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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하 무브먼트, 〈맨땅〉(안무 하지혜): 근본적이거나 핍진한 맨땅에 대한 두 가지 알레고리
    REVIEW/Dance 2026. 7. 25. 13:33

    지지체로서 바닥

     

    아하 무브먼트, 〈맨땅〉ⓒ피아츠[사진 제공=아하 무브먼트](이하 상동).

    맨땅은 맨땅이라는 육체에 대한 지지체를 하나의 기원으로, 영도로 두는데, 이는 맨땅을 매체로서 탐문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맨땅의 연장선상에서 움직임을 탐색해 간다는 걸 또한 의미한다. 소위 맨땅에의 몸, 맨땅과의 교감 작용을 통해 맨땅은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가. 이는 쉬이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우리의 현실, 곤궁한 삶에 대한 상투적인 비유로 환원될 위험을 갖는데, 그것은 신체적인 것이 단순히 비언어적인 것으로 재현될 수 있는 위험의 그 반대편에 위치한다

     

    곧 신체-움직임이 실은 언어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경유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 언어를 궁극에는 가로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가로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언어와 신체가 양립할 수 있는 근거를, 또한 그 둘의 차이를 분리의 근거로 확정 짓지 않는 과정 안에서 자연스레 성립한다. 따라서 다시 돌아오면, 맨땅이라는 지지체와 그에 대한 신체의 함입 과정은 맨땅에 대한 근본적인 명제이며 원리이자 초점이다

     

    맨땅은 흙 대신에 골판지를 무대 전체에 까는 것으로 공간을 설계하는데, 이는 표면에의 심층을 가설하는 것과 같다. 골판지는 짓눌리고 미세 주름들을 결정짓지만, 여전히 그것이 깊이를 산정해 낼 수 있는 것으로 전화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맨땅의 속성일지 모르는데, 표면의 미세한 결정들이 분산되어도 그것이 어떤 지층의 변화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예외적인 변용의 결과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것을 뚫고 나온 한 무용수의 발인데, 맨땅에의 결실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구멍은 파는 게 아니라 찢기는 것으로 초래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러니까 이때 매체의 주요한 단면이 비로소 드러나는데, 그것은 실은 밀도가 얕은, 일종의 부풀어 오른 것밀도가 채 채워지지 않은 것과 같으며, 따라서 그것은 타격에 의해 뚫릴 수 있는 것이 된다. 사실 미세한 질감의 세부는 조명으로 인해 실은 깊이를 얻게 된다. 그것은 형체인 동시에 깊이이다. 그런데 이 뚫림으로부터 그 아래의 또 다른 지층이 비어 있음이 드러난다

     

    실재를 향하여

     


    무저갱의 심연으로서 극장이라는 상징
    , 곧 기저가 뚫리며 그 바닥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의 차원을 드러낼 때 이는 물론 실재에의 공포를 동반한다. 동시에 그것은 어떤 유쾌함으로 전화되며 극복 가능한 것으로 승화된다. 이는 환상의 영역이 실재를 침범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앞서 두 팔을 모아 머리를 감싸며 허리를 세우는 요가식의 물구나무서기 자세를 수없이 취하던 장면은 수직으로 하강한 장면으로 재기입된다

     

    사실상 앞선 수많은 절차는 바닥의 뚫림을 사후적인 것이 아니라 인과적인 것으로 뒤바꾸는 지점에서, 땅의 견고함 대신에 그 무거운 몸의 하중 자체를 지탱하고 있음의 실재를 비우고 또 비집고 나와산뜻하고도 가벼운 것으로 대체된다. 이때의 환상은 공간이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저항이 사라졌다는 것, 무게라는 몸이 틈새입구에의 사물로 전이된다는 사실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땅의 꺼짐 아래 있는데, 이는 또한 땅이, 그 아래의 또 다른바닥이 비가시화되는 지점과 함께 현상된다

     

    희망과 함께 두려움도 함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열려 있다. 시간이 멎고 또 개방된다. 사실 이 장면은 예방 주사를 미리 맞았기 때문에 환상으로 기입될 수 있는 것이다. 곧 꼬무락거리는 발, 그리고 이는 초록색 긴 양말이라는 신체 연장의 매체 자체의 반향이다. 곧 맨살이 아닌 이미지, 일종의 표면 아래 움트는 것, 움트는 것을 비추는 표면의 움직임을 위해 이 양말은 골판지와 마찬가지로 시종일관의 투여 아래, 일종의 축소된 무대 환경의 지점을 찍는 셈이다

