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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혜영의 발화에 대한 단상: 담론 구성으로서 영화 그리고 정치라는 공통의 장소 - 오동진의 말을 문장으로 만들기의 기술을 통해
    Column 2026. 3. 2. 21:33

    [이미지 출처=장혜영 페이스북]

    정의당 장혜영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보낸 오동진 신임 집행위원장 선임에 대한 질의서는 그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담겨 있다. 이는 과거 오동진 영화평론가의 댓글 한 문장으로 소급된다. 이 질의서는 2005년 8월 12일 조국 조국혁신당 전 대표의 사면에 대한 장혜영의 페이스북에 쓴 비판에 대한 답변인 오동진의 비판에 대한 사후적 재처리로서, 엄밀히는 오동진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비판을 경유해 오동진의 자격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영화제의 불성실한 혹은 불합리한 선임의 비가시화된 과정 자체를 겨냥한다. 그러니까 이는 영화제에 오동진이라는 곤궁을 떠안기는 곤궁을 초래하는 셈인데, 질의서에 충실하게 답변하는 방식으로서, 오동진을 설사 소거했다고 해도, 그 절차는 잘못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는 개인의 반성을 통해 (그 개인의 축출을 통해) 영화제의 반성을 감행하는 이중의 과제를 수여한다.

     

    사건이 시작된 최초의 순간은 흔하디흔한, 감정 섞인 정치적 계파 나누기의 어떤 현장으로 보인다. 그것은 조국 사태를 분수령으로 한 고장 난 정치적 싸움으로, 그것의 기원은 일차적으로 조국 자신의 내재적 반성의 자리가 그 자체로 단락되지 않은 채 외화되면서 희생자의 시점으로 착종되는 지점을 그 자신이 짐짓 수용함으로써 자신을 숭고의 형상으로 만드는 부분에서 재단락된다. 이때 이차적으로 조국의 증상과 조국이 맞닥뜨린 심대한 정치적 차원의 이념과 부차적 차원의 삶의 도덕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민주주의적 대의를 수호했던 영예의 이전 자리에 쓰이는 얼룩을 혐오하는 586세대의 또 다른 증상들이 연이어 출현한다―여기서 조국이 정치적 단죄의 대상인지를 판가름하기 이전에 그가 분명한 잘못이 있다는 것이 ‘부인’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는 증상이다. 마지막으로 공정성의 담론을 경유한 MZ 세대로부터 조국은 분노와 조소의 차원으로 뒤집힌다. 또는 정의의 차원에서 단죄의 대상이 된다.

     

    이때 조국을 비호하는 이들이 소위 페북 아재들이라는 것, 한없이 진지해도 그것이 자신의 증상을 노출한다는 점에서 우스꽝스러워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비교적 객관적인, 진리의 수사로써 이를 갈음 짓는 또 다른 한 축에 장혜영을 위치시켜 적대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곧 오동진의 증상인 것인데, 둘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혜영은 오동진의 발언을 문자 그대로 반향함으로써 오동진이라는 증상을 블랙리스트라는 심대한 또 다른 하나의 의제로 굴절시킨다.

     

    이는 그 전의 장혜영의 장애 재현 수사에 대한 여러 비판, 곧 그 문장을 즉각 장애당사자의 입장을 경유해 그것이 배제되고 비가시화되어 있는 ‘정상’ 사회 일단의 불합리함을 되 비추는 이전의 기술 방식에 조응한다. 사실은 그 말을 정작 행한 이의 진정성 자체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는데, 장애 당사자를 비하하는 발언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비장애 당사자성으로 소급된다는 점―모든 언어는 이미 그렇게 쓰여 있다.―에서 그는 논점 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혜영은 항상 상대방을 그가 ‘개인’으로서 풀 수 없는 곤궁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이로써 그가 보여주는 건 국회의원이 근원적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것, 사실은 대표되지 않는 어떤 국민을 더 대표하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어쩌면 부재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각주:1]

     

    물론 이번 질의(서)는 영화인 장혜영을 대리하는 정치인 장혜영의 발화로서, 다시 그가 영화인임을 명시하는 것으로 소급될 필요가 있다, 장혜영은 그 기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영화감독으로서 영화제의 선택에 의해 작품을 상영하는 하나의 방식에 대해 느낀 한 영화감독의 위험 신호가 블랙리스트 차원의 발화를 일삼는 영화평론가에 대한 비판으로 반전되는 상황은, 그가 그것을 점유함으로써, 곧 최종적으로 그것을 그의 페북에 싣는 것으로써 영화계의 한 목소리가 정치인 장혜영의 목소리로서 증폭되는 순간이다.

