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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무용단, 〈내가 물에서 본 것〉(안무 김보라):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신체를 던져놓기REVIEW/Dance 2026. 7. 23. 14:54
신체 밀착적 오브제들의 무의미적 절대성

국립현대무용단, 〈내가 물에서 본 것〉(안무 김보라)[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 〈내가 물에서 본 것〉에는 크게 세 가지 오브제가 등장하는데, 먼저 쿼터파이프에서 바닥으로 이어지는 금속 철판에 접착된 파란 비닐의 배경 자체이며, 또 하나는 물이 든 컵, 그리고 달걀이 담긴 계란판이 그것이다. 이는 모두 신체와 연루되는데, 파란 비닐을 뜯는 초반 긴 행위의 연속으로, 물을 돌아가며 마셔 바닥에 뿜는 중반 일부 구간으로, 후반 계란판을 인 남자의 등장 이후, 무대에 어질러진 달걀을 바닥에 던져 깨뜨리는 행위 구간이 그것으로, 오브제는 모두 행위에 따른 변용의 과정을 이룬다.
곧 이 사물들은 독립적이지 않으며, 행위의 근거가 되는 동시에 그 행위와 결속된 차원에서 그 사물이 갖는 의미를 행위가 갖는 의미와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며, 사실상 그 의미(의 부재)를 은폐하고 망각하게 한다. 파란 비닐이 양수의 막이라면 물은 양수 자체이고 달걀은 생명의 약호가 아니라, 각각 끈적거리며 뜯기어지는 파란 비닐이고 침이 섞여 분사되는 물이고, 깨어져 미끄러운 접촉면과 파편들을 만드는 달걀이며, 그 사물의 질료적 특성으로 지시된다―또 하나가 있다면 후반에 명시되는 마이크로, 이는 입이 아니라 목젖 아래 붙어 신체 일부로서만 작동된다.
예컨대 상징 기호가 아니라 신체적 환유물로서 드러나는 것인데, 이들이 입은 옷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덕지덕지 기워져 있고 매달려 있고 부착돼 있다. 실리콘이나 라텍스를 사용한 이 옷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체 일부로서 본래의 몸을 초과하고 있다. 그것은 무늬나 색이 아니라 실제의 덩어리들로, 장식적이지 않고 실재적이며 어떤 형태로 명확하게 분별되지 않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원시적 질감의 시뮬라크르라기보다는 내장이나 피부 안쪽이 외부로 전도된 형상이다.
존재들은, 퍼포머들은 어떤 행위를 하며, 무용 특정적인 어떤 움직임을 하지 않는다. 사물이 몸의 지지체이자 몸이 사물에 대한 지지체로 탈바꿈하는 장소에서, 존재는 의식적이지 않으며, 사물에 가까워진다. 처음 어슴푸레한 공간에서 뽀드득거리며 비닐 위에서 한 지점에서 뭉쳐 저마다, 따로 또 같이 움직여 나갈 때 신체는 집단성의 기호가 아니라, 일정한 간격과 틈을 근거로 펼치고 뻗어 나가는, 머리 없는 촉수 더미 생명체 같은 것에 가까워진다.
엄밀히 뒤섞임이 아니라 분별의 차원을 만드는 이 집단의 차원은 서로를 비켜나며 자리한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정합적이며, 그러면서도 일정한 대형을 일정 시간 동안 유지한다는 점에서 자의적이고 우연적이다. 그것은 특정한 기원의 시점과 예비하는 프로그램의 어떤 지침을 갖고 있지 않다, 아니 적어도 그 둘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들은 동류의 집단성을 체현한다. 일정한 속도 내에서 다르게 움직이면서 일정한 간격과 이동성을 갖고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들은 친밀하다. 또는 적어도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물질로서 소리

그렇다면 그들이, 내가 물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이 보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는 그들에 내속하는가, 아님 그들 바깥에 내가 있는 것인가. 아님 화자로서 나의 시선이 환상적으로 재현―“본 것”은 과거이다.―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또한 그것은 왜 본 것인가. 아마도 명확하게 분기되는 건 “물” 하나로, 파란 비닐은 색에서, 그리고 먼저 뽀드득거리는 소리에서 미끄러움을 즉물적인 감각으로 소환하고자 하는 용도로 쓰인 것으로 인식된다. 또한 시종일관 비오는 소리가 거기에 부착된다.