     

    그런데 이 수용은 그것이 커튼콜이라는 경계의 시간에 인접해 있는 가운데서의 수용이기도 하며, 그래서 수용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곧 커튼콜의 시간에서 유예되고 예외적인 한 존재로 그가 겹쳐지기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동료들에게 그는 동료로 회귀해야 할, 그 타이밍을 잊은 귀여운 동료의 실수, 착각과 같은 서사 안에서 기꺼이 수용되는 것으로써 이 장면의 무저갱의 근원은 또한 닫힐 수 있다그것은 또한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미세한 지점이 또 다른 시작이라면.

     

    잣기의 언어

     

    맨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는다면, 아마도 이 움틈의 이미지를 그리는 독립적인 발에의 집중과 함께, 바퀴처럼 몸의 한 축을 회전시켜 옆으로 이동의 흐름을 만드는 과정의 한순간에 있다. 특히 뒤로 돈 채 사지로 서서 다리를 뒤로 차올리면서 몸 바깥 방향으로 외회전시켜 커다란 수레바퀴 같은 회전축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정면성을 띤 채 앉아서 역시 바깥으로 다리를 외회전시키는 장면에서, 그것이 처음 한 번에서, 두 번으로 연장되는 순간이 그렇다

     

    이는 사물화된 몸이 만드는 어떤 실 잣기의 반경을 일정하고도 입체적으로 그리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증폭된다. 곧 몰입의 지점 자체가 굴절되는데, 이는 선회하고 되돌아가는 일정 구간에서 장소뿐만 아니라 시간이 나선형으로 펼쳐짐을 의미한다. 맨땅은 이 단단한 땅이라는 매체에 대한 감각과 인지의 차원, 마치 그로부터 발생하는 존재의 차원에서, 영도로서 세계 내 존재의 시작을 알린다. 이는 더디고도 점진적인 이행 과정 아래 있다

     

    결과적으로 거꾸로 선 신체들, 하염없이 땅을 짚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존재들은 그것이 이 땅을 파고들려는 의지와 맹목, 열정 같은 것들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비친다. 그것은 요가의 온전한 동작 수행의 완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이 하나밖에 없는 출구로서 불가능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조적이고도 슬픈 인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는 억척스러움과 우둔함, 우직함 등의 태도와 정서가 뒤섞인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얼굴은 드러나지 않고, 앞선 그 발이 가장 뚜렷하고 명확하게 표정을 갖는다

     

    그리고 무대 앞쪽에서의 잣기의 움직임에서 정면성의 방향을 취하면서 다시 의식적 차원의 안정되고 더딘 움직임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맨땅은 이 의식 자체가 무화되는 듯한 분위기 안에 대부분 잠겨 있다. 숭고미에 가까운, 맨땅에서 신체들이 놓이고 그 맨땅의 변화를 뒤늦게 보여줌으로써 움직임의 궤적이, 곧 환경과 신체의 상호 침투 과정의 일환이 일종의 삶 자체임을 보여준다. 이때 신체의 환유로서 땅은 시간성의 궤적 안에서 삶 자체의 은유가 된다. (땅의) 살은 삶(인간의) 시간이다

     

    땅이라는 매체성과 땅이라는 알레고리 사이에서

     

    잣기의 움직임은 묘연한 데가 있는데, 그것은 땅, 곧 장소와의 협응보다는 일정한 구조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거의 유일하게 정적인 차원에서 어떤 이미지 자체를 만드는 데 초점을 두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화자처럼 땅에의 서사로부터 벗어나 경계에서 이 삶의 진실을 증언하고 발화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이는 또한 바르바가 말한 북극 배우의 춤, 자율적 표현 대신 형식적 틀로부터 출발하는 춤, 가령 전통춤에서 부분적 신체를 대상으로 둠으로써 그리고 뭔가 그 자체가 모든 걸 지배하게 됨으로써 인격적 차원의 신화를 깨뜨리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보다 빛은 이들이 허허벌판의 환경에 놓임을 먼저 더 뚜렷하게 증언하는데, 그것은 물구나무서기 동작이 벌어지기 전, 드럼 세트 아래 비트가 더해지는 가운데, 하얀 조명을 통해 살갗/피부, 속옷 같은 의상이 실재화되는 것으로 그러하다. 그것은 오히려 색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의 덜 채워진 모습에 가깝다. 그리고 방황하고 좌표를 잃은 존재들의 모습이 부각되는 것이다

