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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갈로폴리스 : 거대한 도시> 실존(지루함)에 허덕이는 현대사회(관객)
    REVIEW/Dance 2011. 9. 29. 11:55


    ▲ <메갈로폴리스 : 거대한 도시> [사진 제공 = (재)한국공연예술센터]

    도무지 집중할 수 없음, 파편/조각처럼 너저분하게 펼쳐 놓는/깔려 있는 청각 기표/시각 기표의 병치·혼합·소거 이른바 기표들의 콜라주/배치는 기표 그 자체를 표현/극적 몰입/서사의 흐름으로 바꾸지 않는다.

    알랭 바디우가 『비미학』에서 연극(안의 역할)의 정치성을 이야기했던 것과 또한 다르게 여기서의 인물/존재들은 탄츠 테아터(Tanztheater)의 표현주의적 양식과 맞닿아 있고, 역할들을 제각기 표현하는 와중에 각자의 파편 속으로 사라진다(이는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징후적이고 또한 생채기, 이후의 발현될 징후로 남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발산적인 표현을 만들지만, 한편 증발되는 기표에 가까운데, (또한 하나의 그 자체의 메시지 그리고 기의가 되는데) 이들은 주인공이 되지 않는 방식의 발언/자리를 지킨다(이 점은 브레히트의 소격효과 Verfremdungseffekt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기표들의 병치·혼합·소거의 방식에, 또한 무대의 발현 방식이 의거하기 때문인데, 곧 역할이기 이전에 일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그러니까 극/구조 속에서 어떤 역할로 배분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의 일상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몰입에의 강요가 없다. 그러니까 이 몰입의 강요 없는 지루함의, 자신의 행위를 그저 무의미하게 펼쳐 놓는 행위들은 그저 무의미하기만 할 뿐인데, (과연 그러할까)  이는 현실의 장면들(이는 사실 어폐가 있는데, 이 현실을 일상의 현실 그대로와 상등으로 놓는 것은 물론 아니다)을 무대에 가져옴으로써 이 무대에의 낯선 현실로서의 화법이 무대에 기입되는/놓이는/투여되는 가운데, 무대에서의 몸의 체현(이것이 역할이든 하나의 정치적이지 않은, 역시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에서의 순수한 어떤 타자의 모습이건)이 아주 낯선 방식으로 기록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장소는 철저하게/온전하게 빈 공간이 아닌 완전히/온전히 채워진 공간이며 이 공간에서 몸은 낯설게 투영되고 있다는 것, 바로 이러한 배우·무용수의 중간 지점의, 아니 일상의 한 단편으로서 사람/존재/역할이 아닌 이들은 실존의 길을 모색하는데(실존에 허덕이는데) 이들의 특징은 극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빌딩을 빠르게 하강하며 더듬는/스쳐가는 영상과 미래에 명상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으로서 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데, 곧 이 상승의 부질없음, 문명과 개발주의 그리고 시스템 안에서의 경쟁과 이로 인한 자아를 찾을 수 없음의 일면과 표면/표피적으로만 발산·분출되는 실존의 허덕이는 늪에서 과연 이 내면/자신에서의 탄탄한 중심, 그로부터 샘솟는 지혜·만족·안온함을 느낄 수 있느냐의 일면이다.