이 비닐을 뜯는 소리 역시 물질의 기원을 순수하게 드러내는데, 그 사물 자체의 무의미성 또는 실재성을 오직 이 접착되어 있음의 탈거됨―반동적으로 어떤 저항됨―의 연속적 계열로, 일정한 마디로서 연장하는 데에서만 어떤 감각이, 약간의 의미로의 변경이 있는 듯 보인다. 그 가운데 이 소리는 ‘비’와 섞이며, 비를 뚫고 나오는 음의 단위가 된다. 그것은 비의 물질감을 (환상적 차원에서) 상기시키며, 비를 그것 ‘위’에 접촉, 곧 내속하(게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소리를 내는 또한 소리를 내기 위해서도 그러한 이 비닐 뜯는 행위는 어떤 것을 상징해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어떤 상징성도 없음을, 환원되거나 언어화되는 차원이 없음을 보여주는 차원으로 작동하며, ‘내’가 거기서 본 것은 결국 분명하지만 믿을 수 없는, 보고도 납득이 되지 않는 어떤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단지 내가 어떤 식으로든 감각한 차원에서 실재라는 것이 거기에 있었다라는 걸 밝히는 데 불과한 문장으로 소급되는 지점에서, 이 제목은 충실하고도 (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이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소위 움직임은 비닐을 뜯는 결과의 산출 자체가 아니라, 비닐이 뜯기어짐 자체에 내가 동조되는 것에 그것이 목표라 한다면 목표가 있다. 곧 비닐을 잡아당기는 행위는 비닐이 뜯기어지는 변용적 사태가 감각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이때 몸은 한편으로 기능화되면서 또 한편으로 사물의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음으로써만 주체화된다.
여기서 실재는 최대한 그에 덧붙는 환상의 차원을 소거해야 근접해진다. 〈내가 물에서 본 것〉이 갖는 독특한/특별한 성과는 소리가 순수하게 일종의 물질로서 감각되도록 최대한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일종의 스피커의 자기 지시적인 작동이다. 그것은 이른바 스피커 내 진동이며, 소리-스피커는 싱크레즈되지 않는 그 자체의 물질성을 갖춘 장소적 고립으로서 가시화된다1.
이는 퍼포머들에게 감정과 의식의 차원이 부여되지 않기에, 어떤 서사적 부연도 승화 작용도 필요하지 않기에 자유롭게 구가하는 필연적인 소리의 결과물로 해석하고 넘어가기에는 완전히 정합되지 않고 약간의 여백이 있는데, 곧 안무가가 모든 걸 최종 승인한다고 해도 그것이 안무가의 의도를 합목적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는데, 곧 감각된 채 그러한 것인지, 또는 감각하지 못한 채 그러한 것인지, 애초에 그 감각을 전달할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안무가가 고립된 매체적 지각으로서 소리를 요청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으며, 그 반대로 아예 전제를 달리한다면, 곧 사실 그것과 유사한 차원에서 그리고 마찬가지로 또는 더 이상적인 차원에서, 궁극에는 소리가 환상적 효과로서 달라붙(으려 하)는 식의 작동이 애초에 불가능한 안무를 그 자신을 포함, 모두에게 제안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증폭된 혹은 과잉된

