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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래빗홀씨어터, 〈호기우타〉(작 기타무라 소, 연출 윤혜숙): 무정형의 시간은 어디를 향하는가
    REVIEW/Theater 2026. 7. 28. 21:57

    외부는 가능한가

     

    래빗홀씨어터, 〈호기우타〉(작 기타무라 소, 연출 윤혜숙)ⓒ이지수[사진 제공=래빗홀씨어터](이하 상동).

    호기우타는 낮과 밤의 바뀜만이 있는, 사막 같은 폐허의 환경에서 정처 없이 살아가는 또는 이동하는 교코와 게사쿠, 그리고 우연히 합류한 야스오 셋을 현상한다. 이 미지의 공간은 전쟁이 종식되었지만 미사일이 컴퓨터의 제어로 여전히 날아다니고, 인간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문명도, 외부도, 타자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야스오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은 이 둘의 정처 없음에 저쪽의 거리라는 관념을 들여온다. 하지만 야스오를 경유해 그들의 내면이 상정되는 것 역시 아니며, 그 반대의 차원, 야스오를 통해 그들이 어떤 인물로 객관화되는 것 역시 아니다

     

    예수와 이름의 유사성중국식 발음으로 한자를 빌려 적은 음역어 耶蘇를 음독하면 야소(やそ)’가 된다.뿐만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상기시키는 복제의 능력을 갖고 있는 야스오는, 무대 중앙의 반원기둥을 지름에서 사선으로 자른 납작한 입체 도형 구조물쐐기꼴과 같이 끝이 뾰작한로부터 등장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바꾸벌가지바퀴벌레를 발견해 먹이로 삼으려다 어딘가로 사라진 바퀴벌레 다음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반딧불이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먼저는 바퀴벌레로 환유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퇴장에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곧 무대의 외부는 내부에도 있다. 또 다른 외부는 무대 뒤쪽 공간, 언덕으로 보였으나 조명이 가해지며 숲으로 치환되는 단면 안쪽으로 상수에서 하수로 교코와 게사쿠가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에 수여된다. 그런데 이 둘은 처음과 같이 암전 이후 조명이 다시 켜지면, 다시 엎드려 널브러진 채 무대 위에 놓여 있다, 모든 것은 망각되고 다시 접속되는 환상이며, 영원회귀 되는 일상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듯

     

    그런데 그 전, 야스오의 사라짐과 그를 좇아간 교코가 다시 돌아와서 하는 증언, 그가 환상이었다는 것, 그때 오히려 실재, 일상, 현실에 대한 예외적인 경계가, 의식이, 신체가 부상한다. 타자성은 야스오의 부재 이후, 곧 사후적으로 도래하는데, 그에 따라 내부와 외부의 경계도 생겨난다. 그런데 야스오는 예수 자체의 재등장이라기보다 예수에 대한 패러디에 가까운데, 그것은 그가 원본이 있어야만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기적이란 전적인 창조가 아니라 상품 생산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며, 원본의 소유자, 주인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저쪽은 어디인가

     

    그런데 유일한 예외가, 외부가 환상이라면, 외부는 기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하지만 잠깐 부상하는 이 현실에서의 깨달음, 깨달음에 우선하는 현실이라는 영역은 어떻게 보면 실존적 차원의 번득임으로, 이 둘이 살아있다는 내부를, 외부와의 경계를 건드린다. 이는 이 작품의 예외적 맹점일까

    곧 야스오라는 삽입된, ‘삐져나온인물이 처음 약간의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의사 소통의 경로가 갖는 시간이 워밍업 정도였다면, 이 틈이 곧 채워지면서 그 전까지 그들 존재의 여부 자체를 의문시하게 하지 않는데, 이는 그들이 실존주의적 곤궁에 처하지 않는다는 지점과 조응한다

     

    그러니까 사실 이들에게 어떤 목적의식이나 이념 따위는 없다. 그에 따라 절망이나 우울, 허무 같은 정서도 찾을 수 없다. 음식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게 가난에 대한 자의식으로 연장되기에는 이미 문명이 허물어져 있고, 다만 너른 벌판을 휘저을 뿐이다. 이들은 토대 없음에 속한다. 그 속의 존재는 부조리하다. “방사능의 여파 아래 있지만, 명확하게 이들의 대화에서 이 세계의 배경이 지정되지는 않는다

