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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산실과 신촌극장: 플랫폼의 실종과 교체
    Column 2026. 5. 10. 22:13

    창작산실 2026 포스터[출처=https://www.arko.or.kr/content/2211].

    월간 《몸지》에서 5월호 좌담 [각주:1]의 자리는 창작산실을 주제로 이야기되었는데, 이는 주로 창작산실의 개별 작업 대신에 제도의 허점과 문제점에 대한 것이었다. 정식 명칭은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으로, 이는 공연예술의 분야에서 연극, 무용, 음악, 창작오페라, 전통예술을 아우르는데, 적어도 무용에서는 “망작산실”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아마도 공연 단체의 활동 번반에 대한 지원인 ‘공연예술중장기창작지원’을 제하고는 단일 작품 지원으로는 가장 많은 액수를 지원하는 게 아닐까 하는데, 2025년 선정된 여덟 단체/예술가는 대략 4,000~9,000만 원(가장 적게는 4,300, 그리고 모두 6,000 이상이었고, 가장 많은 액수는 8,900이었다[각주:2].) 사이에 있었는데, 그중 발레 두 작품을 제하고 여섯 작품을 개인적으로 관람했고, 글을 작성했다.

     

    창작산실(創作産室)은 창작을 낳는 공간으로, 그것은 역설적으로 각 창작 팀으로 온전히 소급되는데, 특별히 제도적 차원에서 지원금을 유동적으로 결정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하는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랫폼이었어야 하는 이 제도명은 각자의 창작 플랫폼을 가설하고 구성하는 데 대한 대리 지원의 성격에 가깝다. 제도와 실질의 차이, 곧 창작산실이 우리가 상상하는 적어도 ‘더’ 나은 창작을 낳는 플랫폼이 아니라 실은 개별 작품들의 특색 없는 컬렉션에 다름없는 제도가 갖는 추상성과 범속함으로 드러날 때 갖는 그 괴리가 곧 창작산실이 망작산실의 인식으로 전도되는 지점을 낳는데, 정확히 창작산실이라는 이 위임된 제도의 형식은 그 모든 책임을 민간에게 지우면서 전적인 권리를 주었음으로 이상화한다.

     

    그 인식적 회로의 전환은, 혹은 시차적 간극은 우리가 제도와 예술을, 자본의 투입과 예술의 완성도를 혼동하는 지점을 또한 포함하는데, 거기에는 질투와 시샘, 감시와 억압의 기제가 은밀하게 작동한다. 그러니까 그것을 부러워하면서도(그것의 선정 경위를 의심하면서도) 그것이 그만큼의 돈 값을 했는가를 따져 묻는다(공공성을 담보하는가를 명목 삼는다). 제도는 우리의 분열된 시선과 타락한 신체를 만드는 셈인데[각주:3], 기본적으로 제도 자체가 창작산실의 자리를 점유해야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제도로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역설인 가운데, 우리 역시 그를 경유해 창작을 물화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창작산실은 그 창작이 만들어지는 그 과정 자체에 대한 산뜻함, 생기, 가치와 의미 따위를 긍정하는 이름 아닌가.

     

    사실 ‘진정한’ 창작산실은 신촌극장과 같은 민간 플랫폼에서밖에 나올 수 없는 거 같은데, 그리하여 (여전히 제도가 무언가를 다 담보할 수 없다라는 데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제도의 범속함과 투박함 또는 섬세하지 않음, 낡음의 속성은 ‘어쩔 수 없이’ 구애받지 않으며, 특별한 틀에 끼워 맞추지 않으며, (큰) 돈과 결부되지 않지만 (적은 돈에) 얽매이며, 형식으로 결정되지 않는 어떤 불완전성의 새로움을 낳는 방식으로서 작동하는데, 사실 그것이 예술의 진정한 형식 아닐까. 그러니까 무언가를 더 잘 만들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걸 잘하는 것 말이다.

     

    곧 창작산실은 창작을 제도 안에 두는 방식으로서만 산실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는데, 그리하여 창작을 낳는 산실이라는 인공적 개념으로써 우리를 속이는데, 또는 혼동케 하는데, 곧 창작이라는 것 자체가 실은 산실인 것이다. 단지 (산실로서) 창작이 있을 뿐인 것이다. 창작은 니체의 비유처럼 무언가를 낳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공간이 있다. 따라서 플랫폼으로서 산실이 있다면, 그것은 창작산실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서교예술실험센터, 《쉐어 프로젝트: 실험실》 2018 포스터.

