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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콘데 데 토레필 El Conde de Torrefiel, 〈호수의 빛 La luz de un lago〉: 서사라는 경계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26. 8. 17. 20:19
시작을 정초하기

©Luca Truffarelli[사진 제공=국립현대미술관]. 〈호수의 빛〉은 무대 위에 스크린을 도입하며 영화와 연극을, 그리고 영화와 현실을 맞세우는데, 이는 스크린 자체―이미지의 지지체―의 조작성, 곧 극장에 임시 가설되고는 하는 스크린에서 이미지가 상영되며, 그것을 가설하거나 그것과 조응되는 ‘바깥’의 스태프~배우의 존재가 영화와 실제 관객 사이를 가로지르는 관객이 됨에 의거한다. 이는 비단 영화를,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게 실제로는 바깥의 신체성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사실 영상은 짧게 상영되고 그치는, 상연의 형식 아래 이미지의 예시로서 주어지는 예외로 한다면, 순전한 이미지가 아니라, 들리지 않는 목소리, 곧 자막이다. 그것은 이미지를 보는 바깥의 신체를 묘사하며, 그들의 의식과 반응을 묘사한다. 이 화자의 차원만이 이미지와 바깥의 신체를 하나의 평면으로, 하나의 층위로 둘을 묶어낼 뿐이다. 그러니까 〈호수의 빛〉이 사실 말하는 건 공통되게도 어떤 예술의 형식을 관람하는 관객이다.
이 문학-이미지는 네 개의 이야기를 통해 네 층위에서 공통적으로 허구적 관객의 위치를 상정함으로써 동시대의 관객의 위치를 재고하고 성찰하는 자리에 최종 관객을 맞세운다. 영화는 반드시 “시작”되고 “끝”나는 것으로 ‘먼저’ 표지된다. 그러니까 영화가 ‘비어 있는’ 시간에 관객이 남으며, 그것을 견디고 수용해야 함을, 그것이 곧 관객임을 관객 스스로에게 체현하려고 한다.
가령 막 뒤에서 나와 그 옆에서 선글라스를 낀 퍼포머가 “이 영화는 이렇게 시작됩니다.”라고 시작하며, 전체 작품의 구조와 형식을 정초하는데, 여기서 무엇보다 선글라스는 영화의 바깥이 특정되지 않는 바를 은밀한 신체로 소급시켜 은폐한다. 그는 그렇게 경계에 있으며, 동시에 경계 너머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로서 신비함을 그 작은 스크린 안에 가둔다.
감속되고 열화되기

©Mario Zamora. 출처=https://www.theatre-odeon.eu/en/la-luz-de-un-lago_25-26-en. 영화는 그와 같이 주어지는 것이며, 글리치 이미지, 올록볼록한 패턴으로 기워지며 점조직화되어 전체적으로 뭉개지고 열화된 그 이미지의 감속 재생의 영화로서 예시는, 곧 퍼포머의 발화 직전 그 옆의 이미지는 지지체‘에서’ 꺼지며, 그 아래에 깔린 종이 막을 추어올려 관객 앞에 세워짐으로써, 곧 관객에 직접 접면함으로써 관객을 영화관의 질서에 예속되게 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관객처럼 가로막히며, 구조 바깥의 사물이 된다.
이때 퍼포머는 사라지는 대신에 소거된다, 또는 이화된다. 동시에 관객 역시 그 스크린으로부터 현실과 이화된다. 그 막은, 불순한 잉여물은 일종의 등장인물들이 바라보는 무대를 체현하며, 그것을 보여주는 대신에, 그것을 둘러싼 환경, 그리고 공연과 관객, 그 모든 걸 묘사한다. 이때 이 지지체는 서사 속 급작스럽게 마주한 예술의 일상 속 가설의 위치에 조응한다.
“각기 다른 도시, 시간”의 “바다에 흩뿌려진 물방울”로서 네 개의 이야기는 ‘융해’된다. 이는 매체적 설명이기도 한데, 전면에 가설되는 여러 차원의 스크린과 무대 양옆에 세워진 두 개의 나무 패널 구조물이 계속 이동하며 스크린이거나 투명한 사물이 되는 것과 같이 무대는 변화하며 정리되고 하나의 빈 공간으로 계속해서 돌아간다. 수행성은 무언가의 토대를 만들지만 또한 철거하고 수거한다.
첫 번째 서사는 다음번의 영화 안의 서사로 흡수된다. 서사의 재서사화는 역사로서 서사를 정립한다. 그 과정에서 서사는 응축되고 납작해진다. 과거는 예술로서 표현되며 이행한다. 이때 고유한 과거의 맥락은 역사의 형상으로 자리 잡지만 그것은 동시에 형식적 차원에서 결정되어 탈구된 사실의 차원에서 수여된다. 현재와의 직접적 연결성은 단락되며, 이는 그 형식 안에서 지시된다. ‘그것은 이전의 이야기이다!’
우연들로서 역사

