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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메타포, 〈나는 이따금 여름이 그리울 때 보일러를 켜〉: 과거를 함축하는 현재REVIEW/Theater 2026. 10. 6. 19:31
제자리의 존재(들)

극단 메타포, 〈나는 이따금 여름이 그리울 때 보일러를 켜〉[사진 제공=극단 메타포](이하 상동). 〈나는 이따금 여름이 그리울 때 보일러를 켜〉(이하 〈이따금 여름〉)는 상실과 애도를 다루는데, 이는 기억의 맥락하에 그러하다. 곧 과거를 처리하고 수행하는 것은 기억이다. 대부분의 대화는 둘씩의 내밀한 차원에서 이뤄지는데, 이는 그 둘이 하나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거나, 그 기억 자체로 되돌아가는 차원에서 이뤄진다. 이는 한 명이 다른 한 명과 마주할 때 벌어지는 신체적 현상 혹은 증상이다.
유하의 가족 중 어머니, 신애의 죽음이 전반을 관통한다면, 유하에게 갑자기 찾아온 전 여자친구 지연의 헤어졌던 전 연인 영서에 대한 기억이 또 다른 서사로 흘러나온다. 그런데 지연이 유하의 집에 찾아온 표면상의 목적은 어머니가 준 시계를 찾으러 온 것으로, 그것은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상기됨을 꺼뜨리기 위해 지연에게 준 것이다. 이는 마치 극을 지배하는 유하 어머니 죽음의 잠재적 차원 아래 지연의 어머니가 들어섬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든 것의 죽음으로의 환원이라기보다 상징의 차원이 분화되어 다르게 가시화되는 가운데, 마치 하나의 정서적 차원의 맞물림을 현상한다. 곧 유하와 관련한 지연에 대한 연루적 지각과는 별개로, 유하와 관련되지 않은 지연에 대한 독립적 지각은 ‘우연적으로’ (부재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그리움을 상정한다.
이는 지연에게 지연의 또 다른 존재로 연장되는데, 지연에게는 초등학교 때 친했던 다인이라는 친구가 있었으며, 그런데 중학교 때부터 그를 괴롭히기 시작, 고등학교 때 돌연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대화 중의 정보였다면, 과거의 장면이 갑자기 삽입되는데, 학교에서 아이들의 괴롭힘을 참다 못해 한 애와 싸움을 벌였던 영서와 친해지게 된 것이다. 영서는 지연과 우정을 나누는데, 이는 “가끔씩 그리워.” 하는 다인의 자리를 우연하게 이어받는 것과 같다.
친구들의 괴롭힘과 그에 대한 직접적 관계성이 지닌 애정은 혼합되어 있고 또한 교차되며 따라서 혼동되고, 마찬가지로 다인과 영서의 자리 역시 혼동된다, 유하의 어머니와 지연의 어머니가 근본적으로 혼동되는 것과 같이.
근원적인, 보편적인

이 둘은 모두 하나의 근원적 결핍의 자리를 상기시킨다―마찬가지로 영서와 대화를 나누다 어느새 바다에서 유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연의 관점에서 보면, 영서와 유하는 그에게 근본적으로 친연하다, 곧 혼동되는 대상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어머니의 빈 자리로 합성된다. 그리고 이 셋은 지연에게 혼동된다. 또는 하나의 삶이 반복과 차이로써 점철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약하고 여린 존재들의 삶의 양식이며, 해파리라는 메타포로서 체현된다. 이는 처음으로 신애의 관점에서 표현된다. “힘도 없이 떠밀려 다니는 것 같네.”라는 그의 독백은, 자신의 죽음을 일정 정도 암시하면서 그와 그 바깥 모든 사람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관계는 유정하지만, 겉으로는 한결같이 모가 나 있고 벌어진 틈이 보인다.
이것은 왕따 폭력의 사건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수렴시키는 것이 아니라, 또는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들 안의 현상으로 두고 그 안에서 몇몇 존재의 취약함(들)을 미시적 차원에서 부각시키고 증폭시키는 그 과정에서의 매개적인 차원에 그치는 것에서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따금 여름〉은 누군가가 잘못 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사실상 모든 이를 주요한 인물의 자리에 둔다.―, 각자의 사연과 관점에서 겪는 고통과 궁핍이 자리함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짧은 당장의 현재가 아니라, 계속 살아가며 각기 다른 사건들이 하나로 엮어지는 과정, 곧 각기 다른 시간들의 종합이라는 어떤 역량에서 가능한 관점으로 나타나며, 통상의 애잔한 유행가의 차원이 갖는 정동을 내포한다.
관점주의로부터

