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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영, 〈교차〉: 시차적 종합으로써 순간에 도달하기
    REVIEW/Dance 2026. 8. 29. 21:35

    결정적 장면

     

    김원영, 〈교차〉©옥상훈[사진 제공=크리틱스초이스댄스페스티벌 ](이하 상동).

    〈교차〉는 공통된 세계의 한 속성으로서 시간이라는 토대를 의문에 붙이며, 개별적인 관점의 시차로써 재분할, 재접지하여 존재의 차이를 현상하고자 한다. 이는 일종의 공통 감각의 인지적 차원을 재정초하려는 움직임이며, 데카르트적 개념의 인계에 대한 자명성과 보편성을 의심에 붙이는 현상학적 의제와 맞물린다.

     

    ‘교차’는 존재(들) 간의 교차로써 표현되며, 그것은 후반의 하나의 시간을 늘어뜨려 놓은 채 느리게 재생하는 표현 양태에서와 같이, 하나의 시간이 여러 순간들의 이행적 차원임을 하나의 진리로서 내세우는 것과 같다. 이는 의도했던 바와는 다른 효과를 불러오는 셈이다.

    반면 그 직전까지는 한 쌍의 남녀(김원영, 추세령)가 정지로써 증폭된 순간에 어떤 에너지의 효과가 미치고 있었던 것에서 시작해, 둘이 분기되면서 각자의 관점이 각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걸 보여주는 것에 이를 때까지는 어느 정도 온전하게 재생되었던 것이다.

     

    곧 줄줄이 연결되어 하나의 동작을 존재들의 일정한 나열로 갈음하는 건 물리적 강도의 차원에 대한 설명적 재현의 차원에 전적으로 충실한 것이 되는 셈인데, 그것은 각 존재를 오히려 평범한 요소들로 수렴시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움직임 자체에서 강도가 빠지는 것이다. 여기서 변형되는 신체성을 제로로 갈음하며 평범성을 보편성으로 가져갈 때, 오히려 이념의 특화를 위한 신체와 이념이 만드는 특이성의 신체가 발현되는 방식은 불일치하게 된다.

     

    그러니까 〈교차〉는 구현하고자 하는 이념에 대한 움직임 그 자체를 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 집단적 이행의 방식은 〈교차〉의 주요한 움직임을 이루는데, 이는 모여서 느리게 걸어가는 것으로써 처음 등장부터 적용된다. 여기서 일종의 방향성이 중요한데, 이른바 사선으로 튼 집단의 일정한 방향으로의 시선은 하나의 이념을 공유한 공동체(의 체계)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투박하게 테이블과 의자가 무대에 놓여 있는데, 이는 정돈된 움직임의 질서로 연장된다.

     

    구심의 빛

     

    집단의 힘을 구가하지만, 이는 원시적인 차원의 열정과 힘으로 전이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넥타이를 맨 반절 정도의 무용수들에처럼 정돈되고 나아가 합리적인 차원에서의 움직임을 가져가는 것으로 국한된다. 테이블 아래에 조명이 가해지고 거기서 한 명의 존재가 빠져나오고, 그로부터 세계에 대해 실존적 차원에서 편견 없음의 근본적 인식이 가능해지는데, 일 대 다의 구도는 이후에도 반복되는 구조를 가져간다.

     

    테이블 위에 올라간 남자 한 명과 나머지 집체 움직임이 대비를 이루는 것 역시 그렇다. 이 집단의 형상은 구심력을 가진 채 하나에서 연장된 힘을 발휘한다. 횡대로 무대 앞으로 나올 때 집단적 힘은 역시 정향된 구조로서 어떤 하나의 절대적인 힘을 형상화한다. 그리고 위쪽에서 빛이 아래로 꽂혀 있다. 혼자 남은 남자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얼굴을 감싸 쥐는데, 음악에 긴박감이 더해지면서 숨을 거칠게 내쉬다 다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전이되어 간다.