     

    ‘반전’은, 그러니까 영화인 장혜영이 정치인 장혜영의 대상으로 뒤집히는 순간은, 곧 그가 한 명의 피해자로서 발화하는 것이 아닌, 정치적 대의의 입장에서 영화인 장혜영이 타자로서 기술되는 형식을 정치인 장혜영이 선택함에 의해 가능한데, 하나의 영화인 장혜영이라는 타자의 피해 사례를 경유해, 정치적 주체로서 장혜영이 영화제를 국회의 단상에 불러 앉히고 질의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피해를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문제의 범주에 끼워 넣은 것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일종의 공공적 민원의 형식이기도 한데,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국회라는 장소 아니겠는가.

     

    “앞으로 영화 만든다고 깝죽대기만 해보거라. 자근자근 씹어주마.” 오동진의 이 말은 일차적으로 저속하고도 상스럽다. 그런데 이 말은 근본적 차원에서 잘못되었다기보다 잘 못 쓰였다. 잘 못 쓰였다라는 지점으로부터 잘못의 비판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그럼 어떻게 해당 문장처럼 되돌려줄 수 있을까. 곧 씹어줄 수 있을까.

     

    우선, 장혜영의 소급적 행위로서 발화는 과거의 맥락을 동시에 소거하여 하나의 장면으로 잇는 환상의 메커니즘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저 발언을 경유하며, 오동진은 정치적 전선을 이탈해 순전하게 영화평론가의 직분으로 돌아가며 자신이 그 전선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비분한 정서를 ‘곱씹는다.’ (하지만 그 정서는 잔여로서 남으며, 정작 대상의 자리를 확보하진 못했는데, 그 자리에는 사후에 도래할 무엇, 곧 영화가 수여될 것이다.) [각주:2]

     

    장혜영 영화감독, 〈어른이 되면〉(2018) 포스터 이미지.

    오동진은 장혜영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을 우회해서 그를 다시 상상적 차원에서 변변찮은 영화감독―영화감독으로서 비진정성의 자리―으로 재위치시키고, 그의 앞선 발화를 비하하는 의미에서 도래할 깝죽거림으로 치환한다. 이제 비로소 장혜영은 영화감독이 되는 것인데, 그때 그는 영화평론가로서 장혜영 감독의 영화를 해부하듯 낱낱이 해석해 들어간다는 것이(어야 사실 맞는)다. 첫 번째 문장이 가정이라면, 두 번째 문장은 그에 따른 직접적 행위가 명시되는데, 결정적으로 그 목적어의 자리가 모호하다. 무엇을 씹는다는 것일까. 영화인으로서 자격인가, 그가 만든 영화인가, 영화를 만든다는 애초의 태도인가. 그것은 어떻게 검열로 직접 수용될 수 있을까.

     

    이 목적어의 소거된 자리를 더듬는 과정에서 영화 자체에 대한 검열(이라는 장혜영의 해석)과 영화 평론의 해부학적 방식(오동진을 옹호하고자 하는 이들의 해석)이라는 해석적 분기가 발생한다―아마도 현실에서는 대부분 후자를 운용하면서 오동진의 영화평론가로서 지위를 근본적 차원에서 검토하는 것으로 연장된다. 애초에 이 문장은 다분히 감정적이며 그래서 관성적이다. 그는 영화평론가의 어떤 양식을 답습하면서 동시에 이를 정치적 차원에 종속시킴으로써 평론의 행위를 격하한다, 또는 배반하고 모독한다―이 문장은 심각한 자기 분열이자 모독이다(그 지점에서 우선 영화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이들에 의해, 그에 대한 사랑 혹은 존중에 입각해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 정치적 차원에서 너와 승부를 볼 수는 없지만, (그래서 너에게 밀린) 그 승부를 영화판으로 되불러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깝죽댐은 이미 장혜영의 정치적 수사로부터 선취된 것이고―대상에 대한 비하이고―, 씹어줌은 이미 그에 대한 반론으로 현재 오동진이 쓰고 있는 문체 자체이다―자신에 대한 비하이다.

