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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동, 〈번개와 천둥〉: 메커니즘으로서 형식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26. 9. 8. 13:34
과거로부터 건너온 ‘나’

정찬동, 〈번개와 천둥〉©남산제작소[사진 제공=15분연극제](이하 상동). 〈번개와 천둥〉은 미러링을 퍼포먼스의 유일한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내세우려는 시도인데, A와 B가 교차하며 알파에서 오메가로 순일하게 이르는 이 형식주의적 여정은, 그 반대편에서 진정성의 투여를, 헌신적 참여를 이끌어낸다. 처음 언어를 경유하던 미러링은 기억을 경유함으로써 가장 큰 차이를 짧게 가져간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앞선 언어적 공작이 몸의 체득을 통한 응축된 또는 감축된 안무로서 치환되는 지점을 불완전하게 구성한다.
전반적으로 둘의 관계가 묘사와 서술의 차원에서 한 명이 그 바깥에서 보는 자, 곧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이룬다면, 그 안의 대상적 존재는 사실 이전 자신의 말을 교본 삼아 움직이는 주체의 공작이다. 둘은 동시에 현재를 마주할 수 없다. ‘나는 나의 과거에 연루된다.’, ‘나는 너의 더 과거로부터 온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하나의 계보 안에 서로를 덮어쓰며 지우고 열화시키며 변환하고 연장한다.
결과적으로, 둘은 대체로 어떤 상호-동시적 관계 맺기의 지점, 그것이 주는 어떤 감응이나 유대 등의 정동을 수여하지 않으면서 지지체와 매체의 완벽하게 결속된 관계를 가져가는 데 그치는데, 그것은 한 축에서는 현재적이지만 다른 한축에서는 반드시 비동시적 접속으로써만, 시차적인 연결로써만 지속되는 것과 같다. 먼저 미러링을 시작한 박유라를 A로, 그 말에 전적으로 동화되는 임은정을 B로 둔다면, 모든 장면은 “끝”을 지정하며, 그것은 A에서 B로, 다시 그 반대로 시차를 기입한다.
〈번개와 천둥〉이 연극적이라 하면, 이는 번개와 천둥, 그 각각의 이미지와 소리의 시차가 매체의 차이에 의한 동시성의 분화라는 사실을 적시하기보다 대신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는 허구적 서사로 갈음하는 공연의 소개 차원에만 예외적으로 발견되는데―“천둥은 다음의 번개를, 번개는 다음의 천둥을 번갈아가며 예고하는 것만 같아.”―, 퍼포먼스의 시차적 피드백 시스템에는 순수한 둘만의 관계가 아닌, 사실 하나의 매체적 저장 능력이 전제된다.
미래의 ‘나’를 기입하기

그것은 곧 마이크다. 그러니까 제3의 퍼포머는 퍼포머(마이크)-녹음 및 재생(노트북)-송출(스피커)의 중간에 위치하며, 대체로 비가시화되거나 퍼포머와 같이 대상화된다. 하나의 짧은 토막이 이 기술적 프로세스를 거쳐 전달되는 과정에서, 오직 이 기술만이 직전의 순간을 미래화한다. 그런데 이 지점이 토막나는 지점이 발생하는데, 이는 곧 더는 소리가 남아 있지 않은 가운데, 몸으로 기억을 육화하는 후반의 짧은 과정에서 그러하다.
특정 관객이 첫 번째로 미러링된다. 그런데 이는 이미 몸의 가시화 체제 속에 있는 두 퍼포머의 차원과는 달리 가장 직접적이고도 실재적이다. 수치와 무안, 겸연쩍음의 정서가 실시간으로 분절되어 체적되는 건 이 부분이 유일하다.
나의 행동이 간파당하며, 간파당할 것임을 알고 또 다시 움직임을 재개한다는 것이 주는 이 어정쩡함의 차원은, 이 퍼포먼스의 규칙을 해당 관객을 포함해 모두가 뼈저리게 학습하는 차원이면서 실은 하나의 소스를 얻기 위한 기능적 차원의 동원이다.
곧 관객은 관찰당한 후 추출당하고 축출당한다―사실 형식주의는 하나의 이념이(라는 지점에서만 윤리적이)다. 이제 둘을 위한 하나의 고리가 완성되었다. 둘이 하나의 방향을 보고 거리를 벌린 가운데, 곧 한 명은 허공을 다른 한 명은 그의 등을 보는 구도 아래에서, 뒤에 사람이, 헤드폰을 끼고 자신의 직전 녹음을 들으면서 움직이는 앞의 사람을 모사한다.
그러니까 헤드폰을 낀 자에게 들려오는 음성은 그가 앞서 뒤에 위치했던 순간에 상대의 움직임을 기록한 것을 재생하는 것이며, 그를 관찰하는 이의 육성은 현재 수음되어 미래의 나에게 도착하게 된다. 그러니까 과거의 ‘나’와 인접한 매체는, ‘나’의 지표로서 과거에서 현재로 도착한 목소리라는 매체이며, 이것을 움직임으로 다시 번역하는 것이라면, 실은 그것은 그 직전에 ‘너’의 지표로서 과거에서 현재로 도착한 몸이라는 매체에 대한 피드백인 셈이(라는 지점에서만 , ‘나’와 ‘너’는 관계를 맺는)다.
기억을 통한 안무

