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뭎(Mu:p), 〈출연자 미정 CAST: TBD〉: 하나 이전의 혹은 이후의 하나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26. 10. 6. 19:31
다시 시작되는 순간

뭎(Mu:p), 〈출연자 미정 CAST: TBD〉ⓒ최연근[사진 제공=뭎](이하 상동), 〈출연자 미정〉은 하루 두 번의 공연을 소화하는데, 이는 사실 쌍생아처럼 붙어 있으며, 두 개의 공연에는 공동의, 공통의 간격이 자리한다. 1회차와 2회차를 각각 A와 B로 나누어 본다면, B는 A의 거의 역순으로 진행되며, A의 시작점은 B의 끝점이 되는 구조를 가진다. 공간 중앙에 나무 구조물이 평행하게 세워져 정확히 두 면으로 갈라 놓는 지점에서, 구조물을 180도 회전시킬 때 A와 B의 관객이 서로를 보지 않고 마주하고 있음이 곧 드러난다.
이때 A와 B의 관객은 바통터치를 하게 되며, A의 관객은 다시 처음의 반절 면에서 새로운 시작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공연은 의도치 않게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작품의 구조를 온전히 복각할 수 있는 자의 몫에 A의 관객이 ‘선택’된다. A는 선택할 수 있음을 선택당한다.
여기서 “미정”이라는 말은 새삼 중요해지는데, 이는 TBD, 곧 ‘To Be Determined’―조건들은 이미 선택되어 있다(공연자의 관점).―이거나 ‘To Be Decided’―조건들의 선택됨을 다시 선택해야만 한다(관객 A의 관점).―라는 약어에 대한 두 가지 본말 모두가 따로 또 같이 현상되는 것에 상응한다.
A의 선택이 공연의 잠재된 시간이 이전과는 다른 시간이 펼쳐질 것임에 대한, 그러니까 완전한 하나의 시작이 아니라, 일종의 전생을 업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이미 다른 시작을 담지한다. A와 B의 연속적-중첩적 차원에서, 배가된 인식에서, 또는 이미 모든 걸 기억과 결부 지어 바라보게 될 인지적, 앎적 차원의 관객으로 시작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B 역시 다른 시작을 맞는 것인데, A가 벽의 중앙에 열린 문을 따라 입장할 때 B는 앞선 시간이 함께 시작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연자 미정’이라는 제목은 말 그대로 실현되는데, B에게 가장 먼저 현상된 출연자는 A이며, 그것은 〈출연자 미정〉이 애초에 그 출연자(의 자리에 누군가가 올지)를 결정할 수 없음(Not Decided)의 조건을 선택한 바를 따른다. 그것은 물론 우연과 자의의 영역이다.
미정의, 아니 예정된 만남

출연자를 미리 결정할 수 없음의 차원에서 ‘출연자 미정’은, 곧 B가 A를 바라볼 때 발생하는 그 측면은, 그 직전 A가 B를 향하기 전의 미정과는 또 다르다. 곧 A(의 일부)가 B로 흡수되(지 않)는 차원, 곧 이미 A는 B가 도래할, 잠재적 차원의 장면 안에서 미리~현재 결정되어진다는 것(To Be Determined)은 명확하다. 전자의 미정은 후자의 미정 안에 내속하며 불확실한 변수로 정해진다.
B는 우연하게 결정된 A를 마주하지만, 이 구조는 A라는 이전 시간을 물적 토대로 인계받음이 크게 하나의 구조 안에서의 연속적인 차원―두 다른 시간을 횡단하는 가운데―으로 갈음되는 것 안에서 결정되어진다(Determined)는 것을 A와 마찬가지로 인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두 다른 시간적 존재가 맞물릴 때 실재에 대한 긴장감이 스쳐간다. 그것은 곧 나와 같지만 다른 조건의 관객이라는 존재 자체이다.
〈출연자 미정〉의 이 맞물림과 중층의 토대는 모종의 사건과 같은 동시에 그 결정되어짐을 사후적으로 인지하며 받아들이는 관객의 단계를 동반한다. A는 그 직전까지 우연적인 것이지만, B에 도달했을 때는 필연적인 것이다. 관객의 ‘중층 결정’의 상황은 비가시적 차원에서 일부 펼쳐지며, 두 개의 면을 하나의 축을 기준으로 맞바꾸는 물리적 회전 반경 속에서 구현된다.
이것은 미궁이나 베일에 싸여 있는 것과 같은데, ‘미정’은 공연 내내 이 물리적 차원의 은폐, 경계의 식역 자체로써 체현된다. B의 끝에서 실제의 커튼이 내려가고 가상적 커튼이 드러났다면, A의 시작은 실제의 커튼이 올라가며 가상적 커튼이 드러난다. 여기서 실제의 커튼은 A에서는 무언가를 드러낼 것임을 예고하지만, 그러니까 하나의 막으로서 온전히 ‘보존’되지만, B에서는 그것 자체를 허물어뜨리는 것으로써 사물화한다.
커튼의 두 가지 은유

