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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아리 무 덤, 〈병아리 무 덤〉(박수진 작, 이연주 연출): 미완결의 무덤
    REVIEW/Theater 2026. 9. 13. 19:48

    모두의 각자의 말

     

    병아리 무 덤, 〈병아리 무 덤〉(박수진 작, 이연주 연출, 출연: 하영미, 박수진(목소리))©남산제작소[사진 제공=15분연극제](이하 상동).

    〈병아리 무 덤〉에서 특이한 건 “1인의 배우가 어떠한 구분이나 경계 없이 여러 인물의 말을 읽거나 말”하는 조건에 대한 부분으로, 하영미는 거의 음절 단위로 문자을 해체해 연접함으로써 희곡을 해체시키고 일종의 ‘무덤’의 잔해로 만든다. 인물은 뒤섞이고 하나의 몸을 이룬다. 배우는 말들을 잇고 꿰매어 희곡의 잠재된 상태로 되돌린다. 이러한 구분 없음은 동시에 이뤄지는 수화 통역에 의해 4개의 몸으로 분절되어 이미지화된다.

     

    말에는 몸이 묶이지 않고, 이를 번역하는 그 밖의 다른 몸들에는 말이 알맞게 묶인다. 네 명의 분화는 본래 가진 역할들의 몸을 되살려낸다. 하나의 몸은 모두의 몸을 품고 있다. 아마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진행하는 하영미의 발화 방식은, 이 모든 인물이 어떤 구분되지 않음의 환원적 차원으로 되돌리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것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등장인물로 표기되지 않는 어린 런희의 관점이다.

     

    이 런희의 관점을 마주할 수 있음에서 수화라는 존재가 위치한다. 곧 ‘병아리 무덤’은 우리가 간직한 생명의 죽음에 대한 원-경험 같은 것이며, 그것을 현재 체감하는 이의 경험을 과거나 추억으로 쉬이 넘겨버릴 수는 없고, 수화는 그러지 않는다. 의미적으로 가장 중요한 말이라면, “병아리 위에서 사람이 살면 안 된다고.”라는 수화의 말일 것이다.

     

    이때 조그마한 병아리 무덤이 현실에서 올곧이 지지될 수 있는 차원을 부르짖음은, 런희를 향하는가 아님 자신을 향하는가. 곧 애도의 무력함을 방어하고자 하는 정의에 대한 명목상의 지지일까. 아님 애도에 대한 절차적, 합리적 정의에 대한 앎을 부가하여 공동의 애도를 수행하려는 실제적 의지일까. 그의 소리침은 런희의 자리에 자신의 과거를 두며 그것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미래로의 길로 과거를 전이시키려는 주문은 아닐까.

     

    천박한 진리

     

    또 한 명의 존재, 수화의 연인 ‘정’의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정의 담배를 대신 피우면서 그것을 “애도”라고 생각했던 수화에게 아마도 과거에 고착되지 않으며 미래를 향하는 공동의 병아리 무덤은, “아파트”, 곧 ‘개발’로 이어지는 과거를 절연하며 발생하는 미래의 어떤 논리로부터 전적으로 무력하며 따라서 부정성의 차원에서 낭만적이고 또 나이브하다. 수화의 행위는 주체성보다는 타자성으로 갈음된다.

     

    하지만 수화의 반응에 런희는 “사람 위에서 사람이 사는” 걸 가리키며, 세계가 폭력과 죽음의 차원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이는 아이의 말이 단지 나의 ‘순전한’ 생각을 초과하고 있음에서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앎이 나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놀라운 걸 넘어 섬뜩하기까지 한데, 곧 ‘너도 사실은 알고 있지만 나에게는 알지 못한 척 한 것이며, 나는 그것까지를 알고 있었음에도 모른 척 넘어가려 했던 것 뿐이다.’라는 것이기 때문 아닐까.