     

    저기는 야스오의 한참 저쪽이기도 교쿄-게사쿠의 쪼깐 쩌그이기도 한 곳으로, 이미지와 언어 사이의 지연과 머뭇거림을 경유해, 야스오의 혼동 속에 재지시되며 그 둘이 같은 것이 맞는지의 의문으로 옮겨진다. 장소와 이름은 착종, 소거, 교란되는데, 그것은 일본 희곡을, 그것도 간사이 지역 사투리로 쓰인 희곡을 번역할 때, 그것은 더 특수한 한국 희곡의 또 다른 배경을 상정해 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등장인물들의 이름까지는 바꾸지 않은 가운데, 야스오 등장 전 교코가 펜팔을 하던 도쿄 사는 아이의 안부를 걱정할 때, 우리는 타자의 구체성과 지역성, 그리고 도쿄 건너편으로 존재하는 이곳을 어느 정도 추정, 실증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 존재의 의미를 길어 올리면서 그 존재로써 지역 자체를 의미화하는 어떤 연대의 감각에 대한 단초가 된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사실은 앞선 생각의 단초를 현실로, 관객의 삶으로 되돌려 보냄으로써 전도된다. 이 타자성의 지대로 회귀하는 지점에서 도쿄는 잠시 사라지는 매개자였던 셈이다. 또 다른 장소로서 저곳, “죽음의 언덕” “모헨조다로라는 지명을 야스오가 내뱉고 저쪽은 모헨조다로가 되지만, 그 둘의 향방에 지명의 개념은 없다. 그리고 이후, 야스오의 지명은, 그가 당위적으로 돌아가야 할 고향’, “예루살렘으로 떠오른다

     

    영원회귀의 일상

     

    그런데 이들의 움직임은 사실 저곳을 향하기 전에는, 좌우로 놓인 교쿄와 게사쿠에 정확하게 대응되는, 상수와 하수에 하나씩 눕혀 있던 두 개의 의자를 갖고, 그리고 중앙의 틈새 공간의 주변을 회전하는 일이기만 하다. 애초에 그것은 변경될 수 없는 루과 같다. 거기에는 원의 회전 반경만 얼기설기 남아 있다. 그러니까 시간은 좌우간 오래되었지만 그 시간은 어떤 변경 없이 반복되는 것과 같고, 장소는 한곳에 고착된다는 점에서,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갖지 못하며, 따라서 시간과 장소 역시 의미를 포함할 수 없게 된다

     

    야스오는 결과적으로 구원을 주지 못하고 떠나고, 저곳에서 환상으로 치환됨은 저곳 역시 구원의 장소가 아님을 이야기한다. 부활은 게사쿠에게서 오히려 일어나는데, 그것은 (조명의) ‘깜빡임으로써 의식에의 깨어남으로 현상된다. 그런데 이는 꾸준히 발생하던 발작 이후의 깨어남이 주는 비약과 망각의 순간을 뒤집은, 예외적인 순간이다. 깨어남은 곧 이전을, 곧 망각을 망각하는 것이다. 이 단절의 순간은 마치 이 모든 것이 허상이어도허상임에도 우리가 연극으로의 약속을 하자는 것과 같다

     

    이 연극적 수행성은 본디 교쿄와 게사쿠가 연극을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었음의 사실로 소급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제 관객은 없다. 연극 하기는 부재 앞의 현전이며, 부재 자체를 증명해 내는 일이다. 하나의 예외는 야스오로, 그는 관객이라는 예외를 또한 구성한다. 그가 정면을 향해 나란히 선 둘 앞에 서자 무대는 완성된다. 반면, 그가 혼자 연극을 할 때, 그는 죄 없는 자여 돌을 던지라고 할 때 돌을 맞는 예수를 연기한다

     

