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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돌파구, 〈구미식〉(작가 이홍도, 연출 전인철): 실재를 가로막는 허구, 그리고 실재를 경유하는 허구REVIEW/Theater 2026. 7. 22. 14:43
두 이화 전략: 서사와 인터페이스

극단 돌파구, 〈구미식〉(작가 이홍도, 연출 전인철)ⓒ김신중(만나 사진작업실)[사진 제공=극단 돌파구](이하 상동) 〈구미식〉은 “가상의 지방 도시”인 구미를 배경으로 하며, 이는 허구임을 밝히는 대개의 픽션이 역(설적)으로 실제를 허구에 대응시키게 만들면서 실은 그 실제를 그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강조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데, 그러니까 전자가 실제와 허구의 차이 안에서 벗어날 근거를 명목상으로 마련한다면―‘이것은 사실 허구입니다!’―, 〈구미식〉 식의 명명은 실제 구미가 아닌 게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가상’이란 말이 구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미 자체의 내재적 차원의 명명임을, 곧 구미 자체가 가상의 차원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해 보는 건 타당해 보인다. 곧 제목은 징후적이며 실재적인 것을 향한다.
그리고 이는 〈구미식〉 자체가 서사화 전략 안에서 일종의 인용과 차용을 자유롭게 하는 방식에 기인한다. 이른바 액자식 구성으로서, 이것이 어떤 하나의 서사임을 명시한 채 그것을 전달한다. 그리고 바깥의 화자의 몫에 더해지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거리 두기는 광고로, “구미식”의 본래 뜻과도 연동된 것이며, 이는 무대 전면 세로가 길게 배치된 피봇 모니터에 뜬 유흥업소 광고 역시 포함한 각종 팝업 창에 기입된다.
크게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행복한 왕자』(1888)라는 동화와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 1911~1983.)의 희곡 『유리동물원』(1944)이라는 두 축의 서사를 혼합하는 한편, 박정희 대통령 생가가 있는 구미시의 상징성과 지역의 개성을 비롯해 박정희라는 역사적 사실 역시 가져옴으로써 이러한 서사‘들’의 솔기, 간격, 틈새 자체가 이화 작용을 불러온다.
동시에 일종의 인터랙티브 방식의 유튜브상의 광고나 인터넷상의 팝업과 같은 급작스러운 개입―뚜렷한 외부의 인격이 아니라, 알고리즘적 제어 또는 통제에 의한다.―에 의한 관람 혹은 경험의 분절, 깨어짐이라는 플랫폼 체제 내에서의, 인터페이스 차원에서의 이화 작용을 의태한다.
의자들을 무대 뒤쪽에 깔아두고, 그 의자에 앉아 있다 일제히 튀어나오는 광고의 고립된, 분절된 시간들에서 배우들은 위계 없는 코러스로 분하게 되며, 저마다의 광고를 끼워 넣는 혼신의 다성부, 혼잡의 커뮤니케이션을 구성한다. 사실상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다. 이야기의 결말들은, 역사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닫힌 피드백 시스템 내에서 의식의 고립은 변주를 통한 확장을 꾀하고자 하며, 그것은 환각 작용의 일환에서 시간을 늘려뜨리거나 다른 서사를 꿈꾸는 것으로 연장된다.
침탈하며 침윤되는 서사들

곧 『유리동물원』의 약물 중독자 톰의 환각적 의식의 상태는 서사들의 넘나듦과 비선형성, 모호함과 혼동,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의 그의 상태 변화에 대한 것들을 초래하는데, 또는 그러한 서사에 대한 합목적성을 예외적으로 제공하는데, 이는 종국에는 변주되면서도 결국 하나의 순간으로 계속 되돌아간다는 지점에서 일종의 타임 루프물에 가까워진다.
톰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건, 동시에 톰을 자신의 서사로 추출, 흡착하는 건 『행복한 왕자』의 행복한 왕자 동상으로, 톰은 제비로 분해 갖가지 보석이 박힌 행복한 왕자의 신체 일부인 보석을 대신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야기는 동시에 새어나가는데, 왕자 동상을 만날 때마다 톰은 그 경로에서 우연히 마약을 줍게 된다.