중앙의 물리적 커튼과 프로젝션되는 가상적 커튼은 서로를 의태하며, 가상은 실재가 걷히는 형식으로써 마주하게 되는 진짜 (가짜라는) 내용이다. 이 두 개의 커튼은 유명한 일화, 제욱시스(Zeuxis)와 파라시오스(Parrhasius), 두 화가의 대결에서, 생산된 두 그림 중 제욱시스의 실제와 똑닮은 대상이 아니라 파라시오스의 욕망의 차원에서 비가시화된 베일을 상기시킨다.
일종의 막 너머의 막이 실재가 아니라 정작 가상이며, 앞선 막이 속임수가 아니라는 것은 이것을 비튼다. 첫 번째 속임수는 정정되면서 (다시) 속임수가 된다. 곧 막이 보조적이고 기능적으로 차용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속임의 기술로서 자리하던 막은 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 실재라는 사실로부터 속임수 자체가 실재화된다. 특히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장면은 커튼이 막이 아니라 뭉텅이의 부피감 있는 사물임을 보여준다.
두 번째 속임수는 막상 드러난 막 자체가 그것을 시뮬레이션한 가상이라는 점에 있다. 이전의 것이 실재라는 지점으로부터 열화된 버전은 욕망의 대상으로서 이글거리고 있지만, 그것은 다분히 환상 차원에서 주어지는 공허하고도 부질없는 이미지의 숙명까지를 발화한다. 그것은 그 너머의 것을 끝내 지정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올라간 커튼, 커튼 아래 커튼은, 실은 ‘하나의 엄청나게 긴 커튼’으로 판명난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앞과 비교해서는) 멀어진 것이며, 공간의 끝을 지정한다. 그 너머에는 진짜 벽이 있지만, 실은 어떤 것도 있을 수 있고 에측할 수 없다. 그러니까 커튼은 커튼(이었음)으로 드러난다. 이 커튼이 진정한 마지막 출연자라면, 미정인 것은 그 바깥의 우리가 짐작할 수밖에 없는, 또는 욕망하는 어떤 실제와 닮은 어떤 이미지이다.
공간의, 공간에의

사람 키를 상회하는 일종의 커다란 의자 모양의 구조물은 각재를 가로 세로로 붙이며 만들어 , 그 ‘의자’의 뒤쪽 평평한 면―가장 긴 면―에 4단에 걸쳐 네 개의 날개를 아래로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도록 약간 벌리는 식으로 차례로 부착한 것이다. 이것들이 비교적 평평한 면 쪽이 앞으로 오도록 돌려 A의 시작과 B의 끝, 그리고 중간 기점에서 관객이 드나드는 통로가 되는 게 그 중앙부 하나의 문-구조물이다.
그러니까 그 유일하게 다른 구조물들과 차이를 갖는 안쪽에 45도와 90도 사이의 어떤 각으로 기울어진 지지대 혹은 손잡이가, 위쪽에서 바닥으로 연결된 채, 그것을 잡고 조형준은 찔끔찔끔 이동한다. 그러니까 그는 시종일관 문과 (물리적으로 제일) 가깝고 문(의 투박한 행동)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 구조물은 그것이 모두 바퀴를 달고 있다는 점에서, 이동 가능하며 그것을 정렬하는 건 장식적이고도 구조적 차원의 미학적 행위 자체이다.
이는 동시에 공간을 구획하고 그것이 무대임을 일러준다. 그것이 무대이기 때문에 공간을 구획한다. 무대는 비정형적이기보다 정형적으로 디자인된다 또는 정돈된다―그것은 무대라는 미학, 곧 무대를 위한 미학일까, 아니면 미학을 위한 무대, 곧 미학이 담기는 무대(라는 착각)일까. 그러니까 그것은 미학적 행위이지만 기능적 차원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미학적 행위와 건축적 행위 모두와 연관을 맺고, 그 둘은 절합되어 서로를 마주한다.
건축은, 건축적 시노그라피는 거시적 스케일에서 공간을 반으로 가르고, 벽-무대를 만들고 그 사이에 입구/출구를 만들고, 동선을 만들고 관객을 반으로 갈라 이접시킨다. 벽은 다시 베일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처음에 저 반대편의 작용을, 관객을 숨기고 지운다. 곧 이 벽-베일은 벽+베일이기도 하다. 구조물들로 연결한 이 벽 앞에 커튼이 드리워진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베일만이 있다. 그리고 이 지점을 〈출연자 미정〉은 중핵으로 연장한다.
중간적인, 매개적인 것의 합목적성

