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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작 이은채, 연출 이해인, 〈힛 더 디어〉: 지구를 매개하기 혹은 벗어나기
    REVIEW/Theater 2026. 7. 31. 20:44

    타자성의 통로 혹은 매개

     

    극작 이은채, 연출 이해인, 〈힛 더 디어〉©이지수(이하 상동).

    힛 더 디어의 제목은 갑작스레 고속도로에서 사슴이 튀어나올 때 사슴을 피하지 말고, 사슴을 치라는 조언을 함의하는데, 여기서 사슴은, 그리고 그 사슴을 바라보는 맞은편의 주체는 어디에 해당할까. 집을 떠나는 아이 둘과 그 둘을 지켜보는 다듬이 벌레라는 이중 구조로 전개되는 힛 더 디어, 극장 2층을 활용하여 방 안에서 망원경을 들고 우주를 살펴보는 것으로써 후자의 등장을 알리는 것과 같이, 저 너머의 행성에 있는 벌레와의 닿을 수 없는 거리를 극장의 복층 구조로써 주로 처리한다.

     

    그리고 이때 공연이 시작되는 그 아래쪽 1층 하수 전면의 직사각형의 뚫린 입구는 주차장 공간으로, 그러니까 마치 집을 빠져나오는 둘을 상정하며, 중앙 공간을 한 순간에 그 둘이 고속도로 한복판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전이시키는 것처럼, 실은 사슴의 자리에는 아이들이 들어앉는다.

    아이 둘의 가출이라는 불안()한 상황은 이제 자동차에 탑승한 외부, 곧 타자를 마주하는 어른들의 입장을 전유하는 관객에게 건네진다고도 할 수 있는데, 동물권의 사고 영역 안의 가능성이 짙은 명제는 다듬이벌레를 직접 경유하지 않고, 반대로 다듬이벌레의 초재적 권능의 입장을 경유하여 아이 둘을 살핀다라고도 하겠다.

     

    그런데 힛 더 디어의 특이점은 이 둘과 나란히 살고 있는 다듬이벌레라는 존재에도 있는데, 이를 경유해 지구를 우주 안의 한 행성으로, 차이로, 인간들을 종 특수성의 견지로서 바라보게끔 한다. 외계()의 시점이 그로써 체현되며, 반대로 미소한 존재로서 비인간은 이 너머의 세계를 경유해 휴먼스케일의 위상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그 둘의 절대적 거리, 한 공간에 있을 수 없는 그 거리를 고려한 공간의 실질적 분할을 통해 신체의 차이는 동등한 것이 될 수 있다. 또는 식별 불가능한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객석의 통로는 현실의 두 공간을 빠져나가는 또 다른 경로이자 두 다른 존재를 다르게 배치할 하나의 가능성을 더하는데, 히나가 치치와 헤어지며 각자의 길을 갈 때 올라오는 경로가 된다면, 다듬이벌레는 지구를 마주하며 전유하는 장소로, 객석을 사용하는데, 점점 그 지구와 가까워지며, 곧 클로즈업하며, 불시착해서, 지구에서의 인간에 대한 경험을 환상적으로 체현하며, 지구와의 거리를 완전히 해소한다.

     

    저 너머에 대한 갈망

     

    이 환상적인 방, 지구의 점유는 1355분에 날아다니는 먼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앞서 다듬이벌레의 나의 하얀 별”, 곧 점과 같은 존재를 마치 눈앞에서 만져질 듯 체감하는 것의 증폭되는 신비의 효과로, 그러니까 저 너머는 비가시적인 것의 가까움으로 마법적으로 소환된다. 하지만 이는 거꾸로 다듬이벌레를 우리가 목도하는 순간의 반전적 양상에 근접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드디어 바깥에서, 무대 위에 벌레가 있다. 그가 절대적으로 작은 것을 향하는 시선에서, 우리의 시선이 미소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는 거대해진다. 곧 먼지의 확인은 우주 속 지구라는 점 하나를 보는 것에 절대적으로조응한다.