    맨땅은 크게 두 개의 장면, 마치 피부와 같이 땅과 밀착되어 안정적으로 몸을 딛고 감촉하며 일정한 궤적의 경로를 그리면서 가는 장면의 환영성, 그리고 맨땅을 마주하며 혼란을 겪고 돌파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의 현실성을 오간다

     

    결국 땅은 몸의 결정적 지지체로 나타나면서, 그 관계 양상에 따라 다른 상징적 의미를 형성한다. 만질만질한 피부로서 환상적인 땅, 그리고 말 그대로 새롭게 정초해야 하는 맨몸이 투여되는 의무의 땅. 마지막 삐져나온 발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이질적인 매체, 영역, 장소, 그리고 희망을 나타낸다

    그것은 맨땅이 척박한 불가능성의 장소임을 거꾸로 전제하는 부분이다. 어쩌면 이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조작일 수도 있는데, 사실 맨땅은 이 아래로의 강박, 시도 또는 뒤집힌 몸을 통해 점진적으로 동시에 징후적으로 그것의 불가능성을 윤곽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리가 아닌 얼굴이 나올 때 이는 커튼콜이라는 경계의 시간대에 그러하다

     

    결국 희망의 출구는 무대가 종료되었을 때, 공동의 인식적 경계가 구성되었을 때 오는 덤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강이 아닌 상승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런데 그것은 그토록 파고들고자 했던 땅에의 시도, 그것을 가볍게 뒤집은 것이기도 하다. 맨땅은 또한 땅의 수평성을 연장하는 안정적인 좌우로의 궤적, 그리고 또한 땅을 수직으로 연장하는 고정된 위치의 임시적인 수직적 몸짓의 두 움직임으로 구성되며, 마지막에 이르러 후자는 공간 자체의 변화로 결정된다

     

    구조와의 마주침

     

    맨땅맨땅에 헤딩이라는 핍진한 현실의 알레고리를 끌어오지만, 그 땅은 대지이기도 하고, 피부이기도 한 조금 더 근본적인 차원의 의미를 형상화한다. 그럼에도 반대로 현실의 구체성과 그 코드를 현행화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또는 땅을 공간적 차원이 아니라 미시적 차원의 세부로서 가공하고 감각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실제 흙을 일부 사용하거나 촉각적 차원으로 몸으로 연장되는 어떤 매체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닐까

     

    그럼에도 맨땅은 결국 현실 너머의 근본적 토대에 대한 마주함이며, 이는 다시 현실에 대한 강력한 알레고리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종국에 현실로 되돌아온다는 점에서 현실과 이상의 대립에 대한 것이 아닌 구조 자체에 대해 서사를 구성한다

    따라서 마지막 장면은 이 모든 것이 단지 구원으로 연결되었다가 아니라, 현실 바깥이라는 것은 원래 없고, 그것이 있다면 무대라는 장치의 가시화 속에서 속임수로 드러나는 것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구조는 인식될 수 없는 것이라기보다 망각되어 있고 따라서 인식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맨땅은 그 사실을, 곧 극장이라는 은유를 되돌려 준다

     

    김민관 편집장

     

    2026.06.26 ~ 2026.06.27 금요일 19:30 / 토요일 15:00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출연진 및 제작진 소개

    안무 | 하지혜

    기획 | 강정환

    공동창작 및 출연 | 나혜영, 민희정, 서동솔, 오진민, 임예지, 정종웅, 조영재

    음악 | 김대희

    무대감독 | 이유성

    조명디자인 | 김민수

    음향감독 | 김경남

    자문 | 장영

    의상 | 정현수예

    컨셉사진 | 이미지훈스튜디오

    연습기록 및 공연기록 | 피아츠

    포스터 및 프로그램 디자이너 | 박명근

    주최/주관 | 아하 무브먼트

    공동기획 |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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