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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경계넘기: 신진순박소영박뽀또 Part.2〉: 내재적인, 그러나 (비)사회적인REVIEW/Theater 2026. 9. 8. 13:36
1997년과 2026년 사이의 횡단

박소영, 〈경계넘기: 신진순박소영박뽀또 Part.2〉©최문선[사진 제공=박소영](이하 상동). 〈경계넘기: 신진순박소영박뽀또 Part.2〉(이하 〈경계넘기〉)는 박소영 한 명의 이야기에서 네 명의 배우를 더해 외연을 확장하는 한편, 세운홀을 전시장의 구조로 활용해 이를 접면하는 배우들의 수행성을 배열하는 것으로써 전 작과의 차이를 구성한다. 전자로부터 개인의 미시사적 계보학을 파고드는 작업의 성격이 오히려 느슨해질 위험을 감안해야 한다면, 후자로부터는 공간의 물리적 차원을 작업에 대한 합목적성으로 녹여내야 하는 과제를 수여받는다.
박소영은 우선 전시장을 서류들을 갈음하는 게시판으로 바꾼다. 전면을 중앙 스크린―다양한 참조 자료가 공연에 병행된다.―과 그 양옆으로 “자의 성과 본의 변경허가 심판청구서”로 도배하고, 우측―상수―의 벽면에는 칠판이, 그 안쪽으로는 각각 모니터, 프린터 등이 올라간 책상 두 개가, 그리고 그 뒤 벽면에는 어머니 성을 다룬 신문 기사들이 있고, 좌측―하수―의 벽면에는 하나의 글이 A4 크기의 종이들, 7x30으로 분할, 재단되어 재연결된다.
이 글은 「부모성(姓) 함께 쓰기 선언」으로, 하단에 적힌 “1997년 3월 9일 / 3.8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13회 한국여성대회에서 / 부모성(姓)함께 쓰기 선언자 일동 대표선언자 이이효재외 170명”과 같이, 공연은 1997년과 전 작이 상연되었던 2026년을 횡단하는데, 이는 페미니즘적 차원이 성(姓)을 경유해 운동성을 띤 역사적 사례를 하나의 사건으로 갈음하며, 공연의 계보를 새롭게 정초한다.
이때 그 역사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인적 차원(의 반문)이 사회적 차원(에서의 비판)으로 나아가는 상징적 차원을 아우르는 건 아니다. 낭독되며 재선언되는 이 글의 성격에서 진정 연장되는 건 배우 넷이 성·본 변경 과정을 겪은 다양한 시민들의 의견을 대독하는 매개자의 지위에 순수하게 머물러 있을 때,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소개할 때 자신의 성 또는 이름과 연결지어 일종의 사회적 표본의 다양성으로 배치될 때이다.
배우의 두 가지 위치성

전자가 배우를 일종의 테크니션으로 취한다면, 후자는 배우를 주체화하며 배우 자체를 메타적으로 지시한다. 배우의 층위는 마지막으로 박소영 개인의 이야기를 렉처 퍼포먼스 안에서 펼쳐놓던 방식에서 자신을 소거할 때, 곧 배우들이 박소영을 매개하기 위해 존재하게 된다. 이때 그것은 전자에 가깝지만, 반대편에서 박소영 스스로에게는 개인의 위치가 사회적 차원과 정합되어야 하는 윤리적 차원의 과제가 요청된다.
그러니까 배우를 취함은 개인의 차원을 물리적으로 용이하게 만들기 위함(뿐만)이 아니라, 그 스스로를 사회적 존재로 객관화하는 지점에서의 외화가 된다. 또 한편으로는 이 매개의 차원이 일종의 대독자의 지위로써 참조되고 인용되는 성격을 취하게 되는 것과 같이, 공연 자체가 자료 텍스트들을 전사하고 반영하는 차원에서 물리적으로 전시를 수행적으로 작동시키는 한편, 상징적으로는 사회학적 현장에서의 발굴로 치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연은 영상으로 소급된 지난 공연에서와 같이 이후 영상으로의 소실점으로서 현재를 위치시킨다. 연작의 명명은 이를 보족한다. 앞선 2026년의 하루―“2026.01.23”―는 두산아트센터 공연 기간의 하루로, 영상 촬영이 있던 날이며, 이날 전체 공연 기록에 대한 영상이 전시에서는 중앙 스크린으로 상영되는 가운데, 처음에 공연으로 일부 연장된다. 곧 공연은 전사로서 등장하며, 이로써 하나의 계보 안에서 현재가 지시된다.
첫 장 “2026”년에서 보이지 않는 인터뷰어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이로 분한 박소영의 영상은, 성·본 변경 신청서 청구가 실패해 온 과정, 그리고 공연 자체를 계속 이어 온 과정 자체에 대한 회의와 물음을 토로하는데, 이는 이후의 과정이 그것을 해소할 하나의 새로운 동력을 찾아나가는 과정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때 가정법원에 도착한 박소영의 자의 성과 본의 변경허가 심판청구서가 재현되는데, 이는 대타자적 지위가 외설적으로 노출된다.
다초점적 세계로

