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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푸름, 〈공통의 되기 : 되기의 기술〉: 허구적 실재(를 기각하기)
    REVIEW/Performance 2026. 9. 16. 15:27

    가시화되어지기

     

    〈공통의 되기 : 되기의 기술〉(이하 〈되기의 기술〉)에는 특별한 신체 움직임에 대한 고안이 없는데, 극장 자체를 사물적 존재로 접근한다. 그러니까 춤 이외의 모든 것이, 극장의 제반 조건이 존재화된다. 그것은 오직 ‘극장’의 서사를 가리키는데, 이는 극장을 장치들의 집합으로 상정하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매체로서 다시 분화될 때, 일종의 존재의 충만함 따위를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되기의 기술〉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동시에 가장 불유쾌한(?) 순간을 꼽자면, 첫 번째는 관객을 미러링하는 장면이며, 두 번째는 조명을 이동시키며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10~15초 정도 빛을 가하는 장면이다. 이는 ‘공통’된 극장에의 귀속과 환원을 전제한다. 그런데 이는 극장이 갖고 있는 수동성을 전제로 하며, 극장의 관성과 관습을 연장한다.

     

    기능의 차원으로 동원되던 장치를 탈구시켜 시각의 기원으로 재위치시킬 때 보기와 관음의 차원에서 우위를 점한다고 생각되었던 관객은 볼거리로 전락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이 비어져 있음을 보는 대신, 무엇이 곧 가득 차게 됨을 목격한다. 결여는 없다. 부재 역시 없다. 극장은 이미 충만한 곳이며, 극장은 무언가를, 모든 것을 다시 가시화하는 곳이다.

     

    퍼포머로 극장이 이전되는 게 아니라, 극장 자체가 지시될 때, 관객은 퍼포머를 (대신) 체현하게 된다. 극장의 유령성은 새롭게 가설되는 거의 유일한 하나의 서사이다. 그런데 이 지배적인 시각 체제로서 그중에서도 가장 우월한 조명은 극(장)의 규칙이 갖는 절대성을 전제하며, 마치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관객의 수동성을 일종의 피학적 차원의 쾌락으로 전이시키는 듯 보인다.

     

    극장이라는 실험

     

    극장의 장치가 다시 하나의 매체로 분화, 전환될 때 그것은 거의 존재로 부상하며, 투명한 것들은 실은 모호한 것으로 연장된다. 가령 빛은 존재를 지시하면서 포함하고, 비켜서면서도 회절된다.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가해지는 하이라이트는 무대에 선 배우로의 고립을 수여하는 것으로, 무대 위의 현존에 대한 부담감은 조명으로부터 일종의 눈이 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속에서 관객 한 명 한 명은 과잉 시각화된다.

     

    그러니까 일정 정도 모호한, 신비한 여지의 대상이 된다. 관객은 각각 언어적으로 또한 이미지 차원에서 가시화되며, 사실은 퍼포머 없음에 대한 자리를 수혈한다. 하지만 극장의 환영성이 실재의 부착에 따라 다시 부상할 때도 그것이 장치에 의한 지배에 입각한 것임은 분명하다. 곧 극장의 환영성에 도취 혹은 침잠될 때 이는 장치의 작동자, 연루자를 비가시화하고 은폐하는 것으로써 작동되는데, 그것은 일종의 직접적인 폭력의 차원으로 이전된다.

     

    이는 “새로운 사건”을 만들기 위함으로, 완전히 합의‘된’ 규칙이 아니라, 합의되지 않은 부분을 현장에서 이전하는 부분이 대개 그러하다. 그러니까 사실상 미러링이나 조명 쐬기의 경우, 일종의 트리거 효과의 차원에서 연루될 수 있음을 사전에 공지되지 않는다. 가령 미러링은 관객에게 수치를 전가하고, 조명 쐬기는 관객의 눈을 멀게 한다. 관객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극에 투여된다.