     

    그런데 이 먼지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왜 특별한 것이 될까. 경험의 전수, 타자의 경험을 재경험하는 것이면서 그것을 굳이/다시 설명하는 건 아닌 이런 체험은, 곧 실재하기보다 마치 실재하는 것과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 그와 동시에 실재하는 것의 증명이 사실 중요하지 않은 순간과도 같다.

    이때 그것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내부의 것을 외부의 것으로 착각하는 비문증의 일환을 마치 체현하는 듯한 인상도 주는데, 그것은 무언가를 특정하지 않고, 또한 그 특정됨의 대상이 중요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특정됨을 유예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순간은 마치 다듬이벌레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의 무지에 조응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사실 그건 대상의 중요성보다 저 먼, 다른 대상과의 차이를 그 자체로 갈망하는 것, 호기심을 갖는 것, 마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이 닫힌 체계 내의 삶을 상투적이지 않은 것으로 바꾸는 어떤 희망의 제스처 같은 것 아닐까. 그러니까 어쩌면 이 작은 벌레가 느끼는 작은 신비는 우주에 대한 신비와도 조응되는 것임을 일러주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다듬이벌레는 치치와 히나를 조망하며 그 둘이 고속도로의 사슴인 양 치어 죽지 않도록 하는 안전망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그 둘과 결코 만나지 않은 채, 극의 또 다른 가치를 전한다. 그것은 저기가 바라본 여기의 신비로움이다. 그러니까 힛 더 디어는 통상적인 두 다른 세계의 경로를 뒤집으며 이행된다. 동시에 이곳과 저곳의 상호 교차적, 연루적 차원을 전제하지만, 그 두 곳의 관계는 반드시 시차로서 주어진다. 그런데 그 두 세계의 모호한 관계성은 이곳 안의 모호함으로 연장된다.

     

    칸막이를 허무는 일

     

    히나와 치치는 각각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것이라고 히나에 의해 이야기된다. 둘이 찾는 대상은 다르지만, 둘의 부모는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혼동을 일으킨다. 다시 그 둘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벽으로 나뉘어 붙어 있는 두 집인 것처럼도 생각되지만, 그것을 허물고 나올 때 아버지가 방문을 안 잠갔던 것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사실 한 집에서 살아가는 두 자매인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곧 그 분리되어 있음이 한 부모 가정이 아니라, 각자의 결여의 지점을 분배하여 공통된 결핍의 구조 아래 본래적인 가족의 원형으로서 흔적을 기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이 약분은 물리적인 칸막이와 같이, 각자의 자리로 소급되고, 그 기원이 닫혀 있다. 그리고 벽이라는 물리적 지지체는 집에 대한 상상적 차원보다는 실제적인 사회의 좁은 영역이라는 공통의 토대를 더 의미한다. 그리고 가출을 다시 실패하고 돌아와서 벽을 두고 대화를 나누던 그 둘의 냉각된 관계의 점진적 해소의 차원을 급진적으로 허무는 행위가 곧 히나가 그 ()벽을 실제 허무는 것으로써 나타난다. 그것은 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의 실패를 만회하는 대체의 행위이기도 하다.

     

    일 대 일로 맺어진 가족이 횡단하는 방식, ‘정상가족의 솔기를 드러내기보다 가족의 해체와 대안 공동체적 양식을 기입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가늠하는 모험의 여정을 꾸리는 건 불완전하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적어도 어른이 부재하는 집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더 나은 일로 보인다. 아니 더/훨씬 풍부한 삶이다. 그것은 그 둘에게 부여된 어린아이의 모습, 정체성을 거부하고, 시련을 겪으며 성장하는 어른의 서사를 반강제적으로 도입하지만, 그 바깥의 사회에서 이들은 드문 예외이자 식별되지 않는 취약함의 산물로 전도된다.