    어떻게 보면 <메갈로폴리스:거대한 도시 Megalopolis>는 현대인/현대사회를 객관적이면서도 매우 표피적으로 더듬은 것에 가까울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표현의 방식이 하나의 중심 주체/몰입을 부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피하고 있는 방식은 곧 이들이 우리의 모습이며 이 안에서 나는 피상적으로 관찰되거나 또는 그렇게 관찰하는 존재일 뿐인, 이러한 표피적인 현대인/사회의 모습이 결코 그 표면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결코 온전하게 소통하거나 이해될 수 없는 현대인의 자아 그 자체를 이 극이 수용자인 관객과의 동일선상에서 작품을 놓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음악과 목소리 내지는 음악·목소리는 움직임과 대위법의 선분을 이루는데, 음악과 목소리(음악으로서 목소리 내지는 누군가 그 자체의 목소리)는 모두 주선율을 갖거나 서사의 흐름을 만들지 않고 매우 분절적이거나 하나의 노이즈 사운드 차원으로 그저 반복되는(바이올린의 현을 켜는 것은 현실·현재에 미끄러짐으로 느껴지며 낮게 깔리는 바이올린의 형태는 공명_울림 장치를 활용하지 않는다. 처음 시작된 드럼은 공명과 울림을 매끈하게/풍부하게 선사하기보다 그저 물질성 그 자체가 드러나게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해·파악·감상에는 어려움이 있게 되는데, 여기에 움직임(중심을 잡지 않는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달라붙음으로써 또 그 무의미한 자신만의 일상으로부터 꺼낸(곧 극적 맥락으로 편입되지 않는 그저 놓이는 것으로서) 움직임이 따름으로써 이 움직임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이들은 어떤 구조나 미적인 형태를 만드는 데 집중하지 않고 움직임에 따르는 호흡, 그리고 그 몸과 결부된 일상(온전히 파악되지 않지만)을 파편적으로 드러낼 뿐이고, 이러한 목소리, 또 몸의 어떤 한 쪽으로도 집중할 수 없는 기표들의 병치·혼합·소거는 거리두기적 방식을 구현한다.

    곧 여러 매체로의 분산된 집중/몰입 자신을 (목소리로써) 드러내지만 사실상 공허한 울림에 그치는, 실존적으로 몸을 뒤집고 뒹굴고 실존·일상·존재에 허덕이지만, 이는 어떤 표현도 완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대인/사회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우리 자신이 저기에 섞이면서도 동화될 수 없고, 또한 관계 맺을 수 없고, 관계 맺을 수 없는 각자의 삶의 분절/파편의 방식 속에 역시 마찬가지의 동조를 보내지만, 역시 공허한 그들의 작태에서 내면에의 동화가 아닌 일치됨의, 객관적인 (우리 현실에 대한) 사실을 메타적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이를 어떤 감정적인 동조나 정서상의 고양·슬픔 따위로 읽어내는 시도 자체는 매우 부적당한 접근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매우 지루하고 또 지루한, 도저히 집중과 몰입을 할 수 없는 혼란/병치의 대위법의 가동을 통해 현대인/사회를 구현·체현·인식하는 기제들로 채워져 있는(그 자체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점의 요리하는 모습을 매우 느리게 화면의 분절이 일게 잡고 있는 것은 어떤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말한다. 이 이국에서 부모에게 편지를 쓰는 상황에서 감상주의적 접근, 내면의 투영이 잡는 현실은 실상 어떤 구원도 주지 못 한다는 점에서 또한 허무하다. 그리고 이는 그 허무함 자체 전달/소통할 수 없음의 현실 자체에 대한 인식으로 이끄는 데 더 주안점이 있다 하겠다.

    이 구조적인 도시 공간은 이층 무대를 역동적이고 자유롭게 빠져나가는 한편 연결 짓는 움직임들을 통해 매우 비좁고도(쳇바퀴 같은 생활) 그 속도를 체감케 하는데(발전 속도이자 마천루의 높이와 동일선상의 의미 계열을 이루는), 어쩌면 이 다람쥐 쳇바퀴 같은, 그리고 분출이 분노와 허함이 실존에서부터가 아닌 일상화된 어떤 힘으로 내재화되어 있음을 확인시키는 가운데, 결국 한 명의 벌거벗은 여자를 보는 사람들(곧 주인공 아닌 주인공)을 만드는 가운데, 이 좁은 공간에 피상적으로/표피적으로 흩어지는/사라지는/만나지 않는 사람들이 이 비좁은 세상을 통해 만날 수 있음(연대할 수 있음)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곧 아주 약간의 대안/희망의 가능성을 열어 둔 결말.

    [공연 개요]
    제목 메갈로폴리스 : 거대한 도시

    연극■■□□ 무용■■■□ 음악■■□□ 영상■□□□│독일_한국어 자막
    안무_콘스탄자 마크라스(Constanza Macras)│단체_도키팍 컴퍼니(Dorky Park Company)
    9.28(수), 29(목) 8pm | 아르코_대 | 105분 | 만18세 이상 | R 4만, S 3만원 | 초연 2009

    김민관 편집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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