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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view 하이너 괴벨스의 음악극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진 않았다.」
    REVIEW/Theater 2011. 4. 2. 12:49


    죽음과 실존이 어른거리는 공간에서 소리에의 도취...

     

    ▲ (사진 제공=LG아트센터) T.S.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1917)을 토대로 재구성된 무대

     무대에는 크게 무대가 구성된다. 한 마디로 보통의 무대가 하나의 평면 위주로 객석의 층위보다 낮거나 높은 평지 하나의 땅을 상정하고, 이를 통해 현실이란 터전 그 자체로서의 무대이자 삶과 어둠의 환유적 측면을 강조한 기존의 무대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곧 무대는 세워지고 이는 분명 해체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과정이 이 작품 안에서 모두 존재한다.
     이러한 무대의 구성과 해체의 공존은 이 작품이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구조와 그것의 해체를 모두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텍스트는 해체되고, 메시지 없이, 이유 없이, 내적 독백과도 같이 진행된다. 이는 네 명의 저자가 갖는 문체적 특이성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처음 T.S. 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1917)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시작하는 작품은 하얀 집의 단면도로 구성된다.
     사실 무대는 평면이 아니고 비어있지 않다. 건물 그 자체로 채워지고, 그것이 하나의 땅의 평면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입체적인 환경을 조직한다.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이 텅 빈 무대와 꽉 찬 화이트박스 안에 내적인 의식의 충돌과 해체, 이미지들의 파편적 조합이 수행되는 모던한 공간이 되고, 이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리고 작품에 중요하게 자리하는 결국 죽음이란 알레고리를 가지고 가는 가운데, 시간의 퇴적을 진하고도 결기 있게 가져간다.

     이는 괜한 무대 전환의 신기함 따위를 보여주는 장치라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건 아찔하다. 오히려 이는 결국 구성된 것으로서의 현실, 구조 외의 또 다른 구조, 구조로 이루어진 현실, 그리고 구조 바깥에서의 사유를 관객으로 이전시키는 동시에 시간의 흔적과 현재의 부재를 출현시킨다.

    ▲ (사진 제공=LG아트센터) T.S.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1917)을 토대로 재구성된 무대

     이들이 짐을 쌓아 담는 과정을 찬찬히 하나씩의 장면으로 구성하며 시작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들은 다시 반대의 과정을 하나하나 수행하며 짐을 펼쳐 놓는다. 그야말로 집을 해체시켜 다시 구성한다. 이는 단순하게 보면 영상에서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편집의 가역성을 띤 기능을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지만, 이에 대한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즉 이미 일어났던 일에 대한 역전 현상은 시간의 이중 층위를 현상화한다.

     현재를 보지만 현재를 믿지 못 하고 과거의 장면이 겹쳐져 놓이게 되며 동시에 현재를 되돌리는 것인지, 아님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현재를 해체하고, 다시 시간을 구성하는 식으로 이들은 쌓아 놓은 것을 다시 해체하고, 똑같이 쌓는 무의미한 행위를 통해 현재에 시간성을 입히고 드러내며 삶의 유한함과 무상성의 은유를 직조한다.

     한편으로 이들의 행위에는 사운드가 입혀지는데, 그들의 행위가 일으킬 때 나는 소리를 마이크로 증폭시킨 것이다. 이는 사실상 들을 수 없는 것이기에 일상에 대한 환기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자 내밀하게 그들의 행위가 어떤 일상에의 귀 기울임으로 전환되는 순간들을 맞게 된다.

     여기에 갑작스레 울리는 그저 무대 내 놓인 평범한 사람으로 존재했던 힐리어드 앙상블의 노래는 묘한 레이어를 형성하고 그 레이어에서 새로운 세계를 펼쳐 놓는 힘을 갖게 된다. 곧 무대 내 울림이자 내면 바깥에서의 공명이고 메시지 이전의 표현 자체로 가로 놓인다.
     
     그들의 텍스트는 더 이상 텍스트가 아니라 음계의 파생 그 자체이고 현재의 미끄러짐이다. 아주 묘한 경계가 노래로 인해 생겨난다. 이들은 하나의 악기와도 같이 무대에 서 있고, 배우가 아닌 싱어로 서 있되 무대 내 텍스트 내에서 잡히지 않는 화자의 목소리와 맞물리며 이전移轉할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노래로 위치한다.

     한 마디로 이들은 배우도 가수도 아니며 역할도, 목소리의 화자도 아닌, 어느 세계로의 틈입을 부르는 ‘울림 장치’가 되고, 이는 아름답고도 기묘하다.
     결코 멀지 않지만 먼 곳에서 있다. 곧 먼 곳에서 들려오는 가까움의 한 목소리의 전령이다.

    ▲ (사진 제공=LG아트센터) 모리스 블랑쇼 「낮의 광기(La folie du Jour)」(1949)란 작품을 토대로 재구성된 무대

     두 번째 이들의 무대, 모리스 블랑쇼 「낮의 광기(La folie du Jour)」(1949)는 완전히 무대가 해체되고,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 이후에 시작됐고, 네 개의 칸으로 나뉘어 그 앞에 위치함으로써 이들은 각각의 독립된 자아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연결되지 않는 분산된 목소리로 위치를 점한다.

