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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주 작/연출, 〈갱〉: 혐오를 더하기 혹은 갱신하기REVIEW/Theater 2026. 10. 6. 19:31
시대착오적인 것과 혐오

본주 작/연출, 〈갱〉: 혐오를 더하기 혹은 갱신하기[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갱〉의 제목은 주인공 피영이 겪는 조기 갱년기 증상―이는 작/연출의 본주 자신의 자전적 경험으로부터 온다.―의 주요한 글자를 가져온 것인데, 그가 겪는 열감(과 발한의 넘나듦)과 불안정하고도 치솟는 심리 상태 등은 그가 일하는 주방의 공간적 특질을 체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커다란 환풍기 밑에 서서 화를 식히는 피영 단독의 심리적-실존적 차원의 모습은 화기를 다루고 격렬한 몸짓들이 자리한 주방을 어떤 식으로든 연장하여 응결 짓는 이미지이다.
그러니까 피영과 주방은 조응하고 주방은 그것과 같이 피영의 신체가 현시되는 곳이며, 주방은 피영이라는 메타포와 정합적이다. 심리-실재적인 이 주방은 두 번에 걸쳐 피영에게만 환상이 가설되는 곳이며, 그때마다 언캐니한 순간이 발생하는데, 거기에는 자신의 할아버지 천태의 몸이 놓인다. 아마도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자 작품 자체를 문제적인 것으로 만드는 존재가 천태로, 그를 다루는 방식에는 이 작품의 (비)윤리적 차원에 대한 결정적 심급이랄 만한 것이 자리한다.
천태는 타자화된다. 그의 괴이함, 지독함, 시대착오성을 겪어내는 여성의 모습으로써 빻은 늙은 남성에 대한 비판이 손쉬운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예컨대 주방 멤버가 한데 모인 자리에서, 숭고한 “박정희”의 상에 대한 그의 발언에 대해 그의 딸 금옥의 구역질 반응은, 비판이 갖는 대안적 새로움과 갱신의 차원보다는 비판에 대한 적절한 대상이 선취되었음을 재현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낡은 것을 낡은 것으로 반복하면서 타자는 상투적인 것이 된다.
금옥의 반응은 구시대적 감각에 대한 역겨움이기도 하지만 가부장적-남성적 권위를 받아들여 온 것의 생체적 알레르기 반응이 작동한 결과인데, 따라서 더 이상의 수용이란 없으며, 이제 태업을 선언하며 그것을 종료시키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아버지-딸의 관계를 고전적으로 이어 가려는 금옥의 캐릭터 차원에서는 천태의 구시대적임-역겨움의 이미지를 그가 대신 대속해서 무마하여 사태를 봉합하며 그를 방어하는 것 아닐까.
물(신)화되는 과거

천태 자체가 시대착오적 인물이라는 건 그가 치매 환자로서 과거의 기억에 고착되어 있다는 지점에서 물화된다. 그러니까 그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인물이었다(로 사후적 해석에 의해 변화되는 존재)가 아니라, 돌아가 보니/돌아가더라도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었던 것이고, 그(가 소유한 과거 자체)와 결코 대화할 수도 그로 인해 개선될 수도 없는 글러먹은 인물인 것이다.
그는 외부적으로 그리고 내재적으로도 현재와 평행선상을 달리는 인물이다. 그는 과거의 한 지점으로 수렴되어 있는 인물이기에 대화가 불가능하며, 사실상 그 스스로에게 현재가 주어지지 않는 인물이기에 그 스스로도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시대착오적 노인의 모습은 태극기집회 할아버지의 견고하고도 충실한 어떤 이미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은 아닐까. 치매 환자로서 물화는 그가 중앙 조리대 아래로 들어감으로써 처음 발생한다.