    파란 조명 아래, 물방울 소리가 나면서 평상시에도 망각이 시작되곤 한다. 이 장소가 특정한 몰입적 지각을 유도하며 닫힌 공간으로서 현상된다. 또한 교쿄는 오줌을 누러 간다고 하고는, 또 어딘가로 이동하고는 곧장 쓰러지는데, 이는 하나의 장소라는 무대의 규약을 비약하기 위한 기능적 변용이면서 그 이상을 내포한다. 이 발작은 시간을 비약하는 한편, 새로운 시간으로의 소생, 곧 부활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새로움도 만들지 못한다. 망각은 망각에 대한 망각, 곧 망각 자체에 대한 것이다

     

    무대 위의 무대

     

    처음, 더 피너츠(ザ・ピーナッツ, 1959~1975)의 노래, 우나 세라 디 도쿄(ウナ・セラ・ディ 東京, 1964)가 삽입된다. 이때 뒤쪽 하얀 원형 막이 일종의 반사막 역할을 하여, 엄격한 채도 차를 통해 한 명이 뒤로 허리를 젖힐 때 그는 허공으로 사라지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공허한 일상을 살아가는 대신에, 일상을 공허하게 수행하여 삶을 덜어내는 상연성의 무대에 덤으로 얹히는 이 무대는, 저편의 도쿄, 공고한 도시의 이미지가 아득한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도쿄의 저녁은 이내, 이즈미야 시게루(泉谷しげる, 1948~)의 밤의 아지랑이(のかげろう, 1972)의 배경음악으로 전환되고, ‘축복의 노래란 뜻의 호기우타(寿歌)가 교코에 의해 불린다. 야스오의 깨달음 혹은 탄식, “저 하늘이 저녁놀이 아니라니와 같이 핵전쟁 이후의 세계의 그럴듯한 자연의 이미지는 대체된 이미지, 곧 속임수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과거를 향해 과거를 가져오는 행위이며, 속임을 속이는 이중 속임수속임을 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속임이다

     

    게사쿠와 교쿄의 만담은 중략 만담으로 예정된 조화에 대한 반역이자 운명에 대한 저항”, 그리고 라플라스 역전 만담으로 지시된다. 대사를 건너뜀으로써 전체 맥락을 흐트러트린다. 상대의 행위에 나 역시 동참하며, 이는 연쇄적으로 대사를 건너뛰게 되면서 건너뛴 대사로 다시 돌아오는 역설의 과정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비약해 가는 게 아니라, 닫힌 시스템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인 게 된다. 그것은 뱅글뱅글 도는 이들의 순환적 여정이 전혀 다른 지점으로 건너가는 게 아님을 선회하는 자국들로서 지표적으로 확인케 하는 것과 닮아 있다

     

    하지만 건너뜀은 질서를 재배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예측 가능한 경로를 벗어난다는 점에서새로움을 준다. 그것은 예정된 조화를, 운명을, ‘라플라스의 수학 공식을 잠시 비트는, 벗어난다는 환각을 선사한다. 곧 이 둘은 극장을 가설하고, 대본을 재배치하며 마치 벗어날 수 없는 폐허의 현실에서 새로운 현재성의 효과를 입는다. 그런데 이는 또 다른 외부의 침투 효과, 곧 야스오, 곧 관객의 등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전할 수 없는 것

     

    그런데 이는 이 수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1749~1827)의 가설,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존재가 있어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다면, 곧 현재를 원자 단위에 입각해 완전히 파악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가 미래를 완벽하게 알 수 있다는 그 가정에서 이 둘의 만담을 바라본다면, 라플라스 역전 만담이라는 것은, 그 가정이 뒤집히는바, 이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현재의 역설을 자조적으로 보여주는 발화는 아닐까.  

     

    나아가는당신의 그림자뿐이다. 그런데 당신의 실체는 존재하는가. 호기우타이 노래를 하는 교쿄의 마음이 향하는 존재, 그가 실제 좇아가던 존재는 야스오, 곧 신의 온전한 권능을 갖지 못한 반쪽짜리 신이다. 예루살렘에서 야스오를 마주한 교쿄의 경험은 그가 허깨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야스오는 그가 거기서 자신의 본령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긋난 시대, 과거의 산물, 온전히 시대 착오적인 것이 될 수밖에는 없다. 신약이 재시작되는 시점은 이미 너무 늦었다.