중앙의 기다랗게 정렬된 테이블 일체에 나란히 앉은 네 명의 배우―하수부터 정은순, 류원준, 한지구, 양주현―는 뒤돈 채 하나의 서류를 옆으로 전달하며 차례로 읽어 나간다. 이때 그들은 비가시적인 차원에서 판단의 지위를 가진 법원의 존재들을 반향하는데, 그 안에서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이른 나이에 잃고 어머니와의 오랜 관계성이 삶의 중요한 차원으로 기입되는 박소영의 성 변경에 대한 진정성이 타자성으로서 현전하게 된다.
이후 배우들은 일괄되게 자기 소개를 요청받음으로써 차례로 자기를 진정한 역할로서 투사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는데, 정은순이 다양한 성이 분포하는 자신의 가족과 달리, “파트너”와 향후 낳을 자식의 성에 자신의 성을 붙이는 것에 대한 파트너 가족에 대한 설득이 어려움을 토로한다면, 류원준은 아버지를 따라 “유”에서 “류”로 일괄 바꾼 가족의 일화를 소개하며, 한지구는 본명과 배우명인 각각 한지혜와 한지구 모두를 자신으로 칭한다.
마지막으로, 양주현은 자신이 양씨 자손으로 위치시키는데, 사실상 그것이 자신에게 큰 의미를 수여하지 못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미시적 분포에서 거시사적 관점으로 성의 차원이 확장되는데, 자전적 이야기는 박소영의 예외적 차원의 절박함을 견지하는 대신에, 각자의 일상과 접목되어 평이한 수준으로 감축된다. 이는 성/이름에 특정 사연이 있는 배우를 애초에 고려했거나 창작 과정에서 주제와의 연관성에 기초해 새롭게 끌어온 것일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난점이 생겨나는데, 박소영의 정신(분석)적 차원의 특수성이 실재의 차원에서 호소되고 공연을 추동하는 지점이 그로써 분산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배우의 명목상의 동원을 넘어 각 개인 자체의 어떤 진정함이 공연에 뿌리내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때 그 둘은 연대적 성격보다는 물리적 차원에서 병치되어 연결되는데, 곧 서로가 서로를 경유하는 가운데, 배우는 주체화되며 박소영은 집단적 운동성을 확보하는 지점으로 나아가는 것이 근본적으로 가능한 것인가의 물음에 도착하게 된다.
고착된 사회적 차원에 대해

박소영의 나눔, 곧 박소영에의 매개들이 박소영에 대한 일차적인 매개이자 박소영을 사회적인 차원으로 연장하는 이차적 매개임을 상기해 본다면, 타자를 대독하는 차원에서 비켜나 배우들이 개인적인 것으로 현전함은 수많은 ‘박소영’의 한 예시로서 자리하는 것이면서 박소영 자체를 심화하기보다는 파편적 차원에서 각자의 장을 열어젖히는 데 가깝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시 박소영의 시작적 차원을 예기하는 차원에서 멈춘다.
지난 공연에서 축소된 건 성에 대한 인류학적 차원에서의 의심인데, 반면 더 진작되는 건 사회적 차원이다. 이는 마지막 장면이 그러하듯 또 하나의 텍스트 층위, 바닥에 기입된 민법 제781조 1항부터 6항 중, 1항인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에서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만을 남기고 나머지에 취소선을 긋는 행위―종이 테이프를 붙인다.―가 그것이다.
애초에 뒤집어진 운동장을 반전시켜야만 예외의 수난을, 고군분투를, 지난한 싸움을 소거할 수 있다. 이는 제도적 차원의 안정성과 공고함이 페미니즘을 공식적인 목소리 바깥으로 위치시킴을 부정하고, 또한 그것이 부계 중심의 사회 질서 유지와 어떤 연관성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차원에서 ‘신화’임을 탄로하는 일이 된다.
그러니까 ‘굳이’ 왜 그렇게까지 해서 이름을 바꿔야 되냐라는 효율적 차원에서의 물음은 그것이 그만큼 바꾸기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의문을 은폐하고 소거하는 일이 된다. 여기에는 넘기 힘든 벽이 절감되어 있는데, 곧 성에 대한 제도의 문화에 따른 자의적 성격을 짚는 걸 경유하지 않고 개인‘들’에 초점을 둠으로써, 〈경계넘기〉는 제도의 불(가)능성을 더 강화하는 것이다.
인터페이스로의 매개