그의 왼쪽 팔의 잘려나간 이후의 수술대 위에 올라간 모습과 돼지 발골의 순간은 중첩된다. 이 장면의 기원은 실은 천태 자신의 말에 근거하며, 이는 돼지를 빗댄 인간의 생리적 차원의 행위와 삶 그리고 합리화의 일단인데, 돼지가 처음 새끼를 출산하면 “몸짓이 작고” “삐리”한 자신의 자식을 먹어서 다음 자식의 출산을 예비하며 당장 자신의 생존을 지탱하는 행위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전도시키면, 새끼가 뱃속에서 어미를 먹으면서 나아갈 준비를 한다면, 어미는 그것―‘실패한’ 자식―을 되돌려 새로운 ‘건강할’ 새끼를 예비한다고도 하겠다. 그에 따르면, 천태가 가장 약한 자식 금옥을 선택해 그에게 자신의 잘린 왼팔에 대한 대가로 받은 산재보상금 1억 3,000만 원을 주러 왔다는 것은, 결국 명목이고, 금옥을 잡아먹기 위한 명분에 불과한 것일까. 이러한 혐의 차원의 진실로부터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굴절된 형식화로 진행되는 게 이 수술~발골의 환상이다.
폭력의 연루로서 혈연

돼지의 새비징(Savaging)을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른 자연적 조처라는 지점으로 확장해 인간 질서에 대입하면, 우생학적 관점에 이르게 될 텐데, 또 한편으로는 집단 내 카니발리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에서 국가라는 상급 기관의 지배-통치 체제 자체를 긍정하는 사고와 손을 잡을 수도 있다―가령 박정희가 더 많은 이들에게 이롭기 위해 소수를 억압하거나 살해했다라는 식의 극단적인 사고.
천태의 사고는 무엇보다 “혈연”의 자연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정상적이지 않은 차원에서 성립하며, 양자 관계의 전적인 교감과 일방향적 사랑과 보호의 자리에 개체적 생존 전략의 자리를 놓으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이 위협적-공포적 차원의 발화에서 천태를 수술대에 올리는 피영의 환상은 그 자신이 순전히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나.
거기에는 천태 자신의 환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피영의 환상이라면. 수술대에 올라가서 잘려나간 팔의 잔해를 찾지 못했다고 변명하듯 말하고, 자신이 사무직이라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애원하듯 항변하는 이 종속된 부차적인 인물의 비루한 모습은, 당사자의 고통이 당장 호소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억압된 기억이 풀려나오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 그는 그 순간에도 온전한 개별자가, 환자가, 순전한 고통에 입각한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왜 그는 고통을 감각하(며 늘어지)는 대신에, 세계의 지배 체제에 여전히 순응하(기 위해 의식을 단디 차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 고통은 어떻게 지배 체제에 대한 종속의 차원을 벗겨내지 못하는가. 곧 그것이 천태의 내재적 차원이 아니라면, 그것은 피영의 타동적 존재인 천태에 대한 환상인가, 아님 피영이 마주해야 할 천태의 실재로서 과거이며, 일종의 (트라우마로 잠복되었을 천태 역시 볼 수 없는) 원-장면 같은 것일까.
실재적 환상

그런데 그 환상은 누구를 진정 괴롭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 애초에 천태가 만든 혈연적 착종 관계에서의 끔찍함이 피영의 환상으로 전이되어 돼지-천태에 대한 난도질의 양태로 번져 간 것이라면, 그 환상은 기실 피영이 천태를 잡아먹는 게 아니라, 피영 자신을 잡아먹고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그 가학성의 상연으로부터 스스로 학대당하고 있는 것일까. 아님 천태의 악마성에 대한 방어기제 혹은 반동으로서 그를 수술대 위에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어 실은 안전한 관람자의 위치를 고수하게 되)는 것일까.
이는 상당히 모호하고 복합적이다. 실재와 환상이 교차하며, 실재가 환상을 타고 건너온다. 그런데 환상은 실재의 외양을 빌려 욕망을 실천한다. 가령 피영은 어느새 괴로운 환상의 장면에 직접 들어가서 천태 머리 가에 서서 그를 아래로 희번덕거리는 미소 아래 내려다보며 두 손으로 칼 끝을 쥐고 그의 심장께를 수직으로 강하게 찍으려고 계속 벼르고 있는 것으로써 그 서사의 직접적 실행자가 된다.
