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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현, 〈싱크 디 싱크〉: 언어라는 신체성, 그리고 신체성으로서 언어REVIEW/Dance 2026. 8. 2. 17:32
언어라는 절대성

〈싱크 디 싱크〉는 언어를 집요하고도 세밀하게 세공해 언어 바깥으로 향하는 시도로서, 이는 둘 혹은 셋의 (불)협화음으로써 기입되는데, 실재는 언어를 다양한 인식의 식역 장치로 거름으로써 언어의 경계를 흐트러트리는 지점에서, 하지만 그것이 언어의 파편을 결코 잃어버리지는 않는 어떤 지점에서, 또는 언어의 잔여 자체―잔여가 언어적인 무엇―로서 주어지는 지점에서, 곧 언어가 독특해지는, 기괴하거나 우스꽝스러워지면서 주어지는 무엇이다.
언어는 주요한 매체일 뿐만 아니라, 절대적이다. 곧 신체가 아니라 언어가 절대적(인 매체)이다. 언어가 신체에가 아니라 반대로 신체가 언어에 기생한다. 물론 언어 자체가 국소 차원으로 분절되어 신체로 환원되는 의미 상실의 예외적 지점도 분명 있다. 가령 침을 뱉듯 음절을 뱉어내거나(음절을 침으로 환유하는) 상대의 입술을 빨아당기며 음절을 흡착시키는 동작(음절을 입술로 환유하는)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언어는 여전히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 그 실재 자체를 가리키려는 시도 자체로서 언어는 먼저 주어진다. 언어는 먼저 있고 환원을 추동한다. 때로 실재는 언어 이후에 몸짓들로 그 언어를 보족하면서 갈음된다. 그런데 표현은 그 실재로서 언어를 강박적으로 좇아가면서 그것들을 국소화, 분절화한다. 그것은 의미를 토막 내면서 그 의미가 가리키는 대상의 자리를 역(설적)으로 점유함으로써 의미를 진정 완성시킨다.
먼저 하나의 신체가 있다. 그리고 외부가 있다. 외부는 일상의 식역에서 감지되는 낌새와 같은 것이다. 반면, 서로에 대한 작은 기척은 (절대적일 수 있지만) 관계의 차원으로 확장되는 건 아니다. 서로를 못 본 척한다, 또는 서로를 공간의 한 점으로 둔다. 서로는 서로에게 무심하고 무신경하다. 관계는 앞선 진득한 입맞춤에서처럼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차원에서만 직접적이다. 그것은 언어가 물화되는 지점과 신체가 사물이 되는 지점을 맞물림으로써 그 둘이 등치되는 것임을 메시지로 수여하는데, 또한 공식화하는데, 이는 언어를 거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지점이다.
언어의 바깥

언어의 오류가 커뮤니케이션의 극대화된/극단화된 오작동으로 연장되는 이 상태/사태는, 언어의 바깥이 있는 게 아니라, 언어가 결코 소거될 수 없는, 단지 언어‘의’ 바깥일 뿐인 세계의 양식을 지시하는데, 그것은 언어의 교착이 신체의 교착이며, 관계의 실패 이전에 언어의 실패가 있음을 말하는 데 그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전제를 가져다주는데, 곧 신체 자체가 언어로써 일부 기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체는 언어를 내는 공명 기관일 뿐인 것이 아니라, 아니 결코 그것일 수만은 없을 뿐인 어떤 것이다.
또한 언어로써 관계의 차원이 비교적 명확하고도 투명하게 발생한다고 믿어지지만, 결국 언어가 의미화되기는커녕 언어를 빠져나가는 신체라는 잔여가 언어와 공진하고 있음만이 의미되지 않는가. 아마도 언어가 실재화되는 이 지점은 〈싱크 디 싱크〉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불일치, 더 정확히는 ‘과도한’ 일치는 언어가 끝나는 지점에서 신체가, 관계가 시작되는 지점을 가리킨다. 언어가 고착되는 지점에서 신체는 결착된다―그 반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또 다른 의미가 발생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무엇이 싱크이고 디싱크인 것인가. 언어와 신체가 불능에 빠지는 이 사태는 신체 간의 교착 혹은 결착, 언어 간의 교착 혹은 결착이 아니라 신체와 언어의 진정한 교착 혹은 결착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리고 신체의 미소한 것들, 단어라는 잔해물, 상대의 함입, 섹스의 어느 단계가 그에 이어 가설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언어가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언어가 식역의 틈에 끼어 있는 상태와 같다.
