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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주, 〈고 故 The Late〉: 떠도는/유리된 신체로부터 죽음을 분별하기REVIEW/Visual arts 2026. 7. 7. 15:02
배치: 절단된 동시성

임영주, 《올해의 작가상 2025》 전시 전경. ⓒ 임영주[사진 제공=국립현대미술관](이하 상동). 임영주의 〈고 故 The Late〉(2023-2025. 비디오, 사운드, 물체, 퍼포먼스, 웹사이트, 책, 60분.)는 12채널 영상으로 이뤄진 작업으로, 공간 전체는 영상에 맞춘 시각을 기준으로 크게 3면의 배치로써 재조정되며 부분적으로 적용되는 어포던스, 곧 일정한 자리 잡음에 대한 모순과 비틀림을 초래한다―아마도 이러한 물리적 차원의 배치를 제외하고 순수 형식으로 전시를 환원한다면, 고정된 스크리닝의 핵심적 차원만을 추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혼동으로서 이 전시의 포맷 자체를 애써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곧 관객은 영상들의 동시성의 산출 아래, 시간과 이미지 들의 비선형적 전개를 물리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해제해야 함의 곤궁을 초래한다―하지만 결국 전시는 그것의 실패, 곧 의미 없음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전시장은 일차적으로 어떤 명확한 위치 잡기, 나의 중심된 위치 부여가 어려운 VR의 불안정한 신체 체험에 대한 환유에 가깝다. 우선 전시장 중앙 부근의 천장의 모로 누인 직사각형 패널로 인해, 공간은 하나의 입체 작업으로 상정되는데, 이 허공에 떠 있는 여성을 담은 관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공간의 높이 전면을 차지하는 스크리닝이 주요하게 자리한다―이 관은, 관으로서 스크린은 중간에 붉은색 테두리를 가진 노란색 선분의 빈 직사각형이 비어진 전면 스크린을 활보하는 것, 레이저처럼 쏘아지는 것에서 확인된다.
입구를 기점으로 섰을 때 이 두 전면 스크리닝에는 울퉁불퉁한 턱이, 일종의 장벽이 3개 자리하는데, 왼쪽 가의 〈주마등〉과 오른쪽 가의 2채널 패널 영상, 그리고 그 사이로 천장 패널 가로 전체를 누이는 곡률이 적용된 객석 벽이 그것이다. 그것은 순전한 물리적 덩어리의 형식으로 일단 가정되는데, 두 개의 전면 스크리닝 사이로 접붙는 또 다른 영상들, 주요 영상의 부가적 영상들과 객석, 설치까지 끼워 넣어진 공간에서의 동시성의 발현은 어포던스, 곧 안정적 자리 잡음이 그 밖의 것들을 배제, 소거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를 지양하기 위해, 전면 스크리닝으로부터 모로 돌린 몸으로써, 또는 천장 패널의 인물과 90도로 접면한 채 이 안의 장벽들까지를 한 번에 조망하게 되는 시점이 요청되는바, 그에 따라 사선으로 두 개의 전면 스크린을 교차하는 시선을 선택한다면, 이는 물리적으로 대칭되며 이미지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분열증적 차원으로 조각되는 두 영상의 차이를 감지하게 된다. 그것이 제목 “고 故 The Late”가 함축하는 한글, 한자, 영어의 순으로 동양과 서양의 죽음이 나열되어 ‘죽음’의 의미가 배가되는 한편, 번역의 형식 아래 죽음에 대한 문화적 관념의 차이를 지시하는 바를 체현한다.
죽음: 형식 대 내용

이를 전시 차원으로 연장하면, 전시는 부가와 증폭의 외양 아래 차이의 반복이라는 형식을 추구하는가, 아님 문화상대주의적 차원의 이해를 촉구하는가. 죽음을 끊임없이 다른 죽음으로 전치하며 죽음을 형식으로서 유예하고자 하는가, 아님 죽음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을 도입해 규명하고자 하는가. 죽음이라는 형식을 시험하는가, 죽음이라는 내용을 탐구하는 것인가. 〈고 故 The Late〉는 물론 그 두 층위를 모두 시험하고자 하지만, 그 두 시도 속에서 스스로 모호해진다.