     

    따라서 〈되기의 기술〉은 극장을 새롭게 정의내리기 위한, 재건하기 위한 어떤 극단적 차원의 실험에 대한 지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곧 “극장의 조건을 탐구”한다는 건 한편으로 극장에의 물리적 조건들을 가시화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극(장)이 어떻게(까지) 가능한가에 대한 인지적 차원의 실험을 전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지적 투명성

     

    그것은 극장이 가지고 있는 것들, 극장에서 가능한 것들을 허용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극장 자체의 기원을 비가시화된 장치들로, 매체로 환원될 수 없는 장치들의 집합으로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자체는 새롭다기보다 포스트드라마의 한 축에서 지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니까 더 중요한 건 이러한 시도가 일견 무용 제도적 차원에서의 비판적 기능을 수행한다라는 것보다 그 너머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냐는 것이겠다.

     

    포스트드라마의 차원은 이제 형식적, 인지적 새로움보다는 또는 제도적 성찰의 차원에서보다는 다시 서사나 주제 차원으로 연장된, 심화된 차원에서 작동하며 계보학적 변화를 꾀하는 중인데, 이 작품이 무용으로의 범주화를 선택했을 때, 실제로는 무용이라기보다 안무의 차원에서 무용을 소거했을 때 비무용적인 혹은 탈무용적인 차원에서 몸은 재정의되(면서 다시 무용으로 소급되)게 된다. 그리고 “공통”이라는 것이 아마도 중요한 것으로 부상하게 된다.

     

    가령 정세영의 〈당신이 날 볼 수 없다는 것만 빼면〉(2026)을 참조하면, 장치의 투명한 작동은 불투명성 자체에 대한 서사를 진작하며[각주:1],">https://www.artscene.co.kr/2038.[/footnote], 이는 결과적으로 전동 침대로서 투명인간이 사회에서 비가시화되는 타자이며, 식별 불가능하며 또한 그 스스로는 곤궁을 겪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탈)승화된다. 투명인간은 장치의 (불)투명성을 매체(적 존재)로서 진단하게 하면서 서사의 효과와 메시지 안에서 고양된다.

     

    여기서 공통의 차원이 우리와 타자의 식역 자체로 자리하는 이 불투명함의 투명성을 마주하는 것이 된다면, 〈되기의 기술〉에서 공통성은 관객이라는 존재를 가시화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나의 극장 안에 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지하는 데 있다. 그러니까 극장을 영점의 장소로 두고, 다시 이미 가득한 장치들의 세계로 연장할 때, 안무는 퍼포머의 자리에 관객을 두어 관객이 퍼포머인 동시에 관객으로서 중첩된 지형 안에 놓이게 만든다.

     

    민주주의적 관객을 체현하기

     

    사실상 퍼포머는 관객을 가장하여 관객의 자리를 예시적으로 제시한다. 중앙에 긴 사다리꼴 등받이를 가진 나무 의자 한 쌍을 등을 맞대 붙여놓는 것으로써 기준을 세우고, 두 그룹으로 관객을 나뉘어 배치한다. 여기에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 두 명의 관객을 연기하는/대신하는 퍼포머가 등장하는데, 그는 자신의 앞에 투사되는 발코니와 연결되는 벽면의 프롬프트를 읽고 대답하는 역할만을 수행한다.

     

    이는 관객의 자율성이 아니라 관객이라는 자율적 존재를 예시하며, 조명으로부터의 가시화 전에 관객 한 명 한 명을 식별하는 역할을 한다. 퍼포머의 이름은 크레디트에 기재되지 않는데[각주:2], 이는 그것이 내부 기밀 같은 장치로써 수여되기 때문이지만, 거기에 누구도 가능하다는 것을, 곧 ‘공통의 되기’를 하는 차원에서 퍼포머가 관객의 위치에서 충분히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기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공통에의 윤리를 만들기 위해 크레디트에 퍼포머를 명기를 하지 않는 역설의 차원으로 소급되는데, 그것은 공통과 보편의 차이를 궁구하게 한다. “지금 앉아있는 의자는 어떤 느낌인가요?”로 시작된 질문은 우리가 보이는 것을 당장 경유해, 곧바로 관객으로 이전된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말해주세요.”, 이 말은 두 번의 반복을 통해 반드시 한 번만 도착하며 한 번은 뒤늦게 도착한다.

