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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무용단, 〈젤리디너〉(안무 이재영): 자본주의의 학습 기계 혹은 자본주의적 상상계의 욕망!?REVIEW/Dance 2026. 8. 17. 20:26
예기할 수 없는 선물의 쾌락

국립현대무용단, 〈젤리디너〉(안무 이재영)ⓒAiden hwang[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 〈젤리디너〉는 화려한 색감의 전면과 상수 가의 핀볼 게임 세트로 구성된 무대―상수의 핀볼 기계의 핀들 안쪽에 각종 배관들이 그려진 그래픽 패널 막, 그리고 하수의 진짜 핀볼 기계들이 있다.―로부터 연속된 프로세스로 점철되는 포드 시스템의 메커니즘을 추출, 연장해 낸다. 일종의 틀 안에서의 도미노 게임과도 같은, 핀볼 기구 안의 자동성과 연속성이 타동적 차원의 노동으로 연장되는 것인데, 이는 최면에 가까운 그 자동성의 움직임이 사물이 아닌 존재의 차원으로 거듭날 때 진정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곧 일종의 핀볼 기계의 공이 되는, 그리고 동시에 그 공을 따라가는 시선의 최면성 자체를 체현하는 동시적 작용은, 컨베이어벨트 노동의 관성적 반복 행위로서 균열 없이, 문제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때 끝없는 반복성을 기약하는 그 존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계속된 노동의 복무에 투여되게 하는 어떤 최면적 상태의 노동 행위는, 소진 자체를 소거하는 듯 보이는데, 이는 상품의 물신화와 컨베이어벨트에 묶인 노동자의 형상이 기묘하게 절합된, 그러니까 상품에 대한 쾌락이 그것의 생산 자체에서 기분출되는 어떤 기이한 상태 자체를 묘사한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 기계에 대한 학습과 열망을 미리 맛보는 것과 같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순수 긍정 효과로서 어떤 쾌락, 그러니까 일종의 부정성의 큰 범주에 속할 수 있을 비판성을 차단한 결과로서 그것이 주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젤리 공장은 젤리 상품 포장의 그래픽을 연장한 것에 가까우며, 실제 젤리 자체는 스마일 표시가 그려진 노란 풍선으로 갈음되며, 실제 생산품은 운동화 상자 안의 작은 볼 풀 공들이다. 이 공들은 거의 어떤 무게를 지니지 않는 대신, 풍선 내부의 공기 밀도로부터 생성된 그 표면의 탄력을 대신 거기에 기입하면서 젤리의 질감을 일부 구현한다.
그럼에도 이 젤리-공은 먹는 것에 대한 적절한 환유 대상은 아닌데―곧 어떤 먹음직한 대상은 아닌데―, 그것의 양적 무한함과 그 가벼움의 자유로운 발산과 표현의 역량이 지정되는 기능으로부터 오히려 동글동글한 ‘똥’과의 관련성이 짙어진다―젤리는 보통 기다랗다(그것은 늘어나는 성질을 지향한다.). 공연의 대다수 관객층인 어린아이의 연령대는 똥과 오줌을 분별할 수 있는 나이인 한편, 그것이 무의식의 기저로 가라앉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금제의 차원을 비집고 전도되는 현상은 여전한 강도 높은 쾌일 수 있다.
곧 후반 그 공을 무대에서 바깥으로 보내고 또 그 반대의 순서가 오갈 때, 그리하여 일종의 운동회 같은 공 맞히기의 각축전이 축제처럼 펼쳐질 때에서처럼 그것은 기본적으로 배설의 쾌감을 가정하며―이는 공교롭지만 근래의 정록이 안무가의 〈개꿈〉을 떠올리게 하는데, 공과 똥의 환유적 계열은 역시 꿈의 세계 안에서 완성된다.―, 또한 일종의 ‘돈’에 대한 강박의 메타포이기도 한 그 정체는 ‘상품’으로서 자본주의적 물신 숭배의 차원으로 수렴하게 된다.
내면화된 꿈의 공장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 생산 공정은 사실상 외부를 향하기보다 내부의 유희 안에서 되먹임될 뿐인 것이기도 한데, 곧 상품을 외부로 판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부의 상품‘적’ 컬렉션을 위해 공장의 공정 자체를 의태하는 것이 더 적확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일괄적으로, 상품을 생산하기보다 단지 포장하기에 여념이 없는데, 그것은 사물을 상품으로 만드는 결정적 과정이며, 실은 어떤 것도 바뀐 것이 없음 자체를 드러낼 뿐이다.
자본주의를 미리 학습하는 차원에서 〈젤리디너〉는 자본주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일종의 신화로 둔다. 그렇다면 〈젤리디너〉의 시도는 이전의 신화가 더는 불가능한 시대로부터 찾아내는 궁여지책의 대안 같은 것일까. 젤리는 아이들에게 친숙하고도 ‘자연적’인 (자연을 대체하는) 무엇일 수 있다. 처음 아이들은 상수 가의 핀볼 형태의 자판기를 작동시키다 고장이 내는 실수를 범한다. 여기서 이것이 궁극적이거나 결정적인 잘못이 되며 그에 대한 죄의식을 발동시킬 어떤 초자아적 존재는 따로 있지 않다. 이곳은 곧 ‘꿈의 왕국’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율적이고도 자유롭게 이 닫힌 시스템 내에서 고통받거나 억압받지 않으며―물론 이러한 행위의 자율성이 이곳 자체의 폐쇄적 차원을 은폐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실험과 시험의 역량을 무한하게 펼칠 수 있게 된다. 일종의 대안적 학교로서 집단생활을 하며, 함께 기상나팔 같은 소리에 깨어나고, 함께 잠들며, 일어나자마자 힘차게 노동을 실시한다. 실은 핀볼 기계는 포드 시스템보다는 루브 골드버그 장치의 완구 되기의 버전에 더 가까운 것이 되는 것일 수 있다.