     

    곧, 영화 만든다고 깝죽대는 존재는 이미 선취된 두 정체성의 장혜영이고, 그것을 자근자근 씹어주고자 하는 존재 역시 그 두 정체성을 진정성의 기준으로써 가르고자 하는 현재의 오동진이다―그렇게 오동진은 영화와 정치를 분기시킨다. 이 모호하고도 분열된 문장―장혜영을 분열시키는 동시에 그 스스로 정치적 입장을 지닌 영화평론가와 정치적 입장의 해소를 위해 기능적으로 평론의 언어를 구사하는 영화평론가로서 분열된다.―은 정치인의 발화와 영화평론가의 발화를 독립된 것으로, 각자의 성역으로 두는데, 이는 반대로 그 둘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며 누군가를 씹는 기술이라는 것을 전제한다(어쩌면 이것이 그의 발화가 종착되는 지점일 수도 있다, 각자의 영역에서‘만’ 상대를 씹자라는).

     

    결과적으로, 이 비판 방식의 격하된 발화 방식으로서 표현은 정치의 논쟁적 언어든 평론이든 무언가를 비판적 형식으로 고취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라는 것인데, 깝죽대는 정치의 대리자와 자근자근 씹는 영화평론가의 존재를 맞세우면서, 결국 오동진이 배제하는 건, 상대하지 못하는 건, 영화라기보다 영화의 정치성이다, 정치적 차원의 영화다. 그것은 오동진이 알지 못하는 그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그는 왜 목적어를 특정하지 못할 만큼, 평론과 비난의 심급을 부러 뒤섞으며 자신의 곱씹을 거리를 해소하고자 했을까. 그러니까 목적어의 소거는 하나의 증상인데, 그가 영화평론가로서 첨예한 언어에 이를 수 없는 정도로 대상과의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그는 끝내 장혜영을 영화인으로 확정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 목적어는 분명 정치인이기 이전에 영화감독이었던 장혜영이 아니라, 정치인이면서 영화를 또 한다는 과잉 대표되는 정치인으로서 장혜영이다―그렇지만 사실 정치인으로서 장혜영이란 영화인으로서 중첩된 자격이 감산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오동진은 영화보다는 영화인이라는 자격만을 논구한다. 그렇지만 그것에 따르는 오동진의 행위는 곧 영화평론가로서의 행위, 비가시적이지만 공공적인 표시 행위로서만 이뤄진다―그의 말이 그것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것은 검열이라기보다는 평론으로서 심급을 띨 것이다. 그 지점에서 장혜영이라는 영화인과 그가 만든 영화라는 대상과의 혼동이 있고, 그 혼동을 초래함에는 오동진의 영화평론가로서의 관성과 애석하지만 윤리 역시 있다. 그가 씹어주려는 대상은 영화인 장혜영과 장혜영이 만든 영화 그사이 어딘가에서만 있다.

     

    그런데 진짜 질문은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진정으로 정치적이다. 그것이 장혜영을 향하는 지점에서 말이다. 장혜영은 이후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그의 정치적 발화는 어떤 시나리오에 입각한 것이며, 어떻게 결정적 장면을 만들어 낼 것인가. 정치-영화 혹은 영화-정치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가―물론 이러한 사고 실험적 차원의 ‘연결’은 그 둘이 서로를 대치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횡단하는 지점에서 서로를 다시 쓸 수 있다는 전제를 따른다. 단순히 장혜영은 정치를 선택함으로써 영화적 행위를 중단한 것인가. 영화와 정치는 비유의 영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인가.

     

    하나의 결정적 ‘장면’, 장혜영이 절름발이라는 한 국회의원의 발언을 비판할 때, 그 언어는 은유가 아니라 환유로서 작동한다. 언어가 미끄러지는 지점에 까다로운 대상의 불가능한 요구가 있다―아마도 장혜영의 일련의 그와 같은 정치적 수사들은 그의 동생―발달장애인으로 갈음되고 마는―을 지키는 내재적 윤리의 발로일 것이다, 따라서 장혜영의 언어는 어쩌면 도착적이지만 최종적으로 그 존재의 곁을 수호한다. 이때 장혜영은 장애 당사자가 비가시화된 현실 세계를 하나의 다큐멘터리적 기록으로 찍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이것은 영화-정치로서의 한 비유이다. 그러니까 그의 영화적 주제를 정치에서 고스란히 확장한 것 아닐까.