오목거울이 무대에 내려오고 거기에 얼굴을 갖다 대 입안을 확대해 마치 개구기를 낀 것 같은 이미지를 취하는 것은 자신을 타동적인 신체 표본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와 동시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불투명한 이미지 안에 갇혀 명확하게 의식을 차릴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즉자적으로 확대된 형상이 아니라, 불분명한 자아를 의문시하는 것이 된다. 이는 의학용 장치에 몸을 맡긴 수동성과 그 안에서 이성의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몰지각적 사태를 말 그대로 증폭한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달걀판을 남성들이 조심스레 머리에 이고 나타나고, 이후 한 명의 여자 무용수가 달걀들을 하나씩 바닥에 던져 깨뜨리는 것은, 남성들에게 달걀은 경험되지 않는 대상이며, 단순한 운반체로서 소임을 할 뿐임을 사후적으로 일러주는 듯하다. 반면, 난소를 상징할 달걀은 여성에게 히스테리를 실제 불러일으키는 신체적이고 정신-신리적 증상과 직접 연결됨을 동시에 그만큼의 사회적 의무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하나의 장소 안에 달걀은 덧없이 쌓이(지 못하)고 파편으로 튀어 나간다. 여자의 위치는 한곳에 고착되어 있으며 그 결괏값은 변화의 폭이 크다. 달걀판은 또한 방음판의 역할을 상기시키는데, 그것은 보호막으로 보이는 이 장치가 실은 경계를 가능하게 하며, 성 특정적으로 한정적인 작용을 할 뿐임을 의미한다. 여자의 행위는 이 달걀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경계에 대한 것이 된다.
달걀이 신체 외부적이면서 동시에 신체 내재적인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퍼포머들의 의상 자체가 삐져나온 내장이자 불순물처럼 더해진 외부였는데, 그러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의 위장이 아니라, 위장된 살의 착장인 것인데, 그것은 그 살을 가진 괴물의 의태가 아니라, 그 형상을 외부로서 그냥 수용함을 의미한다. 곧 옷의 경계선 안으로 붙어진 이 뒤집힌 살과 같은 표층은 따라서 일종의 부조리한 환경 자체의 최소한의 것이자 가장 직접적으로 발현된 것이 된다. 비이성적인 동시에 비미학적인 존재가 그로써 탄생한다.
수행성의 부조리한 과제들

프로그램 북을 참조하면, 안무가는 실제 3년간 시험관아기 시술로 불리는 보조생식기술의 도움을 받아 복잡다단한 임신의 절차에 자신을 투여한다. 혈액을 채취해 난소 보유량을 평가받고, 각종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감정 변화를 동반한 각종 신체적 증상을 경험한다. 또한 분만대에 앉아 모니터링 작업을 통해 질 안에 삽입한 초음파 도구로써 자신의 자궁을 확인하기도 한다. 배란유도제를 맞고 난자를 채취, 이후 배양하고, 수정란을 자궁 내부에 이식한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주사와 약이 처방되고 또한 여러 증상이 동반된다.
뭔가 이 과정들은 끔찍하다 못해 기괴한데, 여성에게 부여되는, 여성만이 겪는 이러한 의학 공정 아래의 그로테스크한 경험의 양상은 페미니즘의 의제로 연장되는 대신, 탈승화된 몸의 단면을 그야말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전화되는데, 몸의 정상 기준을 밑도는 저하된 몸, 갖은 화학 공정의 투여로써 재결정되는 몸, 불순물과 잉여가 침범하며 잠식하는 몸, 온갖 증상과 상상으로써 탈구되고 괴리되는 몸, 이런 것들은 퍼포머들의 몸을 통해 재전유된다.
이는 단순히 타자성을 띤 비체로 격하된 몸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내가 구분할 수 없는 나 자신의 곤궁, 초과, 결여 등의 상태들이다. 따라서 주체도 대상도 아닌 중간적인 어느 상태, 의학 공정과 착종되어 가는 비인간적인 상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그러한 상태를 표현한다. 따라서 〈내가 물에서 본 것〉의 주제는 이 자발적인, 그러나 반주체적인 이 과정이 오히려 의학 기술 발전의 미비함을 보여줄 수 있는 사례이며, 따라서 여성 권리 신장의 차원과 결부되어 있다는 비판을 경유한 페미니즘 의제로 도달하기 전에, 한 개인의 풀릴 수 없는 실존적 과제로 결정, 고착되는 바가 있다.
