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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서울미술관 - 세마 퍼포먼스 《호흡》에 대한 두 가지 시나리오: 퍼포먼스는 왜 자기지시적 대상으로 물신화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서
    Column 2026. 3. 12. 12:55

    서서울미술관에 대한 어젠더. 출처=https://sema.seoul.go.kr/kr/visit/seoseoul

    “뉴미디어 특화” 미술관을 표방한 서서울미술관의 개관 특별전은 “세마 퍼포먼스 《호흡》”이다. 퍼포먼스는 (그 전시의 제목이 “호흡”이듯) 신체 기반의 아날로그적 미디어에 가깝지 않은가. 그래서 서서울미술관은 그래서 퍼포먼스를 전시하고, 소장하고, 연구하는 미술관인 건가.

     

    사실상 홈페이지의 기능을 대체한 서서울미술관 인스타그램에는 일주일마다 각 주차의 퍼포먼스 프로그램이 연이어 소개되었는데, 이 특별전만을 다룬 홈페이지로부터 서서울미술관의 이념, 어젠다, (설립) 배경 등을 추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5주 차에 걸쳐 진행되는 퍼포먼스들은 비어 있는 ‘퍼포먼스 미술관’을 수없이 채우고 비워질 것임을 가정하며, 퍼포먼스 미술관으로서 서서울미술관을 지시한다―또는 서서울미술관은 퍼포먼스의 이미지로 막혀 있다.

     

    그런데 이 전시는 특이하게도 각 퍼포먼스가 어떻게 전시의 개념과 직조되는지, 따라서 어떻게 전시와 공명하며 의미화되는지에 대한 언어가 일절 없다―전시라는 것이 작품들을 싸는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라면, 큐레이팅의 관점이라면, 그러한 개념과 관점이 없다는 것이 이번 전시의 가장 특징적인 지점이다. 곧 일종의 프로그래밍된 퍼포먼스들은 각각의 모나드로 고립되며, 추상성의 비가시적인 형상으로 거기에 어떤 것이 들어와도 가능할 그 “호흡”이라는 개념 아래, 그저 ‘차곡차곡’ 쌓여만 가고 있는 형국으로, 이 시간 예술로서 포집되는 퍼포먼스들을 구성하는 역할이 일반적으로 큐레이터보다는 프로그래머에 가깝다면, 그 프로그래머의 언어는 무엇을 발화하고 있는 것일까. 이 퍼포먼스들은 다 어디서 어떻게 여기에 도착하게 되는 것일까.

     

    따라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럴싸한’ 것들이 있지만, 이것을 왜 보여주려는지 어떤 생각으로 그것을 소개하는지에 대한 프로그래머의 언어란 게 없다는 건 다분히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결국 그 언어의 부재가 수신자를 지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중차대하게도 홍보의 언어가 없다는 것과 같지 않은가―결코 수사학적 차원의 포장과 겉치레의 차원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적어도 공공적 차원에서의 발신이 갖는 합목적성과 고민 따위가 없다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 지점에서 바로 홍보의 언어를, 프로그램에 대한 동시대적 합목적성을 내세워야 하는 국공립 미술관이 스스로를 유령화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는 민간 영역의 예술 영역에 가하는 조소와도 같다. 대체로 어떤 프로그램들을 소개할 때 프로그래머는 그것이 어떤 층위에서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그 작품을 선택하며, 그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조심스럽고도 강력하게 홍보의 언어를 꺼내 드는 것이다―이것은 생존의 (필수적인) 영역이지만 진정성의 (필연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홍보의 언어는 양쪽의 발신이다. 곧 작가에게 먼저, 다음에는 예비 관객에게 향한다. 그러니까 결정적으로 문제적인 건 결과적으로 공공은 자본의 힘을 통해 적확한 홍보의 언어를 구사하지 않고서도 민간을, 관객을 호출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서서울미술관 인스타그램.

    홍보의 언어를 대체하는 자리에는 기계처럼 올라가는 각 퍼포먼스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폐쇄적으로 닫히는 언어가 있다. 아니 그 이미지‘들’의 축적 자체가 홍보의 형식이다. 성찬이 마련되었으니 즐기면 된다. 개별 요리는 흥미와 주의를 끈다. 드물고 예외적인 메뉴였던 퍼포먼스가 풍족하게 ‘마련되었다.’―이것이 첫 번째 서서울미술관의 퍼포먼스 미술관 되기라는 하나의 시나리오이다. 이처럼 그것을 꿰는 방식의 언어가 없는 것과 같이,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소화할지에 대한 가이드 역시 없다.