     

    진리는 순진한 생각으로 담기지 않는다. 그것은 정이 수화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야말로 “진리는 천박한 데 있”다. 그런데 이 부정성의 진리는 즉물적인 대입이며, 주체에 내재적으로 귀속되는 진리가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 진리는 주체의 깨달음이 아니라 주체에 대한 어떤 절대적인 효과이다. 아파트 사회가 억누르는 미약한 개체, 그리고 개인의 초상은 그 반대편의 미약한 것을 사랑하는 개인의 초상의 반대편에 있으며, 그것은 정신 이전에 주어지는 사물적인 것으로부터 촉발된다.

     

    곧 목련이 손에 닿으면 갈색으로 변하는 어떤 화학적 가시화 작용과 함께 목련을 좋아하는 수화와 그 수화를 예쁘다고 하며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정의 단편적 대화의 흐름은, 목련과 수화의 (교환의) 축이 예쁨과 좋음의 (교환의) 축을 횡단하는 과정으로 요약되며, 예컨대 목련은 수화로 치환되고, 예쁨은 곧 좋음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예쁨과 관계 맺는 수화의 행위와 수화를 포옹하는 정의 행위는 조응한다.

     

    솟아나는 말들

     

    진리는 그 예쁨과 좋음(이 소박하고 단순하다는 것)에 있다. 그것에 어떤 의미를 별도로 부가하지 않아도 그렇게 감각되고 인지된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천박한 것은 천박하지 않다. 병아리 무덤을 아이들이 런희와 함께 지어줄 때, 땅과 아이들의 신발이 접지될 때, 첫 장면,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는 정에 대한 인물 소개, 수화와 정의 뒤엉킨 발바닥들의 인트로 장면 등이 겹쳐진다. 그것은 아마 ‘천박’한 것이다.

     

    아이들이 한 아이가 파묻은 병아리가 죽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말에, 밤에 와서 다시 “파보자”라고 한 아이가 화답한 후, “파보자”는 구호처럼 메아리친다. 실제 한 발씩 제자리에서 높게 들어올려 파보는 움직임을 하는 하영미, 그로부터 말들은 솟아오른다. 건조하게 하나의 덩어리를 향하는 말들이 반복의 흐름 속 리듬의 몸에 말들이 타고 부상하기 시작한다. 여전히 “파보자”는 건조하지만, 뭔가 생기가 있다.

     

    똑같은 기율로서 한 문장을 반복함으로써 아이들은 뒤섞이고, 하나의 무리가 된다. 모두의 말이자 한 명의 말이며, 모두의 말이기도 하고 나의 말이기도 한 말이 된다. 하영미는 입구를 기준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꼭지점마다 어떤 분기점을 두고 움직인다. 처음 오른편 창가를 마주하고 A4 크기의 크라프트지에 적힌 희곡을 읽기 시작, 오프닝 타이틀이 오르기 전까지를 읽고 맺는다.

     

    (병아리가) “죽었어요.”라고 말하는 런희의 말이 출현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박수진의 지문 음성이 들리면서 두 번째 꼭지점에서 멈춘다. 그 끝 입구 맞은 편 선분을 타고 왼쪽 상단 꼭지점에 도착해 관객 한 명에게 레몬 주스를 건네고 그윽하게 바라본다. 이후 또 다른 꼭지점, 입구 쪽에 도착하면 수화가 “90도”로 몸을 꺾는 순간이다. 수화가 정의 집에 와서 정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는, 달라진 장소에 이른 것이다.

     

    죽음에서 삶으로

     

    이제 문에 붙은 투명 필름에 인쇄한 A4 크기 정도의 인쇄물을 읽기 시작한다. 이때 정은 다시 “90도”로 인사를 하는 수화의 모습을 불러온다. 실제 하영미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몸을 최대한 꺾어 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런희의 “여기 묻을래요.”라고 하며 투명 필름을 내려놓는다. 바닥에 두 손을 짚어 필름을 화단 위에 놓고, 돌을 올려놓으며, 그것을 병아리 대신 묻는다. 그리고 교체한 마지막 크라프트지를 읽기 시작한다.