이때 꾸물거리지 않고 곧바로 일에 투입되는 것, 일에 대한 ‘당위성’은, 곧 어른들의 현실에 대한 재현적인 것임에도 그것이 자발성을 띤 것으로 곧바로 인계되는 것은, 더 구체적으로는 마치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그 잠결의 여운이 일로써 사그라지지 않고 유지된다는 혼동을 주는 것은, 오직 자율성의 신화와 직결된 쾌의 기조라는 전제 이외의 차원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앞서 전면 무대 막이 2차원의 그래픽으로써 3차원의 동화 같은 현실을 핍진하게 구현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곳은 임시적이지만, 어떤 입구와 출구를 정확히 기약할 수 없는 자족적인 동시에 폐쇄적인 공간이 된다―그리고 그 개방성은 그 문이 아니라 그 바깥, 곧 객석과 무대가 서로를 마주하는 차원에서만 현상된다.
상수 가의 자판기 옆으로, 그러니까 무대 더 안쪽으로 롤이 말려 있는 형식으로써 구현한, 위아래로 위치하며 그사이의 작은 틈을 둔 롤 프레스가 있는데, 이로써 그 안의 사람이 말려 들어가서 바싹 눌려 너덜거리는 등신대가 되는 두 번의 해프닝이 발생한다. 그때마다 하수 전면 막의 문을 열고, 등신대-존재를 집어넣고 밖에서 공기 주입기로써 바람을 집어넣으면 포그와 함께 존재는 원상 복구되어 튀어나온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적 상상력은 이곳이 부상과 상해의 위협을 갖는 곳이 아니라, 일시적인 변용을 겪을 수는 있으나 다시 마법적 치유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라는 신화를 만든다.
자본주의에 대한 학습!?

〈젤리디너〉는 복잡다단한 그래픽 이미지와 구조물 등으로 그것을 즉각 해독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그것이 가진 세부와 치밀함, 그리고 구조성은 노동의 차원으로 연장되므로, 현실의 행위 속에서 일정 부분 해소될 수도 있지만, 실은 이념적으로 그것이 확장된 결과와 같다. 그리고 거꾸로 그 행위를 사전에 예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회로도 같은 세계 내 종속됨은 결코 행복한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데, 그 같은 곤궁을 어쩌면 무난하지는 않지만 해방시키는 건 공이다.
또한 말랑한 공은 던지기 전까지 손안에 머물거나 해서 안전감을 주는 오브제로 기능할 수도 있다. 반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태업, 그리고 자극적인 공격의 차원으로서보다는 세계의 교환, 막 자체가 주는 모호한 경계를 깨뜨리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곧 세계와의 엮임인데, 공을 상자에 집어넣는 엄정한 절차와 그것이 상응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질서에 대한 충동, 상품화의 강박적 여정은 그것의 순식간의 와해를 유머로 승화시키는 이 지점과 조응된다. 그런데 이 무질서의 순간은 실패가 아닌, 잠깐의 지연으로 다시 통합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공은 무대 위에 도달하거나 그렇지 않으며, 결국 이 세계 내에 고스란히 보존된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그런데 이 상품은 끈적거리는 촉각과 촉감을 수여하지는 않는다. 포장은 깔끔한 분리이며, 균열이나 뒤섞임 없는 전달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젤리는 침과 뒤섞이면서 강력한 향과 식감을 선사한다. 제목 그대로, 가령 젤리로 이뤄진 식사의 차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분간할 수 없는 동등한 차원의 공장 노동자의 공정이 아니라, 개별자들의 취미와 소통, 여유로운 시간이 필요한 듯 보인다.
〈젤리디너〉는 숨가쁜 여정의 세계를 보여주는데, 그것이 갖는 강도는 모험이 아닌 강박적 차원의 장소와 사물에 고착됨으로써 담보된다. 어쩌면 상상계적 풍경은 끝나지 않는 풍요로운 물질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것은 기능적 차원의 대상으로 사물을 일원화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날 뿐이며, 기시스템화된 장치에의 종속을 통해, 또는 시스템의 의태를 통해 그럴 뿐이다.
우연과 여백, 구체성과 추상성, 다성성의 차원을 담보한 세계의 양식을 매개 불가능성을 통해 전달하는 것, 서사나 설명과 다른 감각과 경험의 차원으로 이전하는 것, 아마도 어린아이들이 세계와 접면하고 그것을 체화하고 또 친연해지면서 그것과 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마도 〈젤리디너〉는 이 젤리가 가진 중독과 매혹의 차원을 경험 이전에 상품 자체라는 정의로 환원코자 하는 것으로 보이다.
김민관 편집장
2026-05-16(토) ~ 2026-05-24(일) 화 3PM / 금 3PM·7:30PM / 수,목, 토,일 11AM·3PM
자유소극장
안무 이재영
드라마투르그 권지현출연
김경민
김소연
이우빈
정철인
정혜지
작곡·연주 채석진
시노그래퍼 김종석
무대감독 안지형
조명디자인 이정윤
음향디자인 정새롬
의상디자인 임선열
협력프로듀서 조하나'REVIEW > Da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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