     

    그리고 무대 중앙부에는 문이 하나 가설되어 있는데, 거기로 들어가며, 미스터리한 서사의 틈이 생겨난다. 그것은 무대의 회전 반경에 속하는데, 그 속으로 들어가면서 일상의 집안 풍경이 펼쳐진다. 소파, 스탠드 거울과 행거, 중앙부의 테이블/의자, 스탠드 조명, 그리고 또 다른 소파에는 흰옷을 입은 여자가 책을 보고 있다. 이렇게 일상의 풍경과 시간이 재현되는데, 그것은 다분히 극적이다.

     

    이때 쇼파 위에 둘의 겹쳐짐은 자연스럽게 여자(추세령)가 다리를 들고 남자(김원영)가 거기에 끼어드는 식으로, 분절되어 합성되는데, 이때 부분 동작들을 하나의 순간으로 결정화하면서, 그 이행의 과정에서 증폭된 움직임을, 일종의 춤을 가동시킨다. 그렇지만 이는 인지되는 단위 속에서가 아니라 그 배면에서 잠재적인 것으로, 가상의 것으로 처리된다. 이때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교향곡 5번이 흘러나오며 이를 극적인 것으로 구성한다.

     

    과거의 잔상, 그리고 존재 간의 교차를 향해

     

    반면, 음악에는 소음이 뒤섞이는데, 홀로 남은 남자에게 컨페티가 떨어진다. 그것은 축복의 기호라기보다 일상의 균형이 깨어지는 순간에 가깝다. 이때 문에서 등장하며 일렬로 대형을 이룬 존재들은 순차적으로 하나의 행위를 반복, 변주한다. 가령 여자들의 무리는 책을 뒤로 전달하고 남자들은 스탠드 조명을 치고 가는 식이다. 다시 무대가 회전하고, 남자들은 무대를 달리기 시작한다.

     

    파편적 동작들이 하나의 이행을 구성하는 건 표면적 차원에서의 다양한 존재의 차이 대신에 순간에 정렬되는 차이 자체의 잠재성을 나타낼 것이다. 곧 존재는 이 이념을 위해 동원되고 정렬된다. 그것은 시간을 늘림으로써 배가된 밀도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집단적 차원의 소극적 양상을 충족시킨다. 사람들은 느리게 재생되면서 웃고들 한다. 그것은 기억의 잔상으로 갈음된다.

     

    이 마지막 장면은 현실이 과거가 되는 지점에서, 미래를 향해 손짓한다. “서로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존재들이 겪는 ‘심리적 시차’”(김원영)는 남자와 여자의 공유된 일상에서 포착된다면, “서로 다른 속도로 교차하고 흩어지는 존재들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궤적을 나누며 경험”(김원영)함은 이 일렬의 ‘공동체’의 경로 속에서 발현된다. 결정적으로 여기서 각 ‘존재들’을 주체의 그림자가 아니라 주체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이는 직전의 남자, 일자의 자리에, 실존적 주체의 자리에 그가 위치할 때, 여남은 존재들의 출현은 순간으로 분쇄될 뿐 그 주체의 자리를 공간으로부터 끌어오지 못한다. 다만 순간의 특이성이 특수한 시각적 재생의 차원에서 볼 수 있음으로 바뀌는 것뿐임에 가깝다. 그것이 오로지 특이성의 순간 자체로 바뀌기 위해서는 다른 절차 혹은 시간의 도입이 필요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교차’를 어떤 식으로 주체와 타자의 관계 양상 속에서 (재)도출할 수 있을까.

     

    김민관 편집장

     

    7.29(수) 19:30/7.30(목) 19:30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음악 전수현
    무대감독 서승진
    조명감독 김정화
    출연 추세령 김은이 윤효인 정상화 최재원 김규년 신윤지
    이민규 장인회 양기성 김단아 박준섭 이사랑 김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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