그런데 그는 마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천태의 왼쪽 팔을 겨냥하고 자른다. 그것은 필연적인 과거를 완성하는 (데 복무하는) 것일까. 아님 과거를 현재로 고착시키(며 두 시간의 횡단을 영원히 불식시키)는 것일까. 이제 천태는 돼지고기로 육화되며, 곁에서 요리 손질을 하던 조리사들의 요리 재료로 분화한다. 천태의 상반신 쪽 조리대 상판 뚜껑을 열고 들통 안에 천태를 집어넣어 조리하고, 음식으로 조각난 신체는 피영의 입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 서사의 단서 역시 공교롭게도 천태에게서 도출되었었다. 돼지 도축 공장에서 발골을 했던 경험은 소급되어 그에게 재적용되는 것에서 공평해진다. 인간의 세계 내에서 먹히기 위해 걸리지는 동물의 지위에 대한 비판보다는 감응의 차원에서의 어떤 인격화와 비루하고도 격하된 인간을 오히려 사물화하는 것은, 이처럼 언어와 경험에 의해 상호 함입되는 두 신체성의 혼합 안에서 횡단하며 맞물리는 것이다.
부정 위의 부정

인간의 사물화와 동물의 상품화는 내통하며, 그렇게 〈갱〉은 하위 계층 혹은 비인간 존재에 대한 편견과 잔혹한 현실을 교차성의 논리로 내통케 하며 더 자극적인 외양으로 추락한다. 물화되는 (따라서 비판적, 대안적 가능성이 차단되는) 더 낮은 차원의 진실과 연루되는 존재들을 보여줌으로써 세계는 비관적인 것으로, 교착되는 것으로, 윤리적 곤궁의 사태에 빠지게 되는 장소로 구성된다.
가령 피영의 갱년기 증상과 빚이 밀려 있는 사업체 운영의 어려움과 왼팔이 잘려 무모하고도 용단 있게 급작스레 등장한 천태의 삶을 나열하면, 천태의 재산을 피영이 갖다 씀으로써 물리적 차원이 곧 전자는 개선되었지만, 그 둘의 관계가 풀린다거나 의식적인 차원이나 정서적인 차원에서 더 나아진 것이 있던가.
부정성은 처음의 고착된 상태에서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는 것에서 변화 없이 단지 가시화되며 그것은 어떤 악화일로의 상황들을 서로에게 배가하여 증폭시키는 것 자체의 전제가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 외의 특이점을 만들지 못한다, 곧 윤리적 차원에서의 다른 모색 경로를 구성하지 못한다. 그것은 일견 곤궁에 빠진 인간을 가시화하는 것, 곧 대상화하는 것이 거꾸로 어떤 차원에서 의도될 수 있는지의 질문을 누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피영은 헛구역질을 하기 위해, 초과된 먹기를 실행한다. 그의 평소 거식증에 가까운 생래적인 차원으로 가동되는 헛구역질 증세는 악착같이 먹기를 하는 천태와 대비를 이루는데, 거식과 탐식의 간극은 두 캐릭터의 절대적 차이를 보여주면서도 그것이 공통된 개념으로 엮일 수 있음을 전제한다―‘더’ 먹거나 ‘덜’ 먹거나. 천태는 마지막 장면에서 한 번 더 환상인지 실재인지 모를 차원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도 피영은 그에게 주고 얼마 남지 않은 보온도시락의 식사를 한다.
사물 특정적인

그 마지막 행위는 천태의 보상금을 받아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의 기사회생을 위해 사용하게 된바 천태의 사상을 ‘깊숙하게’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천태와 더는 구분 지을 수 없는, 미학적 우위를 꾀할 수 없는 상황을 수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수치가 없으며, 애초에 그가 받아들이는 할아버지의 사상 자체에 수치란 것이 없다.
