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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서울변방연극제,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안무가: 황수현): 통제된/되는 감각REVIEW/Dance 2019. 8. 4. 20:55
▲ 황수현 안무,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공연 모습, ⓒ한민주 [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이하 상동)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는 원으로 배치된 관객 사이사이에 피드백 루프로 미세하게 움직임을 확장하는 세 명의 퍼포머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감각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제목은 사실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에서 ‘나’는 관객을 그리고 ‘그 사람’이 퍼포머를 의미한다면, 퍼포머의 감각을 나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것으로, 퍼포머와 관객은 일종의 거리와 지연을 반영한다. 이를 퍼포머와 퍼포머 사이로 바꾸어볼 수도 있겠지만, 세 퍼포머 사이에서는 지연에 따른 간극이 미세하게 반영되는 정도이다. 또는 그 간극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루프)을 형성하는 단위에 속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아래로 떨어뜨린 머리에 얼굴을 묻은 세 명의 퍼포머는 시종일관 땅에서 뗀 그러니까 온몸의 긴장을 안고 있는 또는 그것을 증명하는 두 발의 까딱거림을 지속한다. 이는 거의 호흡의 단위를 가시화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이며, 어떤 단절도 생기지 않는다―다만 그것을 놓치거나 망각하는 관객의 단절이 있을 뿐이다. 몸이 출발하는 입구―관객의 시선이 시작되는 하나의 지지체―로서 발의 까딱거림이 있다면, 가끔씩 고개를 돌려 관객에게 어떤 말을 또는 호흡 자체를 발설한다. 관객의 시선은 이 발을 따라 가거나 다른 퍼포머와 그 주변을 교차한다. 곧 이 셋의 분산됨이 공간의 교차를 구성한다.
사실상 계속된 일정한 박자의 움직임은 기계의 그것과 유사하다. 여기서 퍼포머의 주체성은 지워지고, 공연은 그러한 기계적 움직임의 반복에 중독되거나 감염되는 관객의 신체를 의도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으로써. 반면 거리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이 더 있는데, 이는 퍼포머와 나의 거리가 아니라, 관객 사이의 거리이다. 곧 퍼포머에 감염되는 ‘다른’ 관객이 느끼는 것을 내가 생각하는 것. 퍼포머와 나의 거리―이는 원에서의 분포로 인해 멀고 가까움이 동시에 상정된다―는 관객과 나의 거리로 등치된다.
나는 먼 곳을 동시에(관객‘과’ 퍼포머) 보고 가까운 곳을 동시에(먼 곳‘과’ 함께) 본다. 나의 의식은 저 먼 곳을 향하거나 가까운 곳을 향한다. 이 둘은 양립하지 않고 동시에 충족될 수 있다. 나는 이 까딱거림을 듣고 또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거리에 있는 두 존재를. 또 나는 느끼면서 다른 나, 관객을 생각할 수 있다. 또는 나는 느끼는 또는 생각하는 다른 관객을 생각하거나 느낄 수 있다. 이런 관계의 착종과 감각의 분산된 얽힘은 이 작업이 감각의 극대화를 통한 감각의 체현을 의도하기보다 조금 다른 감각과 인식의 지평을 실험하려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움직임은 조금씩 거대해지고 격렬해진다. 하지만 발의 까딱거림이 지워지는 건 아니다. 휘파람을 전달하여 퍼포머 간의 확장된 공간을 구성하는 건 나아가 약간의 물리적 차이를 두어 관객으로 향해 관객의 반응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휘파람의 과정은 소리의 휩쓸러 감이 느리게 진행되다 시각의 지표를 최종 누군가에게로 찍을 때의 짧은 결절점으로 이뤄지는데, 이때 퍼포머의 몸이 그리는 커다란 원의 반경은 대단히 커다랗게 공간을 휘젓는 것으로 감각된다. 모든 몸은 일정 시간 동안 앉아서 진행이 되고 예외적인 세 몸은 의자에 안착하기보다 의자에 사실 걸쳐져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그 연장선상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의자라는 일종의 평평함으로 합의된 그라운드―그러니까 퍼포머를 관객의 입장으로 동화시켰던 것이다―가 물결치며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분명 충분한 충격일 것이다.
퍼포머는 이제 의자 위에서 몸을 접고 한 바퀴 돌리는 등의 어려운 미션을 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행위에는 지속되는 어떤 소리가 어느 순간 배경으로 깔리게 되는데, 앞선 시각과 청각의 공간에의 혼재상으로 인해 소리는 직접적인 물리적 지표로서 시각으로 수렴되지 않고 그냥 전체 공간에 하나의 감겨 있는 사운드로 인식된다. 마침내 퍼포머들은 의자를 벗어나 하나의 덩어리를 구성하기에 이르는데, 셋은 몸을 서로에게 걸어 잠근 채 한 명씩 몸을 펼쳐 잇몸을 만개하며 소리 내지 않고 몇 초를 지속한다. 이러한 몸을 일종의 포획되는 이미지로 만드는 방식은 움직임에 대한 감각보다 다른 무언가를 지시, 제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가까이 있던 퍼포머는 이제 저 멀리 있다. 멀리 있던 퍼포머는 한층 더 가까워진 중앙이다. 여기서 몸은 소리와 분리되어 있고, 관객은 퍼포머와 거리를 둔 채 웃음의 몸에 일치시킬 소리를 구성하는 데 아마도 실패하게 된다.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는 피드백 루프라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기본적으로 따라 하며 변화되는 과정을 관객과 밀착해서 동시에 떨어져서 배치하는 것으로 구성한다. 가까이 있다는 것이 잘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거리는 보기를 더욱 잘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여기서 관객의 반응은 피드백 루프가 예상치 못한 감염을 일으키는 보기의 현재가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퍼포머의 몸들은 의자에 묶여 최소한도로 그리고 집중해서 펼쳐지고, 이는 원이라는 분산된, 종합되기 어려운 감각들의 혼재를 통해 감각은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제어’된다. 뱃사람들을 노래로 유혹해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사이렌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듣고도 반응하지 않기 위해 오디세우스가 스스로의 몸을 묶었듯, 관객은 의자에 엉덩이를 묶고 이 감각의 파동과 존재들의 감응 현상을 묵묵히 바라보게 된다. 이 피드백 루프가 깨지지 않도록.
여기서 안무가의 위치가 관객과 함께라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 모든 걸 바깥에서 볼 수 있는 건 2층의 음향 또는 조명 통제실의 음악 감독뿐이다. 음악은 실제 이 공간 전체를 묶고 감싸는 유일한 매체다. 그러니까 관객의 시선을 포함한 감각은 이 원 안에 묶이고, 의자라는 그라운드가 무너진 이후에 원 안에 또 다른 원의 집단이 만들어진다―관객과 퍼포머는 그제야 기존 극장의 형식에 놓인다(하지만 그것은 방금까지 묶여 있던 감각의 경계가 잔존하는 상태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 원 바깥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걸 보는 건 불가능하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명: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공연일시: 2019.07.10-13. Wed-Fri 8pm. Sat 7pm
공연장소: 신촌극장(서대문구 연세로 13길17, 4층 옥탑)
러닝타임: 60min
콘셉트, 안무: 황수현
퍼포머: 강호정, 박유라, 황다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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