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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사이스 William Forsythe,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 One flat thing, reproduced〉: 생성의 기호들REVIEW/Dance 2026. 10. 6. 20:04
전-표현적인 기호

윌리엄 포사이스 William Forsythe,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 One flat thing, reproduced〉ⓒ목진우[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이하 〈편평한〉)은 20개의 금속 테이블로 무대 너비를 거의 채우며, 시각적 차원의 ‘영역’, 부감으로 비스듬하게 내려보는 그래프적 맵을 만든다. 곧 테이블은 무대를 갈음하는 부상된 영토이자 신체의 지지체이며, 신체들을 좌표 차원으로 식별하게 하는 시각적 질서를 ‘차갑게’ 구성한다. 그것은 신체의 용출이 벌어지는 터전이지만, 이를 수용하고 나아가 허락하는 곳으로서 신체 지배적인 어떤 대상이다.
테이블은 신체를 함입하고, 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신체성을 지닌다. “하나의 편평한 것”이 먼저 있고 존재들은 “복제된” 차원으로 거기에 배속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건 그 위에 떠 있는, 부유하는 신체들의 합선을 더 보는 게 아니라, 그 굳어 있는, 고정된 신체들의 굳건함을 필연적으로 ‘더’ 보게 되어 있다. 아마 〈편평한〉에서 가장 인상적인 존재, 모호하고도 지표적인 존재는 조선재로, 그를 경유해 테이블과 존재의 교착이, 혼동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편평한〉을 보는 대부분의 시각은 그것이 기계적, 체계적 차원에서 복잡계의 배치술을 산만하게 그러니까 조망-조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이뤄내며, 어떤 구조적 세계의 작동을 완수하고, 완성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테이블에 엉덩이와 허벅지로 걸터 앉아 무릎 밑 다리를 내리고 있는 조선재의 무의미성의 행위는 정과 동의 대립적 심상 전에 전-표현적인 무언가를 누출한다.
그것은 테이블이 단순히 사물이 아니며, 존재와 결착되는 무언가라는 사실이다. 존재의 사물화는 거꾸로 사물(에)의 존재화로서 연장된다. 마치 그의 두 다리는 작동을 멈춘 채 빈 무게를 담지하고 있는 듯 보이며, 그의 오므라든 어깨는 수직의 심상과는 괴리되며, 텅 빈 시선은 의지가 소거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테이블 위에서 테이블에 대한 어떤 여러/입체적 지배가 아니라, 그 테이블에 배속된, 테이블에 배가된 작은/왜소한 잉여처럼 보인다.
직립과 반직립

〈편평한〉은 어둠을 ‘뚫고’ 나와 어둠을 ‘뚫고’ 다시 들어간다. 그에 의해 암흑은 두 차례 상연되며, 표층과 깊이는 극단적인 대비점을 형성하게 된다. 곧 편평하지 않은 순간이 발생한다. 그런데 관객의 시선은 그것을 거의 편평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조감의 시선으로 내려다본다면1, 동시 다발적인 지점에서 단속적으로 촘촘하게 발생하는 움직임들을 거의 2차원으로 환원 짓는, 그러니까 테이블들 각각의 것을 앞쪽 면으로 뾰족하게 수렴시키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이상적인 차원―〈편평한〉은 일종의 불가능성의 (시각으로 완성되는) 안무이다.―일 뿐, 그것이 실제 극장 특정적 차원에서 모든 관객에게 구현 가능한 시점을 제공하기는 어렵다―가령 문래예술공장의 박스 씨어터에서 2층 발코니에서 1층을 바라보는 구조로 설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테이블에 잠식되지 않는 신체성은 테이블의 긴 다리보다 더 긴 다리를 지닌 무용수에게서 절대적이다, 비교적 초반 직립한 자세 자체가 드러나는 지점에서는.