     

    우리는 오동진의 두 번째 문장에서 여러 차원에서 그 목적어의 존재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실은 그 목적어가 영화라는 대상이어도(그렇다면 영화에 대한 평론의 한 양식에 던져진다.) 또 아니어도(그렇다면 그것은 영화라는 대상과는 직접적인 거리를 형성한다.) 그것이 이후 어떤 영화를 직접 검열의 대상으로 놓는다는 것을 미리 판단할 수는 없다. 당시 오동진은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장혜영의 발화는 오동진의 죄를 과거로 소급해 적용하는 것인데, 정확히는 그의 발언을 집행위원장의 자격이 아닌 그 이전의 시간을 표백하여 하나의 진공 상태에 두는 것이다. 그렇게 현재의 순간을 영속화함으로써, 그 발언을 이전에 그가 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집행위원장으로서 그 발언을 (‘현재’) 한 것이 된다. 그로부터 전격적으로 집행위원장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영화제를 소급시킨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소급의 기제는 이 문장을 매우 기이한 것으로 도착시키는데, 곧 그와 같은 해석은 첫 문장 다음에 ‘내가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되어서라는 가정이 누락되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는 도착의 연쇄 과정으로 이어지는데, 그에 따르면 오동진 자신이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곧 장혜영이 영화 만든답고 깝쭉댈 때 무언가 조처를 취할 수 있기 위해서라는 것에 이른다, 또는 저 말을 할 당시에 집행위원장이 되리라는 사실을 그가 미리 알고 있었다가 된다. 반대로 장혜영 역시 거기에 결부될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오동진의 발화가 벌어질 당시 그가 저 말이 실효성이 있게 되는 시점을 거꾸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치 발화 당시, 두 사람 모두 집행위원장이 되고자 하거나 되길 바라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지점에서 둘은 다시 조우한다.

     

    우리가 보통 누군가와의 관계가 부정적 차원으로 종결될 때 그리하여 그로부터 ‘돌아서서’ 혹은 비켜나며 구시렁거릴 때 ‘얼마나 잘 되나 보자!’라고 한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이 말은 짧지만 정신분석적 차원의 심급을 갖는데, 너와의 관계가 심리적으로는 끝나지 않았음을, 너와 깊게 내가 연루되어 있음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그 상대방이 얼마나 잘된 순간을 우연히 내가 보거나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핵에는 네가 사실 있다는, 그래서 처치 곤란하다는 걸 방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나타나지 않은 행위에 대한 가정은 사실 현재의 곤궁을 해소하기 위한 것인데,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내가 너의 경로를 어떻게 조작하거나 조작하겠다기보다는 그 존재 자체를 꺼림을 대신 미래로 유예하여 (상대를 안고 있는) 현재의 나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임시성 도피의 차원을 숨긴다. 그리고 굳이 저 저열한 말을 혼자 내뱉고 만 것이 아니라 오동진이 박제한 것은 그가 장혜영이 까다로운 대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위함이다―사실은 그렇다고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장혜영이 과거와 현재의 시차를 지움으로써 오동진의 자격 없음을 영속화한다면, 오동진은 다시 그 시차를 확인하는 방식 곧 과거와 현재의 다름, 곧 시답잖은 자신의 발화에 대해 한때의 치기 어린 것으로 두는 과거에 대한 다른 이해, 곡 반성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혜영에 따르면, 영화제는 더 숭고한 차원에서 자기 윤리를 가진 독립된 조직으로서 자리해야 한다. 장혜영의 질의서에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자체에 대한 비평적 관점은 들어 있지 않지만, 실제 이 영화제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서 단연 다양한 주제와 형식 모두에서 흥미로운 영화들을 추적하고 검출해 왔다는 지점에서 매우 드물고도 귀하다. 따라서 이 사안을 어떻게 다뤄야지 곧 해당 영화제의 내재적 언어에 대해 좀 더 첨예하게 숙고하는 시간으로 연장될 수 있을까. [각주:3] 다시 국회의 장면으로 돌아오면, 장혜영은 어떻게 적대의 세력을 축출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진리의 실재적 자리를 정치적 주체의 확장 가능성을 통해 연장할 수 있을 것인가.

