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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이로아 원작, 장윤하 각색/연출): 기억의 지지체로서 공동체
    REVIEW/Theater 2026. 7. 8. 13:56

    비언어적 존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이하 〈왝왝이〉)는 동명의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한 작업으로, 사회적 참사의 여파, 참사 관련 당사자성을 지닌 생존자와 유가족이 겪는 트라우마와 애도 불가능성, 그리고 사건의 부정성과 봉합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 아래, 정치적 존재로 변모해 가는 당사자들의 양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를 환기시킨다. 지하차도 침수 참사에서 살아남은 연서는 추모제 준비단 활동을 반강제적으로 그만두게 되면서 학교 바깥을 배회하게 되고, 평소 돌보던 길고양이 옥이를 찾다가 하수구 아래 왝왝이란 존재와 만나게 된다.

     

    강력한 트라우마적 기억에 시달렸을 연서가 공동의 추모를 위한 활동으로 나아갈 때 그는 성숙한 주체로 나아가며 중압적 기억으로부터도 해방될 근거를 얻게 된다. 반면, 사회적 차원에서 그 활동이 부정당할 때 그는 반동적 정서를 갖고 사회를 이탈하게 되며, 애도 역시 굴절된 경로를 밟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트라우마는 심리적/무의식적 차원에서 회피와 부인, 망각의 기제로 연장된다. 이때 왝왝이란 미지의, 이름 없음의 존재는 전치될 수 없는 대상이 전이된 결과일 것이지만, 실은 망각에 의해 봉쇄된, 환상화된 실재의 존재이다.

     

    〈왝왝이〉는 두 번 꼬여 있으며, 동시에 하나의 처소에 여러 개의 진실이 동시에 똬리를 튼다. 곧 반전의 진실이 드러날 때, 곧 낙인찍히고 배제되고 기각당한 반사회적 존재로서 유가족의 지위가 상징적으로 이전된 차원에서의 망각, 그리고 트라우마를 겪는 이의 무의식적 방어기제에 의한 망각이 서로를 마주하는 곳에 왝왝이라는 미지의 존재가 생겨난다. 이 이중의 망각이 공통적으로 사회적 장애물로 인한 애도의 실패라는 것, 그리고 이해받지 못할 지점에서 그들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언어적) 세계라는 점은, 사회적 타자로서 청소년을 다루는 청소년극으로서 근원적 면모를 상기시킨다.

     

    곧 왝왝이를 재선으로 되찾는 일, 제대로 명명할 수 있게 되는 일은 연서와 그의 친구들, 혜민과 호정과의 공동 기억의 재산출 과정에서 ‘이미’ 완성된다. 그러니까 서로를 마주할 때, 마주하고 있었을 때 그 둘은 서로를 본래의 차원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망각할 뿐이다. 그리고 기억을 복기하고 만날 때 왝왝이도 재선으로 돌아와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진정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 곧 재선의 망각보다 재선에 대한 망각을 복구하는 것이 우선한다. 아니 우선해야 한다. 아니 우선해야만 재선의 망각 역시 복구되어진다. 선후 관계는 사후적으로 인과 관계로 연장되는데, 그것은 기억보다 기억에 대한 의지의 중요성을 그리고 망각이 존재 자체를 유실함을, 그 반대편에서 기억이 갖는 정치성을 드러낸다.

     

    세계 너머

     

    처음 연서가 왝왝이라 명명하는 미지의 존재를 만남에서 “왝 왝 왝” 단속적으로 개구리가 우는데, 이는 소리의 근원을 찾을 수 없는, 다른 세계로부터의 다른 주파수를 나타내며, 미지의 존재가 그 개구리로 환유되는, 또는 언어화되지 않는 존재를 비인간의 언어로써 보충하는, 과잉-결여적 사태가 만들어진다. 곧 개구리울음이 명명되지 않은 존재의 아우라로 비치는 이 인상적 장면은, 인간의 언어와 세계 바깥의 것들이 인간에게서 연합되어 증폭되며, 접촉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환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개구리의 신체에 대한 분별도, 미지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를 지지한다는 환상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연서는 상수 쪽에서 뒤집은 의자 밑면에 부착된 휴대폰 영상 카메라를 보고, 이는 하수 쪽에서 세로로 길게 펼쳐진 천막에 쓰이는 하수구를 나타내는 격자무늬 영상 프로젝션과 겹치며, 의자 뒷면이 아니라 하수구 아래를 들여다보는 이미지로 도착한다. 이는 왝왝이에게 드러나는 최종 이미지로, 그 아래에서 정면을 향한 왝왝이를 향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 카메라를 향한 연수의 옆모습이 연수의 의지로 ‘거듭난다’. 신체는 카메라에 보족적이지만, 카메라 너머에서 그것이 담지 못한 것을 누설한다. 둘은 실제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완전히 맞물리지 않지만, 연수의 간절함은 증폭되고, 왝왝이의 무심함은 강조된다. 동시에 왝왝이는 다른 세계에 잠겨 있으며, 연수는 그곳으로부터 가로막힌 채 동시에 전적으로 자신을 투여한다―좁은 세계와 열린 세계가 공존한다. 그리고 그 장애물은 접촉면으로서 자리하며 (카메라를 그리고 카메라로 연수를) 매개한다.

     

    이 동시성의 매체적 활용은 세계 너머에 도달하려는 주체의 간절함과 세계 너머에 있는 언어적 식별 불가의 또 다른 세계 내 존재를 대비시키며 결합한다. 이후 두 번째 만남부터는 산책로에서 하수구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한 연수가 천막을 가로질러 더 넓어진 세계―가변적 의자의 위치를 조종하여―에서 그와 만나게 된다. 처음 이 천막에는 가상의 나무 그래픽 이미지가 유동하고 있는데, 그것은 왝왝이가 사는 다른 환상적 세계의 상징적 표지를 실은 나타낸 것이다.

