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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타임스위트, 〈초 다음 초〉에 대한 주석: 민중미술의/이라는 흔적REVIEW/Visual arts 2026. 7. 8. 13:55

파트타임스위트, 〈초 다음 초〉(2017. 단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25분 14초. 서울시립미술관 커미션.) [출처=http://www.parttimesuite.org/index.php?/20-pnp/statement--work-image/](이하 상동). 파트타임스위트, 〈초 다음 초〉(2017. 단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25분 14초. 서울시립미술관 커미션.)는 민중미술이 동시대에서 어떤 형상으로 논의될 수 있는지, 혹은 어떤 매체로써 반복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상에서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은 전반적으로 광장을 가고 노동가요인 ‘동지가’를 부르고 사물놀이를 하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형식을 전유한다. 이들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시선은 아래로 떨어지거나 어지럽고 불안정하다. 이들의 정처없음을 강조하는 촬영은 정처 없는 이들의 행위에 대한 반향으로 생각된다. 곧 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초과되는 기술은 이들을 바라보기보다 촉각적으로 미치면서 온전히 장악, 파악할 수 없는 무력함의 가능성으로 일부러 자리하고, 그러한 혼란스러움이 거친 편집을 통해 완성된다.
그 과정에서 〈초 다음 초〉는 역사의 형상을 새로운 세대에게 이양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정동을 현재의 수행적 유희로 수용한다. 그 몫은 아마도 어린아이라는 연기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의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성취에 의한 것임을 동의할 수 있게 하는 게 바로 그와 같은 무질서한 촬영과 편집의 활용이다. 몇 가지 규칙을 수행하는 놀이 사이에는 어떤 충동들이 묻어난다. 민중미술의 오윤의 작품들이 다수 차용되었는데, 이 역시 전유의 소재가 된다. 가령, 광장은 텅 빈 풍경이자 스마트폰에 의한 텅 빈 행위에 의한 포착으로 갈음된다면―거기에는 의미의 목격자가 아니라 의미 이후의 텅 빈 몸짓이 있다.―, 스마트폰으로 단체 사진을 그린 회화 이미지를 켜놓고 이를 다시 촬영하는 장면은 인물들의 얼굴을 다수 사람으로 인식하는 스마트폰―아이폰―의 카메라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으로 바뀐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인식하는 카메라라는 주체에 대한 대상화는 행위를 담아내는 방식이 촉각적이라는 사실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니까 어떤 몸들과의 섞임, 또는 그 몸들 사이, 몸과 현장 사이에 카메라가 자리한다. 곧 주체의 가시화가 아니라 주체가 소거된 자리를 채우는, 의미를 상실한 또는 인식하지 못하는, 비주체로 명명되는 이들을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조망하는 대신, 또는 일부러 그들 자신으로부터의 시선 또는 그들 사이의 찍고 찍히는 어떤 관계의 전제(이것이 맞는지는 정확하지 않다.)로부터 텅 빈 주체의 몸짓들에 근접하는 것으로써 〈초 다음 초〉는 불안정하게 시선의 거점을 옮긴다, 또는 불안정한 거점으로부터 시선을 겨우 둔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정처 없는 주체에 관한 현상학적 알레고리는 어린아이의 몸을 거쳐 현재를 향한다. 곧 역사의 부재하는 형상과 역사에 등재되지 않는 도래할 다음 형상의 사이에 끼어 있는, 회화라는 실재와 어린아이들의 몸이라는 실재 사이에서, (앞선 두 개의 형상이, 실재가 단편적이고 불확정적으로 드러나는 데 비해) 비가시적으로 체현되는 작가의 존재는 현재 이를 보는 대부분의 관람객의 존재를 대리한다. 과거를 전유하되 동시대인의 행위 안에 그것이 있게 하는 매개자로서 기능하는 작가를 따라, 부유하는 역사는 수행사로서, 즉물적인 재료로서 미래의 몸을 거쳐 전달된다.

형식은 역사의 재현적 형상을 가져오는 데 반해 거기에는 이들을 가로막는 실질적인 세력도, 어른들의 사회도 부재하므로, 일차적으로 이들의 순수한 유희를 위한 수행성의 발현은 공허한 역사의 텅 빈 형상을 증명하는 형식적 제스처에 가깝지만, 그것은 현재에 명확한 하나의 틈을 낳는데, 이는 역사를 전승하는 게 아니라 단지 전유하는 것만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무정형적이고 광활한 곳에서 새어 나오는 단자적이고 즉발적인 목소리로서 개인 방송 클립의 차용은 이상한 실재, 서사의 새로운 줄기를 여는 경로로 현재를 침투한다.
여기에 보다 근본적인 역-침투와 구조에 대한 탐사가 이와 대구를 이루며 운동의 새로운 차원을 향한다. 곧 아이들은 인터넷 광케이블 매립 터널을 이동함으로써 세계를 재현하고 매개하는 플랫폼 환경의 물리적 하부 구조를 가시화하고, 이는 곧 광장 위의 극장이라는 원형적인 정치적 장소를 텅 빈 형상으로 연장하는 것이다―의제와 민중을 대체하는 건 앞서 언급된, 스마트폰으로 매개되는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곧 새로운 매체, 플랫폼이라는 현재의 연동소는 다름아닌 역사의 매개를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변경된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관점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를 매개하기보다 사라진 것으로 대체하는 것 아닐까. 스마트폰의 화면은 역사의 부재를 보여주면서 그 역사가 어떻게 재인식되는지, 멈춰지지 않는지를 온전하지 않지만 완전히 투과되는 것도 아닌, 스마트폰의 얼굴 인식 알고리즘 체계로써 현상한다. 그렇게 역사의 더께는 표면의 현상학으로 흐릿해진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그것을 포착하려는, 매개하려는 행위가 있다. 그렇다면 그 매개는 역사적 이념을 계승하기 위함일까, 그것이 그 자체로는 유효하지 않음의 진실을 폭로하기 위함일까.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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