또한 행복한 왕자는 박정희 동상이라는 기원 아래 있다. 그것은 신화화되어 영속되는 박정희를 광신적 믿음으로 연장하고 포집하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물화로서 도착한 동상의 환유물로서 포개진다. 그러니까 동상은 허구적 실재이며 그것은 『행복한 왕자』를 전유해 자신을 연장한다. 박정희의 어렵고 힘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경제 부국의 꿈을 꾸며 자신을 희생했다는 서사에 『행복한 왕자』는 용해되며, 어쩌면 희생되며, 실제 용광로에 녹여 선거를 위해 또 다른 동상들을 만들기 위한 현실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이 용광로는 박정희의 경제 발전의 전략이자 그 중추로서 중공업 도시를 제유하는 것이면서, 박정희의 죽음을 희생으로 숭고화, 승화시키는 전략의 일환이다. 그것은 또한 물질로 치환되어 재전유된 ‘박정희’가 그 물화된 신체로서 변용되지만 새롭게 탄생하여 계속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전도된 의식을 앞세운다―사후적 죽음이 영원한 삶으로 재판명되는 데 징후적인 이데올로기가 있다. 용광로 앞에서 ‘행복한’ 동상은 처음으로 곤궁의 사태에 처하고, 그것은 추억에 잠겨 통치 시절 역사를 행복한 기억으로 대리 체현하던 그 전의 모습에서, ‘망각’하고 있던, 그러한 서사 구조 내에서 은폐되어 있던 죽음을 마주하여 깨어남을 의미한다.
박정희라는 왜상과 박정희의 왜상 사이

박정희의 죽음이 영속화된 상징으로 재출현하는 것이 동상이라면, 그리고 박정희라는 죽음의 왜상을 재기입하는 게 이 용광로라면, 후자에서 새로운 생명들의 재탄생이라는 또 다른 서사의 동력은, 박정희의 죽음을 희생으로 전치시키며 숭고화하면서 그 왜상을 제련하고 주조해 내어 세계 내적인 것으로, 곧 박정희라는 세계의 재재편으로 결정한다.
여기서 왜상은 붉은 조명 아래 동상이라는 이미지로서 ‘피로 뒤덮인 박정희’라는 실재의 차원으로 변모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사가 종결되는 지점에서 진정으로 물화된 텅 빈 기표가 될 것임도 명확해 보인다. 곧 어떤 분별과 이미지 작용으로서는 더는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죽음을 안긴다.
하지만 망령된 의식은 그가 꿈꾸는 세계로 영속되는데, 이는 “태극기”와 “새마을기”가 함께 걸린 지난날 영예에 대한 찰나적 환상과 그에 대한 염원이다. 이는 박정희를 대리 체현하며 그를 신화화하는 동시에 굴절시키는 박정희의 영속된 신화를 안고 살아가는 죽음을 앞둔 지긋한 나이의 노인의 서사로 또한 갈음되는데, 곧 〈구미식〉은 종언되는 역사의 닫힌 의식 체제 내의 어떤 망상이나 환각의 차원을 불러오는 것이며, 그것을 경유해 그 이데올로기의 물화된 대상의 죽음을 창안하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동상과 톰~까치는 모두 죽음의 순간을 선회하며 여러 이야기의 결말을 쓰는데, 진짜 결말은 박정희는 용광로 앞에서, 진짜 죽음을 대신해 자신의 질곡의 살아남음의 역사를 읊는, 곧 신체를 녹이는 대신 자동 기계적인 연산으로써 기억을 용해해 낸다. 그것은 남로당 동료들을 밀고해 혼자 살아남은 내용 등을 고스란히 나열하는데, 이는 무엇보다 일종의 스스로에 대한 위키 백과 읽기로써 자신이 그 사실들을 지시하며 수용한다는 점에서, 수치로서 쓰인다.
하지만 이는 경제 발전의 유구한 역사 속에, 그 스스로 중공업을 제유하는 동상으로서 상징적으로 그것에 포함되어 (곧 자신의 죽음이 현실에 산포하여 현실을 재편하며) 영속됨의 사실로써 곧 정신 승리를 거둔다. “산업”은 “개인”보다 크고 동시에 위대한 관념이며, 동시에 더 우선시되어야 하는 관념이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 역시 정치의 대리물이자 산업의 재료로서 계승되어 개인보다 큰, 개인보다 앞선, 개인을 초과하는 것이 된다. 일종의 “고도의 통치 행위”가 역사와 현재를 묶어 낸다.
박정희의 역사로서 재확정은 이후 재편된 박정희의 신체들, 혹은 그 망령의 새로운 역사로서 분화되는데, 이는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 윤석열의 모습으로 ‘환생’하며, 그와 같이 코러스가 돌아가며 그의 모습을 파편적으로 전달하는 것으로 치환된다. 박정희-윤석열의 연계와 공통된 희화화 전략의 공통된 근거의 언어는 “계엄”인데, 이는 윤석열이 의사-박정희이자 망령됨의 박정희를 체현하는 것으로써 현재가 역사를 회고적이고 퇴화된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매 맞는 아버지와 채찍질하는 어머니

톰은 차례대로 의사, 선생, 경찰과 각각 대면하는데, 이 셋은 모두 톰을 각각 시험, 회유, 취조 등의 방식을 통해 톰의 불안(정)한 상태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며 스스로의 위치를 보장받고자 한다. 특히 선생은 독립투사의 상징적 의상으로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의 한복을 입음으로써 박정희의 유년기 당시의 기억을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듯한데, 이는 그러나 전도되어 박정희를 경유하지 않고 톰을 횡단한다. 그는 체벌과 과한 폭력을 통해 톰에게 트라우마를 안겼고, 현재 그의 친구들 대부분 교도소에 가 있는 현실이다.