〈갱〉은 장소 특정적에 앞서 사물 특정적인데, 이것은 주로/거의 스테인리스 재질의 주방 설비나 도구로 덮인 주방은 신체와 맞물리면서 거의 분자 단위로 쪼개어지는데, 이는 대부분 실제로는 전혀 투입되지 않는 재료를 다듬는 헛손질로 연장되지만, 중앙 조리대에 가하는 일정한 칼질의 반복 행위가 기저음을 이루면서 그 자체로 발화의 형식이 깃들게 된다. 하지만 소리의 유무와 상관 없이 요리로서 모든 행위는 일정한 언어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는 단순히 대사와 행위를 같이 하며, 대사 중에 행위가 맞물리는 것과는 다른데, 행위는 실제를 모사하며 실제의 리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는 사물을 결착시키는 상상력을 채워 넣는 게 아니라, 사물이 빠진 자리에 직접적인/또 다른 사물 간의 연결이 채워지고 있음을 감각하게 된다. 가령 칼끝이 도마에 먼저 닿고 채소를 썰어나갈 때, 채소가 닿아야 할 지점에서 공백이 생기고, 앞의 소리가 연장되는 가운데, 본격적인 도마와 칼의 접촉이 가시화된다.
결국 A, (상상적 차원에서만 가정되는 C, 그리고) B의 리듬만이 있고, 두 마디는 그 안에서 더 강화된다. 이때 관객은 그것을 들을 뿐만 아니라 지각하며, 그것의 리듬을 파지하고 분석하며 영식을 파악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하나의 말(에 대한 부속적 차원으)로서 존재하기보다 세계가 현상되는 가운데 그것과 가까운 쪽과 먼 쪽에서 들리는 말의 장소성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소리는 독립적이며, 세계를 낳고, 그 세계 속에 말을 거꾸로 위치시킨다.
실재(적 환상으)로서 사운드

〈갱〉은 이처럼 사물들이 하나의 장소 자체에 가까워지면서―횡축의 중앙 조리대와 그것을 90도로 돌린 좌우 축 가의 조리대 하나씩 두 개, 총 세 개의 조리대가 거의 모든 공간을 차지한다.―, 그 사물과 접면하는 신체의 사물/장소-예속적 상황이 벌어진다. 무언가를 주조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발화가 발생하는 경우는 예외적이다. 여기에 앞선 주조음으로서 사운드는 지배적이다.
〈갱〉은 이로써 희곡 바깥의 것들이 대위법적으로 희곡 안의 것들과 맞서는, 합성되는, 따라서 희곡 이외의 차원이 기이한 실재의 영역에 이르는 어떤 지점에서 독특해진다. 여기서 사운드의 역할은 매우 세밀하고도 중차대하게 자리하는데, 그것은 실재와 극에서 또는 실재로서 극과 내통한다.
가령 피영과 천태가 서로를 마주하며 갈등이 첫 번째로 격화되는 시점, 가족을 버리고 간 할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피영이 표현하기 직전, 백색소음처럼 자리하던 주방 장비의 소음이 꺼진다. 이어 피영은 천태와의 사이에 놓인 칼꽂이에 3개의 칼을 하나씩 꽂고, 파괴적이고 지배적인 눈빛이, 칼이, 소음이 천태를 겨냥한다.
그런데 냉혹하고도 비릿한 천태의 말 이후에, 천태는 앞선 사물화, 곧 테이블 밑에 꾸깃꾸깃 몸을 접어 들어가서는 “우리딸”이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면 안 된다”라고 한다. 이때 발생하는 위기, 혼돈의 차원에 환풍기 소음이 가시화되는데, 그것은 일종의 그것을 녹음하고 편집한 2차 파생 음원을 ‘재생’하는 것과 같다. 곧 그 소리는 외부의 기원(을 전제하지만 단지 지정할 수 없었던) 대신에, 환상적 차원으로 횡단하여 내부화되는 가운데 음원으로서 특질을 메타적으로 드러낸다.