©Mario Zamora. 출처=https://www.theatre-odeon.eu/en/la-luz-de-un-lago_25-26-en. 이러한 포화, 함입 과정으로서 서사의 연결은 “우연의 연속”으로 표상되는 것이며, 실은 그 역사가 우연들의 중첩됨으로 이어진다는 하나의 진리만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는 파편적 개인의 이야기 차원들이 이룬 모자이크로서 역사가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며, 다만 선형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주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실은 이 ‘우연’들이 역사와 대자적 존재로서 자리하는 관객의 차원에서 관점이자 이념을 위한 의도된 인공물들이며 나아가 사실 공시적인 차원으로 연접되는 것들에 대한 혼동이라는 것은―그것이 역사의 분리된 우연들이 아니라, 우연들로써 ‘결합되는’ 역사의 차원을 현상하려는 의도 속에서―, 명확해 보이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닌 선형성의 인식론을 파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가설되는 무대, 드러나는 스태프, 서사 구조를 명시하는 의문의 존재 등에 의해 매 상황이 다시 설정된다는 것, 규칙이 재수여된다는 것, 그리고 규칙은 언제나 영도를 만든다는 것에 의해 시도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는 곧 파편적이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합성된다는 사실로서 드러나는 듯 보인다.
곧 처음 가장 먼저 나타난 이미지, 곧 무도회장의 어느 한 순간을 상기시키는, 첫 번째 서사의 이후 장면을 예기하는 이 같은 영상, 그리고 그 이후의 변주는 그것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분별하는 우리의 인식적 기제를 공통의 감각을 확인하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그리하여 이 열화된 이미지의 총체는 하나의 이념이 된다.
마취로서 예술

©Mario Zamora. 출처=https://www.theatre-odeon.eu/en/la-luz-de-un-lago_25-26-en. 첫 번째 거대한 막의 자막으로써 95년 영국 맨체스터 외곽 어느 공원에서 영국 밴드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의 콘서트가 열리는 순간이 묘사된다. 이곳은 “휴대폰”도 “LED 스크린”도 없으며, ‘모두가 담배를 피우는’ 일종의 낭만적이고도 유토피아적인 공간으로 표상된다. 이곳에서 토마스와 체칠리아가 만난다.
이 역사의 시점은 사실 다른 이후 세 개의 서사에 비해서도 가장 길고 강렬한데, 이는 “노숙자”, “중독자”, “예술가”가 이루는 “쇠락”한 도시와 대비되는 순간적인 예술의 배경과 함께 사랑, 예술, 마약의 3항조가 결합되며 하나의 완성된 순간을 낳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렬한 순간은 경험의 강도 차원에서 관객성을 다시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과거의 산물이거나 기억이라는 것을 주지한다.
예술은 현실에 대한 마취이며 마약이라는 것, 동시에 예술은 현실에 대한 굴절된 대응 방식으로서 그러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쾌락은 더욱 강렬하고 직접적이지만, 그래서 우리의 신체는 이제는 아마도 더 이상 그렇게 방만한 차원에서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에는 사회-신체적 연관 관계를 은폐하는 분명 현재의 낭만주의적 관점이 있다.
‘쇠락한 도시’의 신체에 대응하는 건, 그것에 반해 부상하는 건 “누구든 어디서나 볼 수 있는”“벌거벗은 관능적인 육체”로, 이는 절정의 음악에서 섹스로 이어지면서 재차 발현된다. 붉은색 배경의 스크린은 파란색이 덧대어지면서 보라색의 ‘중간’ 상태를 이룬다. 무대는 “백년 전 광부”가 “곡괭이”를 들고 파내려간 보이지 않는 노동에 의한 것이다. 노동의 조건이 은폐되어 예술의 지층을 이룬다.
중첩된, 혼합된 흥분