한편, 1997년이라는 기원, 곧 성·본 변경이 페미니즘의 운동성과 결합하는 기원적 지점에서 연장, 승화되는 게 아니라, 희미하게 개인의 자율성과 제도적 고착됨에 대한 항의 혹은 반문으로 선회하면서, 성과 이름에 대한 ‘절대적’ 선제성이 개인의 표현적 자율성과 자유를 침범하는 제도적 부정성으로 전이되는 지점에서, 어떤 방해물을 사상할 수 없게 된다.
배우라는 매개의 형식으로부터 박소영은 하나의 예외적 개인‘들’로서 자리 잡는다면, 수행성의 절차로 인도되는 전시라는 형식으로부터 〈경계넘기〉는 배우들이 그리고 작품이 사회에서 가시화되지 않은 언어들을 초대하고 대신 발화해 주는 것임을 하나의 이념으로서 내세우게 된다. 여기서 접지의 형식은 관객을 등진 맞은편의 벽을 마주하며, 그것들은 모두 관객과 벽 사이에 있는 임시적인 중앙 무대에서 산출한 것들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경계는 사회적 인터페이스로서 추후 기능할 수 있게 되는데―공연 후에 다시 공간은 전시장으로 돌아온다.―, 그것을 좁히는 것은 카메라의 매개를 통한 스크린에의 송출이다. 이때 마지막 카메라의 시선은 글자들을 점점 클로즈업하며 거리를 좁히고자 한다는 점에서, 관객의 시선을 대리 체현하게 된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건 공간을 초과하(려)는 소리지름을 통한 말의 전달이다.
“경계를 넘어선다는 마음으로” “당사자들의 말이” “가정법원에 닿도록”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발화”하라는 지시문에 따라, 배우들은 공간 전체에 퍼져 관객을 마주한 채 말들을 옮긴다. 이것은 일견 구자혜 식의 발화 방식1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것은 경계라는 지지체를 회절하는 매체를 고안하려는 시도이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경계넘기〉는 막바지에 이르러 2021~2023년 사이를 역순으로 성·본 변경 신청이 “인용”, “기각”, “각하”, “이송 결정” 등의 통계 수치를 소개하고 칠판에 적기 시작한다. 인용이 절대적으로 많지만, 그 외에 여러 사항 역시 포함된다. 이어 “53년생 신진순”, 곧 박소영의 어머니가 인터뷰이로 등장하는데, 이는 파트 1에 이어, 어머니의 변함 없는 입장을 재확인하는 셈이 된다.
신진순은 “박서방네” “장남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박소영이 자신을 초과하는 의미를 대체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위치성을 부여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애도의 차원을 이 성이 박아두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박소영 스스로에게서도 부정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후 현재의 삶이 더 그에게는 더 중요하며, 그 삶을 진정한 것으로 체현하는 것으로서 성을 변경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아버지의 잔여는 상징적 차원으로 처리될 수 있는 것인가. 또는 그 부재는 더는 어떤 다른 차원으로 전화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이 부분은 모호한 영역으로 남는다. 어쩌면 고착된 사회 제도적 차원에서의 성 자체를 개인적으로 선택하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주는 반동적 정서가 그 모든 걸 간단히 뛰어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티스트 네임을 바꾸는 건 매우 간단하게도 자기 기술로 승인되는 부분이므로 ‘굳이/힘들게도’ 법적 경로를 거쳐 그것을 승인받고자 하는 건 그 결과의 차원을 향하기보다는 억압적 사회적 제도 자체를 파헤치고 재조각하려는 욕망의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연루된다고 보인다.
그것은 계속해서 그것이 만들어진, 시작된 시점으로 소급해 들어가려는 욕망을 낳는다. 곧 어쩌면 자신의 삶의 현재적 기원을 더 뚜렷한, 더 의미가 있는 어머니로부터 재구성하려는 욕망이 거기에 잠재해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것으로서 정치적인 것