이는 타동적인 언어-신체의 양상을 가시화한다. 그 외에도 모두는 주도적이지만, 일종의 화음 기계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차원에서 그러하며, 이러한 불균질한 명확한, 공정한 비매끄러운 조합은 중심된 주체의 자리를 파지한다. 이러한 조합의 양태는 2025년에 이은 재연에서 새롭게 도입한 트리오가 결코 듀엣을 상회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하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는 듯 보이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셋의 식별이 아니라 둘의 식별이 더 판명할 것이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더 밀도 있을 것이라는 것.
2와 3의 문제

강도의 문제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일, 그리고 분배의 차원이 아니라 공진의 차원에서 갈음될 이 화음은 의도치 않게 식별의 문제를 낳게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3으로 진정 약분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곧 A와 A 아닌 것, A의 변용태만이 A의 기준에서 쉬이 분류되며, 선형적 구조 안에서 새로운 3을 형상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결여되거나 이격되어 보인다. 입구를 기준으로 좌측과 우측에 일직선으로 각각 앉은 최승윤과 정나원이 가깝다면, 정나원과 거의 일직선으로 더 멀어지며 최승윤과 사선으로 대응하여 앉은 황수현의 양태는 대개 그렇다.
가령 정나원과 황수현이 말을 멈출 때, 동시에 입을 맞출 때 비켜 선 최승윤의 몸짓은 공백 자체로‘만’ 대응한다. 황수현이 정나원을 비켜 나서 최승윤의 어깨와 등에 밀착해 기대 이동할 때 정나원은 다시 부재로 현상한다. 앞선 행위는 기억 상실의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셋이 다시 엮여 지날 때 그것의 강박적인 정합의 차원은 전혀 합목적적이지 않다. 3은 처음부터 1의 빈 칸을 구성한다. 2의 충분함을 3의 결여로써 대치해야 한다. 이는 처음부터 3이 아니었던 것도 크다.
비역사적인 가정법을 투여해서, 거꾸로 3의 구조로부터 하나를 덜어내는 방식으로 나아갔다면, 그것은 밀도를 강도로써 증폭시켜야 하는 게 난제였을 수 있다. 충분한 것에 무언가를 더하는 방식[2+1]과 빼는 방식[3-1], 어떤 것이 더 적절한가. 아니 충분한가. 만약 듀엣이 아니었던 최승윤과 정나원을 결코 듀엣일 수 없는 방식이 아니라, 또 다른 듀엣의 차원을 배가하는 것으로 가져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3이 내부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1+1의 또 다른 양상을 구성하는 가운데, 그 안을 바라봤다면, 그것은 구조의 차원을 완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싱크 디 싱크〉는 황수현의 말대로 그가 작품에 투여되느냐 아니냐의 대전제에서, 그가 내속함으로써 바깥의 “아웃사이드 아이”를 요청하게 되는데, 이는 스태프 공간으로 전유되는 2층 난간에 있는 손나예와 가상의 4각형의 틀을 구성하는 것으로 연장된다.
필터링

〈싱크 디 싱크〉는 그럼에도 철저히 내속적-경계적이다. 철저히 외부를 상정한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그어진다. 관객의 ‘바깥’에는 사물이 있다. 반대로 그 안의 존재들에게 저 너머가 상정된다. 그리고 저 너머는 일상에서 온다. 이곳으로부터 저곳이 도입된다. 신체는 무언가를 감지한다. 그것은 일상의 비틀림이나 균열이다.
처음에는 일상에서 저 너머를 감지하다가 점차 일상이 외부의 차원으로 변용됨에 따라 기이해지고 사실 숭고해진다. 의미를 지정할 수 있는, 일종의 첫 번째 말은 “기다리고 있나”(최승윤), 그리고 다음으로 “생각~중인가”(정나원)는, 상호 간에 대화와 반응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
전자에서 후자로 건너오는 가운데 가장 긴 사이가 주어진다. 여기서 의미에 대한 발화는 발화에 대한 의미로 전화된다. 그리고 그 의미를 발화하는 신체 자체를 외부(적 사물)로서 현상한다. 의미는 사물화된다. 의미가 생겨나는 지점이 무언가 감지되는 저 너머를 인계하는 (공통의) 순간인 것이라면, 그리고 이것이 통상의 말의 효과라면, 그것을 가시화하는 게 예외적으로 이 말을 하는 존재라(는 것 너머를 가리킬 수 없다)는 사실은 무언가 결정적인 차원으로 전화되는 듯 보인다.
