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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 〈춤출 때 웃고 있지만〉: 무용에 대한 은밀한, 내밀한, 전복적인 발화들REVIEW/Dance 2025. 10. 19. 21:19
출처=신촌극장 〈춤출 때 웃고 있지만〉은 한국무용과 발레를 전공한 두 안무가의 캐릭터를 ‘교차’시켜 두 장르의 제도가 가진 공고함과 억압의 양상을 ‘비교’무용적 기술로써 체현한다. 동등함의 기반은 약간의 불균형 속에 위치하는데, 이는 후반에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윤상은의 말에 동조하는 조진호의 말에서 드러나듯 경험의 차이에 의거한 것이기도 하지만, 웃음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더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웃음이 춤에 더 적극적인 동력을 불어넣어 실제적인 수행의 효과를 극대화시킴에 대한 윤상은의 긍정에 움직일 때 늘 웃어야 했던 강제에 관한 조진호의 의구심이 맞선다.
이는 상대적으로 윤상은의 좀 더 과격하고 도발적인 춤을 통해 틀을 넘어설 때 춤이 구성된다, 또는 춤은 틀을 넘어선 것이라는 춤의 이념을 향하고 그것은 승리한 듯 보이지만, 그 무질서한 신체의 영역과 온전한 움직임의 영역의 병치 뒤에 남는 건 조진호의 그림자 같은 심리적 영역이다. 조진호의 웃음을 띤 춤은 여전히 억압의 흔적이거나 흥을 내지 못하는 춤이 아닌 영역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춤출 때 웃고 있지만〉에서 실재적인 건 바로 그 조진호의 웃음이 담고 있는 절반 정도의 의심과 멜랑콜리이다. 미소를 띠고 등장하는 한국무용가의 춤 내면에 자리한 목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있는가.
왜 웃어야 하고 또 웃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조진호의 질문은 물론 웃음과 진중함에 대한 춤의 특질이 아닌 춤의 가시화 전략에 결부되는 코드의 강제성에 대한 질문이다. 윤상은이 발레가 가진 억압의 기제를 마치 ‘자신만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극복한 것처럼 수용된다면, 조진호는 아직 그 그림자 영역에 갇혀 있으므로, 그 번민에 싸여 있으므로, 〈춤출 때 웃고 있지만〉에는 그의 심리 드라마적 영역이 하나의 과제로 드리워진다. 이 부분이 ‘자신만의 길’을 찾는 것으로 봉합되는 양상이지만,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과제로 남고 승리한다.
둘은 무대의 시작과 함께 발레와 한국무용의 동작을 집약적이고 압축적으로 펼쳐내고, 이는 신촌극장이라는 공간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촌극장은 비좁아 보이는데, 그에 따르면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차원에서 구현된 장소 특정적인 무용의 사례와도 같다. 이 둘은 무대 뒤로 숨을 만한 공간이 없는데, 몸을 풀 때부터 퇴장의 순간에도 여전히 소리와 흔적을 남기며 무대에 은신한다. 그리고 이는 무용계의 속살, 자신들의 내밀함을 거칠고 투박하게 발화한다는 작품의 코드를 생성하기에 이른다. 무대는 경계도 없고, 또 적절한 거리와 온전한 분절의 전략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곧 연출의 불완전함 혹은 부재를 보여준다. 확고한 중심과 지표로서 그의 미소를 지지하는 조진호의 또렷한 눈동자는 이 공간의 좌표 없음을 간신히 지켜낸다.
윤상은이 일종의 패널의 위치에서 애드리브와 피드백으로 조진호의 중심을 흩트리고 시험하고자 한다면, 조진호는 사회자의 입장에서 이를 중재하고 설명해 내고자 한다. 중심과 그것의 흐트러짐, 물리적 토대로서 중심과 심리적 번민의 갈피 없음이 〈춤출 때 웃고 있지만〉를 구성하고, 이는 조진호의 신체와 심리의 분화된 양태로서 이 극이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독립적인 두 토대의 교차이지만, 윤상은은 보조적 역할로서 주체성을 위해 분투하고, 조진호는 흔들림의 양상 아래서 자신의 고민을 하나의 위상으로 정립하기 위해 흔들린다.
별도의 무대가 없다는 지점, 단과 구획과 분리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은 조진호의 몸을 불안전한 것으로 만들며, 또한 하나의 미세한 중심으로서 조진호를 세운다. 동시에 그를 밀어붙이고 조종하는 윤상은은 그 바깥에서 넘실거리는 하나의 무대가 될 것이다. 조진호가 어느 정도 신촌극장의 규모에 자신의 시선을 맞춘다면, 윤상은은 더 큰 극장이라는 가상을 이곳에 불러온다. 사실 우리는 이 작은 극장의 울타리를 넘어 그들이 처음에 구현했던 여러 춤이 실제로는 다른 극장들에서 펼쳐졌음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착시와 환상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관객과 이들의 간격은 좁은 것이다. 거리의 획득만큼 시간과 공간과 연출이 각각 늘어날 것이다. 또는 늘어나야만 할 것이다.
처음 〈춤출 때 웃고 있지만〉은 언어와 움직임의 상관관계의 비교무용적 차이를 보여주는 실험의 양상으로 존재했다. 한국무용은 발레의 동작을 자신만의 것으로, 발레는 한국무용의 동작을 자신만의 것으로 전유한다. 전자가 후자보다 쉬워 보이는데, 이는 발레라는 언어의 직접성을 의미하는지 한국무용이라는 동작의 추상성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이러한 언어-동작 체계를 시현함은 이 둘의 앞선 뒤섞임을 다시 분해한다.