     

    오동진의 말은 ‘얼마나 잘 되나 보자!’의 다른 판본이다. 부정적 대상을 기피하며 무작정 뱉으며 삼키는, 해소 불가능한 정념의 그 효과를 가둔 말 말이다. 검열은 무언가를 상연하는 권리 자체를 취소하는 것이다. 그것을 소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언가를 집요하게 다루는 방식은 그것을 일단 상연시킨다는 것, 저 말처럼 지켜본다라는 것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말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사실 더 투명하게 문자 그대로‘로만’ 해석한다면, 그러니까 불분명한 목적어가 해석의 요점이 아니라 그 목적어 없음 자체가 애초에 의도된 것이라고 본다면, ‘장혜영’ 자체를 그 두 번째 문장에 대입한다라는 가정이 어쩌면 더 적확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이것은 외설인 동시에 도착이다. 그에 따라 오동진은 잠재적 테러분자로 신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보다는 오동진의 발화는 상대방을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게 된, 영원히 추적해야 하는 내적 항거 불능의 상태를 가리키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가장 상위의 위치에 있는 집행위원장의 근본적 기준이 소급되어 향해야 하는 바는 한 ‘다큐멘터리’ 감독을 모독했다는 사실이 아니라―그의 영화에 대해 그가 어떤 언급을 한 것은 아니다.―, 또한 블랙리스트의 공작을 예표 했다가 아니라, 순전히 가상적인 것으로 치환될 수 있지 않은, 정치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이 서로를 향하고 지시하며 맞물리는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근본적 정의의 차원 자체를 그가 협소하게 정의 짓고 있음에 있는 것 아닐까, 곧 그가 정치와 영화를 은연중에 분리하고 있는 것에서처럼 말이다.

     

    오동진, 『불온한 영화를 위하여』(2025, 썰물과밀물) 표지 이미지.

    나는 차라리 그 말에 대한 변명보다는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대한 오동진의 사유를 듣고 싶다. 물론 불분명하고 상스럽지 않은 문장이 아닌, 정돈된 방식의 평론의 언어로서 말이다―그것이 곧 사유이다. 마찬가지로 오동진이 집행위원장으로서 사과가 아니라 영화 평론가로서 사과해야 하는 것은 명확하다. 따라서 더 이전으로 소급하면 자기 윤리가 연장된 차원에서 영화 평론에 대한 그의 진술을 듣고 싶다―그는 언제나 영화를 삶을 진정 은유하는 것으로 전제하며, 어쩌면 진정한 삶에 대한 글들을 써오지 않았는가. [각주:4] 그런데 이런 삶-영화의 틈 없는 공존은 삶도, 영화도 납작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삶에 가장 충실한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삶과 영화의 틈을 가장 명확하게 분별하는 장르의 영화 아닐까. 따라서 어쩌면 오동진은 영화와 정치를 분리한 것이 아니라, 정치―삶―와 영화를 분간 짓지 않음으로써 과오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곧 정치인 장혜영과 영화인 장혜영의 심급을 모두 그 두 개가 혼동되는 하나의 자리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사태에서 진정한 소급의 자리는 정치와 정치적인 것이 혼동되는 그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각주:5]

     

    검열은 예술에 있어 가장 심각하게 비판되어야 할 지점이다. 따라서 검열에 대한 정의 역시 엄중할 필요가 있는데, 오동진과 검열을, 그리고 집행위원장과 검열을 연결하다 보면, 자칫 각 섹션에서 전문가성을 발휘하는 프로그래머들의 지속적 리서치와 숙고된 판단에 의한 영화적 선택으로써 기초를 이루는 영화제의 내실을 소거한 자리에, 집행위원장의 단독적 권위로부터 영화들이 선택될 수 있다는, 검열이라는 환상이 투여될 수 있다. 그러니까 (만에 하나 검열의 주체로서) 오동진의 권위―얼굴―와 영화제의 본질―프로그램―이 뒤섞이는 자리에 대한 현실적 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글은 간단히 말해, 이 영화제의 가치를 인정하는 자리에서, 검열과 영화제 사이에 오동진이라는 환상을 투여하는 것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쓰였다. 또한, 누군가의 축출의 논리와 어떤 숙고와 담론의 과정을 경유해 그것에 이르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지 않을까에 대해 나름의 답변을 시도한 것이다.

     

    p.s. 페이스북은 이제 아재들이 독식하는 놀이터다. 고독함과 울화와 불끈 솟는 의지들을 끼리끼리 주고받으며 떠오른 생각들을 정돈 없이 마구 배설하며 낄낄거리며 노는 여흥의 공간, 스스로는 세계의 구태의연함과 핍진함을 걱정하며 비장한 독립투사인 것처럼 구는 그런 공간이다―그리고 저열하거나 상투적이며 단순하거나 부화뇌동하는 표현들은 오동진의 사례와 같이 대부분 게시글이 아닌 ‘댓글’에서 나타난다(그것은 결코 발화라기보다 일차원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정념의 파편적 조각들이다. 그러니까 오동진의 문장을 발화의 대열로 올리는 것은 페이스북이라는 플랫폼, 곧 미성숙한 자아들을 양성하는 이 같은 온라인 공간과 그것을 결부 짓지 않을 때 사실 가능하다.). 가끔은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문과 같은 정돈된 정치적 발언이 가끔 올라오기도 한다. 이 두 개의 크고 작은 조류가 각각 지속적이고 일시적으로 나타나 뒤섞이며 혼합되는 게 곧 페이스북 같다.

