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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티무민클럽, 〈그러나 내겐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장소(-없음이)라는 정동
    REVIEW/Theater 2026. 10. 6. 19:32

    관객을 초과하는 시선

     

    안티무민클럽, 〈그러나 내겐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아〉ⓒ혜정[사진 제공=2026 서울변방연극제])이하 상동).

    〈그러나 내겐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아〉(이하 〈아직 마음이〉)는 팔레스타인 댄서 친구인 누아르 살렘(Nowwar Salem)과의 영상 채팅을 전제로 하며, 이는 각종 실타래와 홀로그램 필름지로 꾸민 무대 위의 안티무민클럽의 우지안과 현호정을 아울러 관객을 누아르가 시종일관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구도를 만드는데, 이는 그 현재의 행위 양상이 하나의 장소성으로 전달되는 그 다른 장소성이 이곳을 수용하고 승인함을 의미한다.

     

    현재의 장소성은 오히려 저곳에 있으며, 이곳 전체가 하나의 무대로서 저곳에 수여된다. 이는 누아르의 단독적 가시화에 그치기보다는 관객이 누아르에게 가시화됨을 누아르에게서 확인받고 있는 시점을 이곳에 수여하는 것에 이른다. 이는 서로를 본다라는 점에서 상호 함입되는 구조를 경유하지만, 우리를, 현재를 승인받는 최종 지점은 저곳이 되는 지점이 발생한다.

     

    관객이 보는 시선이 우리에게서 끝나는 특권이 지워지는 지점에 누아르가 절대적인 자아로 갱신되는 지점이 놓인다. 이 지위의 맞바꿈은 누아르의 삶의 지형을 마치 그의 내재적 차원으로 연장하여 안정화한다. 그런데 누아르의 확실한-과잉된 가시화로 인한 지배성은 동시에 그를 취약성의 근거로 잡아두는 것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취약함을 사회적으로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어쩌면 우지안과 현호정은 그 사이에서 일종의 울타리를 가설하는 것과 같다. ‘경계’는 매개의 기능을 갖는다. 이 둘은 하나의 무대이며 그 자체로서 시각적 대상이지만 바깥의 시각 자체를 회유하는 중간적 신체이기도 하다. 무대는 이른바 두 개의 세계가 공-현존한다는 점에서 가상-실재적인 것이며, 세계의 불안정성을 일시적으로 안정화하는 것의 틈새를 실은 목격하게 만든다.

     

    공적 장을 덮는 사적 언어

     

    결과적으로, 우리와 누아르의 상상적 마주침 사이에 그 둘이 있으며, 이 둘을 경유해서 시선은 간접적인 것이 되는데, 안티무민클럽과 누아르 사이의 대화를 공개적으로 펼친다는 데, 누아르를 공연에 경유시킨다는 것에 대한 어떤 윤리적 죄책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것은 “부적절”하고도 “불경”한 것인데, 여기에는 ‘그럼에도’가 따라붙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해진다. 그들은 승화의 장치를 찾는 대신에, 그것을 하나의 정동으로 ‘나열’한다.

     

    어쩌면 여기에 관객은 연루됨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는 사적 언어가 공적 언어가 될 수 있느냐라는 심급의 질문을 오히려 반문으로 돌린다. 사적 언어의 과잉이 공적 경계를 침투할 때 발생하는 지점을 책임지(려 하)지 않고 관객에게 돌려 버린다. 이는 그저 관객에게 토로하는바,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과 부딪히는 사적인 것의 연장으로서 그러하는 것이다.

     

    이는 이들이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음의 차원에서 봉합되는데, 이는 삶이 예술이 되는 것의 이상적 차원과는 다른, 삶을 추출해 오는 예술의 삶에 대한 도구화와 예술의 제도적 차원과의 불가피한 연루를 전제하며 수용하는 것과 같은데, 그러니까 이 사적 차원의 공적 전시에 대한 부분이 정확히 해소되거나 해명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알 수 없는 정동에 휩싸여 있으며, 그것이 여전히 공적 언어가 아니라는 것, 다만 사적인 것‘들’이 공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확약받는 차원에서 그러한 것 아닐까. 그러니까 여전히 공적인 것을 현재로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차라리 유예하며, 그 자리에 사적인 것이 다른 사적인 것들’ 안에 놓이게 됨을 경유하는 것은 아닐까.