그와 맞물릴 때 테이블은 마치 신체를 반으로 잘라 먹는 초재적 사물처럼 보인다―더군다나 테이블은 밑으로 조명을 차단한다. 테이블 사이에서 수직성의 기호를 용출하는 건 마치 테이블에의 몸부림, 테이블에서 연장되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분기되려는, ‘빠지지 않으려는’ 필사적 몸부림으로 보인다―그보다 낮은 위치에서 다리를 솟구쳐 테이블에 착지할 때 테이블이 아가리를 벌리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반면, 그에 앉아 있을 때, 곧 반직립할 때 테이블은 신체를 안정적으로 완전하게 파지한다. 이 정(중동―다른 존재가 동시적으로 작동할 때도 그의 반직립이 성립할 때가 있다.―)의 기호는 이 정교하고 산만한 시각 체제의 어떤 기원 같은 것이 되며, 그것의 구멍, 곧 증상적 차원으로 작동하는 구조적 시스템의 어떤 구멍 같은 것으로 자리한다―이는 일종의 나비효과로서, 사실 조선재의 고유성을 경유해 매우 독특한 차원으로 원작이 분화되어 가는 것과 같다.
온전하게/이상적으로 작품을 보는 방법!?

반대로 부감 쇼트의 온전한 평면으로 이 작품을 연장한다면, 그의 시선은 (비)주체의 의미를 감축하거나 소거하며, 완벽한 체제를 완성(?)시킬 수 있는지도 모른다. 실상 테이블을 끌고 와서 정렬하는 순전한 행위가 처음에 발생하는데, 이는 과잉되지 않고 효율성 자체의 기준으로만 점검할 수 있는 부분임에도, 엄격한 시각화의 산물이 아니라, 강박이 가지고 있는 충동 자체를 누출하는 것 아닐까.
가령 테이블의 끌림은 집단이 내는 함성의 환유물이고―특히 실루엣으로부터 가시화되어 가는 이들의 또렷한 얼굴 직전까지의 웅성거림에 대한 음원은 비어 있으며, 정확히는 모호하며, 소리에서 얼굴로 이어지는 그 사이의 간극에서 얼굴로 그 소리를 소급시킬 혼동의 여지를 만든다.―, 그것이 집단의 정리 행위에 의해 집단 스스로의 에너지를 감축시켜 차분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액자로 수렴하는, 테이블을 수직으로만 조우하는 위치성은 테이블과 수평과 수직을 각각 이루는 지점에서 거의/주로 쓰인다는 점―그러니까 네모난 격자의 틀 안에서 몸들이 ‘주조’되고 있다.―에서, 이 공연이 트리플 빌의 세 번째 공연으로 진행되었던바, 그 앞선 공연의 〈메커니즘〉의 초반 터팅에서 연장된 안무를 조금 더 커다란 단위에서 구현되는 것으로 본다면 어떨까.
곧 팔을, 다리를, 앉은 자세에서 엉덩이를 테이블을 따라 쭉 밀어넣는 움직임, 테이블에서 테이블 사이로, 또는 하나의 테이블에서 다른 테이블로 이동하거나 테이블 사이에서 만든 다리의 축을 회전시켜 관점을 변경시키거나 하는 이동의 장소 국소적/특정적 가시화를 제한다면, 이 테이블 내의 순전한 움직임은, 존재 대신에 커다란 대상과 합선되는 수평적 움직임으로 수렴시키는 게 가능하다.
노이즈와 음악 사이

〈편평한〉에서 반직립과 함께 또 하나의 징후적인 기호는 음악인데, 마치 사물이 물리적 뒤가 아닌 과거로 역재생되는 듯한 소리이다. 그것은 사물의 미끄러짐이면서 동시에 과거로의 소급이다. 이는 단속적이고 주기적으로 출현하면서 테이블의 미끄러짐, 마찰 등의 소리를 불길하고 신경증적인 차원으로 증폭시킨다. 그것은 동시에 테이블 소음을 음악적인 것으로 연장하면서 그것을 음악적인 것으로 다시 지시한다.
