께 의미를 불안정하게나마 확정할 수 있다. (창문으로서) ‘window’인지 (무기로서) ‘spear’인지 알 수 없는 ‘창‘은 흐르는(“MELTING”) 속성을 간직함으로써 경계의 의미를 띤 투과체로서 자리를 잡는다. “흐르는”은 “ICEMAN”과 결합하며 ‘물’의 대표적인 속성을 의미하게 되고, 그 역으로 “ICEMAN”은 물의 존재적 차원으로 승화된다. 오인을 위한, 중첩과 복합을 위한 의미 양상으로서 번역은 이미지를 옮기는 행위의 가변성과 시차, 우발성 등의 특성에 상응해 보인다. 동시에 이 병렬의 행위는 그 자체로 몽타주의 행위이기도 하다. 곧 이미지는 몽타주를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또는 가장할 수 있다. 나아가 흔들릴 수 있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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