사운드가 매개하는 바

그러니까 사물의 음원이 증폭되며 독립된 음원으로 절취되어 재생될 때, 사물이 기원을 소거하고 하나의 음악적 차원으로 자리 잡을 때, 곧 음원-사물의 자기 발화 영역, 곧 사물의 인격화랄 것이 생겨난다. 어떻게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심리-실재적 차원의 동요와 혼란의 상황 자체를 연출하기 위해, 또한 그것 자체의 강도를 수여하기 위해 〈갱〉은, 먼저 사운드를 실재의 차원으로 활용하며, 그로부터 통약 불가능한 존재들의 맞물림과 극단적 대립의 설정을 예비한다.
천태를 향하던 칼 끝이 순전한 꿈이라기보다 천태의 과거를 또는 왜상을 틈 타, 나아가 그것이 하나의 명목으로 이미 자리하는바 명석-판별한 차원에서 그를 발굴하고 살해하기 위한 절차임은, 무엇보다 수행적이고 실재적인 차원으로 이뤄지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사운드가 매개하는 바가 사물들의 독립적인 공화국을 가설하려는 것보다는 그것이 내재적 차원으로 심리와 결합되는 차원에서, 또는 그 심리에 대한 절대적 차원의 영향력 혹은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가동되는 것 역시 분명하다.
〈갱〉이 인간의 발화 너머, 사물의 소리들을 주목하고 그것이 내는 아상블라주적 공명을 적극적으로 시현하고, 마침내 실재의 영역으로 그것을 확장해 가는 건 분명하다. 피영이 첫 등장한 이후, 가만히 손을 씻으려다가 세정제를 뿌려 중앙 테이블을 닦는 가운데, 말 없이 천태가 등장하고, 금옥이 나오고 나서야 그 둘의 간격을 해소하는 발화가 발생한다. 그런데 금옥의 말은 천태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고, 직접적인 셋의 대화가 발생하는 것 역시 아니다. 천태는 일종의 환영으로서 자리하는 것이다.
주요 인물들을 차례차례 등장시키는 이 시작 장면은 〈갱〉이 앞으로의 그 셋의 유착된 갈등 관계를 미리 예시하는 한편, 무엇보다 실재적 사운드라는 매체적 차원의 발화 너머의 잉여가 삶의 실재가 가진 잉여의 성격임을 규명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이 시퀀스는 사물-공간과 신체의 협응이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현상학적 체험을 보여준다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피영의 강박적 증상으로 처음부터 반복하려 보여주는 것으로만 한정할 수도 없다. 존재보다 선행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처라리 보여준다.
모호한 존재성

첫 세 명의 시차적 (반)결합은 피영의 몸 자체가 주방의 일부이며, 정확히 천태가 실은 환영이 아닌 피영과 금옥의 사이에서 사물화되는 존재론적 특질을 나타낸 것이며, 그 사물화된 지위가 갖는 비가시성이 둘에 있어 다르게 관계 맺는다는 사실로부터 셋의 착종된 관계성의 복잡함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것은 금옥이 피영에게 천태를 매개함을, 그리고 그 전까지 피영이 천태를 알지 못함을 시뮬레이션하면서 의사-충족시킨다.
그런데 이 모든 건 실재적이면서 무의식적이다. 천태는 그야말로 그 둘 사이에서 모호하다. 한편으로 피영의 천태를 아직 자각할 수 없음은 물론 근본적인 차원에서 천태가 그에게 유령이나 다름 없음의 사실을 혹은 진실을 앞당겨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손 씻기와 테이블 닦기는 천태의 등장과 함께 마치 천태 자신을 향한 무의식적 방어와 혐오로 사후적으로 자리 잡지 않는가.
또한 금옥의 등장과 함께 단번에 천태와 피영의 거리가 현실로 이완되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처럼, 금옥에게는 천태가 그들의 삶의 맥락 안에 자연스러운 것으로 있다고 마치 무의식적으로 판단되고 있다. 금옥을 통해 천태는 모호하지만 가시화되고, 실은 금옥은 자신의 등장을 가시화한 것이 아니라 천태가 비로소 가시화됨을 드러내기 위해 기능적 차원으로 가시화되는 것일 뿐이다.