앞선 반정립이 드방과 같은 발레 기초 동작으로 변형, 적용되(는 가운데 시선과 마찬가지로 예외적으로 정면성에 순전하게 입각해서, 그 다리의 움직임이 정면성을 뚫고 나가고 있)었던 것과 같이, 후반에는 한 발을 익스텐션하는데, 이는 남녀 무용수의 정면을 향한 동시성의 대칭 속에 진행되며, 가장 긴밀하면서도 오래 지속되는 테이블과의 교착된 움직임이 구성된다.
〈편평한〉은 테이블이라는 확장된 신체성, 동시에 테이블이라는 감축된 장소성 사이에서 부유하며, 기실 기계적 셈법에 의해 처리된다. 여기서 발레 움직임의 고유성으로부터 신체의 제약을 또 다른 신체 지지체와의 연결로 바꾸는 일은, 타격음, 쓸어내림의 효과에 의한 덜그럭거림 등을 발생시키게 되는 일인 것과 같이, 딱딱한 것을 떨리는 것으로, 유동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 어떤 에너지를 수여해 그 사물에 효과를 파생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신체의 제약이 급격하게 시각화, 또는 굴절되면서 (미세한 시차로써) 청각화되는, 청각적으로 증폭되고 공간 자체에 반향을 안기는 프로세스가, 실은 〈편평한〉을 지배한다. 가령수직적 용출, 대표적으로 그랑바뜨망은 사이의 수직 축을 회전 축으로 경유해 테이블을 찍는 ‘변용된’ 착지에 이르는 것과 같이 움직임은 빠르게 타격으로 수렴하고 멈춘다.
불연속적, 연속적

불연속적 연속성, 곧 A의 비연장―단절―이 B의 시작―분절―으로 연결되는, A와 B(, C, D…)의 오직 기계적 연결‘만’이 있다. 이것이 포사이스의 “대위법”인 셈으로, 그것이 누여 놓은 X-Y 축의 그래프 안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안무의 전부이다.
이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미지는 전적으로 산만한 데다 겹쳐져서/흐릿해서 그것을 시각적으로 조망, 파지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대신 청각적 응결점으로서 그것을 수렴한다면, 사실 그것은 음악적으로 보잘것없는, 불성실한 차원이 될 것이다―대위법이 아니라, 뚝뚝 끊기는 비리듬의 모스 부호 같은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주로 타격음의 노이즈는 안무를 정립하는 하나의 핵심적 요소인데, 그것이 그 자체의 독립적 신체에의 공명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예컨대 한 명이 뒤에서부터 앞으로 두 테이블을 하나로 연결된 평행봉인 양 왼손과 오른손을 차례로 짚어 가며 이동하는 움직임이 있다. 물론, 이 병렬되는 타격음 자체가 하나의 기호로 추출될 것이다.―, 다음 동작의 큐를 지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일종의 음악에서의 지위와 동일한데, 그 자체가 소리라는 매체로서 드러나지만, 분산된 신체들을 유일하게 하나의 평면 안에 포함시키는 일이 된다. 그러니까 독립적 움직임의 분기점이자 새로운 움직임의 분기점으로서, 관계의 확장에서도 특별하게 ‘원격’적 동시성을 가능하게 한다―일자가 전부의 차원에 포함된다, 또는 일자와 전부의 대비를 구성한다.
가령 지휘가 텅 빈 세계의 유일한/예외적인 중심의 지표로 전반의 흐름을 파지하고 규제하고 종속시키는 하나의 축이지만 그것을 따르는 매체 사이에서는 들리지 않는 텅 빈 기표―발화의 기호에서 소리를 소거한 것―라면, 〈편평한〉에서 소리는 연속성을 분절하고 동시에 불연속성을 일시로 봉합하(여 연속되는 것으로 착각, 혼동하게 하)는 기술이 된다. 곧 마치 지휘자가 예외적으로 소리를 낼 때 연주가 중단되(어야만 하)는 것과 같다.