     

    퍼포먼스와 우정의 전복됨

     

    〈아직 마음이〉는 어쩌면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지지체가 되는 이 현상이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을 침범하는 세계의 영역을 전도시키는 결과에 의거한 것임을 명시하지 않는다. 우정의 퍼포먼스가 우정을 위한 퍼포먼스이면서 그보다 우정‘에’의 퍼포먼스인지, 그러니까 나아가 명시되지 않은 우정이 퍼포먼스의 연장선상인지 퍼포먼스가 아닌 순전한 차원인지도 알 수 없다. 우정이 퍼포먼스를 성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면?

     

    이는 실은 완전히 작품 내에서 해소되지 않는 차원으로 남는다. 우정의 진정함이 명시되는 게 퍼포먼스라면, 애초에 우정이라는 별도의 실체를 구성하는 것, 곧 퍼포먼스의 진정한 외부로 서 우정의 진정함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퍼포먼스를 매개로 해서(만) 진정한 우정의 여러 관념이 파생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이 미래에 대한 잠재적 유예로서 현재‘들’은 어떤 현재의 외부화로 훼손되는 게 아니라 완성되는 것 아닐까.

     

    이때의 토로는 그 미래가 실현되는 순간에 현재‘들’이 그곳으로 횡단하는 경계를 만든다. 그것은 곧 현재에 대한 변명, 봉합이라기보다 이 현재로의 건너옴에 대한 현재들 안에 자리한 생각들, 이 작업 자체에 대한 의문 같은 것이며, 곧 그것이 지금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늘 동반되어 있었음을 전제한다. 이러한 우정은 왜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사적인 것이 공적인 차원으로 발화할 때 그 관계의 내재적 차원이 훼손되거나 오염될 수 있다는 그들의 우려와 회의의 차원과는 반대로, 사적인 것을 공적 장에서 들어야 하는 것의 명분, 합목적성 따위의 질문이다. 〈아직 마음이〉는 팔레스타인의 지정학적-정치적 차원을 직면하지 않고 존재로써 사상한다. 그리고 그 직접적 이야기들 대신, 우리의 멂과 일시적 가까움을 통한 해소, 그 시간 자체를 귀중한 것으로 부각시키는 데서 멈춘다.

     

    불안전성을 딛고서

     

     

    누아르를 만나고 헤어지는 시간은 일종의 제의적 차원에서 갈음된다. 마법과 같이 문이 열리고 또 닫힌다. 그것은 미래를 기약하지 않고 있으며, 누아르의 일상 공간―현지성에 대한 재현적 차원, 우리와 여섯 시간 정도의 시차가 있는, 이곳과 다른 자연의 시간, 한낮이라는 실재적 차원―에서의 모습과 같이 평범한 일상의 차원의 연속선상에 자리한다.

     

    그와 동시에―그러니까 그곳이 누아르에게는 무엇보다 익숙한 곳으로 감각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그 둘에게는 새로운 현장으로 감각(되어 발화)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친숙함과 사랑이 봇물 터지듯 먼저 교환되기에 이른다.

    외부적 차원은 이 은밀한 관계의 차원 바깥에 있으며―밀려나 있으며―, 중요한 건 안전함의 감각이 편안함의 정서 차원에서 보충되고 지지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직 마음이〉는 이 외부와 내부의 분리가 아니라, 내부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 차원에서 또 다른 외부가 내부와 소통하는 차원을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내재적 차원과 외부적 차원의 경계에 있는 산물을 낳지만, 어쩌면 이 다른 횡단의 차원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노출하면서 가능해지며 또한 노출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닐까. 이로써 역설적으로 불완전한 내부의 조건을 노출시킴으로써 불완전함을 만드는 외부의 조건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 아닐까.

     

    이 외부 도입으로 인한 내부의 가시화, 곧 공적 차원의 가시화와 내부들의 잇기로서 사적 차원의 확장이 맞물리는 지점에서의 어떤 틈이 윤리적 토로의 내용이며, 그것은 결정적으로 비가시화되어 있는 외부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밀려나 있지만 전적으로 우선하는 것이며, 지배적인 것이다. 〈아직 마음이〉는 마음을 전하면서 그 마음이 촉발되는 매개의 몸들과 연루되는 지점을 건드린다.

     

    불결한 또는 은밀한

     


    작업은 그 외부를 도입하는 것의 불결함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외부라는 불길함 너머에서 어떤 연합을 꾀하는 것의 증대됨, 확장의 차원 자체를 긍정으로 수용하면서 그러니까 이 부정성의 차원을 하나의 공적 차원 안의 ‘우리라는’ 경계로서 재구획함으로써 이 경계 안에서의 어떤 상태적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토로는 곧 내부 바깥을 내부로 가설하는 것 아닐까. 외부에 대한 하나의 내부를 만드는 시도 아닐까.