     

    두 번째 이 질문으로부터 관객의 개별적 특성들이 묘사된다. 이 미러링은 피상적인데, 다음 질문인 “어떤 연결”된 사람에 대한 묘사를 요청하면서 관계의 전사가 출현하면서 심화된다. 후자가 구체적이고도 (지극히) 사적이라면, 전자는 투박한 환원에 기초하는데, 가령 검은 바지를 입었다 정도의 특징이 그 사람의 고유성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공통의 윤리를 선취하는 효과를 위한 단순함, 곧 공통의 관객성을 상정하기 위한 단순해짐의 역설을 보여준다.

     

    문장이 만드는 허구적 세계

     

    그러니까 무엇이든 극장의 특이성을, 재전유됨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감축의 기술은 충분한 것일까. 의상 정도로 관객을 분별하는, 그것으로 관객을 지시하고 공통의 차원이 무엇인지보다는 공통의 차원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음을 발화하는 것, 이 둘에는 분명 심대한 차이가 있다. 곧 명목상의 참여가 공통에 대한 토대를 구성하는 것과 참여의 질적 차원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 사이에 어떤 간격이 필요할까.

     

    필요한 건 ‘(공통의) 되기의 기술’이 아니라 그 되기의 효과 자체일 것이다. 제도/의미 너머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도/의미 바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되기의 기술〉에서 관객은 타자이거나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영도의 값에 포함된다. 그리고 관객의 자리는 공모와 연루의 자리로서 사실상 선점되어 있다. 관객석에는 처음부터 하얀 천에 각기 다른 글자들이 기입되어 있다.

     

    이는 극장을 한 번 더 지시하면서 선취하고, 시적 언어로써 이 모든 걸 추상적이고도 문학적인 언어로 재기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문학의 용어는 앞선 두 퍼포머가 점점 어두워지며 사물로서 잠겨갈 때 그와 동시에 “천조각 위의 말들을 천천히 읽어주세요.”라는 프롬프터의 말 역시 점점 어두워지면서 늦추어지게 되는 장면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에 다름없는, 제법 긴 온전한 글 하나를 읽어내려 가는 것에서 실현된다.

     

    실재가 찾아오는 건 커튼을 걷으면서 극장의 닫힌 시스템에 간격을 내기 시작할 때부터로, 그것에 동반되는 이 말은 내재적인데, 이 모든 공간에 대한 추상적 적용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가령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던 시간과 감각은 각자의 자리로 다시 흩어진다. / 주위를 둘러본다. / 사람들은 떠날 채비를 한다.”와 같은 말은, 극장의 무심한 규칙과 행위를 일상과 삶으로 격상하기 위한 모종의 획책과 같다.

     

    분절된, 독립된…

     

    그런데 앞서 의자 위에 앉은 관객의 자리는 관객을 이상적이고도 평화주의적으로 가두어 두지만, 그의 평범한 기술의 차원은 그다지 특별한 것으로 전이되지 않는 가운데, 관객은 보통의 민주주의적인 관객으로서 평화로운 사회를, 이견과 적대 없는 사회를 학습된다. ‘그’의 거리는 ‘나’의 거리로 체현되지만 그것은 학습의 영역이고 강제의 영역이 전제된다. 동시에 우리는 그 거리만큼 안전하다고 판단되며, 우리는 관객의 특권을 기껍게 제안받게 된다.

     

    그런데 2층을 건너가는 이 공연을 사진 찍는 사진 작가 류진욱의 실루엣 자체가 이 단조로운 질서의 구획을 벗어나 해방적 제스처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 보이는데, 이는 황수현 안무가의 의 〈Zzz〉에서 잠결에 또는 은연중에 나타나는 유령 같은 퍼포머의 존재감을 상기시킨다[각주:3]. 그런데 〈되기의 기술〉은 모든 걸 ‘지시’의 상태로 제시하고자 하며, 그것은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서 바라보게 하는 것과 같다.

     

    이는 분할된 것들이 자기 매체 고유의 차원으로 자신을 한정하며 온전히 드러나길 종용한다. 평범한 것들(이라 치부된 것들)은 비범한 것들인 양 (그 자체로서 아우라를 드러낼 수 있다는 식으로) 제시되면서 극장의 복합적 상관물들은 제각각의 고유성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안무적인 것은 그 모든 것들을 직관하고 종합하는 데에 그치게 된다, 아니 그쳐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실천한다.

