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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n Dance, 〈미스터 소크라테스〉: 구도를 위한 여정REVIEW/Dance 2025. 10. 19. 21:30
서사: 원초적인 세계의 원-장면
〈미스터 소크라테스〉(2024.05.11 ~ 05.12,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 이하 〈소크라테스〉)가 여는 세계는 일종의 원초적인 자아 혹은 그 자아가 지닌 충동과 정념이 지배하는, 부족적이고 원시적인 사회의 일면을 띤다. 이와 동시적인 차원에서 경계에 위치한 한 여자(정희나), 일종의 주체이자 주인공인 그 여자의 시종일관의 대조적인 수행의 모습은 두 다른 층위를 통해, 변증법적 결말에 도달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곧 이는 동물적 외양의 존재들의 무제약적인 분출에서도 의식적 차원과 성스러움의 외양을 잃지 않았던 여자가 여는 이전의 세계에 대한 정화의식이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표현주의적 몸짓은 그것과 부합하는 움직임 메소드의 이념과 형식의 특유함―이따금의 과잉―으로 동시에 나타난다. 전자는 이 움직임이 창출되는 총체적 경로와 근거가 정서를 집약적으로 표출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또는 움직임의 구성보다는 움직임의 동기를 우선하는 가운데 창출되는 움직임의 자율성과 비정형성, 추상성 등의 특질에 해당할 것이다―이는 일정 정도, 이스라엘의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의 가가 테크닉과의 연관성의 차원에서 비춰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만드는 양태로서 후자는 그 형식이 절대적인 차원으로, 일종의 태도가 될 때 일종의 과잉적 제스처를 띠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떤 동물적 양태는 재현의 차원에서 실제와의 닮음을 구현하는 것인가 아님 움직임의 기본적 메소드로부터 나오는 순전히 특유의 형식인 것인가라는 두 질문 사이에 자리하는 듯 보인다. 곧 과잉으로서의 내용과 형식의 과잉 사이에서 혼동을 주는 순간들이 자리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표현하는 작품일까. 그러한 표현은 어떤 결말을 혹은 어떤 주제를 향하는가. 무엇보다 그 표현의 외양이 갖는 절대성, 강렬함이 지배적인 작품에서 이 같은 질문은, 곧 〈소크라테스〉의 표현을 위한 표현은 “인간의 본성과 충동을 탐구하는” “여정”의 일환으로, 곧 애매하며 모호한 인간의 전표현적 양태를 지칭하기 위한 것임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표현의 신체들은 앞서 언급한 합리적 의식이 갖춰지기 전 단계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편으로 비인간적 형상이며, 곧 인간을 벗어난 모습이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야성과 본능을 극단적으로 끌어낸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이 제어되지 않은 힘과 경계를 형성하는 여자의 동시성이 이전까지의 표현의 극단적 양태를 지양하고 새로운 세계의 입구를 여는 열쇠가 되며, 〈소크라테스〉는 막을 향한다. 여기에 한 명의 아이가 등장하고, 그는 춤에 대한 긍정과 열정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와 짝을 이룬 여자의 춤은 거리 두기를 통한 합리주의적 노선의 작품의 방향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차원의 급작스러운 구원의 또 한 번의 반복을 통해 강조한다. 또 다른 외부, 외부에 대한 외부의 도입은 여성의 일상을, 기억의 전사를 구축함으로써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무엇보다 춤의 이후를 추동한다.
아이는 여자에게 잠깐의 기쁨을 주고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실재라기보다 기억의 한 산물에 가까워 보인다. 아이 자체가 여성에게 내속하는 한 부분인 것이다. 아이는 순수함의 결정체로서 무한하게 긍정될 수 있는 존재의 원형적 모습을 상정할 것이다. 이는 곧 앞선 존재들의 야생성이 기호 이전의 차원으로 분별되는 것처럼 그에 속하지만 그것과 대별되는 차원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일종의 환상물로서. 이 막을 거슬러 다시 처음의 장면으로 되돌아 가보고자 한다.
움직임: 힘이 산출되는 경로
일곱 대의 피아노가 정면을 향해 놓여 있고, 여섯 명이 그 위에 앉아 앞을 향해 응시와 응시를 위한 포즈를 취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시작된다. 피아노는 일종의 존재의 환유물이며, 비어진 한 자리가 그들을 이탈하여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여자의 자리를 자연 가리킬 것이라는 건, 여자 역시 그들과 동류라는 걸 상징한다. 피아노는 중반 이후 괴성을 지르고 또 건반을 두드리는 과정에서 충동을 마구 발산하는 표현주의적 장치의 일환으로 기능한다. 실재의 조각으로 튀어나오는 이 예외적인 일부의 소리를 제한다면, 대체로 〈소크라테스〉에서 사운드는 정글과 야생의 환경을 상기시키는 가운데, 문명의 조각들을 뒤섞는다.