     

    이 외부는 끊임없이 암시된다. 그것은 물리적이고도 은유적인 차원을 띤 대상으로 전환된다.곧 땅이라는 환유적 대상은 의미들을 나르는 의미들의 지지체로서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지며, 모든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와 연합하는 수많은 은유들의 차원에서 어떤 신체적 대상들로 연장된다. 내장의 뒤엉킴과 그것이 이룬 길, 무지개색 (필름의) 얇은 경계 모두 땅을 알레고리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첫 번째, ‘새로운 시간의 입구’를 여는 장면,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의 〈Clair de lune(달빛)〉(1890)에 붙인 현호정, 우지안의 가사 낭독은 “더 갈 수 없는 데까지”로 시작하며, 그 한계로부터 “우리를 어르고 달래줄 땅”이 (역설적이고도 모순적으로) 설정되며, 나는 “환”한 “별”과 “달”의 자연을 볼 수 있을 만큼 안온해진다. 나는 나를 “놓을 수 있”어 그것들을 볼 수 있음을 안다.

     

    “영원한 이름”이 새겨지는 “이제”는 은밀한 우리만의 확약이며―현호정과 우지안이 서로를 보며 속삭이듯 말한다.―, 환상적인 차원의 순간은 오직 일시적이고 임시적일 뿐이지만, 영원함을 약속한다. 그러니까 그 ‘이제’는 누아르에 대한 접속의 순간으로 이전되며, 그것을 불러온다. 이는 그 순간을 위한 작은 주문, 의식 같은 것이다. “시간이 됐어!”라는 말은 “이제”와 같이 우지안, 현호정의 반복된 주문으로 출현한다..

     

    기표를 전유하기

     

    이들은 대략 저녁 7시쯤 된 현재를 설명하고, 우지안은 “밤을 불러오고 있었어.”라고 말한다. 몇 가지 언어-문화적 차이에 입각한 의미의 지연이 발생하는데, 그중 첫 번째로 “밤”은 누아르에게는 ‘Bomb’을, 곧 폭탄을, 그러니까 미심쩍음과 놀라움, 해소할 수 없는 물음을 불러온다―그가 광주에 왔을 때 세탁기 소리가 총소리와 혼동되는 탓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함을 동료에게 위로받았음의 이야기가 추후 언급된다.

     

    밤~‘밤’의 횡단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과 같은 일련의 사태와 한국 상황의 간극, 불일치임을, 곧 그가 그렇게 사상할 것임을 뒤늦게 우리가 해석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비로소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지각의 오류는 AI에게서 온다.

    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팠다 좋아졌다는 근황을 설명하던 현호정의 말에서, (갑자기 아마도 ‘아버지’가) “아저씨”라는 개념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는 부정성을 띤 이 개념을 그들이 부르는 인형의 이름으로 전유하게 됨에 따라, 그 부정성을 탈색하고, 텅 빈 기표 안에 새로운 의미를 요청하는, 집어넣을 수 있게 하는 차원에서 갑자기 부정성의 자리가 붕 뜨게 된다.

     

    그것은 부정성을 비판하기보다 소거하여 우리의 안전한 영토를 만든다는 데 가깝지 않을까. ‘아저씨’는 영토적 개념에 가까워지는데, 그것은 인형이 땅을 구획하고 경로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그런에 이 ‘아저씨’가 AI 번역에서는 “address”로 번역되는데, 이는 문화적 차이, [아저씨]라는 발음 자체에 대한 간극, 그것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의 부재)로부터의 간극 같은 것이 가시화된 것 아닐까.

     

    그런데, 그것이 ‘주소’라는 점에서, 이는 의도적으로 그 뜻 자체를 지울 수 있는 기표 자체의 무한(한 가능)성 자체로부터 (누아르의 관점에서) 자의적인 기호인 ‘아저씨’를 특정하게 채택한 것 아닐까.

    하나의 기의-기표가 내통하는 지점이 문화적 번역의 차원에서 획득될 때, 누아르의 관점에서 우리는 언어의 새로운 주소에 이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운 사람”을 떠올려 보기 위해, ‘그리운 사람’의 먼, 가기 어려운 주소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인형”으로 지정한 것 아닐까.