     

    앞선 프롬프터의 두 위치, 문래예술공장 발코니 물결형 요철의 벽과 커튼 두 축에서 상연된 백종관의 영상 역시 그 자체로의 독립적 조각으로 투사된다. 처음에는 얼굴들을 회전하며 잇는 영상에서, 긴 벤치를 기준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의 관찰 지점에서 촬영한 영상, 곧 프레임 속에서 무대의 가설 효과를 가져오는 영상으로 바뀐다.

     

    또 다른 제도적인, 관성적인

     

    이는 결국 무언가가 발생하는 무대라는 신비한 영역 자체를 가시화하는 것으로 보이며, 우리가보는 것으로서 이 공연에 임하고 있음을 연장하면서, 본다는 것을 의미화한다. 그런데 작가주의적 탐구로서 영상은 어떤 잠재성의 언어를 (고)취하는 바람에 연합하며, 이것을 무심한 공간, 곧 예술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예술은 내재적 의도로서 분별되기보다 그 자체로 예술임의 자리로 분배된다.

     

    곧 조명이 그 자체의 목적을 지닐 때, 그것은 비예술적인 것이 아니라 예술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조응한다. 이는 예술의 내재적 수용을 추동하는 대신에, 예술의 자율적 차원 자체를 승인하는 시스템에 가깝다. 예술은 이미 그러하며, 그것은 제도적 차원을 벗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제도적 차원을 확장하며 그로부터 승인되기에 사실 예술적인 것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이는 (형태적으로) 새로울 수 있지만, 이념적 차원에서 충분히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곧 부정성으로 전의된다고 보이는 건, 〈되기의 기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이 형태적 새로움 자체가 아니라, 그 시도 자체가 새롭고 유의미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있다.

     

    그러니까 극장이 여러 장치의 드러남으로, 관객의 (타동적) 참여로, 각 매체의 효과들로 재편되게 될 때 또는 소급될 때 그 각각을 시간의 흐름 안에서 완전히 분리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그 흐름 안에서 조각들은 유기성을 띨 수밖에 없다면, 중요한 건 형태의 서사적 배치 자체―정세영의 앞선 공연은 이를 추구한다고 하겠다.―이거나 오히려 그 반대의 차원에서 그것의 철저한 배제 아닐까.

     

    예외적인, 서사적인

     

    그런데 각 매체로의 소급들로써 구성적 차원의 배치를 무력화하고자 한다면, 간극의 차원 자체를 의도된 표현의 반복으로 갈음 짓는 것과 같이 특정한 조처를 강력하게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곧 어쨌거나 간극이 그 자체로 분명해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마지막 하나의 글은 이 모든 이전의 시간에 (무)의미를 불어넣는다. 결코 소거할 수 없는 서사의 강력한 층위가 ‘시작’된다.

     

    암전과 창문 밖 풍경으로 환유되는 “캄캄한 새벽” “산을 오르기 시작”해 “피할 길 없는 검은 땅”을 발견한 화자는, 우주와 존재를 횡단하는 “인공위성”의 “미약한 신호”를 경유해, “송전탑”에 오른 “70대 할머니”를 가사의 무대에 위치시키는데―이는 물론 앞선 세계에 닿는 확장적 기호로서 연접된다.―, 그 주변에서 “경운기”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위를 하는 모습까지, 마지막 이야기는 실제의 사건들을 불러오며 합성한 결과이다.

     

    그 결과, 취약함(으로)의 신체와 넌센스와 파라독스의 부정성의 현실 속에서 기이한 정동이 연장된다. 그것은 미약하지만 그 너머를 향한다. 그런데 이 운동성의 차원은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내재적-문학적 차원의 알레고리로 승화되지 않고 잔여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마지막 문장, “짙은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너가 만져진다.” 이때의 문학적 성취는 극장을 경유해 연장되지 않고, 고립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때의 어둠은 암전으로 대체될 수 없지 않은가. 저 너머에서의 실재-이미지가 극장의 환영성을 반전시킬 때 침투하는 이 이야기는, 앞선 발화들이 관객에 대응되는 차원에서의 범속함/자연스러움을 가장하고 있는 데 반해, 뚜렷한 저자성을 가지며, 마찬가지로 그 내용적 차원이 매체적으로, 체험적으로 작품 전반에서 조응되지 못함에 대한 잔여 또한 뚜렷해지게 된다.