‘너’의 몸과 ‘나’의 목소리, ‘나’의 목소리와 ‘너’의 몸은 시차적으로 착종된다. 미러링을 하나의 작업 방식, 메커니즘, 메소드로 내세운 또 다른 작업으로 신혜진의 〈전래적인공무용〉(2017)을 상기할 수 있을 텐데, 이는 참고로 최승희의 『조선민족무용기본』(1958)의 구술로 된 무보를 현재 발화의 차원으로 옮기는 가운데, 이에 맞춰 저마다의 움직임 구문으로 동시 번역을 수행하는 작업이다.
이는 전통적인 것이 곧 인공적인 것임을 자조적으로 표시하는데, 처음 일 대 일의 관계로 시작해서 점차 여러 명이 하나의 발화 구문을 수행하는 것으로 옮겨감으로써 개별 지각의 차원이 어떻게 원본이라고 불리는 것을 변형시키며 차이를 발생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천둥과 번개〉 역시 이와 같은 지점들을 자연 내포하는데, 음성 값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 곧 ‘전통’이랄 만한 것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차이를 생성한다.
음성은 임시적이며 계속 흘러간다. 그런데 둘이 서로를 마주할 때 B는 A의 음성을 따라하는 것일까. 그것은 따라 한다기보다 기입하고 체득하는 것이다, 이후 그것을 재현하기 위해.
“공연 중에 번개와 천둥이 칩니다. 조심하세요!” 처음 공연 전에 정찬동이 두 번 관객에게 직접 건네는 말은 예외적으로 제목을 가시화하며, 이미지와 사운드의 시차적 조응, 곧 미러링에 은유의 두께를 입힌다.
그것은 일종의 맥거핀이지만, 중요한 건 그가 말을 할 때 위치를 바꾼다는 것이다. 곧 그것 자체가 반복이 아니라 시차에 대한 생산을 모사하고 있다. 방금 전의 정찬동은 현재의 정찬동과 다른 반복이다. 반면, 그 밖의 모든 사운드는, 발화는 몸을 따라 온 것이고, 이제 다시 말을 따라간다. 몸과 몸의 교환이 아닌, 몸과 말의 교환만이 있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연장하며 맞물리는 피드백 체계 안에서 안무는 이중적이다.
말과 몸의 차이

말이 몸으로 건너갈 때 몸은 말을 상상력으로써 변용한다. 반면 몸이 말로 건너갈 때 말은 몸을 상투적으로 옮긴다. 그것은 언어가 복잡한 고도의 묘사 작용을 하기에는 다급하기 때문이다. 말의 구조성을 쌓는 것보다 몸이 말을 풀어내는 것이 차라리 쉬워 보인다. 즉각 펼쳐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보면서 말하는 것, 곧 시각화-언어화보다 들으면서 추는 것, 곧 이미지화-움직임화의 과정이 조금 덜 강박적이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둘은 말과 움직임을 교차시켜 가며 서로를 체화한다. 움직임은 움직임을 기억하기 위해서, 말은 움직임을 잡아두기 위해서 각각 쓰인다. 서로의 말을 말로써 외우고 움직임을 움직임으로써 익히고 움직임을 말로 외워서 마침내 말로만 하나의 기보를 그릴 수 있게 되고, 공통으로 하나의 조각에서 다음 조각으로 말을 이어 가며 그것을 완성시킨다.
그런데 이 과정 역시 둘은 하나의 완성된 기보를 물리적으로 확정된 상태에서 그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후적으로만 그것이 완성된 형태를 구성하며, 실은 움직임에 대한 말의 다른 번역의 기술을 각자가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총체적인 상에 대한 파지, 구조에 대한 개괄적 이미지가 어느 정도의 공통된 토대로서 자리 잡고 있겠지만, 그 둘의 언어는 엄밀히 같지 않을 것이었다.
박유라가 처음 관객을 미러링할 때처럼 곧 원본과 그 이후의 움직임에는 어떤 상징성도 의미도 없다―더 정확히는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말은 움직임의 단위를 보존하기 위한 중간의 매개이며, 움직임은 언어적 단위를 각색하기보다는 갈음하는, 마찬가지로 번역의 프로세스 안에 있다. 이 과정에서 말과 움직임의 대응 관계는 표현의 창발 가능성과 번역의 부정확성 모두를 가치 평가 내리지 않은 채 횡단한다. 곧 번역은 목적이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다.
평평한 곡선