어쩌면 전시는 그 세 개의 단어, 네 개의 문자 가운데 빈칸을 명시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곧 12개의 영상에서 실제로 기능하는 영상과 단지 부가되는 영상, 그리고 전자의 전면 스크리닝의 빈 구간들은 분열증적일 뿐만 아니라, 전체를 초과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강박 역시 체현한다. 그러니까 VR의 시점으로부터 우리가 360도의 세계 속에서 국소의 시야만을 임시적으로 확보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곧 모든 정보를 파악할 수 없음의 사태는 역설적이지만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의미로 채워 넣어야 하는 과제를 해소하지 않는다. 하지만 VR과 달리 우리는 시선을 자연스레 옮길 수 있으므로 모든 것은 무의미하더라도 의미를 지녀야 한다.
결과적으로, 두 개의 스크린은 서로를 마주하면서 서로를 번역한다. 마치 고(故)와 The Late가 서로를 다른 것인 양 되비추는 것처럼. 그것은 문화의 차이보다 언어의 차이―오히려 번역의 차원은 각각의 화면마다 적용되며, 이는 하나의 스크린이 실은 세 개의 스크린을 빈 이음매로 결착시킨 세 개의 형식을 활용하는 데서 연장된다.―, 곧 한 언어 내의 다시 쓰기 차원이라는 순수 ‘기술’의 차원에서 분화됨에 가깝다.
가령 “축시”는 “비혼잡시”―“데이터 심야 처리”로 (데이터가) “가장 잘 흐르는 시간”―로 전유된다(인간이 보통 잠든 시간이지만, 귀신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는 따라서 죽음의 견지에서 봤을 때 양가적인 이 시간은 왜 반대의 시간으로 재설정되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 중첩의, 실은 하나의 나눔 안에서 언어는 명확해지는 대신에 모호해지고 형해화된다, 사후적 중첩을 통한다고 해도 말이다. 곧 언어의 정교함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상실해 나간다.
그러니까 관객이 잠의 포즈로써 하나의 스크리닝에 대한 맹목을 선택하고 다른 영상을 차단할 수 있지만, 실은 이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두 언어에 대한 간극이 매우 미소한 것 자체임을 판단하는 것, 어쩌면 그 둘이 하나에 예속되기 위한 차이의 복제임을, 따라서 그 차이는 오로지 고유성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일자에 부속되기 위한 기능적인 차원임을 인식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실상 언어 유희의 차원, 곧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로 기표적 닮음의 차원에서만 이동하는 것의 전략이 활용되는 것에서 더 명확해지는 것 같은데, 곧 “고국”, “고물” 등 온갖 한자 고가 쓰인 단어들이 나열되는 부분에서, 그것은 각 단어가 지닌 ‘고’가 그 각각의 단어로 어떻게 연장되는가의 차원이 아니라, ‘고’라는 라임의 어떤 구색을 맞추기 위해 동원되는 단어들에 가까워 보인다.
전근대로의 환원 혹은 언어 유희적인 환원

“아이고”와 “하이고”가 두 개의 화면으로 분배되는 것 역시 그러한데, 금강경에 ‘무슨 연고에서 그런가 하면’이라는 후자의 뜻이 실제 있고, 전자가 그로부터 우연히 유래한 것으로 보는 기원의 신화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 언급되지 않기도 하지만, 이는 실은 하나의 단어에 대한 다른 단어의 라임을 맞추기 위한 사후적 명분에 가깝다고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핵심 문장은 다음과 같다.
[스크리닝 1] “1971년의 한국인들은 두 개의 미래를 동시에 살았다. 하나는 과학기술이 약속하는 근대화된 미래였고, 다른 하나는 종교가 예언하는 종말 이후의 세계였다. 이 두 미래는 서로의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모든 것이 이중화되고 있었다. 목소리는 에코로 나뉘었고, 미래는 과학과 종교로 갈라졌으며, 존재는 물질과 영혼으로 분리되었다. 바니걸즈 쌍둥이가 만든 에코는 분신에 분신을 거듭했다.”
[스크리닝 2] “1971년, 한국 현대사에서 기술과 영혼이 갈라지는 분기점으로 기억된다. 이 해에 한국과학원(KAIS)이 설립되며 과학기술의 미래가 열었고, 동시에 여러 종교가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되면서 신종교의 지형이 요동쳤다. 물질과 정신, 기술과 종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초월을 추구하던 시기였다.”