     

    “외향적인 분들, 내향적인 분들, 낙담하는 분들, 낙관하는 분들, 모두 따뜻하게 환영합니다.”(서서울미술관 개관 현수막)

     

    무엇보다 퍼포먼스에서 몸이 주요한 매(개)체로서 전제되고 있다면, 그리하여 무용 장르가 퍼포먼스로 이미 들어왔다면, 다시 다른 몸들이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고, 그 다른 몸들이라고 하는 관객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고, 미술관 전반의 접근성 이외에도 공연 자체의 배리어 프리가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번역’의 문제는 단지 퍼포먼스를 이미 완성된 대본의 차원으로 소급시킴에 따른 혐의를 부여하기 이전에, 사실 퍼포먼스를 어떻게 기록하고 다시 지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앞선 질문에 닿아 있다.

     

    그런데 저 수사는 무엇인가. 프로그래밍의 언어가 부재할 때 홍보의 언어 역시 총체적 난국에 빠진다. 그러니까 개관의 축하를 위해 퍼포먼스는 동원되는가. 퍼포먼스를 탐구하고 매개하기 위해 배치되는가. 사실상 미술관은 5주간 비워지고 채워지는 극장이 된다. 동시에 두 개가 나란히 놓일 수 없으며, 설사 겹치더라도 장소의 구획으로 분리된다. 사라지는 것을 담아내는 것, 이를 무한에 가깝게 지속하는 장소가 곧 극장이다. 공연 장르가 들어온다는 건 극장 시스템 전반을 활용할 줄 안다는 것과 같다.

     

    이때 완벽하게 극장 시스템을 갖춘 미술관(만)이 퍼포먼스를 (적확하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님 헐겁게 그것이 자리하는 환경 자체가 어쩌면 퍼포먼스라는 조건을 만드는 것인가. 훈련된 몸과 쓰인 대본, 완벽한 세팅의 차원이 퍼포먼스보다 공연에 전제되는 것이라면, 퍼포먼스가 완벽해질 때 그것은 공연과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퍼포먼스가 퍼포먼스로가 아닌, 공연이 퍼포먼스로 지시되는 순간, 그 둘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다. 반대로 퍼포먼스는 완전한 공연이 되길 거부하는 것으로써만 자신의 특별함과 독특함을 지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세마 퍼포먼스 《호흡》 포스터.

    《호흡》에서 눈에 띄는 건 공연 장르와 시각예술에서 출발한 퍼포먼스가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작품 설명들을 볼 때, 공연예술이 본질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호흡”의 키워드를 감안해 작품을 고안했다면, 시각예술은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작품을 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공연이 훈련되고 전수되어 극장에서 재현될 수 있는 것이라면, 퍼포먼스 역시 그것을 적용할 수 있을까. 또는 그것을 반대적으로 가정할 때 그 외양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일까―따라서 퍼포먼스는 공연을 보는 이에게는 대체로 설익거나 미정련된 모습으로 다가오곤 했던 것인데, 반대로 공연이 오히려 완성도와 형식의 차원에서 감산된다면, 그것은 퍼포먼스가 될 수 있을까를 뒤집힌 논리로써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퍼포먼스는 비의적이며 규명 불가능한 또한 아직 새로움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은 최후의 보루로서 미술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며, 거기에는 분명 신체가 투여되지만, 그 신체가 표현의 내재적 차원으로서 완전히 연장되지 않는 그 지점에서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차라리 신체는 기호이거나 언어이며 발화되지 않은, 잘 발화되기 어려운 발화 자체이다.

     

    그런데 나아가면 그 발화를 위해 신체를 투여한다는 것에 퍼포먼스의 ‘현재적’ 위상이 자리하는 것이다. 아마도 《호흡》은 그 애매하고도 과잉된 수사로서 지금의 퍼포먼스를 ‘긁어오고자’ 한다. 따라서 두 번째 시나리오도 가능할 것이다. 퍼포먼스라 불리어짐 직한 것들을 일단 펼쳐내고 귀납적으로만 그 퍼포먼스를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퍼포먼스’가 있기 전에 산재된 퍼포먼스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퍼포먼스를 정전화하는 대신, 유동하는 형상, 동시대에서 끊임없이 호출되지만 장르로 귀착되지 않는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형상으로서 정의를 위해 일단 분열적이고 강박적으로 퍼포먼스를 반복해서 수행해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정녕 퍼포먼스에 대해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인가. 아님 귀납적으로 신체를 다루는 여러 장르, 매체를 들여다봄으로써 퍼포먼스라는 걸 사후적으로 규정해 가려 하는 것인가. 후자라면, 이것들은 추후 어떤 식으로 아카이브되며 담론의 차원에서 재구성될 수 있을까. 이건 전시이므로 한정판 도록의 형태가 예정된 것인가.