     

    기억의 은유

     

    이곳 세계에서는 각자의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에서 딴 열매를 먹으면, 당사자의 기억이 나무의 일부로 함입되어 자라나는 이상한 환유의 연쇄 과정이 벌어진다. 나무는 기억의 순수 매개체인데, 나무 자체의 기억이 자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자양분이 된다. 서로는 서로를 키운다. 또한 서로는 서로를 먹는다. 내가 나무의 열매를 함입할 때 나무로 나의 기억이 나무를 자라게 함으로써, 나는 나의 기억을 이전한다. 하지만 나무는 보전하는 대신 물리적 크기로서 연장할 뿐이다―기억은 일종의 자양분으로 기능한다.

     

    반면, 열매는 적정 수준으로 취해져야 하며, 나무가 다시 돌아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무는 일시적인 망각의 상태를 가져온다. 마치 연수가 왝왝이를 만나고 그를 망각할까 두려워하여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은 간절한 행위의 반대편에서 이 기억의 마술적 지지체가 있으며, 이는 망각보다는 기억을 보존할 수 있는, 대신할 수 있는 타자에 대한 환상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곧 망각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려 하는 것보다는 기억의 공동체에 대한 바람에서 상상된 것은 아닐까. 곧 공동의 차원에서 기억의 의례적 행위가 발생하는 것을 신화적이고 우화적으로 풀어낸 것 아닐까.

     

    서로 지치면 상기시켜주기로 하는 것, 처음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친구들의 이 공동의 다짐은 처음에 그리고 막바지에 한 번 더 반복되는데, 이는 애도를 공동의 차원에서 같이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수여한다. 애도 불가능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애도 공동체 속에서 함께하며 공동의 기억으로써 서로를 지지해 줌을 의미한다. 따라서 각자는 일종의 서로에 대한 나무이며, 그것은 쉬이 망각하는 대신, 너의 존재로써 나의 망각이 기억으로서 지지되고 충당되고 보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의 존재를 네가, 너의 존재를 내가 대리한다. 그것은 정치적 공동체 같은 것이고, 동시에 기억의 결사체 같은 것이다. 〈왝왝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억을 존재로 계속 연장시키는 방식을 찾고, 애도를 지속할 수 있는 방식을 고안해 낸다. 하수구와 같은 제2의 공간은 현실의 잔여 같은 것이 축적되는 공간으로서, 현실 바깥의 장소로서 현실을 환기하며, 또한 상상적 차원의 환영성이 현실에 입각한 것임을 반전으로써 드러낸다. 거기에 사회가 회피한 진실로서 왝왝이가 있다. 그런데 반전은 연서가 그를 망각했기에 그를 왝왝이라는 타자로 변용시켰다는 것이다.

     

    기억의 공동체

     

    재선이 타자가 되었기에 연서가 그를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그래서 왝왝이라는 매개의 명명을 통한 접촉과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었던 것인지, 아님 그가 타자로서 인식했기에 왝왝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가 탄생한 것인지, 곧 그의 망각이 공동체성의 와해를 증언하면서 그것의 끔찍함을 더 항변하고 있는 것인지는 결정하기 쉽지 않다. 그것은 애초에 기억에 대한 의무를 짊어지는 것이 트라우마적 존재에게 강요할 수도 쉬운 것도 아님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왝왝이〉가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왝왝이〉는 사건 이후에 살아가는 존재들의 삶을 불쑥 들여다본다. 불쑥 사건을 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균일한 존재들의 세계가 아니다. 어떤 정답과 해법에 의해 일정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상적 현실 역시 아니다. 기억을 감당할 수 없는 연서의 방황과 사회적으로 애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리하여 연서를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모제 준비단 활동을 강력하게 지속해 나가려 하는 호정의 대비는 왝왝이의 도입을 통해 더 많은 독특함의 차이로써 확장되어 간다. 그것은 정의의 올바름이나 도피의 무책임성의 차원으로 쉬이 갈음할 수 없는 세계의 확장성을 보여준다.

     

    이로써 세계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곧 양자택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잠재적인 영역으로 연장된다. 타자성을 도입하며, 타자성에 대한 지향을, 그리고 그것과의 간극을 가져오며,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를 다시 상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기입한다. 그것은 다 같이 나무를 뽑는 것으로, 프로젝션을 투사하는 천이 떨어지는 것으로써 처리된다.

    사실상 공동의 과제를, 공동의 외부를 그리고 내부를 정초하는 하나의 과제를 최초로 완수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환상의 잔여를 마저 소거해 현실의 자리로 통합되는 과정이다, 애초에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것이 환상이었을 뿐인 게 아니라, 이 양쪽의 세계가 결코 동시에 교환될 수는 없다는 법칙을 그렇게 완수하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명: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공연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공연일시: 2026619() - 625()

    공연시간: -1930, 15·19, 15

    러닝타임: 90

    출연: 김기표, 김정연, 김해미, 윤희지

     

    원작 이로아

    각색/연출 장윤하

    기획 김남현

    드라마투르그 이양구

    움직임 김규리

    사운드 카입

    조명디자인 김현

    무대디자인 조경훈

    영상디자인 신민승

    무대감독 김성미

    조연출 김지예, 윤수연

     

    접근성매니저 박소희

    자막디자인 임민정

     

    기록사진 권석주

    그래픽디자인 임민재

     

    예술교육 최준태, 이유진

     

    주최·주관 크리에이티브 윤슬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접근성 운영협력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문의 050-6850-8105

     

    [비고]

    - 원작 이로아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문학동네 (*15회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6년 어린이청소년을위한예술지원선정 작품

    -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접근성 운영협력 선정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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