     이 창문 앞에 커다란 커튼이 내려옴으로써 사실상 무대에서 보이는 집 내부조차도 정말 내부가 되는, 집의 물질적 속성이 가로놓이게 되는 건 중요한 지점이다.
     그리고 이 집 바깥에서 들리는 갖가지 소음들, 가령 오토바이가 지나가거나 하는 등의 소음은 빛으로 처리되며 오토바이가 그 집 바깥에 놓이고, 우리가 그 안쪽에 위치해 있음을 상정케 하며 동시에 외부의 사운드가 외화면으로서의 소리off-screen voice임으로 연결된다. 이는 집에 대해서 완전한 리얼리티를 부여하며 우리는 집 내부를 가까이에서 느낀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네 명의 이야기는 너무나 사적이면서 매끈하지 않고 흘러나가기에 이에 온전히 집중하거나 온전히 그 이야기를 명료하게 이해해 집중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마치 개별자로서 실존적인 삶의 위치에 처한 사람들의 각자의 떠도는 이야기, 공동화될 수 없는 이야기, 스스로의 뇌까림에 그치는 이야기, 초현실주의적으로 이미지들이 병치되는 이야기 정도로 그친다. 포스트모던 기점 이후에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을 뿐인 것과 같이,

    ▲ (사진 제공=LG아트센터) 프란츠 카프카 「산으로의 소풍(Excursion into the Mountains)」 을 토대로 재구성된 무대

     무대의 전환이 다시 따르는 중간 지점에서 카프카의 이야기, 프란츠 카프카 「산으로의 소풍(Excursion into the Mountains)」"이 우화처럼 짧게 제공된다.

    ▲ (사진 제공=LG아트센터) 사무엘 베케트의 「Worstward Ho」를 토대로 재구성된 무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이야기, 사무엘 베케트의 「Worstward Ho」(1982)의 텍스트를 차용해 전개된다. 한 방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이들의 노래가 가장 크게 주효하는 부분이다.
     커튼을 바라보며 길게 발성을 뽑아내는 노신사는 이들이 그 방 자체에서 탄생시키는 그 방 자체를 육화하며 자신의 내면의 독백을 읊는 것이라는 것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부분의 하나다.

     마치 커튼 앞으로 들어오는 빛이 구원의 빛인 듯 그 빛을 보며 이야기하고 죽음의 알레고리들이 환유적으로 떠돈다.
     죽음은 무엇보다 신체의 부분적인 노쇠에 따른 감각적인 것에서부터 출현하는 인식의 구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노신사들인 진짜 힐리어드 앙상블의 존재 자체는 ‘그들의 스스로의 자각과 묘한 자기 언설, 역할이자 역할 바깥에서 그것과 일치하는 것 사이에서의 간극이 일어나며 삶을 진정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이들의 목소리는 왜 구원을 향하는가? 텍스트에서의 죽음이 결코 미래가 아닌 과거가 되며 삶의 무상함,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한 반추와 고찰로 다시 이어지게 만드는가?

     이것은 한데 묶여 있는 것으로,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를 그리는 힐리어드 앙상블의 목소리는 시대의 이전移轉이자 돌아올 수 없는 것의 귀환, 돌아올 수 없는 것의 출현이자 현시顯示로, 시간을 비껴나고 다시 텍스트의 시간성 안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노래 자체만을 즐기기에도 충분한 즐거움이 생겨났을 것이지만, 그것을 붙잡아 두고 있는 텍스트는 이들의 의식 속에 긴장을 출현시켰고, 삶 이전의 것으로 돌아가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케 했다.

     이들의 몸은 첫 번째 시퀀스에서 그들의 몸에 부착된 증폭 마이크가 무대에 잔향을 남겼을 때와 같이 ‘사운드-조직자’로서 자리를 차지한다. 또한 육화된 공간 그리고 육화된 공간으로서의 몸으로 유기적으로 공간과 얽혀 있다.
     냉장고를 열어 빛을 표출한다. 빨간 빛, 이는 지옥의 환희인가! 조명의 묘한 대비 효과가 일어나고, 이들의 목소리가 순간적인 빛으로 거듭나듯 그것과도 대비를 이룬다. 마치 빛은 목소리로 다시 환유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냉장고는 새로운 세계를 열고, 황혼의 빛을 선사한다. 그리고 죽음과 삶을 잇는다. 앞서 나온 커튼과 냉장고, 그리고 방 전체는 이들의 신체가 깃든 곳, 의식이 내재하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냉장고를 열고 가동되는 팬의 소리, 이러한 목소리 바깥에서의 현실의 수행 지점들은 꼿꼿한 이들의 울림 장치로서의 몸이 일상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이며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역설적으로 싱어 이전에 울림-기계로서 너무나도 완벽하게 무대에 놓여 있었음을 상기시켜준다.

     고음악의 종교적이고도 신성한 음악이 주는 낯선 듯 익숙한 ‘옛날적인 것’, 공간에 퍼져 나가는, 미세한 장막의 틈을 열던, 무대의 작은 구멍을 뚫고 나가던 목소리, 그렇지만 무대 안에서 불가해한 텍스트의 늪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호수처럼 열어준 힐리어드 앙상블, 이들은 싱어 내지 앙상블이 아닌 존재 자체의 역할로서 또 무대-현실 공간의 직조자로서의 앙상블로 위치했다. 또한 구조를 만들고 구조의 해체를 통과하던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자리한 하이너 괴벨스의 풀기 어려운 비-텍스트 구문들의 조합이 끈끈한 비-해석과 상기 작용을 성취해 내고 있었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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