     

    실재로서 언어들

     

    ‘아저씨’와 ‘인형’ 간의 간극이 ‘주소’와 ‘아저씨’ 간의 간극보다 결코 작지 않은 것이라면, ‘아저씨’의 부정성이 저 너머의 주소(로 옮겨지며 그 땅)에서 그리움을 인계받는 것이 된다면, 문화적 횡단의 환상성은 실재의 차원에서 구가되는 것 아닐까. 현호정과 우지안은 여권 입국 심사 재현 놀이를 하는데, 이때 셋은 내통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ts Council Korea; ARKO)’를 전유한 “디즈니문화예술위원회”, “다르코(Disney Arts Council; DARCO)”의 정식 초대를 받았음을 항변한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전유이지만, 아르코라는 상징적 명칭이 대외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라는 장소를 구획한다. 이때 필름을 앞뒤로 하여, 앞쪽의 우지안은 이 항변의 입장이고, 맞은편의 현호정은 단호하게 그를 막아세워, “출입국관리소”로 되돌려 보내는 입장이다. 이제 오른손에 양말―눈알과 입술을 붙인―을 낀 누아르가 천연덕스럽게 표정을 바꾸고 양말-얼굴을 전면에 내세워 발화하며, 살짝 얼굴을 화면 가로 위치시키고 시선의 방향을 돌린다.

     

    이어 얼굴에 갖다 대며 전화 통화로써 그가 승인받은 존재인지 상황을 확인해 본다. 그런데 이 과정은 불과 셋이 오랜만의 우정을 확인하는 정동의 시간 직후에 벌어진다. 그 전에 현호정은 이 셋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데, 이 작은 다툼에서 누아르가 “피난”을 보내서 미안하다는 말을 우지안이 대신 전하게 된다. 과잉으로서 언어는 언어의 하락으로 옮겨진다. 언어는 문화적-장소적 차원에서 헐거워지기도 무거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비로소 입국 심사를 거쳐 현호정이 “추방”되며 단어는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이때 “피난”과 “추방”과 같은 장소성을 잃어버림에 대한 의미들이 중첩되며 거대해진다. 그것은 사소한 것으로 한 번, 중차대한 것으로 한 번 반복되면서, 갑자기 그 사이에서 언어적 진공 같은 것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 말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었다!’ 무엇보다 이 언어들은 실재이다. 장소에 부착되며, 지워지고 탈락한 그곳 존재들이 짊어질 가혹한 언어가 된다.

     

    절대적 장소로부터의 차이

     

    그런데 중요한 건 이 언어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곧 우리의 차이가 절대적이며, 그 차이로부터 짐작할 수 없는 저곳을 재현 불가능성으로 위치시킬 수밖에 없음, 그래서 재현보다는 그 횡단 안에서 생겨나는 차이에 주목할 수밖에 없음에서 이 작품이 애초에 주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호정과 우지안은 다음으로, 시적-신화적 언어의 반복으로 전쟁의 상황을 표현하는데, 현호정이 우지안의 발을 밟고, 현호정의 우리는 발이 없다는 말에 대해, 우지안은 살아 있을 때 발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발은 물론 땅을 갈음하는 땅에 대한 제유이다. 있음과 없음이 현생과 전생의 차원과 교환되는 이 같은 언어 간 횡단과 교차는, 팔레스타인의 몫 없는 자들이 다른 땅으로 건너오면서는 권리가 있을 수도 있음을 수여한다.

     

    이러한 언어 사용은 그들을 타자화하고 절대화하는 게 아니라, 이항의 논리 안에서 자의적으로 선택되는 세계의 냉혹한 규칙을 가시화하며 우리의 입장이 절대적일 수 없음의 견지에서, 그들과 우리가 수렴하는 하나의 전제를 규칙으로 갖는 가운데, 함께 배가되는 나와 타자에 대한 효과를 쟁취하게 된다. 이 둘은 누아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이때 앞서 언급한 “불경”함이 발생한다.

     

    이때 “해리”라는 단어의 긍정성도 언급된다. 이는 인격적 차원의 정위 지을 수 없는 자리에 대한 수용에 가깝지만, 관계 차원으로 확장을 꾀해 본다면, 안티무민클럽과 누아르 사이에서 기본적-물리적으로 전제되는 것이면서 이후 안티무민클럽에서도 내재적-이념적 차원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곧 호정에 대한 지안의 편지에서 “내가 우리는 하나야!”라고 할 때 “우리는 (결코 하나가 아닌) 둘이야!”라고 말하는 지안에 대한 존중과 경외심이 담긴 시작 부분이 그러하다.

     

    진정한 삶

     


    우정은 너와 나가 떨어져 있기에, 다르기 때문에 성립한다. 나와 너가 ‘같은’ 프로토콜을, 주소를 가질 수 없다. 그러니까 나의 해리됨만큼 나와 너의 해리됨을 상대적인 것으로, 유연하게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현호정의 편지를 누아르가 읽고, 우지안이 동시에 번역한다. 누아르는 현호정의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라는 건 누아르보다 우지안의 입을 통해 ‘먼저’ 도착한다. 다시 누아르가 현호정에게 보낸 답장이 낭독되고, 현호정의 우지안을 향한 편지가 도착한다.