     

    퍼포먼스는 어떻게 소장되고 그 전에 기록될 것인가. 마치 그 모든 퍼포먼스가 하나의 미술관 안에서 호흡을 공유했기 때문에 그것은 환유적 차원에서 “호흡”[각주:1]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 호흡‘들’ 자체는 개별적 차이로서 도록에 담길 수 있는 것인가. 퍼포먼스가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퍼포먼스의 현존성과 부재성을, 체험과 체험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인가. ‘긴박한’ 5주간의 릴레이는 그것이 단지 전시이기 때문에 일정 기간에 끝나야만 하는 것인가.

     

    조금 더 긴 ‘호흡’으로 그것들을 다루지 않는 건 뉴미디어를 다루는 서서울미술관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기 위함인가. 아님 공통으로 주어지는 한정된 스태프의 운용의 경제적 효율성을 충족하기 위함이 더 타당한 현실적 분석일까―이 임시적 극장의 일시적 토대의 구축으로부터 퍼포먼스와 극장의 연계성 곧 극장으로서 최소한의 조건이 퍼포먼스의 당락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이는 결정적으로 퍼포먼스의 ‘정치성’을 띤 장소, ‘현장’으로 소급되는 장소가 하나의 빈 공간으로 전이된 순간을 공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곧 퍼포먼스의 정신은 죽었고, 그것은 극장의 기술로 재처리된다.).

     

    마치 고립된 단자로 축적되는 홍보의 기술 아래 파편적으로 쪼개져 나오는 퍼포먼스들은 그것이 결코 전체의 상을 유기적으로 구성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곧 앞을 대체하고 지우는 방식의 홍보는 그러한 난점을 봉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그것이 진정한 퍼포먼스의 현재상일까. 주로 시각예술의 언어이지만, 여러 장르에서도 임시적인 이벤트로 기입될 때 퍼포먼스라는 용어를 도입하는 것처럼, 퍼포먼스는 장르에 복속된, 장르의 특성에서 연유하는 각 장르의 예외적 조각과 같은 것일 것이므로, 《호흡》에서는 공연예술의 장르적 분포 역시 가능해지는 것일까.

     

    《페스티벌 봄 2008》 포스터.

    어쩌면 퍼포먼스의 규명은, 더 정확히는 재명명은 페스티벌 봄(2008~2013)―이는 또한 2020년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옵/신 페스티벌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페스티벌 봄이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의 개명이라면, 옵/신 페스티벌은 페스티벌 봄의 변주에 가깝다.―에서 이미 이뤄졌다고 할 수 있는데, 정확히는 그의 전신, 2007년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에서 축제 감독 김성희는 왜 퍼포먼스가 아닌 다원예술로 작품들을 명명했을까. 그것은 장르적 조각이 장르와는 완전히 같은 무엇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 아니었을까. 곧 장르 사이에 ‘퍼포먼스’가 끼어 있는 채 존재하기 때문 아니었을까. 퍼포먼스는 장르적 차원과 다소 거리가 멀다는 예외적 가치의 차원을 아직 훼손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보다 퍼포먼스로는 그 장르적 차이와 그 장르의 특별함 모두를 지시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확장적이고 포괄적으로 제3의 장르를 만들어 내는 김성희의 명명은, 제도적 차원에서 그것의 지원 분과를 새롭게 신설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는데, 이는 다원예술이 물화된 버전이 되었다는 비판을 함께 가져왔다. 마치 그 전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강한 부인의 혐의를 안고서 말이다. 하지만 실상 다원예술이야말로 전적으로 새로운, 현재 바깥의 예술 대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 이전부터 간과되거나 은폐된 장르의 기술로서, 기존의 장르적 규약을 새로운 틀에 올림으로써 또는 비틂으로써 각 장르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리고 여러 개의 장르가 착종되어 있는 예술 고유의 문법을 상기하는 시각을 제공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데 《호흡》에 들어온 작업들, 공연예술의 형상들, 그리고 신체성이 강조된 시각예술의 형상들은 페스티벌 봄에서 익숙하게 보아 왔던 그것 아닌가. 현재 옵/신 페스티벌이 다원예술이라는 예술의 형식보다는 동시대 예술이 지향해야 할 이념의 차원에서 스스로를 가치 정립 하고 있다는 점에서, 퍼포먼스는 부차적이고 기능적 차원에서 효과적인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하는 듯 보인다―그것은 또한 절대적 형식으로 갈음할 수 없는 퍼포먼스의 형식에도 조응한다. 따라서 《호흡》이 대체하는, 연장하는 자리는 이미 다원예술이라는 용어가 상투어가 된 그 자리다. 더 이상 절대적인 새로움으로 인식, 혼동되지 않는 그 자리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에 대해 어떤 특별한 언어도, 규정도 없는 이 《호흡》이 가리키는 자리는, 다시 퍼포먼스의 자기 지시성의 자리이다. 어쩌면 그래서 잠시동안은 새로울지도 모르는 이 자리는 어젠다와 이념을 ‘의도적으로’ 소거하여 퍼포먼스 자체를 물신화한다. 그래서 남는 건 ‘퍼포먼스’라는 이름 자체다. 이는 “호흡”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신체성의 일환으로 연장됨으로써 또한 비가시적인 물질로 연장됨으로써 어떤 부가적인 언어와 그 언어의 필요성을 함께 소거하나. 호흡이 하나의 기술이 될 때, 그것은 요가나 명상과 같은 신체 테크닉이 되고, 신체의 이완과 궁극적인 쉼의 웰니스적 활동의 코드를 가져간다.