두 스크린을 관통하는 중요한 명제는 한국과학원 설립과 종교의 신흥 종교의 난립이라는 1971년의 두 가지 대비되는 사실이다. 이 대비를 스크리닝 1이 “과학”과 “종교”의 (원래는 하나의 무엇이었던 차원로부터의) “분리”로 갈음한다면, 스크리닝 2는 “기술(과학)”과 “종교” 각자의 (어떤 비정상적인 차원에서의 지향으로서) “초월”로 상승시키는데, 이는 이 둘의 갈라짐이 실은 기이한 것이며―원래는 하나였어야 하며―(스크리닝 1), 원래와 달리 미래에 대한 어떤 과잉으로서 관념이 산출되었음을 의미한다(스크리닝 2).
이때 스크리닝 1의 형식에 대한 사운드적 지표성을 가져가기 위해, 바니걸즈의 〈우주여행〉이 실제 나오게 된다. 〈고 故 The Late〉는 텍스트와 이미지와 대위법으로 산출되는 독립된 노래들을 가져오는데, 〈우주여행〉은 이소라의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를 죽음의 의미로 연장되는 데 있어 어렴풋함을 띠고 동원된다면, 〈우주여행〉은 직접적 참조 자료로, 바니걸스 멤버 두 명이 번갈아 가며 소리를 내서 에코 효과를 만들었다고 하는 걸 스크리닝 1에서 ‘하나‘의 기이한 분리, 그리고 그 상호 반영성을 형식적 차원의 예술적 효과로 환유할 수 있다고 믿(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음악은 일종의 주술적 효과를 의도한다. 다른 두 개가 하나인 것처럼 반향되는 원래의 ‘하나’, 그리고 ‘초월’이 아닌 이념은 여기서 누락된다. 동시에 누락을 통해 그것은 오히려 (믿음의 차원에서는) 강화된다. 스크리닝 1에서 과학과 종교가 갈라짐으로써 그 둘이 하나(의 믿음 체계)였던 전 시대를 거꾸로 확정한다면, 스크리닝 2에서는 과학이든 종교든 비이성적 차원의 맹목을 추구하고 있음을 통해 오히려 맹목성의 이념을 종교가 아닌 과학도 좇을 수 있다는 지점에서 둘의 상동성을 거꾸로 확인시킨다. 결국 이 두 영상은 모두 기이한 환원적 하강을 향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주술적 효과를 꿈꾼다.
목소리라는 주술 혹은 주어

곧 두 개의 영상은 모두 현대에 이르러서도 과학, 종교 다 근대성의 차원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것이 아니라 전근대적 차원의 종교적 믿음성을 오히려 더 강화했음의 결말을 향한다. 이 두 개의 ‘하나를 분리’한 문단은, 곧 이 내용에 대한 진정한 형식으로 대응하는 이 같은 텍스트의 반복은 스크리닝 1이 한국과학원이라는 참조점을 누락한다면, 스크리닝 2는 바니걸스의 〈우주여행〉을 그러한다. 이 불친절하고 불완전한 나눔을 완성하는 건 그러니까 ‘눕방‘이 아닌, 분열증 차원의 가로지르기이다. VR의 편재된 시각성을 꿰매는 것뿐이다.
여기서 주술적 차원을 기하는 건 실은 전면에 나서기보다 은근하게 배어드는 목소리로서 작가의 목소리다. 중저음의 동시에 진폭 없음, 단일 음정에 가까운 이 목소리는 작가를 체현하는 상징적 지표로서 이 거대한 이미지 ‘무덤’―사실상 대부분의 검은색 이미지는 일종의 비워진 배경 이미지 자체이면서 죽음의 ‘무’를 상정하는 기술의 한 방식이다.―을 배회하는 관객에게 주문을 거는 장치이다. 이 막연한 장소를 예외적으로 지배하는 아쿠스마틱한 소리이다.
‘눈을 감으세요’라는 괄호 쳐진 문구는 이 이미지 자체를 잉여의 텍스트라는 아이러니로 제시하는 것과 같이, 이 실패한 언어―‘사실상 누가 눈을 감겠는가.’―를 꾸리면서 작가의 존재는 언어를 초월해 단일 차원의 기표로서 진정한 외부 효과로 삽입되는 것 같은데―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이미지를 보지 않아도 되는 시점에 직면한다.―, 일종의 엔딩 크레디트 효과로 위로 올라가는 글자들로, 떠 있는 ‘죽음’을 가정한 인간의 이미지로, 무의 배경 이미지로 고정되는 것들 속에서 유일하게 비가시적 차원의 생동감을 주는 것이 이 작가의 목소리다.