     

    곧 가출, 곧 새로운 세계를 향한 둘의 여정은 어설프고도 위태로우며, 일단의 해프닝에 그치는 소동이고 또한 부모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나 그들의 위협에 기원을 두고 있다치치가 아빠에게 맞았다라는 사실은 히나에 의해 복기되지만, 치치에 의해 결정적으로 떠오르거나 감정의 차원으로 옮겨가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암시의 차원에서 그친다.기보다 새로운 세계로의 불시착을 갈망하는 것, 그리고 그들만의 세계의 더 안온함을 유희, 미미크리 등을 통해 추구하는 것 자체의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는 그것과의 연접을 잠재하고 있다.

     

    자연이라는 환유, 그리고 사회라는 적대

     

    그리고 거기에는 자연이, 자연에 대한 상상과 전유가 먼저 자리한다. “이빨”, “코끼리자리 등자연은 그들의 기초적 단어의 차원을 활용하는 것으로써 의미화되며 존재화된다. 자전거 타는 닭과 같이 형체를 서사적 장면으로 구획한다. 치치의 딸꾹질은 히나에게는 외부로의 수치가 되는데, 그럴 때마다 히나는 치치와 거리를 둔다.

    인간의 조상은 물고기라는 사실, 폐와 뇌가 지금은 멀어져 호흡의 기전여전히물고기와 같이 뇌간에서 제어하는에서 발생하는 거리, 시차가 딸꾹질을 만든다는 설명은 대강의 이론이지만, 그것은 그 자체의 정합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그 둘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둔다.

     

    딸꾹질은 증상이자 기호이다. 곧 위협적인 세계의 경계가 치치의 신체로 파고들고, 그에의 초과됨을 그의 초과됨으로 드러내고, 이는 치치를 이끌며 여정을 함께하려는 히나의 당황스러움과 미숙함으로 인계되는 한편, 그들의 기원을 재정초하려는 미지를 향한 여정의 성격을 설명해준다. 히나는 현실을, 엄마를 진단하고 분석하고 비판하지만, 치치는 그것에 대해 어렴풋한 느낌, 생각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여정의 합목적성, 의지, 의도 등을 주체적으로 구성해 내지 못하는 상태이다.

     

    치치가 순수하고 귀엽다면, 히나는 영리하고 이미 사회에 대해 냉소적이다. 치치가 사회가 보호해줘야 하는 존재로 우리의 시선을 함입한다면, 히나는 사회적 차원에 대한 반성의 자리에 우리를 올려둔다. 히나의 엄마는 로드킬당한 사슴이 이내 죽을 걸 알면서도 그에게 물과 먹이를 가져다줄 수밖에 없음을 수용하는 정도로 여리고도 순수하며 한편으로 그것을 순진무구함의 차원이라고 일부 반성적으로 인지하는데, 이 지점이 히나에게는 어른답지 않음, 나약함, 그리고 바뀌지 않는 아니 바꾸려고 하지 않는 한계와 답답함으로 인지된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다움으로부터 비정한 사회 내 규칙과 전략을 학습해서 취약성을 감추고 극복하는 냉정한 이성이 소유자로 거듭나고자 한다. 그리고 엄마는 치치와 거울 쌍을 이룬다. 그리고 등장하지 않는 어른의 자리를 메운다. 그런데 그것은 불완전하고, 치치와의 관계 양상에서 적합한 것도, 적절한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쉬이 치치의 아빠에 대한 비판이나 판단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가운데, 그것이 모호한 가운데, 어린아이들의 이색적인 놀이로 이 모든 걸 갈음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지구에 대한 두 가지 시도, 그리고 하나의 윤리

     

    이 지점에서 가장 은밀하고 신비로운 놀이, 먼지라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지구라는 먼 행성을 지켜보는 것, 미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하나의 세계에, 순간에 잠기는 것, -장면적인 행위에 침잠하는 것, 곧 다듬이벌레의 행위는 놀이가 가진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경험과 같은 것의 비언어적 순간, 절대적 즐거움 등을 선취하고 있다. 치치와 히나 사이에는 끝말잇기라는 더 자주 반복되어 이행되는 놀이가 있는데, 이는 앞선 상상력의 장면을 불러오는 것으로써 게임의 법칙은 변용되고 또 이격된다.

