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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시아르로니, 〈마지막 춤은 나를 위해(Save the Last Dance for Me)〉: 춤에 수여되는 축복과 환희의 어떤 순간들REVIEW/Dance 2026. 7. 13. 14:48

알레산드로 시아르로니, 〈마지막 춤은 나를 위해(Save the Last Dance for Me)〉[사진 제공=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이하 상동). 이탈리아 볼로냐 지역의 오랜 춤, 20세기 초 남성 둘이 추던 춤이라고 하는, ‘폴카 키나타(Polka Chinata)’를 소환하는데, 이는 명맥이 끊겨 가는 춤의 전승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흰색 테이핑의 네모 위에 네모―45도 기울여 모서리가 다른 네모에 닿는―를 따라 물 흐르듯 유유하고 잽싸게 그 선을 가로지르는, 그리고 두 무릎을 포개 뱅글뱅글 도는 폭발적 구심력의 움직임은 순식간에 치닫고 또 폭발하는 과정의 찰나적 반복인데, 그 ‘가속의’ 차원에 물리적으로 기여하는 속도 외에 두 사람의 유착, 애착, 애정으로 흐르는, 어떤 정동 차원의 전이 양상이 덧붙여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갈채를 보내게 된다.
이 테이핑이 바로 관객 앞까지 닿아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조망되기보다 촉지적으로 연계되는데, 그로써 명료해지는 건 이 둘의 표정과 야릇한 분위기인데, 이것이 단 둘의 거리 안에서만 인계된다는 점을 곧 우리가 볼 수 있는 지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잔마리아 보르질로(Gianmaria Borzillo)와 조반프란체스코 잔니니(Giovanfrancesco Giannini) 두 사람의 춤은 보르질로의 잔니니에 대한 외곽선 안의 제어를 통해, 상대적으로 보르질로가 잔니니의 지지체 역할을 하면서 상호 호흡이 가능하게 되는데, 여기서 튀어나오는, 폭발하는, 경계선을 넘는 잔니니를 보르지로가 안쪽으로 적당히 붙들어 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의 몸처럼 굴러가는 가운데, 이 접착성은 단번에 ‘해결’되는 춤의 단위 전에 반드시 응축의 전기를 마련하는데, 이때 잔니니는 보르질로에게 ‘우리 이제 곧장 나아가는 거야, 아무것도 두려워 할 것도, 망설일 것도 없이 말이야. 우리 둘만의 공간이니까 말이야.‘라고 진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드러난다. 춤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고 춤이 닫히고 나서, 희열을 머금은 채 벌어진 잔니니의 입술에서 나오는 속삭임은 분명 춤에 대한 직접적인 법칙이나 차원에서의 언급이 아닌, 그 나머지 것이다. 이는 그 춤의 효과이자 그 춤의 동력 자체를 거슬러 올라가는 어떤 맥락을 부여하는데, 곧 이것은 안무(에 따른 수행적 산출의 결과)가 아니라 진정한 춤을 춘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애”의 춤은 그 둘만의 닫힌 공간, 서로만을 향하며, 최소한의 경계 영역에서의 단속만을 곁눈질로 그것도 한 사람만이 꾀하는, 나아가 증폭된 구심력이 그 둘만의 세계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충분히 자족적인 그 공간에서, 그만큼의 가까운 좁은 구역을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가 취하는 건 관음증적 시선이라기보다 우리를 초과하는 춤이 낳는 생명력의 에너지, 분출, 힘, 순간이다. 그리하여 아마도 우리는 공연이 갖는 전적인 강도의 차원을 재분출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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