이 유일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사운드 차원에서 명확한 윤곽으로 갈음되지 않으면서 관객에게 주문을 걸고자 하는데, 이는 따라서 양가적이다. 그것은 주문이 언어를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소거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곧 이 주문을 거는 이 자체가 주문에 걸린 상태이며, 그것은 지배적 효과는 언어의 수행적 차원에서의 결과보다는 그 언어 자체에 대한 감염을 획책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목소리 자체의 상태에 대한 의미를 구성하며, 그 언어의 차원이 현실 너머의 차원임을 고지하는 데 그 메시지가 있다. 이 저자의 체현은 그가 예전 Hall 1에서 연 개인전 《인간과나 人間科我》의 퍼포먼스에서 상영과 동시에 그 스크린 너머 튀어나왔던 작가 신체 일부를 떠올리게 한다―결국 작가 자신의 지배적 개입은 흐릿하고도 모호한 중첩의 형상으로서 그것을 은폐하면서 또한 지속한다.
시차로서 수행성

VR 화면의 유일한 자기 반영, 곧 두 개의 잘려나간 손은 VR 화면 바깥의 통합된 신체를 환기시키는데, 이때 ‘나’의 신체는 분리된 조각인 양 가상의 세계에 잔여와 경계의 표지로서 불완전하게 통합된다. 이 세계의 분리(감), 실재의 가상으로의 전이가 바로 일종의 ‘죽음 효과’의 단초로서 제시된다. 곧 〈고 故 The Late〉에서 죽음은 이 가상의 경계감 그 자체를 시현하는 것과 같다. “5초”를 표기하고, 5초 후에 당신이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눈을 감았다 뜨는 간단한 작용만으로 실제로 작동하는 것처럼 믿어질 수 있다고 아마도 〈고 故 The Late〉는 믿는다!?
그러니까 VR이 일종의 눈을 가리는 장치이면서 다른 가상의 세계로 동시에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가 눈을 감고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건 근원적인 VR로서 원점임을 가정하면서 말이다, 마치 1971년을 표기하기보다는 그로부터 과학과 종교가 하나였던 전근대의 시기로 환원되어 가는 하나의 두 다른 문단과 같이 말이다. VR을 쓴 신체는 따라서 죽음을 보존하는 신체로, 죽음의 순간을 체현하는 신체로 거듭나는데, 〈주마등〉 안의 중앙부에 자리한 그것은 사선 방향이지만 천장의 영상과 서로를 마주한다.
곧 VR을 쓴 자가 보는 온전한 자기 체현으로서 가상이라는 설정은, 유체 이탈의 완전한 분리라는 가상적 환각에 전염되는 더미 신체라는 하나의 피드백 루프를 만드는데, 이 영혼적 신체와 죽음의 신체라는 하나로부터의 ‘분리’는 1971년의 분리와도 상응한다. 여기서 더미 신체는 관객에 대한 작품에 대한 매뉴얼이면서 또한 자기 지시적 오브제인 셈인데, 우리는 죽음의 사태를 겪고 있으며 동시에 그 죽음을 (외부를 향해) 수행하고 있다라는 것이다―그리고 이는 곡률 안 신체들이 작품을 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작품을 완성하고 증명하는 효과들임을 발화한다.
반면, 이는 VR 화면 속의 손, 곧 VR 화면에서 내 손을 봄으로써 예외적인 가상 너머 실재의 표지를 확인하는 것과 대비되는데, 여기서 죽음은 일종의 지연 효과이며 그것은 곧 “고”와 “the late” 간의 빈칸과도 같은 것이다. 죽음은 다른 것으로 번역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간극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와 의사-하나의 시차이다. 잠깐 눈을 떴다 뜨는 것이다. 그 뜬 눈에서 연속된/달라진 나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 그리고 여기서 작가의 목소리는 어떤 감정도 없는 의사-사물의 형태로서 주어지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생기를 의도적으로 소거한 형태라는 점에서 바로 죽음의 차원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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