말은 그것을 지연시키고 필터링하는 것 속에서 굴절된다. 의미(를 담지하는 신체)보다 의미를 파지하는 신체의 특이성에 집중한다. 이 신체는 언어와 온전하게 조응되는 대신, 언어라는 이물질을 입 안에서 늘어뜨리고 굴리는 유희에 종속된다. 곧 의미를 외부로서 도입하는 게 아니라, 언어와 신체의 틈을 도입하며, 신체는 언어적인 것을 외부적인 것으로 체현한다. 언어는 신체적인 것이다. 그리고 신체는 사물적인 무엇이다. 그러니까 저 너머의 의미는 이곳에, 이 신체의 내재적인 틈에 이미 도착해 있다.
공동의 차원이 아니라 공통의 차원이 단지 개별적으로 수렴될 뿐이다. 말은 서로를 향하지 않고, 각자의 사물(적 신체)성 안에 고인다. 또는 미소하게 뚫린 입술 사이를 훝고 뚫고 비집고 나간다. 그러니까 의미는 사물로 먼저/동시에 번역된다. 의미는 사후적으로 그 사물에 입혀지는 것으로 전도된다. 이 전도의 차원을 위해 의미-사물이 담금질된다. 〈싱크 디 싱크〉는 이 (비)의미-사물의 차원에 대한 음악적 운용의 과정이다.
리토르넬로

그것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그 음악적 개념화, 리토르넬로와 같다. 소리는, 더 정확히 화음은 언어의 탄생 전에, 곧 언어보다 앞서 존재하며, 언어의 이후, 곧 언어의 승화된 경계를 이루며, 손쉽게 언어 너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의미에 반응하지 않더라도 소리가 이루는 물리적 권역, ‘영토’ 안에서 신체는 합성될 수 있다, 그 소리가 합성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이는 근본적인 것이기보다 본능적인 무엇이다.
그로부터 복잡계, ‘카오스’의 어떤 상황이 도래한다. 낌새는 과도해진다. 언어는 초과된다. 실재가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것은 이해 불가능한 것이며, 기괴한 것이고, 존재들에게는 긴급 사태로서 다가온다―존재들이 그 사태를 체현한다.
가령 “갑자기/튀어나오는/무더기들이/끌어당겨/거부할 수/없는/형체들이/산발적으로/솟구치는/덩어리들이…”[A]와 같이 괴이한 것들, 재현 불가능한 것들의 침입으로 포화되거나 “끈적하게/달라붙는/진드기들이/무더기로/떨어지는/먼지가루가/무방비로/어쩔 수 없이/뿜어 나오는/소리들이…”[B]와 같이 일상은 초과되는 상태로 주어진다.
한 손바닥에 붙인 테이프 안의 글자들을 보고 읽는 이 중반부의 과정에서 두 개의 구문은 결국 하나의 손바닥 안 문장, 곧 하나의 단락임에도 두 개의 다른 구문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연속해서 읽는 방식이 아니라, A와 B를 층차를 두고 재시작하는, 끼어드는 방식을 통해 크게 두 개의 분기되는 단위로서 제시됨이, 상대방의 반절의 몫을 비워두는 방식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때 언어는 상대 언어와의 동조됨에 틈을 두는 방식으로 발화된다.
어떤 형태와 기초를 가정하며 그것을 따르지만, 집단적 차원에서의 결부는 철저히 무심하거나 무신경한 차원에서 이뤄진다. 그러니까 의미의 단위는 다시 한번 음악의 단위 안에서 기입된다. ‘싱크 디 싱크’, 곧 제목상으로는 상대와의 동조와 어긋남을 연속 혹은 중첩된 상태로 둠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마치 디싱크가 싱크로 되돌아오는, 혼동되는 어떤 순간을 가정하는 듯 보인다. 실제, 분절의 기입은 어긋남을 (다시) 어긋냄으로써 동조를 순간적으로 부정하면서 동조로 되돌아오는 것으로 보인다.
소리-언어의 변화되는 경로

제목은 언어유희이지만, 반복이 곧 차이 자체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실재는 신비하며 기괴한 것일까. 극적인 결정은, 클라이맥스는, 승화는 결정적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구조적 차원에서 정합됨을 수여하는 것일까. 소리 구조체로서 공동의 영토와 의미 구조체로서 공통의 영역은 어떻게 병치될 수 있는 것일까. 의미가 경합할 때 곧 덜그럭거리며 겨우 절합되는 몸이 정치성을 띤다면, 소리가 조화될 때 기능적인 차원으로 전락하는 몸은 서사적 숭고의 양식으로 쉬이 인지된다.