유하의 관점에서 세계가 주어지는 것처럼 지연의 관점에서 세계가 또한 주어진다. 지연의 삶 역시 유하의 세계와도 같은, 시간의 깊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무대에는 실제 등장하지 않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곧 이야기하기 안에 배속됨으로써 배우-신체라는 명확한 지지체 없이 강도 있는 서사를 소화하려 할 때의 역설적인 흐릿함 같은 것이 생겨난다. 이는 서사의 충만함이 무대의 공백 안에 거의 담기지 않음을 의미한다.
보통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려 했다라는 작품에 대한 상투적인 비판은 〈이따금 여름〉에서는 오히려 뒤집히거나 주의해서 생각할 부분인데, 곧 주동인물의 차원이 끊임없이 변경되는 지점에서 서사를 써 내려가기에 잠재적인 서사의 차원이 미처 다 담기지 않는, 곧 무대에서 실재 구현되지 않는 차원으로 드러나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더 적은 이야기가 담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공 유하가 지연의 관점 아래 들어온다는 것―이는 영서와 대화를 나누던 지연이 유하와 대화를 나누다 지연과 다시 대화를 나누는, 일종의 막간 극 형식으로 유하와의 일화가 삽입되어 있음에서 명확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연에 의해 유하가 재현된다는 것과 같은 것, 이 부분은 〈이따금 여름〉의 가장 독특하면서도 뛰어난 지점이다.
무지한, 포용하는

강묵은 신애의 기일에 장미꽃을 사들고 유하와 재호를 찾아온다. 엄마가 백합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로 아마도 수없이 책망받았을 강묵에 대한 재호의 언질과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유하의 말은, 신애에 대한 애도를 강묵에 대한 책임으로 이행케 한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변증법적 차원에서 강묵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떠안긴다.
그가 글자를 모르는 것과 신애의 욕망을 모르는 것은 다른 범주의 무지이지만, 그리고 이 둘은 그가 친구 성배에게 사기를 당한 것을 비롯해 남을 의심 없이 믿으며 여러 일에 연루돼 신애에게 고통의 결과를 안기는 것과 함께, 역설적이지만 강묵이라는 사람의 순일한 특질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신애에게 무감한 것은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의 책임에 대한 무감함이며 무지이다.
반면, 그것은 친구나 지인을 향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곧 그의 범주에 대한 무감함 혹은 무지이다. 그가 트랜스섹슈얼로서 재호를 “너는 그냥 너지.”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어떤 잣대나 기준에 의해 무언가를 규정하지 않는 차원에서의 긍정성으로 승화되는 부분이다.
그가 “똑똑”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어떤 편견도 ‘더’ 갖고 있지 않음의 견지로부터 비롯됨으로 뒤집히는 순간, 무심한 재호의 단말마 같은 말이 갖는 힘이 부상하고, 그로부터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재호라는 인물이 비로소 반향되는 순간이 발생한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신애는 유하와 재호를 데리고 빨간 딱지가 붙은 집을 나서던 장면은, 신애가 강묵을 “버”렸다는 유하의 인식으로 남고, 여관의 “누런 벽지” 보고 울던 엄마의 모습과 함께 일종의 원-장면이 되는데, 이는 계속 반복적으로 유하를 찾아오는 기억이다.
강묵은 묵묵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식들의 핀잔도, 일종의 버려짐도 자신의 못남과 책임으로 수용한다.
버려짐과 버림