©Mario Zamora. 출처=https://www.theatre-odeon.eu/en/la-luz-de-un-lago_25-26-en. 이후 “바다”의 파란색을 암시하면서, 연결이 아니라, 혼합인 순간, 이 사이의 지층은 두 개의 지층이 다른 하나로 식별되는, 과거와 미래를 실은 현재의 순간이 담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비언어화된 순간이다. “정글”과 “트랜스”를 트는 “클럽”에서 다시 토마스와 체칠리아가 만나고, 토마스가 지갑에서 꺼낸 종이 약 형태의 LSD를 건네고, 둘은 약에 취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끊임없이 리드미컬하고” “앞만을 향해” “나아가는” 음악을 경유해 초월한다, 또는 역사를 도피한다.
이 스크린 막의 중앙부에 검은 사각형의 막, 실은 구멍이 생겨나고 거기에 내장 덩어리가 엉킨 3D 이미지가 드러난다. 이 몸은 “벌거벗은 관능적인 육체”로서 체칠리아의 집을 향하는, 비가시화된 이후 둘의 신체적 결말이다. 또는 LSD-음악-섹스에 취한 그 둘의 뇌이다. 전면이 개방된 상자 안에 매달려 있는 이 신체 구조물을 내리고 다시 무대를 재세팅한다. 그리고 두 번째 서사, 그리스의 한 영화관으로 이동한다.
상수에 스태프가 담배를 손에 꽂고 선 선글라스를 낀 여자로 분한다. 하나의 나무 구조물 막이 정면을 향하며 그의 뒤에 선다―막의 변전이 자연스러운 장면으로 전용된다. 그가 이내 담배를 피워 대고 다시 선글라스를 낀 한 남자가 오면서 그는 사라진다. 이는 그리스 도시의 한 거리에서의 불특정한 대중을 표현하는 것이며,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한 돈과 지능, 젊음 모두를 결여한 이들을 그린다.
토마스와 체칠리아의 이후의 서사는 영화의 서사로 축약되어 삽입된다. 그것은 불필요한 잉여이며, 이후 두 주인공과는 어떤 상관도 없지만 그 둘과 조응한다. “격렬”한 “폭동”이 일어나고 “화염병”이 날아다닌다. 이러한 상황은 내면의 열정을 추출해 낸다. 또는 어떤 위급함의 사태로부터의 흥분과 두려움을 서로에 대한 열정으로 혼동하게 만든다. 은행 애널리스트인 이오아니스는 오랫동안 자신에게 끌려왔다는 동료 페트로스의 고백을 받고, 둘은 뜨겁게 사랑에 빠진다.
신체성의 막

©Mario Zamora. 출처=https://www.theatre-odeon.eu/en/la-luz-de-un-lago_25-26-en. 사회적인 환경이 극적인 사랑의 상황을 추동한다는 설정은 토마스-체칠리아 커플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위대함 따위가 아니라, 또한 반사회적인 사랑의 면모가 아니라, 사랑-극장의 탈정치성으로 오인되는 부분이 실은 사랑-극장의 진정한 (비)정치성에 대한 오해임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사회를 부인하기 위한 둘만의 은밀한 극장은 실은 사회로부터 추동된 것이며, 반사회적이지만 사회와 깊게 연루된다.
‘위기 속에서도’가 아니라 ‘위기로부터의’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극장은 사회 바깥의 독립된 물리적 장소이지만, 사회를 반향한다. 마약은 현실을 벗어나게 하지만, 그 현실의 기원과 정합된다. 따라서 〈호수의 빛〉은 이 위기의 현실 아래, 극장이 수행하는 바가 임시 가설의 토대일 뿐이며, 또한 일종의 환영임을 지시하는 장일 뿐이며, 그 속에서 역사는 서사화되면서 간략하고 무미건조해지는 것―인지적 상관물―일 뿐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 반복되며 차이로 변주되는 역사의 단위가 개인의 특정한 정동의 차원을 함축하는 구조적 차원을 갈음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관객 역시 그 안에서 특별한 동시에 범박한 주체성의 자리에 속하게 됨을 나타낸다. 두 개의 막 이전에 중앙의 스크린은 심장이 튀어나오듯 박동한다.
이러한 막‘에’의 신체성은 이후 다시 출현한, 이번에는 사선으로 중앙 쪽으로 기울어진 두 개의 막의 사이로, 이오아니스와 페트로스를 치환한 두 남자가 출현하고, 중앙부의 점멸하는 이미지로 바뀐다. 파국 속 격정이 영화관에서의 지속적 밀회로 전이된 것이다. 점멸하는 일종의 확장영화는 이 둘 ‘앞에서’ 앞선 서사적 축약을 감행하고, 영화가 끝나고 다시 박동하기 시작한다.
사물적인 것의 힘