그런데 그것은 설명 불가능한 실재가 아니라, 설명 불가능한 실재에 대한 재현 아닐까. 그것은 도래하는 실재를 부정적으로/재현적으로 초과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실재는 언어가 신체와 닿는 지점에서 생기발랄하게, 또는 거칠게 현상된다. 실재는 의미가 파기되는 순간이 아니라, 의미가 경계화되는 지점에서 그 의미라는 사물과 함께 이미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막대한 강도의 작업에서 유일한/뜻밖의 구멍 같은 것일까.
(미세한 화음들의 배경음[0] 그리고) 입술(의 비틀림)에서 오는 연극적 문장들[1], 소리를 길게 끌며 증폭시켜 마치 비디오테이프를 감속 재생 하는 방식 안에 단어들을 담구다 마침내 타액-사물로 전화하는, 기본적으로 겹쳐 읽기의 방식 안에서의 분자 단위의 파편 구문들[2], 그리고 입맞춤[2-1], (단속적 화음들 그리고 단속적 스피커로부터 오는 사운드의 교차[0]).
그리고 처음과 같이 그러나 처음보다 명확해진 식별되는 단어들의 끝말잇기 같은 나열[3], 그리고 손바닥에 심어진 외부를 마주하며 (불)협화음을 이루는 시적 문장들[4], (다시 잘게 분화된 조각들의 연결 혹은 벌레떼의 귀환 혹은 음절 하나하나의 떨림 그리고 점점 더 괴생명체의 울음, 그리고 다시 화음[0] 그리고)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켜서 더 미소해진 글자들의 문장들을 이번에는 한데 읽어나가는, 동조되는, “틀어짐”으로 설명되는, 점멸하는 떨림의 음절들이 이루는, 강세 없는 기계적 구성의, 여러 변주의 순서를 거치는 문장들[5] (초현실적이고도 환각적인 짧은 기계음[0])
저당잡히는 신체

거의 대부분의 텍스트 스코어가 기입된 작업 노트를 참조하면, 이 마지막 문장들에는 부가적인 선분과 기호 표시가 덧대어진다. 이는 기존의 문장들을 쉬이 스코어로 변환하는 방식으로, “자동적으로 수월하고 매끄러움에 왜 끌리는 걸까”라는 문장부터 음절을 외는 호흡의 단위는 빨라지고 의미 단위를 구성하는 데에도 용이해진다. 그러다 더 빨라지면서 다시 파악이 더 불가능한 사태에 이른다.
휴대폰을 지시하는 이 같은 인터랙티브한 매체의 간이성과 그에 따른 높은 의존도 등이 감각을 전화시키고 감각의 정도를 수축시키고 오염시킨다는 전제로부터 미래는 불길하고도 불안한 무엇의 시점으로 주어지는 듯하다. 첫 번째 문장, “이 온도는 내 온도일까 기계가 꺼진 온도일까”는 나와 합성된 기계, 기계로부터 분리지을 수 없는 나의 상태를 극단적으로 가리킨다. 나의 모호함은 무기력한 나의 화두이다.
숭고는 바로 이러한 변형된 감각으로 인해 달라진 존재의 양상을 체현하고 동시에 거기서 던지는 질문이 구분 불가능한 주체의 관점을 지지해낼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대한 감각을 질문의 형식 안에 용해시킨다. “감각이 무뎌지면 편해지는 건가 아니면 마비되는 건가 사라지는 건가 아니면 정돈된 건가” 이른바 답을 내리는 것이 나를, 현재를 갱신하지 못하는 질문의 연속이다. 이때 퍼포머들은 이 언어에 부속된, 저당잡힌 영매로 순전하게 분한다.
무엇을 보고 읽는 것은 그것을 물질로, 의미 단위가 아닌 글자로 식별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텍스트는 의미 단위를 형성하는 대신에, 그것들을 스코어로 이행하는 신체성의 규율을, 그 예속된 신체성을 그 텍스트의 의미로서 끼워 넣는다. 곧 볼모의 나라는 상태로서 텍스트를 이행시킨다.
이 작업 이후에 출현했으며, 어쩌면 그 연장선상에서 되짚어볼 수 있는 황수현의 근래 작업 〈세계〉는 이 소위 스마트폰을 전격화하며 스마트폰과 신체의 동조를 기본적인 전제 조건으로 둔다1.