아마 춤출 때 웃어야 함은 그렇게 보이고자 하는 가시화 전략의 일환으로, 거기에는 안정된 숨으로부터 창출되는 신체를 증명하기 위해 그 숨을 하나의 표정으로 표식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춤추는 이의 내재적인 감정에 상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까지는 가시화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조진호의 발화가 춤을 내파한다. “온(On!)”과 “오프(Off!)”의 이진법으로 조진호를 윤상은이 통제할 때 체화된 조진호의 웃음-신체 뒤에는 어김없이 멜랑콜리-신체가 부상한다.
아마 춤출 때 웃음을 지워야 함은 그 자체에 대한 강조보다는 다양한 감정의 한 양태를 표현해 내는 실존적 코드의 몸짓을 간직한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전략으로, 관객과 직접 맞닿는 표층적인 신체의 움직임과 다른 내재적인 캐릭터의 양상을 공간으로 확장해 나가기 위함일 것이다. 웃음이 관객에 대한 응대라면, 비-웃음은 주체의 세계에 대한 강조이다. 웃음이 강제되거나 기각당하는 가운데, 그 둘 모두에게서 춤의 시작에 대한 모티브 대신에 춤의 시작에 대한 강박이 자리한다.
결국, 외양에 대한 보존으로서 춤의 규칙이 웃음과 비-웃음의 양상을 구성하며, 무언가를 연출해야 한다는 것 뒤에 남는 허탈함으로 이어진다. “춤출 때 웃고 있지만” 뒤에 말줄임표가 붙듯 〈춤출 때 웃고 있지만〉은 다 말하지 못한 느낌에 대한 것이고, 다 말하지 못하고 결말을 맞는다. 뉴진스의 〈슈퍼샤이〉에 맞춰 춤과 노래를 수행하며, 어둠을 맞고, 불 켜진 후에도 여전한 춤과 노래가 이어지며 공연은 끝이 난다. 그에 따르면, 윤상은이 놀리듯 한국무용이 체현되는 대중가요의 어색하거나 어설픈 몸짓이 그 춤에 대한 결론인 것일까.
힙합, 케이팝 댄스 등을 새롭게 익히며 몸의 낡은 관습을 타파하려는 조진호의 시도는 유효한 것일까. 또는 다른 몸의 경로를 탐색하게 하는가. 아이돌의 웃음 띤 춤 아래에는 실존적 사유가 숨겨져 있는가. 또는 아이돌과 같이 웃음을 수행함으로써 긍정의 효과가 창출될 수 있는가. 안무가 제어라면, 춤은 순전한 정동인 것일까. 한국무용에서 남은, 한국무용을 지양하고자 하면서 나오는 웃음은 어색한 것일까. 정말 신이 나 보이는 윤상은의 미소는 웃음의 효과일까. 웃음이 춤으로 전이되는 것일까.
안무와 춤의 차이를 질문하며 〈춤출 때 웃고 있지만〉은 조진호의 어색한 듯한 미소로 수렴한다. 한국무용과 발레의 비교를 통한 무용이라는 메타 서사를 발화하는 공연은 춤의 강제성과 억압이 미친 개별적인 심리적 기제들을 고백하고 토로하며, 은밀한 수다의 형태를 간직한다. 그것은 무대와의 경계를 만들지 않는, 만들기 어려운 무대에서 각각 기인하며, 토론과 논의보다는 일차적인 텍스트로서 무대에 고스란히 투여되는 형태를 띤다. 그리하여 무언가 다른 무대가 그로부터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신촌극장 2024 라인업
[춤출 때 웃고 있지만×조진호]
2024년 9월 12일(목) - 9월 14일(토)
목금 20:00. 토 16:00 (약 45분 / 총 3회)
서대문구 연세로13길 17 4층 옥탑 신촌극장
안무 및 연출: 조진호
공동구성: 윤상은, 조진호
출연: 윤상은, 조진호
사운드: 목소
조명: 서가영
의상: 황석민
오퍼레이터: 류혜영
촬영: 이지수
자문: 목소, 양근애, 윤단우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동구성/출연 _ 윤상은]
윤상은은 프리랜서 안무가로 최근 ‘발레 다시 보기’ 작업을 하고 있다.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 속 여성 죽음의 서사를 비판하는 〈죽는 장면〉(2020), 한국 발레의 사회문화적 발전과정을 살펴보며 공고한 엘리트주의와 절대적 아름다움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는 〈Ballet for all〉(2021)을 안무하였다. 또한 평등한 발레를 실험하는 〈모든 몸을 위한 발레〉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몸들과 발레의 움직임 문법을 뒤집어보는 〈메타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 〉(2024)을 발표하였다.
조진호 안무가로부터 어느 날 연락을 받았다. 나의 발레 작업에 동의한다고. 그리고 이내 한국무용 전공자로서 겪었던 갈등이 내 경험과 많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글로벌 시대 동서양의 만남이 이렇게도 만나지나. 우리나라 무용계의 씁쓸한 현실이다. 연습 기간 내내 우리가 무용을 하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현실과 또 지혜롭게 벗어날 궁리를 함께 했다. 먼 동료를 가까이 두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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