천태가 금옥으로 인해 가시화되었음은 금옥이 천태와 함께(에서만) 가시화됨을 또한 은폐하는 기전이 될 수 있다. 천태는 골칫덩어리와 같은 인물로 이후 부상하지만, 제어되지 않으며,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면모로 점철된다. 금옥은 천태라는 힘을 결정적으로 이곳으로 들여오는 역할을 하지만, 그를 조금이라도 유연하게 다루어 낼 수는 없다. 금옥은 천태의 삶에 부속되어 있는 것과 같은 자신의 지위를 핵심적으로 드러내는 (천태와 마찬가지로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피영의 심리적 공간으로서 세계

천태가 남아 있는 다른 한 손도 작동 중인 믹서기에 넣어 갈아버리는 장면은, 그가 돼지로서 발골되는 장면, 그리고 그 전에 그가 모두의 식사를 준비한다고 직접 곰솥에 끓인 라면 남은 걸 고개를 처박고 먹을 때 그의 얼굴은 완전히 솥으로 가라앉고, 그가 완전히 말의 지위와 얼굴, 곧 인물의 지위까지 반환하는 것으로써 마치 돼지가 사료를 우걱지걱 먹는 것을 환유하는 장면, 공통적으로 그를 격하하는 이 두 장면과는 달리, 그 스스로를 자신이 대상화하면서 동시에 가시화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는 여전히 의식이 온전히 미치지 않는 그의 치매화된, 사물화된 신체로부터의 자연스러운 격발인 것으로 드러내지만, 이는 실은 어떤 판단도 불가능한 인물로 격하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은 그의 폭력적 가시화의 차원으로 환원되는 가운데, 피영의 앞선 도착증적 환상이 실재화되는 것이라는 것이 은폐된다. 묘한/모호한 것은 이 보이지 않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이 위급한 행동이 오직 피영의 관점에서만 다른 차원으로 가시화, 장면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믹서기 앞에 선 천태―그는 초반에 믹서기 버튼을 괜히 한 번 눌러보는데, 이는 곧 이 사건에 대한 명백한 복선이다.―를 마주하며 피영이 서고, 천태의 행위는 피영의 암시, 은밀한 주문에 의해 벌어진다고 복기해볼 수 있다. 이후 붉은 조명으로 믹서기에 갈리는 손과 피의 튕겨 나감이 모두에게 인식되어 공통의 사건이 그제야 만들어질 때, 사건으로 구성될 때 오히려 피영은 자신의 책임을 피해가는 것인 양 등지고 홀로 멈춘 채 그 핏빛 세계의 비극적 인물로서 자리한다.
그러니까 이 일련의 시퀀스는 천태의 사고라는 외부의 실재적 사건으로 촉발되는 피영의 심리적 효과가 아니라, 피영의 심리-내재적 차원에서 빚어진 환상에서만 진정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것은 진정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며, 피영의 심리적 차원에서만 균일한 것으로 자리 잡으며, 하나의 강도로서, 하나의 자연스러운 시간으로 유지된다. 천태의 파국적 장면은 피영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며, 당연한 것이다.
파괴적인, 실재적인

믹서기의 증폭된 소리는 또한 어두운/붉은 조명은 그 갈리는, 실제로 갈리지 않는 손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실재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증폭된 매체의 장악이 다른 매체에 대한 감축 혹은 소거를 부르면서 오히려 그 둘의 종합의 성사보다 더 파괴적이고 강렬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아니 하나의 매체의 장악이 다른 매체의 더 큰 확장으로서 가시화를 구성하며, 의사-출현, 곧 상기시킴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을 포기하거나 기각하는 차원을 보여준다.
우리는 보지 못하고 더 크게 들으며 고통스러워한다. 믹서기 신은 마치 그와 같은 감각이 실현되는 장면이다. 실재는 제대로 또는 현실적인 차원에서 감각되지 못하고, 이후 이 사건의 여파만이 진정된 사태로 펼쳐진다. 도로시와 바리는 일을 그만두게 되는데, 이는 천태의 사고가 봉합과 은폐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나아감을 그들이 촉구‘했’지만 그것이 이미 되지 않는다는 점을 묘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호하다.