구원의 감각, 아니 감각의 구원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싱크 디 싱크〉를 경유해서야 〈세계〉를 들여다보고 또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거꾸로 〈싱크〉를 경유해야만 〈싱크 디 싱크〉의 시간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를 점쳐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싱크 디 싱크〉가 현재성에 기초해 미래를 성찰해 낸다면, 〈세계〉는 좀 더 종교적이고 근원적인 차원의 신체를, 시간을, 그리고 공동체를, 나아가 사물화된 실재의 시간이 주는 간격을, 시차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
“피부가 점점 무감각해지면 그게 미래일까 지금 이 감각이 단단해지면 미래일까 말랑해지면 미래일까 아직인가” 미래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미래라는 시간을 감각으로 식별,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체는 이러한 감각에 대한 기입을 유예한다. 대신 그것은 몸에 대한, 안무에 대한 이념을 기입한다.
〈싱크 디 싱크〉는 표층적으로는 개별 퍼포머들의 (불협)화음과 동조, 간극을 통해 음성적 차원의 여러 스코어를 수행하지만, 이는 동시대 기계 문명과의 싱크를 맞추는 몸, 싱크를 맞추지만 잔여로 남는 몸이라는 주제를 표현해 내기 위한 일환이다.
“지금보다 자동적으로 수월하고 매끄러워지면”이라는 가정은 “무엇이 지워지나” 또는 “마찰은 끝나나”라는 두 개의 물음으로 분화된다. 이러한 매끄러움의 세계를 이미지로서 구현한 작업으로 장서영의 〈스틸 무빙〉을 상기할 수 있겠는데, 이는 자율 자동차의 유선형 차체에 비치는 반향으로 체현되는 매끄러운 세계가 불균질한 세계에 대한 장막이 되는 동시에 (해당 작품을 포함한 전시 전체에서) 그 안의 개체가 소유할 평안의 의식을 담지하는 하나의 결정적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2.
이때 황수현은 몸의 감각이 어떻게 분기하고 또한 침묵하게 되는지, 어떤 잔여를 갖게 되는지, 성찰의 여지로서 그것을 재구성할 수 있을지를 사유한다. 마지막으로 비말처럼 터져 나오는 음절들은 비언어적이며 의미 단위를 재고하기 어렵다.
한편으로 중간에 나오는, 손바닥에 적힌 문장이 주는 의미 단위에서의 실재의 공포는 SF적 공포의 이미지에 근접해 있다. 그것의 초과된 언어와 기괴한 외양의 비현실적 조건은, 순전한 소리, 또는 소리 자체에 가까워질 때 비로소 체현되며 승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결국 다시 불균질한, 정위되지 않는 차원에서 기폭 장치를 쉴새 없이 누르는 듯한 강세로써 이행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비인간 존재의 열화된/무의미한 의미의 단위와 함께 승화 역시 거부하며, 비틀린 감각의 전이를 통해, 또한 말단의 감각으로부터 신체를 재활성화하며 어떤 특이성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니까 (불협)화음은 결국 몸의 소리 경로 의존성과 매체성, 그리고 표현의 다양성을 재고하려는 실험일 뿐만 아니라, 무뎌진 감각 혹은 감각의 무뎌짐을 상회하려는 응급 장치의 기능성을 또한 가져간다.
김민관 편집장
- 7월 16일(목): 최승윤, 황수현
- 7월 17일(금): 정나원, 황수현
- 7월 18일(토): 정나원, 최승윤, 황수현
- 7월 19일(일): 정나원, 최승윤, 황수현
2026.7.16-19 7:30pm
TINC (This is Not A Church)
콘셉트, 안무―황수현
리서치―정나원, 최승윤, 황수현사운드 디자이너: 홍초선
조명 디자이너: 공연화
영상: 백종관
아웃사이드 아이: 손나예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박지선
기획, 행정: 송미선
무대감독: 김세현
그래픽 디자이너: 홍소이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2026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다년) 선정 프로젝트- 1.〈세계〉는 스마트폰이 보여주는 소통의 무한한 가능성과 근본적인 언어의 불가능성을 횡단한다. 그것은 ‘미래’가 아닌, 시간의 엄청난 격차를 상정하며, 다소 세계에 대한 모호한 시간대를 상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조: https://www.artscene.co.kr/2095. [본문으로]
- 2. “…차창 밖에 비치는 세계의 풍경, 곧 “외부의 표상들”은 그것이 단순히 분리되어야 할 세계를 흡수하는 동시에 차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인데, 곧 화면은 이 자동차의 차체로 완전히 잠식, 또는 침잠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조: https://www.artscene.co.kr/203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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