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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훈, 《손과 얼룩》: 시간의 잠재적 계열로서 회화’들’REVIEW/Visual arts 2026. 7. 8. 13:52

안상훈, 《손과 얼룩》전시 전경[사진 제공=갤러리조선](이하 상동). “손과 얼룩”은 그야말로 회화 작가가 작업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그 둘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드러낸다. 이는 작품의 특질이 아닌,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필연적인 사전 절차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와 같이 전시의 제목이 작품으로서 어떤 (특별한/예외적)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는 사실, 얼룩이 곧 그림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이 전시는 어떻게 그 평범한 진실을 마주하는가, 또는 그 평범함이 어떻게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는가의 질문으로부터 전시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손과 얼룩》은 우선 그리고 아마도 결정적으로 그림들의 물리적 집산 그 자체로 드러난다. 전시장 자체가 분별할 수 없는 차원에서 하나의 얼룩이라는 사실은, 기존 전시에 대한 냉소적 회의를 동반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곧 전시와 작업의 불가분성을 넘어, 작업이 곧 전시임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시는 작업(장)의 연장선상에서 그것의 포화 상태, 더이상 작업이 불가능한 임계지대의 영역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고 이는 “손과 얼룩”이 그야말로 작업 그 자체를 성실하게 주장하는 것임을 확인하게 하는 듯하다.
실제 그림은 수많은 얼룩들과도 같고―이는 결과적으로 이 그림들의 추상회화의 속성을 구성하는 부분이 두께감 있게 붓질한 흔적과도 같다는 지점에서 실제적 진술이다.―, 그 수많은 얼룩‘들’로서 그림은 다양한 착상의 단어 수집장의 일부로 조응한다. 곧 작품명은 ‘손과 얼룩’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우연한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차원에서 도출된 ‘각각의’ 명제들이며, 그 얼룩을 상징화된 자리를 부여하는 매개의 언어로서 착상은 손으로 이전될 것이라는 지점에서, 또는 그 손 자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착상은 비가시성의 실재성이다. 그리고 이는 ‘손과 얼룩’의 자동 회화와도 같은 물리적 회화, 신체로부터의 지표로서 회화에 대한 차이―순수 추상에 대한 언어로서 지지체―를 보여준다.
제목이 작품에 대한 단서로서 직접성을 띠지 않는다는 것은 곧 제목이 작품에 대해 부차적임을 뜻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는데, 언어가 일으키는 효과가 작품과 별개로 그 작품들을 어떤 분류의 질서와 사소설적 세계의 아카이브를 구성하며, 곧 순수 추상으로부터 오는 회화의 의미 없음과 분별없음의 세계를 ‘세계’를 조각하는 파편들로서 단어장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이는 틈 없음의 설치 방식을 수많은 틈‘들’의 언어로 치환하는 방식이다.

아마도 그것이 (사)소설인 것은, 모든 언어가 아닌 것은 그 언어가 구상적 차원과 추상적 차원으로 대별되는 것이 아닌 주로 구상적 차원의 단어들과 화용론적 차원의 문장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무코지마에서 사이클링”, “풀밭 위에 점심식사”, “맞춤 재단사”와 같이 연이은 작품들에서 언어가 가리키는, 언어로부터 떠올리는 어떤 형상, 물살, 풀밭, 옷의 솔기 같은 것이 작품에서 짐작되지 않는 건 아니다.
반면, 그와 인접한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와 같은 작품에서, 그것은 어떻게 형상화될 수 있는지, 언어와 회화의 상응점을 찾기 어려워지는데, 앞선 과정으로서 절대성, 과정으로서 전시의 이념의 차원에서, 그 과정으로 착상을 실재성으로 부착하는 과정이 예속하는 지점에서 이 말은 일차적인 의미를 형성한다.
나아가 일종의 문장 계열체로서 그것은 다시 회화적인 것을 되돌려 주는데, 곧 앞선 문장은 다다음 ‘섹션‘―참고로 너무 많은 작업은 도면상에서 일종의 묶음들로 처리된다.―의 앞선 문장처럼 예외적으로 눈에 띄는 혹은 분별되는 “난 확실히 돌아올 것이다”라는 문장이 가진 추상성의 차원에서의 유사성을 획득한다.