12분 동안, 두 다른 관객 층위가 함께 공간을 채우며, 60분의 러닝타임으로 가산된다. 12분은 두 개의 무대가 동시적으로 절합되며 24분의 질을 수용한다. 이는 무대 전환 구간으로, 두 번째 무대가 역순으로 진행된다는 건 그것이 그 자체로 흥미롭기보다 효율적이라는 데서부터 진정 흥미로워진다. 그것이 사실 공연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까 무대의 일반적인 시작, 다음 회차를 위한 이전 회차에 대한 ‘원상 복구’의 비가시화된 시간 대신에, 공연 전체가 원상 복구 자체의 시간이며, 거꾸로 이 구조물들의 움직임, 배치는 다시 되돌릴 수 있을 정도의 차원에서만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이 구조주의적 정합성의 차원에서만 발현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라면, 그것이 심미적-이미지적 차원에서 배가되는 것은 어떤 의도를 직접적으로 갖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게 보인다라는 것이 〈출연자 미정〉이 앞선 언급처럼, 무대를 위한 기능적 차원의 행위가 무대 자체라는 것, 무대 ‘위’에 고유성이 아니라, 어떤 잠재된, 의도를 알 수 없는 비인간화된 의도의 매개적-실천적 차원에서만 그 고유성이 드러난다는 것, 그 지점에서 지워진다는 것 자체와 긴밀하게 연합되어 나타나게 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출연자 미정〉에서의 혼동은 이 구조물+인간이 실은 구조물 자체이(겠)지만 여전히 인간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온다. 그런데 이 건축에 대한 지지체로서 신체 행위들, 가령 문 자체인 조형준은 문의 커다란 손잡이를 의태하며 가시화되어 있음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자신의 초라한 몸에 대해서는 몸 둘 바 모르는 모드에 젖어있으며, 이 지점에서 인간이라는 잔여는 오히려 수치로서 과잉된다.
건축 연루적 혹은 체현적 신체

〈출연자 미정〉은 구조물의 공간 내 배치의 흐름이 건축적 설계도의 조립 양상인 것과 같이, 스코어상의 수행을 기호들의 물리적 배치의 차원으로 연장하는데, 여기서 퍼포머는 공간 내에 투명하기 있기보다 공간에 부속되어 있다. 곧 투명한 공간이 아닌 건축적으로 구조화된 공간 안에 있는데, 이는 수행의 법칙을 순서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룰에 대한 것이 아니라, 건축의 일부로서, 건축에 흡수되고 흡착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는 움직임의 범주가 건축과 연루되어 건축으로 제한되어 발생하며, 그것을 지지체로 삼되 유동하는 건축의 움직임 자체가 그로부터 반대로 연장되며―‘그러니까 애초에 고정된 것이란 없다.’―, 유동하는 건축적 풍경 자체가 신체적이며, 이 거대한 신체적 움직임과의 맞물림 속에서 미시적인 차원으로 단지 반향될 뿐인 것이다.
움직임은 이 ‘안’에서 일어난다. 이 안을 초과하지 않고 일어나며, 이곳의 경계(를 구성하기)와 함께 일어난다. 그런데 공간의 파악이 곧 경계의 인지, 건축의 파지라면, 그것은 움직임이 투명하게 공간에서 실천된다는 것과, 무한한 자율성과 가능성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과 다른 차원에서의 움직임을 만든다, 또는 그러한 움직임으로 제한한다.
〈출연자 미정〉은 일종의 소극으로서 양상을 펼치고 있으며, 그것은 기호학적 배치이자 그것의 정확한 큐의 이행적 차원에서의 가시화이다. 가령 초반과 후반에 마찬가지로 되풀이되는 조형준의 넘어짐과 멀찍이 떨어진 카산드라 마토스의 조소는 적확한 시차와 함께 맞물리며, 넘어짐의 사건을 비가시화되어 있던 감상자의 출현으로 곧장 이행시키면서 시점을 변경시킨다. 마토스의 웃음[청각]-지나감[시각]의 분절적-간격적 이행/종합은 타자적 제스처에 대한 관람자의 윤리적 대응의 (반사)신경을 급속도로 냉각시키는 장치이다.
무대화 혹은 장면화