소리의 위상 혹은 효과

움직임은 세계 내 편재하지만, 소리는 세계를 재편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툭툭 끊기는 또한 끼어드는 이 삼만한 흐름을 유일하게 재정렬하는 힘을 가진다. 소리는 세계 자체의 분절이다. 그런데 이는 그 자체의 연주가 아니라, 계속된 전개 안에 마디를 심어 그것이 지속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까 사실 대위법은 소리와 소리가 아니라, 소리와 움직임 자체로 구성된다.
정신없이 전개되는 움직임들에서 기점이 되는 건 움직임이 아니라 소리이며, A-흐르는 움직임들과 소음, B-타격음과 듣기의 신체들, C-재편된 움직임의 흐름과 소음의 전개 양상이 만들어진다. 사실 B는 찰라이며, 타격(과 잔음)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움직임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이 있기보다 소리가 강세를 둔 장소가 생겨난다가 맞다. 물론 이는 시각적 제약의 극장 공간으로 인해 초래되는, 동시 병렬의 안무에서 대위법을 추출해 내는 것이 어렵다는 것에 기인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복제된”2 〈편평한〉은 소리 기호가 지닌 무대의 재편이 실은 소리 자체의 무대 장치적 증폭을 거쳐 선명하게 전달되어 온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 부분이 크다. 곧 움직임의 표지점이 되는 동사들의 발화~분출이 잘 파지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초연의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 깊이의 차원에서 더 멀리 지각되었던 데 비해 무대와 객석의 간격이 좁은 극장 차로 인해 한층 가깝게 전달되는데, 소리는 더 편평해졌다는 곧 오목해졌다는 느낌을 준다―이는 소리의 공명이 객석과의 거리가 바퉈지면서 감축되는 것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편평한〉은 두 번의 재연을 통해, 원본을 체화시키는 과정을 조금 더 가져갔으며, 어떤 지점에서 그것은 더 능숙한 지점으로 표현되었다고 보인다. 공간을 (테이블로써) 분할하고, 움직임의 단위를 (소리로써) 분할하고는 가운데, 편재성과 독립성의 차원으로써 움직임의 단위를 쌓아나가는, 그리고 그것이 겹쳐지고 함입되는 관계성의 임시적 단위 안에서 작동할 때, 존재-움직임 간의 대위법이 화려하고도 신속하게 발생하는 중이다.
p.s. 〈편평한〉은 입체적인 안무 기보법의 차원 자체로서 기입되는 작업이기도 하며, 2000년 초연 이후, 오직 무용수들의 변이를 통해서 반복 재연/재현되는 중이다. 그러니까 그것의 동시대성은 동결 건조된 작품을 다시 재생한다는 데에 있을까. 곧 차이마저 붙들어 놓을 수 있는 ‘복제’, 복제할 수 없는 차이―DNA―들을 하나의 생성에 근접시키는 절대적 법칙으로서 그 기보법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 1. 가령 다음 영상은 부감 쇼트 촬영으로 작업을 새롭게 관점화, 분석함으로써 작품이 어떻게 몇 개의 지배적인 큐―“Go”, “Sit”, “Freeze” 등―와 함께, 입체적으로 발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참조=《Norah Zuniga Shaw》, https://youtu.be/iPwyVs9NSrA?si=XWXDLOa8IeeuXygY. [본문으로]
- 1. 정옥희,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 DNA 복제로 탄생한 클론」, 『객석』, 2019년 1월 14일., https://auditorium.kr/2019/01/%ed%95%98%eb%82%98%ec%9d%98-%ed%8e%b8%ed%8f%89%ed%95%9c-%ea%b2%83-%eb%b3%b5%ec%a0%9c%eb%90%9c-dna-%eb%b3%b5%ec%a0%9c%eb%a1%9c-%ed%83%84%ec%83%9d%ed%95%9c-%ed%81%b4%eb%a1%a0/., 2026년 10월 7일 검색.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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