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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김, 〈씻김, 무악과 만나는 몸의 자전〉: 전통의 순수 보존적 차원 혹은 형식적-실험적 차원REVIEW/Dance 2026. 10. 6. 20:03
내부로 소구되는 춤

[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 〈씻김, 무악과 만나는 몸의 자전〉(이하 〈씻김〉)은 김영은, 홍은주, 김순정, 그리고 무녀 이소영의 실제 씻김 이후 박은하로, 각각의 무대들을 거친 후 모두가 함께하는 열린 무대의 시간이 만들어진다. 상수 가에 시나위 그룹 신청악회의 연주가 동반한다. 제목은 ‘씻김굿’을 분절해서 조금 길게 풀어 쓴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무대의 실질적 행위자들의 결합, 곧 매체적 결합으로서 음악과 움직임의 자리를 명시한 이 제목은 왜 공전이 아닌 자전을 택한 것일까.
씻김이 무녀의 역할, 곧 외부로 향할 때 또는 외부를 매개할 때 발생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또한 외부의 응어리와 한 따위를 품고 또 다른 외부의 초재적 힘을 끌어오면서 그것을 해소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공전이 맞지 않을까. 이 움직임의 방향을 뜻할 개념으로서 ‘자전’은 무녀로서 역할이 적어도 강단 있는 독립적인 모습으로 가시화됨에서 연원한 듯하다.
사실 전통춤의 원리가 중심의 축을 몸에 이전시키는 것으로, ‘자전’은 춤의 근본을 따른 무의식적 선택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이는 구심과 원심의 방향성에서 더 잘 판단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씻김굿은 결국 무녀를 기준으로 힘과 흥취를 모으고 증폭하고 극대화한다―그런데 이는 다시 무녀를 중심으로 한 공전, 그 기저에는 다시 신을 중심으로 한 공전의 차원이 전제하는 것 아닐까.
특히 무대의 단연 하이라이트인 하수에서 상수를 잇는 길게 허공에 늘어뜨려 길을 낸 하얀 천[베], 곧 길베의 등장 이후, 그 앞에 모든 무용수들이 도열하는 장면은 그 길, 띠를 경계로 관객이 접근할 수 있는 포털로 기능한다. 이는 일종의 컨베이어벨트와 같은 사물이 다른 끝으로 건너가는 길이기도 한데, 그 천을 위에서 사물로써 쓸어내리는 동작은 흐름, 흘러감의 동적 양태를 공통적으로 취하는 일이다.
외부로 들썩이는 춤
천은 실제 고정되어 있지만, 무형의 방향성이 입혀지고 있다. 이는 하나의 거대한 (없었던) 임시적 길을 따라 부정성을 보내고 새로운 기운을 가져오는 교환의 작용을 운송 장치의 형식으로서 가시화하는 것과 같다. 이는 “천국”이라는 장소를 지시하는, 장구를 맡고 관객석 쪽에 가장 가깝게 위치한 음악감독 김태영의 그 발화와 겹쳐진다. 그 직전의 포문을 여는 박은하는 절정의 무대를 만든다.
특히 그가 어깨를 좌우로 으쓱일 때 관객은 격하게 동조되어 공간이 들썩들썩한다. 일종의 카오스가 만들어진다. 그가 처음 들고 나온 꽹과리에 대응하는 징이 주요하게 포문을 열면서 연주가 딱 멈추고 꽹과리가 순간 쏟아진다. 보이다~건네다의 어떤 변환의 기울기 속에서 박은하는 꽹과리로 주의를 끌면서(도) 자신의 중심을 유지한다. 허공에서 뒤집고 다시 앞으로 내민다. 이 짧은 반경과 순환 가운데 하나의 세계가, 주의가 만들어진다.
징과 그에 가세한 북이 잠재적으로 있다면, 꽹과리는 요란하게 가시화되는데, 사실 춤과 직접 동반된 악기는 정교하거나 실질적인 음악 생성의 역할보다는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결정되는 장식적인 기호의 부분이 크다. 그것은 시각적 단면의 끝에 붙은, 시각화의 이색적 연장술이며, 예고치 않은 음성적 파장이다. 그것은 거꾸로 무용수의 목소리를 시각화하는 것, 무용수라는 정체를 식별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 비연주성의 연주로부터 공식 연주의 차원 자체가 수그러들고 헝클어지고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은 그로부터 논리 어법을 구사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지며 어떤 틀로부터(도) 해리되며 비정형성을 띠는 과정에서, 어떤 다른 형식을 고안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박은하는 초반 거의 움직이지 않고, 멈칫할 뿐인데, 음악 역시 그러할 뿐만 아니라, 그 상위의 차원에서 잠재적이다.