     

    그러니까 퍼포먼스를 가장 무해한, 가장 비정치적인, 가장 근원적인 차원으로 가장하는 점에서, 《호흡》은 퍼포먼스의 현장성을, 정치성을, 현재성을 대체하며, 그것이 대체된 자리로서 퍼포먼스의 현재성을 새삼스럽지 않게 재정초한다. 따라서 《호흡》은 어떤 현실에 대한 증상으로서 퍼포먼스가 아니라 장르로 환원되거나 형식의 실험으로 귀결되는 퍼포먼스라는 작금의 증상 자체를 담는 안전한 용기로서, 그 모두를 경계 없이 지시하는 빈 언어로서 ‘호흡’을 각각의 퍼포먼스를 지시하지 않은 채 곧 대상을 향하지 않은 채, 빈 공간으로서 미술관에 불어넣는다.

     

    퍼포먼스가 곧 형식을 위한 하나의 실험으로 소급되는 자리에서, 퍼포먼스는 특별한 심미적 대상으로 물신화된다. “호흡”이 공연예술가에게는 주제라면, 시각예술가에는 단지 무형식의 형식적 전제로 이양된 듯 보이는데, 곧 주제를 위한 형식, 주제를 탐구하는 형식과 형식을 위한 형식, 주제를 대체하는 형식―또는 그저 명목일 뿐인 주제―으로서 그 차이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더 중요하게는 그로부터 고정된 장소를 향해 나간 시각예술과 텅 빈 공간을 채워 나가는 공연예술의 본질적 차이가, 곧 공간을 다루는 것의 새로움과 수월함의 차이가 유추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이 분계점으로부터 “호흡”은 다시 한번 분절되는데, 이는 또한 두 다른 장르의 지대가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함께’ 호흡하며 고안하지 않았다는 것―또는 상대적으로 공연예술과의 더 긴밀한 호흡에 대해―도 유추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원예술로서 관점의 창출을 시도했던 김성희의 실패 혹은 반절의 성공에 대한 독창적 면모를 새롭게 혹은 다시 환기한다(적어도 그는 공연예술과 시각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의 관객을 다시 새롭게 구성하는 데 있어 그 둘을 넘나드는 하나의 시각점으로서 ‘다원’이라는 확장을 고려했다.). 《호흡》은 전시라기보다는 전시를 빙자한 각 개체로 특별하고도 다른 것들의, 이합집산의 모음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퍼포먼스를 작위적으로 만든 또 하나의 생태계이자 과잉된 현장의 재현으로 산출되는 것을 넘어, 퍼포먼스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비신화화된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공공 영역이 민간 영역을 너무 쉬이 잠식하는 구조에 대한 경계와 주의는 반드시 ‘민간에서’ 끝까지 붙들고 가야 하는 의식이다. 공공이 민간이 이뤄낸 것을 너무 쉽게 가져오고 형식화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호흡》은 기존 퍼포먼스라 불리는 것들, 또한 장르를 맴돌고 있던 ‘애매한’ 것들을 한 번에 불러온다. 그것은 대체로 전적으로 새로운 것들이라기보다는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호흡》은 그 미래를 제도의 힘을 통해 더 명확하게 ‘절취’해 온다.) 것들이며, 따라서 그것이 벌어졌던 기존의 맥락을 소거하거나 물신화하거나 은폐함으로써 가능하다. 또는 추상적 범주 안에 묶어 놓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리고 이 지점이 바로 ‘현장’의 언어를 매개하는 노력, 나아가 현장의 언어를 다시 찾는 노력이 공공 안팎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해지는 지점이라 하겠다.

     

    김민관 편집장

    1. 1. 사실 “호흡” 하면 즉각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민재 작가의 《Doppel-Lumpen》 전시에서 그가 선보인 〈두려움 이후는 두려움 이전과 같다〉에서 투명 유리문으로 된 방에서 숨을 그 창에 불어넣는 퍼포먼스의 장면이다. 그리고 공교롭지만 이번 전시에 이민재 작가도 참여해 새로운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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