그것은 또한 건축적 연장이다. 일종의 장면화로서 건축적 반경이 확장되고 또 그려진다. 곧 직전~직후 막대 걸레로 바닥을 닦기보다 쓸던 최민선의 등장과 함께 조형준의 슬라이딩이 그리고 그것을 치워 버리려는 것도 포함해, 무대 앞의 경계가 지정되는 것이라면, 마토스의 등장은 캐릭터로서 가치 산정 되는 대신, 무대화-장면화의 메커니즘 자체를 가시화한다.
그것은 건축의 전면에서 건축의 구조 안으로의 침투 자체에 대한 텅 빈 기호이다―어쩌면 목소리는 이 건축적 반향으로서 최소한의 질적 차원을 산정한다는 점에서 충만한 기호일 수 있다. 그러니까 주동인물들의 바깥에 있는 듯한, 경계 바깥을 떠도는, 그 자신이 주인공은 아닌 것 같은, 일종의 트릭스터로서,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일종의 차가운 어머니 혹은 새디스틱한 어머니에 가까운 캐릭터로서 (앞으로도 그러한) 마토스가 내는 이 소리는, 기호적 차원에서 어떤 것도 발생시키지 않는, 어떤 영향 관계도 없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그런데 그가 심리적-상징적 차원에서 무의식적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며, 마찬가지로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잠재적 차원의 서사를 이행과 배치의 설계도를 체현하는 것 너머에서 담지한다. 〈출연자 미정〉은 소극으로써 이를 소극적으로 가져가며, 소극은 자신의 서사적 규약 안에서 (어떻게든) 사건이 발생하지만 어떻게든 그것이 해소되는 차원으로 연장된다.
가령 이소여가 사탕을 입에 물고 오물거리다 목에 걸려 켁켁거릴 때 마토스가 뒤에서 명치-배 쪽을 껴안아 자신의 몸쪽으로 당기며 동시에 위로 밀쳐 올리는 하임리히법으로 사탕을 토해 내게 하고, 이는 멀리 튕겨 나가며 최민선이 그것을 치우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까지가 앞선 무대 장면화와 조응하며, 존재에 대한 걸레질을 하는 인색한 캐릭터의 최종 수렴으로서 공통된 장면을 구성한다.
예외적인 움직임

아마도 〈출연자 미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움직임은 이소여가 사탕을 뱉은 후 여전히 안정화되지 않고 누워 있는 마토스에게 선 채로 허리를 숙여 두 번 입맞춤을 했다가 이전의 호흡을 이어 켁켁~헉헉대며 짧은 보폭으로 아장거리며 또한 비틀거리며 무대 안을 돌아다니는 광경으로1, 작위적인 호흡-연출의 상황을 일정한 리듬의 반복으로 승화시키며 유예하는, 곧 계속 무대(의 바닥)에 성근 구멍을 지속하여 만들어내어 그것에 빠져들게 하는 전술을 취한다.
이는 마치 성룡의 영화 속 권법 중 취권을 체현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그 자체의 고유한, 자율적 움직임에 가깝기도 하지만, 그 스스로가 구조체적인 움직임을 띠기도 하고, 구조적 리듬과 사건적 양태가 혼합되는 지점에서, 그것이 사건인데 우연하게도 구조적인 것인지, 구조적인 것을 단지 사건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사건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모호해진다.
여기서 그가 마토스에게 입을 맞추는 장면은 마토스가 누워 있기에 무의식적으로 그를 자신이 방금 살아난 것과 같이 살려내기 위해 인공호흡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어정쩡하면서도 무게가 실린 발디딤이 발생하면서 무게추를 좌우 앞뒤로 저울질하듯 일정한 무게의 신체가 이동하게 되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위태로운 균형의 안정성을 계속해서 시험한다.
아마 가장 길고 메소드적 테크닉이 자율적으로 사용되면서 독립적인 움직임의 무대로서 놓이는 (그리하여 예외적인 차원에서 인상적일 수 있는) 이 부분을 제하면, 대부분 건축적 구조물을 끼고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물화된 신체를 옮기고 하는 일련의 수행사적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설계도적 배치의 요소마다를 이전과 이후의 마디 안에서 확인하는 과정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반복되기 위한