     

    실재의 진술

     

    저 너머가 이곳의 뒤집힌 이미지로서 결말의 효과를 위한 것이라면, 마지막 서사를 경유해서 이 서사의 잠재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될 수는 없었을까. 그것은 앞선 모든 것들에 대해 실재로서 대응됨으로써 극장의 환영성을 깨부수기 위한 비판적 의도일까. 극장의 확장성이 실은 극장의 경계라는 것을 손쉽게 갈아끼움으로써 담보될 수 있었음을 인지시키기 위한 장치를 지시하는 차원이 의도일까.

     

    마지막 서사는 결말(을 짓기 위한 예외적인 차원에서)의 승화(를 기획했음에서 아마도 오는 것)일 것이지만, 그것이 갖는 잠재적 차원을 온전히 잠재우지 못하고 끝나는, 곧 봉합하지 못하는 부위를 남기는 역(설적)으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결말은 또 다른 시작의 충동으로서 자리 잡는 데 그친다. 극장의 환영성이 그 자체의 효과를 산출하는 것이 하나의 안무적 관점이 된다면, 극장 바깥의 구조를 가져오는 건 문법의 차원을 전면 재구축하는 것이라 하겠다.

     

    화자의 경험은 일견 김보용의 〈텔레워크〉(2013)를 상기시키는데, 랜턴을 들고 워키토키를 갖고 두 사람이 송수신하면서 산의 능선을 따라 두 축을 멀리서 걸어오면서[각주:4] 교차하며 헤어지는, 실은 ‘제 갈 길 가는 거였던’ 이 퍼포먼스는 실재의 암전을 바탕으로 ‘먼’ 곳의 작은 빛과 그것을 가깝게 끌어온 음성과 동조시키면서 곧 두 매체로 분기된 지점이 합성되면서 가장 큰 극장을 만든다.

     

    그리고 피터 브룩의 “빈 공간”의 가장 유명한 은유, 연극 고유의 보기의 기술, 무대 안에 ‘장면’의 구축술로서 우리의 (관)습적 체현이 그것을 연장하지만, 그것은 실재의 차원이 초과하는 지점에서 그러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실재에 더해지는 어떤 자국이다[각주:5].

     

    내파하는

     

    마찬가지로 〈되기의 기술〉에서 화자의 이야기, 실재에의 경험, 그리고 저곳에서의 이미지, 그리고 이곳에서의 반향됨의 매체가 인공위성으로 연결되는 것, 밝혀지는 것, 이 횡단의 과정이 다시 송전탑과 연결되어 먼 곳과 이곳을 잇는 어떤 연결의 메타포, 그리고 타자로서 실재로 수렴하는 과정은, 실상 ‘공통’을 초과한다.

     

    극장을 넘어서는 것, 극장을 넘어서는 곳, 그 실재의 자국들을 공연으로 소급시켜 다시 의미화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아마도 ‘공통의 되기’가 지닌 이후의 과제이지 않을까. 창문 너머의 실재가 극장임을 환기시키며 나의 보기를 진정 도약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허구적 차원의 서사가 담지하는바, 타자성으로의 횡단과 교환이 극장으로 침투해 올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두 관객 퍼포머가 실은 글자를 식별하면서 인지했듯이 우리는 극장의 조각들을 식별하고 의미화한다. 식별은 가장 첫 번째 단계이다. 마지막의 문장 읽기 방식에서 우리는 관객으로 앉아 있던 실은 스태프를 확인하고, 바깥의 실재를 식별하는 동시에, 다시 그 읽는 이를 식별하고, 그 문장들을 듣는다. 그 문장이 발화하는 바를 체현하는, 수행하는 신체를 (흘끔) 본다.