위에 달린 스피커의 증폭된 소리는 이들을 비춰 보는 시선을 제시한다면, 초원을 환기시키는 소리에 섞이는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나 상공을 거슬러 가며 대기와 부딪히며 발생하는 소리 등은 이를 연장한다. 숭고함과 불길함 사이에 자리한 긴장은 개별의 형태가 추동되며 어떤 집단을 형성하기 이전의 상태에서 주어진다. 인간의 전 단계를 표현하는, 표현 그 자체의 표현은 일정하게 구조화되는 형태가 아니라 그 형태를 구조화하는 힘 자체에 가깝다.
형태는 움직임의 동기에 예속되며 뒤따르며 정형되는 자의적이고 우연한 결정물에 가깝다. 곧 결과적으로, 움직임은 어떤 고정된 형태로서 결과가 아닌, 어떤 힘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부산물이 곧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표현주의적 양태의 형식에 대한 분별이 아닌, 그 존재가 가진 힘과 정동을 향한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의 야생의 기호로 다시 짧은 환상의 장면으로 삽입되는 아이의 상징이라는 주제와 맞닿는다.
이 둘의 접점, 곧 일종의 표현주의적 메소드와 그 표현주의가 향하는 외양이 나타내는 세계는 밀접하다. 전자는 후자의 필요조건인가. 아님 후자는 전자의 충분조건인가. 작품은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되는가. 아님 주제, 철학적 탐구로부터 시작되는가. 어쩌면 이 움직임의 추상적이고도 구체적인 힘의 역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안정적인 행위 그 자체의 발현으로서, 비인간으로의 접속, 또는 비인간의 형상을 구성하는 것, 인간성의 (다른 차원에서의) 탐색은 그 움직임에 대한 탐구(의 필연적인 하나의 결과)는 아닐까. 이 미스터리한 세계 내 인간을 가로지르는 존재의 실존적 형상과 그 과잉 기표로서 움직임 사이에서 물음은 그 움직임의 차원에서 다소 환원적으로 향한다.
전언: 통과 의례적 승화
배경의 소음에 섞여 드는 짧은 어린아이의 음성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는 피아노를 마구 두드리는 충동적 자기 표현의 여러 자아들에 앞서 자리한다. 이는 실제 아이의 출현과 함께 징후로서 완성된다. 상공의 프로펠러 소리가 그 아래의 야생적 질서를 비추는 문명의 기호였다면, 아이는 야성이 지배하는 인간의 형상 너머로 그 둘의 심급을 가로지르며 짧게 각인된다.
무대를 뱅글뱅글 도는 여자의 무심한 걷기는 세계를 구조화하는 하나의 틀을 제시하고, 그 바깥에 자리한 우리의 실존을 상정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건 우리가 아닌, 우리의 어떤 모습이다. 여자와 그들의 경계를 심화시키는 기제는 아이의 난입이다. 어둠의 사라짐과 밝음의 출현―그것이 기억에 가깝다는 차원에서 환상적인―, 그리고 존재의 새로운 활력(의 움직임)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이는 이해될 수 있는 차원에서의 주체의 의식과 발화를 가능한다.
이 난입은 앞선 움직임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기호화하며 소거할 수 있는 하나의 전략이다. 아이의 제어할 수 없는 생동적 육체와 움직임―구조적으로 체계화되고 훈련된 움직임의 여분의 자리에서의 어떤 몸짓―은 그 아이가 가진 순수함의 상징적 기호 너머에서, 어쩌면 테크닉적으로도 〈소크라테스〉를 지배하는 움직임이 도달하고자 하는 하나의 이념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로부터 무심했던 그리고 정체돼 있었던 여자의 움직임이 추동될 수 있다는 것, 거기에는 아이라는 나를 마주한 누군가의 뚜렷한 현존에 대한 지각이 있다. 그리고 이는 앞선, 공허하고도 아무 사심 없이 우리를, 정면을 응시하던 비인간적 형상의 존재들의 시선과 뚜렷한 차이를 구성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에 대한 탐구에서 인간에 대한 구원을 향한다. 이 둘은 연결되지만, 어느 정도는 비약적인 차원으로 그러하다. 자극과 반응으로서 원시적 자아와 제의와 침묵의 수도자적 존재 사이의 거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내용이며 메시지이다. 전자는 후자로 수렴되는 가운데, 일시적이고 부수적이며 극복해야 할 현실이 된다. 이 초월적 시간 안에서는 이 존재자들이 신성한 존재와 어떤 관계인지, 여자의 전사는 무엇인지, 아이와 여자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지는 공백으로 남는다. 그리하여 아마도 그 공백을 온전히 채우는 건 또는 가리는 건 아이라는 순전함의 존재, 그리고 그로부터 추동되는 춤의 어떤 정념이 주는 클라이맥스의 순간이다.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안무 및 연출 : 김천웅
안무 어시스트 : 정희은
출연 : 윤태준, 정희은, 노주호, 배소미, 윤명인, 이예림, 김리하
특별출연 : 김라온
음악 : 최해순
조명 : 이승호
무대 : 정진우
의상 : 강한나
영상 : 김예은
포스터 : Kaya
프로덕션 매니저 : 한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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