©Mario Zamora. 출처=https://www.theatre-odeon.eu/en/la-luz-de-un-lago_25-26-en. 영화, 스크린 자체의 동력은 서사 너머의 힘을, 사물 자체의 힘을, 비인간 존재의 의도 없는 효과를 상정한다. 그런데 이는 스피커의 울림 그 자체를 환유한다. 영화는 곧 소리의 물질성 자체이기도 함을 드러내는 것일까. 이는 처음의 선글라스 낀 여자가 중앙부에 위치하면서, 영화관에 있던 제3자, 그 둘에게 영화의 내용을 물어보는 시각장애인 여자로서 비로소 정립될 때, 그 뒤에 자리하며, 그에게 중요한 청각적 자장으로서 여자와 조응한다.
그리고 화면은 빠르게 깜빡거린다. 하지만 그것은 빛이라는 내용 이외의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앞의 여자는 태연하고 무심하다.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감을 때 그것은 여자 바깥에서 여자‘에’의 효과로 전이된다. 이제 다시 두 개의 막을 좌우로 밀어 넣고, 중앙부에 걸린 스크린 앞으로 검은 천을 깔기 시작한다. 하얀 두 개의 막은 이제 검은 페인트를 칠하는 하나의 캔버스로 변화한다.
마리안느는 해양생물학자이지만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기득권이면서도 필립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바꿀 때에는 치욕을 겪는 대상, 곧 사회적 약자이기도 하다. 앞의 이야기는 이제 그가 지하철에서 읽는 책으로 수렴한다. 그리스 경제 위기 상황 속 두 동성애 커플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필립”에게 남긴 편지가 두 번째 문서로 전달된다. 그것은 이야기를 거치지 않고 직접 현전될 수 있다.
“생명력 그 자체인 아이”에게 그는 코드화된 사회 체제 안에서 존재가 잘못 이용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반대로 “진정한 어른”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기를 충고한다. 페인트를 칠하던 행위는 죽음 직전 할머니의 남은 숨이 사라지는 걸 표현한 것일까. 아님 마리안느가 다른 성으로 변화되기 전 필립으로서 어둠의 신체를 은유하는 것일까. 그리고 중앙의 철판에는 모터 하나가 진동하며 막과 그 사이를 수없이 횡단한다.
사물-이미지 혹은 스크린 위의 사물

출처=https://www.teatredesalt.com/programacio/la-luz-de-un-lago/. 그렇게 2036년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오페라 하우스로 건너온다. 책/편지에서 오페라로 매체가 전이되며, 인공지능이 오페라를 학습해서 극을 올리는데, 오페라는 마리안느가 거대한 파도에 삼켜 사라지는 서사로 축약된다. 이는 스크린이 점멸하는 것으로 상연을 ‘대체’한다. 아니 대체가 가능한 것일까. 사물-이미지의 차원은 비인간-동력의 역능과 바다의 파도가 가진 역능을 겹쳐놓는다. 그것은 과도하며 그 인공의 힘을 나타내지만 실은 단순하고 투박한 표현 양식이다.
중앙의 철판에 진흙을 뿌리고, 이동식 디스펜서로 그것을 씻어낸다. 이는 고전 예술의 편안함에 도취된 관객을 각성시키려는 직접적인 물리적 이화 작용으로서, 오물을 객석에 투척하는 오페라 2막 이후의 행위를 시현하는 것이다. 텍스트를 예외적으로 수행하는 이 부분은, 앞선 페인트칠과 달리, 명확하며 은유적이지 않다.
비판의 대상 역시 명확한데, “오늘날의 예술”은 “박제”되었으며, “와우 아트(Wow Art)”, 곧, “관객에게 와우라는 탄성을 강요하는 예술”은 “찰나의 시각적 쾌락”만을 준다는 것이다. 3장의 선글라스를 낀 지하철 내 트럼펫 연주자가 2장의 극장 속 시각장애인을 전치시킨 것과 같이, 제3의 비가시화된 시각은, 이제 4장에서 BBB 공동체의 이 폭력적 태업 행위와 극장 관객의 동요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극장 안내원 코시모로 옮겨가는 듯 보인다.
코시모는 주체성을 지닌 존재로 피력되지 않는다. 장소를 옮겨 가는 각 장이 극장으로 도착하는 순간, 이것이 현재 극장의 관객에게 소구되는 것이며, 관객과의 거리를 상쇄하는 이 행위가 다시 전도되며, 관객을 등지고 극의 경계로 설정되는 지점에서, 관객은 안전해진다. 이 불쾌한 편안함의 역설은 미래와 현재의 시차 안에서 명목적으로 보존되지만, 이 비판 상실의 극장에 안정적으로 자신의 불완전한, 불온전한 형상을 보존하는 역설의 제스처를 취하는 셈이다.
불쾌한 쾌