     

    현호정 이후에 우지안이 이야기한다. 그는 “삶을 기도로 만들면 안 돼!”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삶에 통상적인 기도가 진정한 차원을 가장하고 있는 것처럼, 진정한 기도만은 적어도 삶으로 만들면 안 된다. 삶은 기도보다 더한 무엇이다. “밤의 구멍”으로서 “달빛”과 같은 것이 기도의 자의적, 우연적 차원의 순간이 아닐까. 외부의 차원, 그렇지만 내부의 경계를 표지하며, 그것이 잠시나마 안전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순간 말이다.

     

    우지안의 “우리가 정말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에 대응하는, 현호정의 마지막 말, “정말로 우리가 서로를 떠날 수 있을까?” 곧 장소에 신체가 반드시 붙들릴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우리는 역으로 완전히 다른 두 장소를 영원히 선택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관계만큼 우리의 장소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던가.

     

    반대로, 우리가 떠날 수 있다면, 아니 떠날 수 없게 됨에도 떠날 것을 기약한다면, 이와 같이 “이제” 어떤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장소를 초월해서 어떤 떠남을 구성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곧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정말 만나지 않을 수 있을까?” [퇴장하던 지안: “뭘 보고 있어?” 함께 퇴장하던 호정: “달빛”] 누아르는 곧 그런 순간 아니었을까.

     

    장소라는 관계항

     

    무대에서 달빛을 노래하고 달빛을 보는 것, 막바지 말 호정의 “그러나 내겐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아”에서처럼 장소에는 달라붙는 마음이 있다. 장소는 관계와 상관없는 제3항이 아니고, 장소와 관계는 길항하고 절합된다. 장소 역시 하나의 관계항이다. 이곳과 저곳이 다르지만, 공동의 시간을 구성하고, 공동(空洞)의 자리에서 변전이 기약된다. 이제 영상은 꺼진 채고, 암전의 자리를 부글거리는 사운드가 메운다.

     

    “다음에 우리는 다 다르게 된다.” 시간이 바뀌고 장소도 달라진다. 장소가 달라질 것이고, 우리 역시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관계도 이전과는 다를 것이며, 우리는 그 관계를 새롭게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이 올 것이다. 장소의 타동적 주어짐과 장소의 능동적 쥠의 차이가 거기서 분명하게 구분되는가. 아마도 전자를 상기시키는바, 〈아직 마음이〉는 땅 없는 발로부터 발 없는 땅을 끌어내고, 발의 권리를 주장한다.

     

    이것은 신화 속 영원회귀의 질서 속에서 기입된다. 장소 없는 자의 몫이, 몫 없는 자의 몫이, 몫 없는 자의 신체가 영원한 고통 속에서 반복된다. 이 고통은, 아니 분열은 타자를 불러오면서 우리의 논리 바깥에서 우리를 이중 구속의 상태로 몰아세우는 광경이다. 나는 장소―발―가 없거나 신체―발―가 없다. 발은 ‘나’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 장소에 담글 나의 신체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장소-나라는 기이한 부재를 현상한다.

     

    장소와 공동의 몸은 어떻게 같고 또 다른가. 〈아직 마음이〉는 명확하거나 분별되는 것이 아닌, 명확하게 분별되는 것이 아닌 마음을 바라보는 시도이다. 나의 마음을 살핌을 너를 바라보듯 그렇게 한다. ‘그’는 ‘우리’와 교환되고, ‘그’를 경유해 또한 ‘나’와 ‘너’는 교환된다.

    이러한 교환과 횡단의 경로에서, 상호 함입적 주체성이랄 것이 만들어지고, 그것은 미세한 정동 자체가 확장성을 갖고 (주체의) 경계를 손짓하고 있는 순간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엇보다 언어적 덩어리를 던지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모호함의 불안정성 또는 확장성에 힘 입고 있다.

     

    김민관 편집장

     

    9. 10 (목) 19:00
    9. 11 (금) 19:00
    9. 12 (토) 19:00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안티무민클럽AMC antimoominclub 안티무민클럽AMC
    작, 출연_ 우지안 현호정 Nowwar Salem
    연출_ 우지안
    조명_ 성미림
    미술, 의상_ 윤이람
    인형제작워크숍_ 이지형
    무대감독_ 김진아
    조명 오퍼레이터_ 라소영
    사운드 기술 자문_ 목소
    - 원안 「달빛」(현호정),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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