그러니까 그는 변하지 않았고, 버려짐을 언제까지 당하는 인물이다. 이는 지연의 안 버려지기 위해 먼저 버리는 행위의 자리에 있게 되는 영서와의 공통되는 부분으로, 사실 이 “뜨거운 아스팔트 위”는 지연에게서 영서와의 추억으로 먼저 출현한다. 그렇게 헤어짐 끝에는 강렬한 추억이 뒤따른다. 마찬가지로 강묵의 아버지 초상에 들른 앞서 하늘로 간 신애가 들러 강묵과 신애가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죽음 자체가 버림과 버려짐의 관계성을 필연적으로 만드는데, 지연과 영서의 관계에서 반복되었듯 신애가 강묵을 두고 떠나는 것 역시 반복된다. 유하의 여름 감기는 일종의 메타포 자체인 듯한데, 유하가 여름에도 아니 어쩌면 여름에만 보일러를 더 트는 행위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잊지 못해서가 아닐까. 즉 고착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그 무거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항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따금 여름〉은 기억의 환유로서 과거를 불러오며, 그것이 해파리 수조와 바다로 연장되는 또 다른 결정적인 환유의 조각을 경유해, 넘실거리고 찰랑이는 양태로서 그 과거가 건너온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과거는 빈번하게 그리고 ‘뻔뻔하게’ 현재의 자리를 차지한다. 마치 그 두 개의 시간 축이 구분할 수 없다는 듯이, 아니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과거와 현재가 섞이듯 인물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인물을 만나면서 자신의 고유성 같은 걸 비로소 드러낸다. 또는 다른 관계성은 그 사람의 다른 부분을 함축한다. 재호는 기본적으로 까칠하며 유하와 있을 때는 형제 간의 치고받고 싸우며 저하된 모습으로 수렴되고는 하지만, 강묵을 만나고 또 지연을 만나고 할 때, 그 자신의 성을 자연스럽게 두고, 침착하고 의젓해진다. 그는 강묵을 거쳐 지연에게서 충족된다 혹은 완성된다.
과거의 양가성 혹은 입체성

〈이따금 여름〉은 유하, 재연, 신애, 강묵, 지연이 해수욕장에 간 일종의 판타지로서 종결되는데, 이는 기억과 현재가 접면하고 기억 자체가 일종의 애도이자 삶의 기본적인 한 축으로 자리하는 세계의 연장과 같다. 신애는 유하가 감기에 걸렸을 때마다 보일러를 틀고 이불을 덮어 씌워 자게 했던 자신의 강제가 유하의 현재를 만들었다고 자책하지만, 유하는 아스팔트의 기억을 토로하며 자신의 왜상을 토로한다.
그리고 둘은 비로소 서로를 안아주고 유하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기억이 현재 이전에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이고 잠재적인 차원에서 존재가 소급되는 지점을, 그리고 다시 기입될 수 있는 지점을 만듦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바다에 해파리를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해파리와 같이 갇힌 삶의 반경 안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따금 여름〉은 고착된 기억을 통해 자연스럽게 애도가 녹아든 일상 세계를 구현한다. 일상에는 죽음이 묻어 있고, 그것은 뾰족한 차원에서 나를 찌르지 않는다. 〈이따금 여름〉은 죽은 이에 대한 직접적 애도 대신에, 애도로서 기억의 차원이 현실을 넘나들며 세계와의 다른 접면을 만들고 힘을 행사함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과거에 젖어 있고, 그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동시에 그 과거에 대한 고착됨으로부터 역설적으로 자유를 얻는다. 과거는 현재에 비로소 의미화되고, 예외적으로 현재의 자리를 의미화하는 역량을 선사한다. 과거는 그에게 그로부터 풀려날 실마리 역시 준다. 그리고 그 환상으로서 결말이 현실이 아니라는 데서 궁극적으로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 과거-현재의 중층적 시간만이 진실임을 〈이따금 여름〉은 형식적으로 반복하며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9월 3일(목) 19:30 9월 4일(금) 19:30 9월 5일(토) 14:00 / 17:00
장소: 문학시어터(인천 미추홀구 매소홀로 618, SSG랜더스필드 1루 B1층)
작·연출: 최규화
출연: 성희주, 이대관, 이유진, 유주리, 윤상영, 한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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