확장되는, 내파되는 음악
그러니까 음악을 머금고 거대하게 운용한다, 국소의 몸짓으로써 말이다. 그러니까 미시적인 것은 시간의 격차를 이고 지며 질적 차원의 길이와 부피를 구성하여 거대해진다. 이것을 동양적인 차원의 잠재적인 것, 그러니까 역설적인 차원과도 같은, 덜 움직이는데 최고치의 강도를 유지하는 것이라 한다면, 거기에는 물론 숨의 자재(自在)적 운용의 역량이 기저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발산이 아니라 수렴으로서 움직임,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강력한 현존으로 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리고 무의 운용이 에너지의 강도로 치환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찬가지로 숨을 붙잡아 두어 유지하는, 구심적 사상이며, ‘자전’의 원리를 나타낸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박은하의 무대 장악력은 단연 발군인데, 이는 앞선 무대들이 대부분 정적이고 닫힌 무대의 차원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연주는 내재적으로 혼란을, 분열을 겪기 시작한다. 장구는 다른 모든 연주에 엇박으로 가는데, 이는 마치 박은하의 움직임이 음악에 온전히 조응되지 않고 그것을 비켜나갈 때, 그것의 신체성을 갈음하는 장소를 점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또 다른 신체성이 있다. 한편, 이 음악의 이질적 장소는, 불협화음은 고음역의 태평소의 장악, 곧 모든 음을 누그러뜨리는 장악으로 인해 가능하다.
하지만 꽹과리라는 확고하고도/물리적이고도 상징적인 지표로부터 모든 연주가 휘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과 같이, 음악은 꽹과리의 자유도가 높아지는 것과 함께 그것과 조응할 수 없는 차원에서 일견 소극적 양상을 연출하게 된다. 여기에 화룡정점을 찍듯 박은하는 꽹과리와 채 끝에 달린 천으로 장구의 중간 몸체를 확 치듯 두 번 건드리는 행위를 한다. 이는 높은 자유도를 직접 지배력으로 바꾼 순간이기도 하고, 소극에 포함된 악단의 외양을 더욱 희극화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참여적인 혹은 연루적인
꽹과리와 채를 각각 한 손에 든 채 몸을 숙이고 절을 하면서 동시에 내려놓는 장면은, 공간이 우묵해지는 광경을 만든다. 이 대단원의 마무리 이후에 길베가 출현하는데, 그 전의 무대는 이소영이 공연의 연출을 맡은 진옥섭과 공연을 초대한 축제 감독 이종호를 무대에 불러와 50,000원 짜리 지폐 한 장씩 받는데, 이를 넋 당석에 끼게 한 후, 정면을 향해 앉은 둘의 등을 한 명씩 지전으로 만든 신칼로 쓸어내린다.
마지막 길베에는 직전에 나왔던 객석의 노부부 한 쌍을 비롯해, 여러 관객이 무대를 드나드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굿판은 애초에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자연스레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든다. 이 지점에서 남산예술국악당 자체에 주목할 수 있을 텐데, 원형 무대와 프로시니엄 아치가 절충된 이 극장은 낮은 무대 높이와 무대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인해 무대에 대한 근접적, 촉각적 지각이 상대적으로 프로시니엄 아치에 비해 더 발생하게 된다.
물론 이소영 전의 김순정의 고풀이까지는 관객이 참여하지 않는 프로시니엄 아치에서의 무대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럼에도 그것들이 정면성을 향하는, 공연자를 인지하는 관객을 메타 인지하는 공연자의 의사-상호 연루성의 피드백 체계로 운영된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의 보라색 의상의 긴 소매는 손을 대신하면서 기괴한 느낌을 일부 주는데, 특히 이러한 느낌은 소매에서 손이 빠져나와 허공에 들 때 손은 숭고한 승화로 또 결정적 순간으로 응결됨으로써 반전된다.
고풀이는 바깥이 아니라 입고 있던 장삼의 고름을 푸는 내재적인 차원의 풀이이며, 따라서 의상은 하나의 공간이자 세계라 할 수 있다. 이 푸는 실제 동작에 이어 김순정은 점차 생기를, 능숙함을, 여유를 더해 나간다. 홍은주의 제석굿 역시 “내 몸 안에 나를 점지”하는 것과 같이, 1인 무대의 차원을 서사적 차원의 내재적-주관적 차원으로 수렴시키는데, 그로부터 “지워지지 않는 마음들, 버리지 못한 마음들까지”를 풀어내는 것으로 나아가며, 성찰적 차원을 관객에게 연루시킨다.