     

    하지만 이 신체성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으며, 그 말을 타고 바깥으로, 바깥에서 그 말을 경유해 실재의 이미지들을 전달한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민주주의적 공통의 세계 안에 안전하게 침묵할 수 있었다면, 이제 민주주의가 균열을 드러내는, 파산하는 어떤 지점에서 타자를 목격하며, 그것에 대한 응답의 요구를 받게 된다. 그 응답에 대한 힌트를 우리는 고지받지 못했는데, 따라서 이는 실재 자체가 작품을 내파시키는 부분이겠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일정: 2026년 8월 20일(목)-22일(토)

    시간: 목,금 19:30 / 토 16:00

    장소: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주최 주관: 윤푸름프로젝트그룹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티켓: 전석 3만원

    예매: 구글폼 신청 (프로필 하단 링크)

    문의: 010-3252-5487

    안무/콘셉트 윤푸름

    드라마트루그 한수민

    시노그라피 로와정

    영상디자인 백종관

    음악/사운드 정의석

    조명디자인 김병구

    무대감독 김인성

    사진기록 류진욱

    영상기록 이정훈

    포스터디자인 불도저

    프로듀서 한채령

    매니저 노혜림

    2026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 선정 프로젝트

     

     

    1. 1. “…투명인간이 전동 침대의 기계적 움직임 자체에 접면하며 그것과 경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것에 더해진 어떤 것, 그것으로 지지된 어떤 것으로서, 그것에서 감산된 어떤 것으로서 결정적으로 그것과 혼동되는 것으로서 드러난다면, 유령은 이미 가시화된 것을 덮는 차원으로서 접면하는 천이 있는…”, 「정세영, 〈당신이 날 볼 수 없다는 것만 빼면〉: 두 가지 시각 체제의 기원」, [본문으로]
    2. 2. 실은 한 명은 섭외된 관객, 다른 한 명은 퍼포머로 섭외되었었던 관객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크레디트는 사후에만 완성 가능한 형태의 공연이 되는 셈이다. [본문으로]
    3. 2. 「https://www.artscene.co.kr/1942%20%5BARTSCENE:%ED%8B%B0%EC%8A%A4%ED%86%A0%EB%A6%AC%5D"〉 황수현 안무가 〈Zzz〉: 잠을 자는 신체의 표현 혹은 상태」, 참조=https://www.artscene.co.kr/1942. [본문으로]
    4. 2.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보이는 산의 능선을 우리는 공제선이라고 한다. 바로 그 공제선이 김보용의 ‹텔레-워크›의 무대가 된다. 눈 앞에 펼쳐지는 청계산의 맥에 눈길을 툭 던지면, 저 극단적인 우측에 하나의 빛 점이, 반대편 극단적인 좌측에 또 하나의 빛 점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김남수, 〈겨우 존재하는 반딧불이의 빛이 되기, 그 빛들을 멀리-보기 그리고 망상에 사로잡히기〉,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vol.62. [본문으로]
    5. 3. “한자 망 (望)의 초기 글자는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성 (聖)과 비슷하며, 한자 명 (明)이란 "어두운 밝음", 즉 달빛의 이미지라고 한다(시라카와 시즈카). 이렇듯 본다는 것은 흐릿한 초점으로 본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영적으로 소통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것은 전면적 참여를 요청한다.” Ibid., / “그러나 그저 보는 것은 상황이 전제되어 있었다. 멀리 보기. 그가 바라보라는 지점은 내가 보는 시야에서 좀더 먼 어느 지점이었고, 그곳은 자연에 가까웠으나 자연은 아닌 ‘공간’이었다. 그곳은 어디일까. ‘본다’라는 공간이다. 우리가 작품을 보았을 때 길들여진 원근법적인 시야에서 벗어나 산이라는 추상, 그 밤을 가만히 보는 것이다. 가만히 보는 행위. 익숙지 않은 습(習)이다. 무언가를 가만히 보는 것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이전, 유년기부터 나의 습에 분명 있었음에 말이다.”, 이정화, 〈멀리, 분리된 자연 보기〉. 《크리티칼》, http://www.critic-al.org/?p=41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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