     

    지구의 쓰레기를 우주로 쏘아 올리는 행사를 런칭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정리가 안 돼 마치 쓰레기장 같은 다듬이 벌레의 집에서 빠져나오는 망원경과 상자들로 구획된 지구의 바깥에서 우주를 보는 것이 조응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 가장 주요한 효과로 보인다. 곧 지구가 쓰레기로 가득 차고, 우주가 저 너머의 세계로 여겨지지 않게 된 무책임한 인류의 현재는 도덕적으로 평가되는 걸 유예하고, 쓰레기를 우주로 배출하는데, 그런데 이는 우주로부터의 비판으로 되돌아오기보다 지구를 선망하는 타자의 시선으로 되돌아온다.

     

    지구는 변하는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고라는 다듬이 벌레의 말은 신비한 지구에 대한 애정을 가진 관찰자의 견지에서, 이념 자체가 모호한, 아니 와해된, 지구에 대한 작품의 관점을 대리 체현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미래의 상태가 현재와, 작품 바깥의 현실과 분별지을 수 없는 상태, 이는 현재의 무기력함, 곧 현재가 미래에 대한 어떤 기준이나 판단 근거를 마련해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힛 더 디어는 신비하거나 모든 것이 무의미하거나 하여 알 수 없는 지구()의 상태에 그 바깥의 입장에서 순수하게 유미주의적으로 대응하거나 무의미로부터 의미를 새롭게 정초하고자 하는 시도의 두 양태를 보여준다. 두 탐사의 유형은 각각 시각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일어난다. 별 관찰이 자연의 명명을 통한 재의미화라면, 끝말잇기는 기존 언어의 규칙을 깨뜨리면서 언어에 대한 자유로운 역량을 시험하며, 세계를 확장하는 시도가 된다.

     

    반면, 이 둘이 그들을 타자로 인지하고 차 문을 열어주는 트럭 기사의 모습으로부터 사슴을 치는 게 아니라 구하는 새로운 시도가 마침내 일어났음을, 그들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와 함께 주어진다. 타자에 대한 현상학적 그리고 윤리적 체험은 세 번째 시도로서, 근본적인 인간의 윤리적 차원으로의 소급이다.

    이는 제목이 전제하는바, 인물들에 경계를 재설정하는 전도된 차원에서 가능해진다. 그리고 별똥별처럼 쓰레기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스펙터클의 대미가 장식된다. 지구를 향한 부조리하고도 아름다운 두 개의 시점이 거기 용해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지구의 다른 어디를 향하는가. 그곳은 쓰레기가 향하는 우주이지 않을까.

     

    김민관 편집장

     

    2026.07.09 ~ 2026.07.12 목~금요일 20:00 토요일 15:00, 20:00 일요일 15:00

    아르코꿈밭극장

     

    출연진 및 제작진 소개

    출연 

    이세영 (히나 역)

    김예은 (치치 역)

    라소영 (다듬이 벌레 역)

     

    만든 사람들

    이은채 (작가)

    이해인 (연출)

    김예슬 (미술 총괄)

    정유석 (조명 디자인)

    공한식 (음향/사운드 디자인)

    박준희 (조연출)

     

    제8회 페미니즘연극제 / 힛 더 디어 (Hit the Deer)

    극작 이은채

    연출 이해인

    조연출/음향OP 박준희

    출연 김예은 라소영 이세영

    미술총괄 김예슬

    조명 디자인 정유석

    음악/사운드 디자인 공한식

    조명OP 양대은

    기록 영상 더즐더즐 필름

    제작 이은채

    주최/주관 페미니즘연극제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예매 NOL 티켓,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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