곧 그들의 윤리는 적극적 요구 자체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타자의 책임에 자신이 맡겨진 상태를 타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어설프게 봉합되는 데 그친다. 그들의 요구는 자신들은 책임이 없지만, 그럼에도 책임을 다했음의 명목을 만들기 위한 행동에 그친다. 그것은 결국 자기의 진정한 책임을 부인하면서 숭고한 자기 외양을 완성한다. 따라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해소되는 것이 없다. 대안이랄 것 역시 없다.
〈갱〉은 그 둘의 나감과 함께, 완전한 부재로 하강한다. 사물-공간(이 다였던 이 세계)의 사라짐은 현실 자체가 완전히 종식됨을 의미한다. 곧 마지막에 이르러 주방 자체를 다 치우고, 다른 곳으로 터전을 기약하게 되는데, 이때 장비를 나르는 광경은 하나의 정합적 풍경을 해체하는 것이며, 잔여적인 것들을 향해 세계를 분해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지루하기보다 을씨년스럽다. 모든 사물은 제자리를 이탈하며, 본래 가진 그것의 의미가, 사용이 중단된다.
역사적 왜상을 봉합하는 우리의 자리에서

그것은 마치 천태의 사건 이후의 기억을 봉쇄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이며, 천태라는 왜상적 존재를 아니 천태로서 왜상적 진실이 가하는 곤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강박적 의례의 확장판으로 보인다. 곧 피영은 처음 천태의 배후와 맞물려 손을 씻고, 마지막에는 이 공간 자체를 철회하며 씻어낸다. 그런데 이는 역설적으로 환상으로 등장하던 천태를 실제의 공간에 불러오기 위한 주문으로 변화한다.
곧 모든 게 정리되고 나서(야) 천태는 다시 등장한다. 물론 부재의 자리이기에 그의 출현은 자연스럽다. 한편으로 이런 위치성 자체가 그 전에 비해 너무 이질적이다. 사실상 어둠 속 은밀한 은빛 세계의 차원이 예리하고도 날카롭게 그곳의 심리를 옥죄어 나가고 있다가 그것이 ‘걷히고’ 마치 햇빛이 비치는 야외의 감각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새로운 느낌으로 피영과 천태는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밥을 찾는 천태에게 피영은 보온도시락을 건네고, 그가 먹고 남은 음식을 떠먹는데, 이는 천태라는 존재와의 뒤섞임을 수용하는 것임을, 삼키는 것 자체를 긍정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삼켜짐, 이미 삼켰음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곧 그의 산재보상금으로 새로운 장소로 이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타협은 〈갱〉이 부정성의 자리를 밟고 올라선 자리에서 우리 삶이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역설적으로 역사의 부재하는 자리로 소급해 가게 만드는데, 그것은 천태의 논리, 곧 박정희 정권하의 경제 부흥 정책으로써 달성된 국가의 현재적 부의 논리를 비판하거나 전적으로 거부하지 못하고 무자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삶을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하강시킨다. 〈갱〉은 그 지점에서 천태를 완전히 소화해 내지 못했으며, 그 한계로서 달콤한 취식에의 전유로써 그것을 봉합하고 있다.
김민관 편집장
일시: 2026년 9월 2일(수) ~ 9월 20일(일)
화수목금 7시 30분/토일 3시 *월 쉼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
작∙연출 본주
드라마투르그 박다솔
조연출 이민주
출연 강혜련 공상아 곽영현 김은희 이주협 조하석
프로덕션 무대감독 유성엽
무대디자인 남경식
무대제작 와스테이지(대표 조환준)
조명디자인 신동선
사운드 Kayip(카입)
의상디자인 EK
분장∙소품디자인 장경숙
움직임디자인 하영미
방언지도 김호준관람연령: 13세 이상
러닝타임: 120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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