그러니까 이 공연은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듯한 외양을 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또는 (중)핵이 아니다. 〈경계넘기〉는 운동성의 차원을 본격적으로 띠면서 예술을 벗어나려 한다거나 예술의 차원에서 개인사에서 확장되어 운동의 차원을 끌어들이거나 하는 것 모두 해당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의 차원에서 생긴 욕망의 잔여 같은 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해소할 수 없어서 사회적인 대상을 초대하는 것 아닐까.그것은 사회적 개인으로서 자신을 정체화하기보다 개인이 인식하는 사회와의 경계를 시현하고 그로부터 동의를 얻는 과정이다. 곧 〈경계넘기〉는 박소영으로의 수렴을 부른다. 그런데 그 자신이 경계에 위치함으로 인해, 우리는 그 경계의 심급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성·본 변경이라는 법적 프로세스와 사회적 의제의 차원으로써 가시화되기보다는 그것 아래 잠겨 있다.
결과적으로, 〈경계넘기〉는 전시장이라는 공간을 활용해 전시의 연장으로서 일종의 플레이어들을 배치하며, 전시장이라는 인터페이스를 구성하고 매개하는 차원에서 배우를 두며, 이를 통해 공간을 확장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목소리의 발화는 울림이 발생하는 공간 특성을 반영하면서 그 한계를 돌파하려는 순전히 물리적 차원의 시도이면서, 배우의 기술을 진정성의 윤리적 차원으로 전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실은 파트 1 역시 바닥의 문자 및 구획 테이핑, 전면의 영상 스크리닝 등을 통해 전시장의 외양을 띠고 있었는데, 파트 2에서 달라진 건 4명의 배우가 자신을 스스로 정체화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 외에 그들은 문자와 말을 옮기는 매개의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것이 물리적 차원의 공간을 직접적으로 매개하며 전시에서의 퍼포먼스라는 외양을 띠게 된다―우리가 전시에서 참여로 획득할 몫을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우리를 대신해 수행해 준다.
정신분석적 심급에서

여기서 정체화의 시간은 어쩌면, 〈경계넘기〉가 정신분석적 심급에서만 다가설 수 있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성/이름 관련해 사회적 표본의 다양성을 구성하기 위한 가벼운/단조로운 가시화라는 우려를 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배우 한 명 한 명을 작품의 주제와 맞춰 다양하게 구(성)했다는 것 자체가 배우의 삶을 들여다보고 궁구하며 리서치하는 단계에서의 합목적성과 그 가치를 인정케 하는 반면, 그것이 박소영 개인의 내밀한 주제와 정합될 수는 없는 것이다.곧 박소영의 사례가 내재적이고 유동적 차원에서 ‘정’체성에 대한 분석을 어렵게 하는 것과 같이, 배우 각자의 정체성을 성/이름으로 환원시키는 것도 쉽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경유해 더 깊게 이야기하는 것은 (주제를 벗어나므로) 허용할 수 없는 가운데, 개인에서 사회-운동적 차원의 진작으로 나아가기 위한 명목으로서(만) 이 단계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볼 수 있는 것이다.
〈경계넘기〉는 사회를 가르는, 사회에서 내파되는 개인의 사례에 주목한 드물고도 예외적인 작업으로, 당연시되어 의문시되지 않는 사회 제도의 차원이 가진 부조리함, 모순 등을 적시하는 한편, 그것을 지속적인 다른 방식의 표현으로써 접근해 가는 지점에서 긍정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것이 사회적으로 쉬이 공명하는 지점을 찾기 어렵거나 운동성 차원과 직접 결부되지 않는 건 그것이 매우 내밀한 박소영의 특수한 사례라는 점 외에도, 실은 그 제도 자체를 박소영이 부정하기보다 그 부정성을 철학적으로 사상하려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수직 하강하며 내려온 말씀, 아버지의 법 자체에 대한 경계를 시험하고 탐문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은유적으로 부성에 대한 더 깊숙한, 절실한 접근일지도 모른다. 〈경계넘기〉는 아버지의 명령 속에서 어머니의 기원적 자리를 재정초하려는 시도라고도 하겠다.
그것은 또한 어머니-나-고양이로 이어지는 대안적 가족의 삶 자체를 단락시켜 하나의 자율적 기관, 장으로 바꾸고자 하는 선언이자 운동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동시대 사회 내 중요한 그리고 징후적인 하나의 목소리라 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함께한 사람들
구성/연출 박소영
창작/퍼포먼스 류원준 양주현 정은순 한지구
공간 디자인 유태희
조명 디자인 김영준
영상기술 김성호 김윤환
촬영/편집 김수민
음향감독 박붐
기술지원 박선영
프로듀서 임예지
그래픽 문혜정
현장기록 최문선접근성매니저 강보름
음성해설대본 구지수 김내원
음성해설자문 김혜영
수어통역 김아영 윤영표
실시간 문자통역 AUD 사회적협동조합
주최·주관 박소영
제작 스튜디오 42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2. 「구자혜, 〈로드킬 인 더 씨어터〉: 인간의 시점을 도륙하기」, 참조=https://www.artscene.co.kr/177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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