〈출연자 미정〉은 시작과 끝을 일치시키는 것을 향해 두 번씩 반복하며, 따라서 그것을 제외하면 목표랄 것이 딱히 없는데, 어쩌면 아니 필연적으로 이 순행-역행의 구조를 완성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행한다. 따라서 그것은 서사적 차원의 유기성보다 배치들이 하나의 요소로서 가시화되는, 연결-접속의 인터페이스가 구현되는 차원에서, 어떤 신체-구조물의 이미지들이 기입된다.
강호정이 바닥에 앉은 상태에서 자신의 발에 고개를 숙여 양말을 입으로 물어 고개를 들여 빼내는 일종의 크레인식 기계화된 신체 운용은, 김서윤이 양말을 신고 벗고 크록스를 신고 사수하고 하는 과정에 조응하는데, 이는 신체의 자율성을 사물적 차원의 미시성과 겹쳐 놓으면서 감축시키는, 일종의 건축적 유비를 자신의 신체 안에서 내재적으로 약분하여 실행하는 행위와도 같다.
건축 안의 건축적 움직임으로서 이 양말~크록스에 대한 유희적 페티시의 차원이 연접되어 가는데, 곧 그것이 하나의 서사라면 서사이다. 구조적 반복은 처음과 마지막의 한 남성 화자의 목소리-내레이션을 통해 “끝없이 되돌아가”는 과정으로 비유되는데, 그것은 시작에 대한 주저함, 망설임 같은 것과도 같다. “무엇”으로 시작할지 “어떤” 외양으로 시작할지, 지지체와 표현 방식의 사이에서 무한한 고민이 토로된다.
“일단 시작”하는 건 그래서 앞선 조형준의 미끄러짐과 같이 우연하고도 멍청하게 이뤄진다.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주체를 비주체화, 사물화하면서 발생한다. 사건으로써 (비주체적) 주체가 명시된다. 그런데 실은 조형준은 문(짝)의 알레고리이다. 그런데 또한 〈출연자 미정〉은 막의 알레고리로 점철된다.
막이 열리면서 또 다른 막이 펼쳐지는 것과 같이, 사실 아무것도 바뀌거나 달라진 것이 없음은 A-B의 역전적 이행의 구조로서 표기된다. 시작은 끝을 머금고 있고, 끝은 시작을 머금는다. 시작이 반이며, 반은 완성이다. 그리고 또한 조형준의 슬라이딩은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음의 막에 대한 기입 자체이다.
김민관 편집장
2026.09.09.-09.11.
KOCCA 콘텐츠문화광장 스테이지66
09.09 수 18:30 / 19:18
09.10 목 18:30 / 19:18
09.11 금 14:00 / 14:48 (*아티스트 토크 16:20)
*회차별 러닝타임은 60분입니다.
*동일 날짜에 한하여 1, 2회차 중복 신청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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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디트
연출, 구성: 뭎
캐스트: 강호정, 김서윤, 김준환, 손민선, 이소여, 조형준, 카산드라 마토스
협력큐레이터: 박윤영
벽: 플랏엠
사운드: 정진화
조명: 임재덕
영상: 이현지
스타일링: 안솔
영상기록: 이윤식
사진기록: 최연근
진행도움: 김유림
Thanks to: 박혜진
주최/주관: 뭎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는 박선화의 〈마주하기 ; Reflection〉에서의 한 표현 양식을 상기시키는데, 그보다 더 일정한 차원의 건축적 스케일을 구성한다. “그는 정면을 마주하며 숨을 고르고 이내 과호흡 증후군에 걸린 사람으로서 그 호흡으로 인해 뒤집히고 굴복하며 사투하는 몸짓들로써 불연속적인 노이즈의 음악을 대체한다, 더 정확히는 표현한다.” 「박선화, 〈마주하기 ; Reflection〉: 불화로서 몸에서 출발하기」, 『아트신』, https://www.artscene.co.kr/197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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