두 작품은 형상적으로 비교 가능한 지점을 산출하는데, 가령 캔버스의 크기가 거의 같고, 4분할 되는, 좌우, 위아래의 네 단면의 형상이 대체로 유사한 것이다. 이는 예컨대 어떤 구상으로부터 오지 않는 차원에서의 추상을 구성할 때 오는 작가의 무의식적 클리셰, 습관적 기초를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두 작업은 그 외에는 모두 다른데, 전자가 뭉개듯 그린 두꺼운 선분들과 그것이 주는 어떤 몽롱함이 느껴진다면, 후자는 스케치와 옅게 펴 바른 방식으로 인해 질감과 색감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결국, 이는 회화의 물리적 성격의 차이들로 분쇄, 환원된다.
여기서 언어는 색의 뭉침과 선분들의 결이 구성하는 형태의 추상화를 통과하는 의미의 지층이다. 곧 언어는 손으로 향하는 무의식적 착상이 그 자체의 자율성만을 향하지 않게 만드는, 전 단계의 잠재적 효과가 일종의 얼룩으로 각인되는 부분으로 보인다. 그것이 작가의 물리적 프로세스에서 오히려 뒤늦은 절차로 자리한다―작품 이후 이름을 명명한다는 것―고 해도 관객에게는 캡션으로서 작품을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구상과 추상의 미묘한 틈은 곧 언어일 것이다. 언어가 보다 직접적인 차원에서 작용하는 것이라면, 곧 합목적적으로 작품을 규정하는 역량을 갖는 것이라면, 형태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단지 그것이) 추상화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곧 언어가 사후 작용일 뿐이라면, 그것은 추상화된 형태, 의도되지 않았지만 단지 형태로 다만 보이는 것일 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손의 자율성은, 회화적이고자 하는 손의 충동은 언어로부터 온전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언어의 차원에서 보면, 방만하고도 무책임하며 무절제한 충동의 바람 아닐까. 물론 그 자율성은 운동성의 차원으로 회화적인 작가만의 형식을 대체로 구성한다. 곧 색과 선분이 구성하는 구조적 조합으로서 이미지의 어떤 계열체들이 분류의 지층을 형성한다.〈그 식물은 견디지 못했다〉는 분명 다른 작업들과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 이는 〈하와이 해변에는 모래가 많아요〉에서의 역설적인 부분, 곧 구상적 차원의 물질, 모래의 색과 모래가 뒤섞이는 유동적인 구획과 그 가벼운 속성, 빛 등을 어느 정도 충분히 체현하는 가운데, 곧 다른 작업들보다 밀도를 덜어내는 것에서 나아가 그림 전체를 대략 사선으로 가르며 자리하는 여백 공간을 상기시키는데, 이 여백은 물론 캔버스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색과 선분의 운동을 볼 수 있게 하는 간격으로 자리한다.
그러니까 마치 초기 작업처럼 보이는 〈그 식물은 견디지 못했다〉는, 거의 각기 다른 색을 지닌 선분들의 뼈대 같은 구획이 색을 덜어낸 여백 공간 안에서 두드러질 때 그것은 그 스스로, 그리고 다른 작업들 중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게 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때 ‘견딜 수 없음’의 차원은 이 연결되지 않은 선, 여백, 과감함 대신 읊조림과 같은 이 선분들 자체에 내재적으로, 심리적으로 숨어 들어 있지 않은가.
안상훈의 《손과 얼룩》은 꾸준히 작업을 지속하면서 일상의 어떤 흔적, 작품과 연관되지 않은 곧 일상으로부터의 ‘얼룩‘을 개입시킨다. 그것이 곧 문장과도 같은 제목들인데, 이는 작업 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작업을 정렬하고 의미화하는 한편, 작업을 구상하고 예비하는 어떤 작업의 서사적 지형을 그려 나가는 의식의 구성적 흐름과 같은 것 아닐까.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그것의 지침이, 경로가, 기입이 가능해짐으로써 그 모든 것이 잠재적인 것으로서 그저 있을 수 있게 하는 것 아닐까. 곧 얼룩은 손보다 늦게 나타나지만 또는 실제로는 손과 함께 동시적으로 나타나겠지만, 실은 손보다 미리 앞서서 가상적으로 그림을 물들이고 있거나 그림 밖에서 어느 순간 그것의 의미로 결정되었던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2025.2.14.(금)-4.27(일) 10:30-18:30(월요일 휴관)
갤러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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