     

    “사람 위에서 사람이” 산다는 걸 수화가 런희에게 듣는 순간에 이르고 다시 수진의 음성이 재생된다. 이때 하영미 배우는 듣고 있다 두 팔을 가슴께에 말아쥐고 눕는다. 음성이 끝나고, 정이 수화를 안고 있음의 발화가 그로써 체현된다. 이제 하영미는 누워서 대사를 읽기 시작한다. 장례식장에 찾아가고 나서 하영미는 ‘마땅히’ 죽은 자를 바라보는 산 자를 체현하기 위해 일어서고, 마침 과거의 한 이야기가 그렇게 재현된다.

     

    이제 아이들이 병아리 무덤을 만드는 장면에 이르고, 다시 하영미는 일어나서 아이들의 죽음을 처리하는 데 따르는 생기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매체의 변화는 종이 자체의 결착 여부로부터 읽기가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말과 종이의 결착 자체도 유동적인 것으로 만드는 듯하다. 이는 이 희곡 자체가 임시적이라는 것으로 소급된다―〈병아리 무 덤〉은 긴 장편 시나리오를 분해해서 재조립한 것이라고 한다.

     

    완성되지 않는 무덤

     

    〈병아리 무 덤〉의 읽기 방식, 읽기로서 발화의 형식은 몸에 순간적으로 기입되고 사라지는 매체의 속성이 연장된 것이며, 하영미는 그 말들을 재현하는 대신에 말들이 발생하는 자리로서 자신의 몸을 어떻게 두는가를 궁구한다. 우리는 말을 담아내는 대신 말이 담기는 몸을 본다. 그는 하나의 동선을 구성하고, 그 동선 안의 움직임과 맞물려 말들을 ‘받아들인다.’ 말 그대로 말은 소유되지 않고 희곡 안에 쓰인 그대로의 형상으로 고착된다.

     

    희곡은 일종의 무덤을 덮는 흙의 일부, 접지하는 발걸음 같은 것이다. 인트로에서 “발굴”이 “발”로 이어지는 것처럼, ‘발’굴은 ‘발’을 포함하고 있다. 그건 쪼개지는 발화의 방식으로 인해 새롭게 또는 비로소 살아나는 공통된 개념으로서 말들이다. 말은 신비화되지 않지만, 그 말들의 자리는 뚜렷하게 흔적을 남긴다. 어쩌면 하영미는 말을 소유하는 대신에 각 장소에서 발굴하고 자기 것이 아닌 양 매개할 뿐이다.

     

    그러니까 무덤을 파고 덮는 하나의 행위가 지배하는, 그것이 계속해서 죽음의 상징과 관련을 맺는 한편, 과거의 환기로 점철된 이 묘연한 시점의 서사들이 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귀속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그는 그렇게 한다. 하영미의 동선은 언어의 힌트에 입각하고, 언어의 양을 측량하고 질서화하며, 그 자신 역시 박수진의 또 다른 언어 안에 포함되며 느슨해지거나 듣는 또 다른 몸으로 분화해 간다.

     

    무덤은 완성되지 않는다. 아니 무덤은 죽음을 완성하지 못한다. 따라서 아이들은 미래를 기약하며, 그것을 삶의 또 다른 재생 장소로 위치시킨다. 마찬가지로 “무”와 “덤”의 빈 칸으로부터 무덤은 자신을 유예한다. 그것은 완전히 덮히지 않는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며, 이후 덤으로 생겨난 무엇이다. 거기에는 비가시적인 어떤 시간의 틈 같은 것이 실재한다.

     

     

     

    김민관 편집장

     

    2026년 8월 22일(토)~23일(일)
    오후 3시 이후 차북카페 2F (금곡로8-1, 계단)
    작가: 박수진
    연출: 이연주
    출연: 하영미, 박수진(목소리)
    수어통역: 강소진, 고다희, 김유리, 신지선
    제작: 병아리 무 덤
    주최·주관: 15분연극제X인천
    후원: 인천광역시 인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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