© Andrea Macchia. 출처=https://www.teatromunicipaldoporto.pt/en/programa/el-conde-de-torrefiel-la-luz-de-un-lago. 하지만 조금 더 지저분한 건 그것을 씻어내는 행위에 의한다. 곧 붉게 번지며 여전히 판에 붙어 있는 흙은 좀처럼 떨어지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지지직거리는 판은 소거되지 않는 잔향과 얼룩, 흔적을 겹쳐놓는다. 옆의 두 막이 이번에는 다리의 지지체가 보이는 거꾸로 된 상태에서 합쳐지고, 붉은 스크린이 되며 극이 끝난다. 아마도 중요한 건 이 서사가 더는 축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시모보다 더 이색적인 건 중간에는 의상과 관련해서,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1969-2010)의 서사로, 여기에는 그의 가난의 배경과 천재이면서 일의 노예였던 착종되는 삶, 그리고 비극적 죽음이 반향된다. 이는 첫 번째 장의 광산 노동자의 삶으로부터 이륙된 문명의 시차를, 그리고 가속주의적 문명의 체계를 개인의 신체로 환유하는 것으로 상기된다. 〈호수의 빛〉은 역사의 변증법적 순간을 망각과 상기의 차원으로 병치시킨다.
이러한 되살림의 기억은 짧지만 이전의 역사가 미래를 향해 나아갔음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대체로 죽음과 같은 비극의 순간인데, 이는 하나의 역사가 끝났음을 가리키기보다는, 그리고 그것이 현재와 이격되어 무심한 차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기보다는 개인의 특정한 서사가 갖는 무게가 서사화되어 비교적 가볍게 이전될 수 있음을, 그리고 특정 수신자를 경유하지 않으면서도 살아남게 됨을 차라리 의미하는 듯 보인다.
마지막 두 장은 촉각적인 전이로서 갈음되는데, 1장의 더 가까운 시각적 차원이 주는 강도는 더 멀어진 거리 안에서 물리적 충격으로 전이되지만 생각보다 그 강도가 크진 않다. 아마 바다의 파동을 의태하는 철판 위의 떨림이야말로 극의 실질적 클라이막스로 체감된다. 마리안느의 ‘거대한’ 죽음과 함께 극은 마지막 동력을 다 쏟아붓는다.
이후 이른바 투척은 영혼 없음의 행위이며, 이로써 주체적이지 않은 인간의 시대가 지닌 시대 착오성을 무력하게 재현한다. 배설물이기도 하고 자연의 시작으로서 흙이기도 한 이 투척의 물질은 문명 이전의, 너머의 생명력에 대한 갈망과 같은 것일까.
‘호수 위의 빛’은 열화된 스크린에서 얼룩진 막으로 이행한다. 빛을 경유한 흐릿한 사물들의 가시막은 사물이 이미지화된 효과이며, 경계로서 드리워지며 은유와 몰입을 요청한다. 무엇보다 〈호수의 빛〉은 서사 간의 경계를, 경계로서 서사를 드리운다, 문자와 사물을 극단적으로 횡단하면서.
김민관 편집장
일시: 2026년 7월 24일(금)-25일(토) 16:00-17:30‣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B1, 다원공간‣ 언어: 스페인어(한국어, 영어 자막)'REVIEW > Interdisciplinary A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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