곧 비인간의 새로운 유형을 보여준다기보다는 귀신과 같은 중간적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물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것은 더디지만 유연하고 의지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일정한 행위 양식을 구가하며 집단적 반경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질서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고 사회적 차원의 관계를 맺을 줄 알며, 또 한편으로 자유롭지 못한 저당 잡힌 의식의 측면을 드러낸다. 달걀을 던지기 전에는 사실상 감정을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행위는 무엇보다 인간적이고 또한 비판적이다.
무시간성의 토대

그러니까 몸의 탐구는 이 거대한 인공적 사회를 어떻게 재정초할 수 있느냐의 측면으로 나아가기 전 고착된, 결정된 어떤 몸 자체를 전제하며, 몸의 탐구를 통해 다른 출구를 찾을 수 있느냐의 측면을 기약한다기보다는 이 몸의 다양성을 듣고 주목하여 새삼 내가 주목하지 않은 몸의 세부, 경로, 이미지 등을 찾을 수 있음으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이는 일종의 강도 높은 경험, 트라우마적 경험을 경유해, (결코 그것을 곧바로, 곧이곧대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일단 전제하며) 그 안을 헤집고 그 안에서 뒹굴며 발화되지 않은 언어를 몸의 언어 안에서 재탐색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그리고 이는 트라우마가 갖는 근본적으로 정체되고 착종된 시간의 형태로서 현재가 아니라 무시간성의 차원이 도입된다고 보인다. 사물이 정렬되는 시간성은 곧 현재이지만, 그 현재와 접지되는 의식의 차원은 거의 변경이 없다. 사실상 기이함이나 괴이함만이 있지만, 정동은 없다. 인공적인 분위기는 있지만, 감정이나 정서 따위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더럽거나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 역시 아니다. 그것은 신체적 경로가 어떤 착오를, 혼동을 일으키는 물리적 현상 그 이상은 아닌 것으로 자연 인식된다.
그리고 이것이 보이지 않는 (회)한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정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그것은 현재성으로 전이되고는 있지만, 실은 어떤 것도 근본적으로 바뀌는 건 없는 물화된 신체, 그 영점으로 조정된 신체를 시간의 전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공간적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몸에 대한 탐구, 집중은 바로 이 몸의 무시간적 경로, 어떤 무엇을 따로 재현하거나 표현하려는 의도를 비우고, 몸이 최소한도로 또는 어떤 본능을 경유해 이행되는 어떤 물리적 경로를 탐색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내가 물에서 본 것〉의 제목은 안무가―“내”―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되 그 즉물적인 연장에 기초하고 있으며, 오히려 미세한 접촉과 차이는 퍼포머의 주체적 역량으로 결정된다기보다는 어떤 집산된 신체들의 각기 다른 반향이라는 미세한 이미지의 변주 자체로 일원화되는 듯 보인다.
그것은 근본적인 차이를 갖지 않는, 몸의 전표현적 단계에 도달한 것의 (긍정적)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들이 미분화된 신체 자체, 의식의 단위가 아니라 세포의 단위,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신체의 화학적 단위로 갈음되면서 실은 각자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특히 집합적인 차원에서의_ 신체 운용의 단계로 접어들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물에서 본 것〉은 이 발설되지 않은, 또 언어화되지 않은 신체에 대한 어떤 반향, 실재 그 자체를 던져놓으려는 작업이겠다.
김민관 편집장
2026.6.12-6.14 금 7:30PM | 토·일 3PM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 1. 대극장에서의 가속되는 스펙터클의 양상에서 소리-스피커가 그것과 환상적 차원에서 동조되어 증폭되는 현상의 관성적 차원에 대한 비판은 다음 글을 참조할 수 있다. https://www.artscene.co.kr/23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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