     

    그러니까 오동진은 후자를 담론적 처리가 아니라 존재적 처리를 한다―맞서는 대신 부정하며 방어한다. 존재를 전격적으로 드러내는 게, 곧 ‘얼굴을 드러내며 (그래서 더) 거침없이 발화하는’ 게 페이스북이라는 플랫폼‘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선 목적어는 이미 정해져 있다, 장해영의 얼굴, 그리고 그의 얼굴을 믿고 그의 글에 좋아요를 누른 모든 사람이다.) [각주:6]) 어떤 뚜렷한 현안에 진정으로 결연한 존재와 평소에 해소 못 한 정념들을 해소하는 존재 간의 간극이 또한 하나의 평행선상을 달리고 있는지도, 그럼에도 결국 어쩔 수 없이 간헐적으로 덜컹거리며 뒤섞이게 되는 게 곧 페이스북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떤 담론의 주체를 가장한 위치에 있는 자들은 그것과 다른 홈을 파나가야 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1. 1. 이는 절대적 진리의 위치로 수여되지만, 당시 이광재 의원은 자신의 발언으로부터 탈구된 이 사실을 즉각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때 정치가 화용론적 차원에서 상대방을 어떻게 설득하는지의 효과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따라서 이는 실패한 대화였다. 상대방이 인지하지 못한 사실은 질책이 아니라, 설명과 논증의 절차를 따라 전달되어야 한다. [본문으로]
    2. 2. 아마도 조국을 비호하는 이들은 자신의 윤리적 숭고함이 침범당한 것 같은 분노와 허탈감을 느끼는데, 이는 다른 상대방의 말에 대해 합리적 비판의 사고보다는 오동진의 문장처럼 상대방에 대한 불쾌함과 더러움의 감정이 앞서는 이유이다. [본문으로]
    3. 3. 3월 2일 현재, 몇 명의 집행위원이 집행위원회 자체의 졸속 운영을 반성하고 점검할 것을 요청하는 입장이 발표되었다, 내부 자정 작용이라는 긍정적 측면 아래, 이 지점이 보여주는 건 오히려 오동진 자체의 자격 없음이 아니라, 집행위원장 자체의 영화제와의 내재적 차원에서의 연관성 없음에 대한 사실 아닌가. 그에 따라, 제대로 된 절차를 겪었다면 오동진이 임명되지 않았을 거라는 해석은 도착적인 것이다. [본문으로]
    4. 4. 가령 『불온한 영화를 위하여』(2025)를 보면, 대부분의 글은 영화는 삶을 탁월한/독특한 것으로 비유한 것들이며, 곧 삶의 알레고리로서 영화를 정의한다. [본문으로]
    5. 5. 거기서 조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가 진정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조국의 내재적 윤리를 선취할 수 있는 자리―역으로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자리―에 대한 근거가 되는지에 대해서 또한 묻고 싶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조국의 비위로 소급되지 않을 수 있는지, 그것을 경유하지 않고 조국을 지지할 수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적대에 맞서, 그 지지자들의 원한감정을 어떻게 반향시켜 전이시킬 수 있는지의 정치적 차원의 가능성이 다른 한편으로 또한 궁금한 것이다. [본문으로]
    6. 6. 아마도 오동진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과문을 직접 올리지 않고 이를 영화제에 직접 보내는 것으로 갈음한 것은, 이 논쟁이 페이스북에서 시작됐고 그 안에서 자신이 설정한 두 축의 세력이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무엇보다 담론의 차원이 아닌 선호의 차원이, 정의의 차원이 아닌 정치의 싸움이 작동하는 본질적인 오염된 플랫폼‘이라는’ 어떤 진단을 따른다. 그러니까 자신의 말이 이미 그것과 친연하며 그로부터 전이되어 있음―그것이 반성적 차원이라면―, 자신의 말과 같은 차원이 증폭되어 자신을 반향할 것―도피의 기제 차원일 것이다.―역시 그가 판단한 가정이 아닐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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