식역의 자리
처음 무대에는 장구를 세워, 그 위에 꽹과리들을 쌓고, 그 위에 쌀을 가득 담은 대접을, 그 위에 숟가락 두 개를 수직으로 꽂아 두고, 넋을 그 위에 올린다. 김영은의 손님굿은 90도 절로 시작하는데, 이는 수도와 수련과 같은 기호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머리를 민 모습에 검은색 의상 한벌은 이를 강화한다. 배에 얹은 손은 신체 중심을 잡는 호흡법의 일환이다. 또한 위쪽부터 등 쪽으로 기울어지며 수직으로 낙하하는 입체적 궤적이 거기에 배가된다.
분절과 유연한 리듬, 속도의 층차를 가져가는 동작, 스텝을 활용한 신체 전반의 운용은 강단 있고도 강렬하다. 김영은의 자유로운 위치 이동은 공간 내 손님의 위치를 체현하는데, 곧 그 스스로가 손님을 맞는 예의를 체현하면서도 타자성의 위치를 가져간다. 또한 악단의 곁에 머물고 보조를 맞추고 하며, 세계를 확장하고 또 세계에 맞물린다.
김영은의 움직임은 사실상 완벽히 현대적인 그것으로 봐도 무방하며, 그로부터 전통적인 차원을 거꾸로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는가의 견지에서 그의 춤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씻김〉에서 김영은은 움직임과 독립적 무대 자체로서 가장 밀도 있고도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는데, 그것이 손님굿인 만큼, 아직 모호하고 열린 단계의 차원을 정위하는 또 가늠하는 지점에서 신비로움과 잠재성이 더 강조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매력이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아직 형식적으로 완성도 차원에서 모호함으로 귀결된다. 김영은 자신이 공간적 차원의 식역이고, 혼란한 공간적 질서 내에서 차원을 열어젖히며 식역으로의 접면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는 원형 무대의 차원에 가장 걸맞은, 입체적인 장소의 변화를 그려 나간다. 그것은 차라리 좌표 없음, 장소 자체의 잃어버림과 같다. 이는 전반적으로, 진옥섭의 여는 말이 소거된 자리에서 시작되어 더욱 모호해진다.
무대화되는 전통의 양가적 차원
〈씻김〉에는 특이하게도 화려한 입담과 해설의 몫을 풍부하게 가져가는 진옥섭의 사회가 거의 부재하는데, 처음부터 그는 등장하고서도 관객 한 명을 객석에서 초대해 오는 것으로 말을 갈음한다. 그로부터 그 불러옴이 적잖이 어정쩡해지고, 또한 그 존재가 무대 첫 등장인물이라는 점이 다소 모호해진다. 말의 소거는 한을 보듬고 푸는 시간의 충일함을 가져가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지만, 연출로서 이 공연을 내부에서 진두지휘했기 때문이겠다.
서울세계무용축제는 20년 가까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에서 국가무형유산 진도씻김굿이 좌초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세계무용의 한 부분으로, 곧 우리나라 전통춤 문화의 상징적인-대표적인 차원으로 기입하고자 한다.
제의성을 띤 공연이 그 자체의 원형성에 현대적-예술적 실험성을 더한 채, 무대화될 때, 그것은 한 축으로는 전통적 가치의 절대적인 고유성을 전제하는 한편 다른 한 축으로는 감상 가능한 지점으로 소구시키는 두 가지 전략이 결합되어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세계무용축제는 매년 한국의 전통 춤을 축제에 일정 비율 끼워넣음으로써 한국의 역사적-보편사적 차원의 축을 한국의 주요한-핵심적 차원으로 상정하는데, 이는 일종의 예외적인 프로그래밍으로서, 다른 국가들의 춤을 함께 조명하지 않는 지점에서의 프로그래밍이라는 지점에서, 문화인류학적 차원의 견지에서 적용된 부분으로도 보기 힘들다.
그러니까 특히 이번 씻김굿은 ‘씻김’이라는 임시적 단체의 적나라한(?)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 세계 내 문화유산의 가치를 향한 국제 정치적 차원의 시도로 자리매김될 수 있지 않을까.
곧 한편으로 〈씻김〉에는 무엇보다 어떤 주제가 없다. 씻김에 따르는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애도 대상이 빠져 있다. 그래서 이는 안무가 특정적 차원으로, 개인적으로, 무대화되어 거리를 갖는 방식으로 대체로 형상화되는데, 이러한 단계들을 거치고 나서야, 아니 거쳐서 집단적 씻김의 차이가 도드라지며 급속도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이는 전통이 동시대적 차원에서 공명할 수 있는 지점을 부분적으로, 형식적으로만 취한 결과로서 또한 볼 수 있지 않을까.
김민관 편집장
09.16.(Wed) 7:30pm서울남산국악당소요시간 : 60분크레디트연출
진옥섭
무용수
박은하, 김순정, 홍은주, 김영은
음악감독
김태영
무녀
이소영
가야금
손세영
대금
윤진우
해금
천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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