결국 〈구미식〉은 과거의 잔재 아래 구성된 현 존재가 자신의 왜상적 얼룩을 청산하기 위해 기성 세대를 만나 따져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 박정희를 관통하지만, 선생과 같이 원형적 기억의 상징적 존재 역시 해당되는데, 톰 역시 오래 전 희곡 속 인물이지만, 그 두 인물이 과거에 고착된 데 반해, 톰은 현실이라는 하나의 레이어가 뒤에 부착되는 것이다. 곧 그 둘과의 만남은 톰에게는 반성적 과거의 현장이며, 과거의 인물들은 결코 반성하지 않음으로써 톰은 과거의 기억을 해소하거나 치유하지 못한다.
톰에게는 “파더”, 아빠가 없는 아이였으며, 원작의 가부장적 어머니 아만다를 대체하는 게 선생이라면, 원초적 아버지의 원형적 존재가 곧 행복한 동상인 셈이다. 실제 선생은 마조히즘적 어머니이며 여기서 아버지는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는 일종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계약에 의거한다.
이때 선생이 그리는 미래는 박정희의 성실 근면한 산업 일꾼을 체현하는데, 이때 그 채찍질은 톰이 아닌, 박정희 자신에게로 군인 정신의 기꺼움의 차원에서 도착한다. 그러니까 시종일관 상기된 선생이 그리는, 체벌을 받고 자라난 성실한 어른의 상은 톰으로부터 미끄러지며 간극을 심지만, 드러나지 않는 ‘단단한’ (동상과 같은) 박정희의 내면에서는 정확하게 도착해 결정되는 건 아닐까.

반면, 행복한 동상은 자신의 백성에게 시혜적이며 자애로운 어머니의 상만을 구현하는데, 어머니 대신 선생에게 매를 맞고 자란 톰은 어머니라는 강력한 남근으로부터 거세를 환상적으로 수용함―톰은 약물을 통해 스스로를 분열된 주체로 이행시킨다.―으로써 톰은 실은 가학적 충동, 곧 사디즘의 무의식을 반전시키는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비폭력적인, 여성적인 어떤 존재에 가까운 형상을 이룬다.
톰은 사회적 적대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서보다 그 자신의 세계 안에서의 은밀한 차원을 기약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닫힌, ‘클로짓’ 게이로서 명명되는 듯 보인다. 곧 이는 소급되는 사실일 뿐 확장되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니까 톰의 성소수자 정체성은 실제 극 내에서 어떤 사회적 차원과도 직접 연관되어 드러나는 바 없으며, 다만 그 기원적 차원에서 그의 왜상적 차원과 결부돼 추적해 볼 수 있을 뿐인 ‘사실’이다.
〈구미식〉은 어머니-나-아버지, 이 셋의 관계가 착종되어 있으며 그 인과 관계의 정립 차원에서 묘연하기만 한데, 매를 맞고 자라 성장한 예외적 인격에 대한 환상의 자리에 박정희가 있다면, 실제적인 결과는 모두 사회 질서에서 탈락되고 배제된 톰과 그 친구들로 나타난다. 어머니는 박정희의 대리자적 역할을 하지만, 곧 박정희의 초재자적 입장을 연장하지만, 박정희라는 선제적 조건을 만든다는 사후적 환상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톰을 경유하지만 실제로는 박정희에게 도달하는 이 어머니는 사후적으로 완성되는 그 박정희라는 환상을 뒤집기 위한, 실패한 톰이라는 대상으로 도착한다―그런데 톰이야말로 박정희에 대한 무의식의 실제적인/또 다른 경로는 아닐까. 그런데 실은 억압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톰은 때리는 어머니로부터 거세된 채 자족적인 환상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곧 어머니는 결정적으로 톰의 내재적 차원에서 성립한다. 곧 아버지, 어머니, 나의 관계는 선후적으로, 인과적으로 뒤집히고 또 맞물린다. 또한 비켜나간다.