     

    게사쿠의 말처럼 엉터리는 예술의 진수이고, “의미 부여는 시간의 권력이다. 더 벌릴 시차, 성찰적 현재라는 것이 의미가 없으므로, 시간이라는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이 엉터리라고 하더라도, 그 엉터리가 본인을 속일 수 있다면, 충분한 것일까. 미래를 담보할 누군가의 평가를 기대할 수 없는 마당에

    옛날 이야기는 유일하게 미래를 담보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그것은 주인을 위해 퇴깽이토끼가 주인에게 모닥불 속으로 뛰어들어가 통구이가 되는 이야기, 그리고 호랑이 굴에 갇혔을 때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호랑이에게 먼저 먹이가 되면 된다는 것 두 개다

     

    전자에서 주인은 퇴깽이 고기를 또 먹는데, 그게 퇴깽이한테 기껏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야스오는 희생정신에 대한 이야기냐며 의미 부여를 하지만, 게사쿠는 목숨을 건다는 건 기껏해야 그란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목숨은 엄청 숭고하거나 절대적인 것으로 치환되는 대신, 그저 그럴 수밖에 없기에 바칠 수 있는 것, 별다른 대안이 없는 가운데, 피치 못 할 수단이 되는 무엇이다. 여기서 죽음은 부조리를 드러낸다

     

    반딧불이, , 아기

     

    죽음을 무조건적으로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 그 죽음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죽음을 수용함이 어떤 의미로 승격될 수 없는 것, “쪼깐이 거리를 지정하기보다 그 거리를 언어로써 지시하는 것의 어려움을, 애매함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처럼, 죽음에 대한 언어적 진술은, 언어의 공백은 그란것이다. 의미를 매듭짓지 못한 이 언어는 죽음이라는 실재를 마주하며 한없이 실없어진다. 대신 언어의 추락은 죽음을 의미화하지 못하는 현실의 타락을 증언한다. 전쟁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목숨이 한갓된 것으로 추락하는 것, 그 목숨으로서 언어가 타락하는 것.

     

    예루살렘에서 야스오를 보고 온 교쿄는 그를 허깨비로, “반딧불이로 지시한다. 그리고 게사쿠는 반딧불이-야스오가 준 빗을 교쿄에게 건넨다. 반딧불이가 처음 나타나던 그때 동시에 미사일이 날라다니고 있었고 교쿄는 빗을 부러뜨리고 만다. 반딧불이는 게사쿠에게 밥티로 인식되지만, 그것은 적어도 교쿄를 경유해서는 희망의 빛 같은 것일 수 있고, 그리하여 교쿄를 배반할 수 있는 것이었을 수 있다. 그것이 곧 야스오에 대한 교쿄만의 특수한 관점, 관계, 그러니까 허구의 관계를 연장해 주는 지점, 어쩌면 환각 같은 것 아닐까

     

    저녁놀방사능의 효과이고, “별똥별리튬 폭탄인 세계에서, 적어도 이후 다시 출현한 게사쿠가 인식한 반딧불이는 방사능을 입은 애기들 부적”, 아마가쓰일 뿐이다. 반딧불이는 무대에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니 표현하지 않을 수 있어서 그것을 실재화하지 않은 것으로 동시에 ()의미화할 수 있다

    반딧불이는 존재하는가. 교쿄는 셋이 하룻밤을 보내던 어느 날 반딧불이가 자기 거시기에 들어와 임신을 했다고 한다. 이는 야스오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상상 임신 같은 것일까. 아니 야스오는 존재하는가. 교쿄가 성령을 잉태하고, 게사쿠가 부활하고, 이 모든 건 야스오가 있을 때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빗은 여러모로 불길한 의미를 갖는데, 교쿄의 빗이 먼저 부러진다면, 다음으로 야스오가 교쿄에게 건네주라고 빗을 건넬 때 다른 무엇과 바꾸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을 암시하며 자신이 하루 맡지만, 그건 야스오가 떠나고 나서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어쨌거나 빗은 그의 첫 번째 죽음을 불러오는가. 그리고 다시 돌아온 교쿄에게 빗을 건네며 게사쿠는, 야스오를 만나 빗과 바꿀 것으로 애기를 꺼낸다. 그러니까 그 반딧불이 아기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전수의 영원한 시간