일종의 강박적 과제의 산물로서 말과 움직임 모두 행해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며, 유일하게 더 나아간 의미를 내포하는 듯 보인다. 곧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 움직임, 서사를 구축하지 않는 말,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운 움직임과 말의 형식이 그것이다. 말과 움직임의 투명성은 시차적-매체적 횡단을 통해 변용되어 간다.
말을 가두는 매체가 또 하나의 비가시적인 퍼포머로 놓임으로써 말은 녹음본으로 남아 손실되지 않지만, 움직임은 보전되지 않으며 그 말에 힘입어 생성될 뿐이다. 말은 그 지점에서 여전히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이지만 움직임은 완전한 의미화를 거부하고 있는 듯 보인다. 말은 불명료한 것에 대해 명확하다. 반면 말은 움직임을 재단하지만 움직임의 가능성을 장악하지는 못한다. 움직임은 명료한 것에 대해 불명확하다.
이 두 매체의 간극과 차이를 선명하고도 투명하게 조명하려는 것이 곧 〈천둥과 번개〉라 할 것이다―그것이 그리고 곧 안무이다. 어떤 안무적 조각이 생산되는 방식이 순수한 움직임의 고안이나 의미의 언어를 형용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차원에서 비롯된다는 것보다 〈천둥과 번개〉가 보여주려는 진정한 차원은, 사실은 끝없는 미러링의 과정, 녹음과 녹화의 형식으로서 매체적 전이의 과정이 반드시 원본과의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표현을 만들어내고 확정 짓기 위한 것으로서 이 모든 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곧 그에 따라 그 결과가 유의미한 어떤 결과로 정착되는 게 아님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통과하는 것이다. 곧 단지 그 만드는 과정이 동등한 차원에서‘만’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니까 어떤 승화의 지점도 없고, 단지 메커니즘에 도달하는 절차들만이 동일선상에서 존재한다.
안무에 대한 퍼포먼스

그럼에도 하나의 원본이 계속 흘러가는 것에 대한 집중력이 전체를 관통한다―이 지점에서 〈전래적인공무용〉이 일종의 포스트모던적 유희의 결론에 도착한다면, 〈천둥과 번개〉는 시차적 반복 자체를 초점화한다. 사실상 그것이 어떤 차이를 발생시키는지는 중요치 않다. 우리는 말과 움직임의 간극을 명료한 내용으로서보다 불완전한 형식으로서 보며, 말과 움직임의 동시적 생산 양식과 변환의 프로세스 자체에 연루되어 그렇게 한다.
한편으로는 두 퍼포머의 마지막 공통의 규준을 공유하는 교환적 차원의 형식적 연대를 제하면―서로를 마주하던 것도 마지막 한 번은 서로를 다시 등지고 앞선 것을 한 번 더 복기하는 것으로 마친다.―, 둘의 관계에서 생기는 정동 같은 것 역시 없는데, 항상 둘의 관계는 시차적이며, 항상 두 번의 “끝”이 반복되는 것과 같이 그렇기 때문이다―처음에는 스피커까지 세 번의 “끝”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두 퍼포머의 차이는, 고유성은 분명한데, 박유라가 태연하다면, 임은정은 난처하다.
그러니까 박유라가 가면을 쓴다면, 임은정은 그렇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그것은 박유라가 처음의 문장을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일까.―, 주어진 정보의 과도함에 대한 대처에서 그가 어떤 곤궁을 겪고 있음이 드러나는 부분이 아주 예외적인 부분으로 있다. 곧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가족오락관〉에서의 ‘고요 속의 외침’이라는 프로그램이 지닌 언어의 시차적 번역의 간극이 주는 유머 같은 것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전반적으로 이 과제의 난망함 같은 것이 능숙하고도 기민한 대처 방식에 의해 처리되고 있음 역시 생각보다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우리는 말과 움직임을 동시적으로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반대선상에서 유머로 승화되지도 않기도 하고 말이다. 〈천둥과 번개〉는 어떤 전형의 움직임을 만들려는 어떤 의도도 없다, 아니 가질 수 없다―그런데 그것이 곧 의도라면. 계속 말과 움직임이 서로를 향해 미끄러지는 가운데, 포획되는 건 완벽한 파지와 번역에 대한 불가능성이다.
그러니까 이 작업은 신체적인 작업이기보다 오히려 이념적인 작업으로 볼 수 있을까. 피드백 체계 안에서 자연히 흘러가는 안무의 공식은, 주체의 내용을 체현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수행하는 반주체적 시도만을 각인한다. 곧 연기가 아니라 퍼포머의 행위만이 자리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춤의 어떤 프로세스(로서 안무)를 보여주는 퍼포먼스(의 특징을 분명히 정의하는 퍼포먼스)이다.
김민관 편집장
제13회 15분연극제
2026년 8월 22일(토)~23일(일)
주최•주관: 15분연극제X인천 후원: 인천광역시 인천문화재단
연출: 정찬동
창작, 퍼포머: 박유라, 임은정
사운드 엔지니어링: 정기훈
수어통역: 김경순, 이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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