실재를 가로지르는 법

“파더”와 “스승”은 겹쳐진다. 분명 하나의 차원으로 환유된다. 아버지가 키워 놓은 공원은 세계 그 자체의 확장이 아니라, 아버지의 존재가, 영향력이 그곳을 잠식함을 의미하고, 아마도 세계 내에서 비가시화되려던 날 삼킬 것이다. 또는 나는 탄로가 날 것이다. 공원의 커짐은 공원이 나를 초과하며 나의 세계를 잠식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공원은 톰과 같은 부랑자 역시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반면 거기에 들어서는 동상은 권위적이고 지배적인 군주의 모습을 체현하며, 지극히 사적인 공간을 공적 차원으로 바꾼다.
행복한 동상은 ‘아빠 없는 아이’인 톰의 부재하던 자리를 그의 의지와 상관 없이 차지한다. 그런데 마약을 “미필적 고의”로써 쟁취하곤 했던 건 공교롭게도 번번이 행복한 동상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인과적이지는 않지만 선후 관계를 이룬다. 이를 환상적 차원에서 동상이 쥐여준 것으로 받아들여짐은 톰의 무의식적 합리화가 아니라, 반동적으로 그것이 필요한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차원을 전제하는 건 아닐까. 곧 아버지에 부속되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로 인해 배가되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강력한 아버지(의 물화)를 받아들이는 아들의 무의식에 결정적인 무엇으로서.
그런데 이는 현실에서 검증을 받는다. 마약은 상징계적 차원을 교란시키는 상징적 행위소이며 결코 용인될 수 없는 대상이다. 왜 그것은 철저한, 엄정한 규명 절차 아래 다시 놓이게 되는 것일까. 이때 경찰은 그를 취조하는데, 어떤 추적도, 사전 정보도 없이 어떻게 그것은 가능한가. 그러니까 그것은 왜 필요한 것인가.
그 추궁은 동상의 효과와 감화됨으로부터 세계를 연장하는 그것의 은혜와 시혜의 차원이(야말로 환상이며) 사후적으로 사건을 재조합하는 기술임을, 따라서 그것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는 합리화의 효과였던 건 아닐까. 그런데 이는 동시에 엄한 ‘아버지’가 주는 달콤한 선물이라는 보석의 다른 판본이 존재했음을 무력화된 개인의 의지로 소급시켜 현실에서 아버지의 부정성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정치적 기술은 아닌가.
톰은 화자로 변화해 작은할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큰 방에 있던 큰할머니와 작은 방에 있던 작은 할머니는 자신에게 똑같은 할머니였지만, 실은 공식적 “서류”에 “기록”되지 않아 “증명” 불가한 존재라는 것, 이 존재의 간극, 공백이 주는 연민, 우울, 기괴함, 공허감 따위의 형용 불가능한 정동이 향하는 바는 박정희라는 외설적 현상에 경도된 존재의 우스꽝스러운/비루한 모습이 아니라, 물신화된 역사와 기록되지 않고 사라진 존재들 간의 간극이다.
여기서 〈구미식〉은 그 “바꿀 수 없”는 “현실”에 “극장”의 당위와 “이야기”의 합목적성을 이야기하며 닫힌다. 그 끝을, 언어의 소진, 어둠을 지시하는 말들이 뒤따른다. 실은 앞선 간극의 여운을 해소하지 못하는 이 말들은, 또는 그것에서 연장되는 이 말들은 신화화된 이미지를 전유와 희화화를 통해 외설적인 것으로 만든다. 동시에 그것에 맹목적인 존재들까지. 그리고 이는 수많은 팝업창과 광고, 자극적인 선전과 숏츠 등이 뒤덮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로 가설된다. 이 산만함의 지각 조건은 톰의 환각과 조응하며, 허구적 실재의 조건을 구성한다.
검은 비닐 커튼으로 싸인 극장은 막힌/닫힌 공간이며, 반환되고 튕겨 나오는, 수많은 광고와 같이 무한 재생 되는 인물 조각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어두울 때 벽의 질감처럼 감각되는데, 이때 중앙 스크린의 이미지는 그것과 거의 흡사해진다. 이 구분 불가능한 지점이 따라서 이미지라기보다 실재라면, 광고들이 꺼지고, 빛이 소거되는 이 자리가 서사 자체, 곧 서사의 루프에 대한 지지체를 증명하는 어떤 틈 같은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2026.06.13 ~2026.06.21
씨어터 쿰
만드는 사람들
작가 이홍도
연출 전인철
출연 백익남 안병식 윤경 조영규 한지수
드라마투르그 전강희
무대디자인 박상봉
조명디자인 최보윤
영상디자인
이태석
의상디자인 김지연
분장디자인 장경숙
안무감독 지경민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웅
조연출 황성현 권수지
프로듀서 조유림주최/주관 극단 돌파구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2차제작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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