     

    호기우타는 지구 전체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빙하기로 진입하면서 끝난다. 그와 같은 내레이션이 나오는 가운데 이 둘은 끝을 향하는가, 아님 시작을 향하는 것인가. 곧 인류의 마지막 장면과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것 사이에서 그 둘의 행적은 묘연하고도 모호하다. 떠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들의 발 딛고 선 곳이 죽음의 언덕, 곧 모헨조다로라면, 이는 그 죽음이 체현되고 있는 광경일 것이다. 드디어 이곳이 아닌 저곳이 수여된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그 그림자가 된다

     

    이는 마치 하나의 꿈인 것처럼, 망각되는 것처럼 처음의 모습으로 다시 누워 있는 둘의 모습을 막의 경계에 둠으로써 하나의 돌파구를 찾는다. 그것은 미래보다는 초기 인류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인류의 절멸보다는 모든 것이 진짜 자연의 힘으로 다시 소생할 날을 기다리는 리셋된 지구의 시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는 교사쿠에게서도 방사능 잿가루가 아닌 진짜 이며 그것은 자연이라 착각되던 핵전쟁 이후의 폐허가 펼쳐놓는 스펙터클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극은 전쟁의 부조리를 하얀망각으로 도배하며, 쉬이 그로부터 출구를 찾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전쟁에 대한 성찰을 망각하고, 기후 위기로 인한 멸망 혹은 결정적 변화로의 비약한 결말인 양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인류의 절멸 이후에 어떤 희망의 언어를, 비판의 성찰을 가져올 수 있을까. 전수되어 온 노래, 호기우타를 경유해, 관객은 그 노래의 주인이 되어 그 둘을 지칭할 수 있게 되고, 마지막 인류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며 현재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마치 노래는 도쿄라는 지역을, 한때의 문명을, 역사를, 인류의 마지막 흔적을 기입한 유일한 매체가 되며, 한편으로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로도 현실의 맥락을 연장하는 것은 아닌, 독립적인 구문이 된다. 그것은 인류가 만들어 낸 자연에 가까운 문명의 산물로서, 무의식적으로 흘러들어와서 흘러나가는 무의지적으로 전파되고 전염되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신화 같은 것이 된다

     

    호기우타는 교쿄에게는 일종의 반딧불이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노래는 이유 없이 시작과 끝에 반복적으로 교쿄를 경유해 출현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다음 장면에서 그 노래가 다시 출현할 것을 예고하고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망각되더라도 말이다. 희망은 그런 알 수 없는 전수의 시간 안에 있지 않을까. 호기우타는 그 알 수 없는 묘연한 시간 속에 인류를, 그리고 역사와 미래를 포집해 놓는다

     

    2026.07.04 ~ 2026.07.12 화~금요일 20:00 / 토요일 19:00 / 일요일 16:00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CAST]
    게사쿠 - 이경민
    교코 - 정다연
    야스오 - 우범진

     

    함께만든사람들


    작 기타무라 소
    번역 김유빈
    연출 윤혜숙
    연출부 김성령
    무대감독 이효진
    무대/소품디자인 김다정

    조명디자인 성미림
    사운드디자인 이현석
    의상디자인 김미나
    분장 장경숙
    한글자막해설디자인 이청
    음향OP 김민지

    조명OP 김소영
    한글자막해설OP 정혜민
    그래픽 황가림
    영상기록 강수연
    접근성 매니저 이청
    기획/운영 이도원 나희경

     

    주최/주관 래빗홀씨어터
    협력 플레이포라이프 & 페미씨어터
    접근성 운영협력 아르코 대학로예술극장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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