    기실 공간 자체를 실험케 하는 공간의 실험 프로젝트가 이에 근접하는데, 이후 예시는 모두 “실험실”이란 명칭을 택했다. 제도적으로 이에 접근한 것은 민관 거버넌스 체제로 이뤄진 서교예술실험센터의 공동운영단이 진행한 《쉐어 프로젝트: 실험실》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그야말로 실험을 위한 공간 개방으로, 공간의 비수기에 마련되었으며, 어떤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민간의 방식으로는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에서 있었던 ‘○○○의 실험실’(2016)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술가가 공간에 일주일 입주하고, 8일째 되는 날 관객을 초청해 “마라톤 토크”를 개최하는 프로그램으로, 그 창작에 대한 이야기는 창작의 결과와는 다른 어떤 것들을 발생시키는 바 있었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주최했던 ‘안무랩’ 2015 포스터.

    안무의 차원에서 제도적 산실이었던 예외적 사례는 국립현대무용단이 주최했던 ‘안무랩’(2014~2016년, 안애순 예술감독 당시 ‘여전히 안무다’라는 이름으로 각각 “리서치”, “생산”, “장치”를 주제로 열렸다. 2020년에 “안무가, 자기 자신”이라는 특색 없는 이름으로 돌아왔으며, 2021년, 2022년에 한 번 더 열렸으나 주제 자체가 없어져 안무랩의 측면이 무색해졌고 그렇게 겨우 명목을 이어오다가 김성용 예술감독 때에는 완전히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이 있을 것이다―지금은 2021년 이후 진행되어 온 무용×기술 창작랩이 남아 있다. 현재로서는 서울무용센터의 레지던시, 그러니까 레지던시 및 연습실 기능을 겸하면서 상반기/하반기로 일 년에 두 번 나누어 작업공유회와 이후 결과물 출판까지 진행하는 서울무용센터 입주예술가(2016, 2023~) 과정이 산실의 역할을 제도 차원에서는 유일하게 한다고 보인다[각주:4].

     

    사실 그 외에 민간에서 작동하는 거의 대부분의 방식은 이처럼 산실에서 이뤄진다. 곧 그것을 물화시키고 외주화하는 방식으로서 창작산실이 성립하는데, 개인적으로 창작산실의 가장 긍정적인 부분이라 함은 그것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태계 자체를 담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작산실은 기실 창작 환경 (일부) 활성화 프로젝트로 보이는데, 대부분의 작업이 무언가를 만들 때 창작산실 정도의 적어도 시간을 들이지 않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거기에 산정되는 자본의 가치를 산정해 내지는 않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어느 정도의 예산이면 신작을 만들 수 있느냐라는 자본의 적정 수준을 예시하고 표준화하기 위한 실험으로서 창작산실이 유효할 수 있다라고 보는 것인데, 물론 그것이 충분하고 적합하느냐의 차원을 되묻기 전에, 적어도 크레디트에 붙는 사람들에게는 예산 기준표의 양식에 근거해서 돈을 지급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반면, 더 많은 인원은 행정과 소통의 차원을 그만큼 증대시키는데, 이는 시간의 감축을 의미한다. 곧 작년 5월 발표가 나고, 10개월 정도 안에 모든 작업이 마쳤다고 할 때, 그것은 일반적으로 한 작업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서 그 감축됨을 ‘더해서’ 충분한 시간이라 할 수 있는가.

     

    2024 서울무용센터 입주예술가 작업공유회 포스터.

    그러니까 제도적 차원에서의 얽힘이 행정의 영역을 따로 분리, 외주화한다고 해도, 전적으로 그에 속박된 사고 체제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더 많은 자율성은 더 좋은 창작을 낳는다는 가설을 지지한다면, 신촌극장처럼 나이브한(?) 시스템은 예술의 전반적 경로 자체를 더 활성화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더 많은 예술가와의 협업 및 협력이 증대될 때 그것이 예술의 형식으로 온전히 이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데, 일종의 작가주의적 작업이 소수의 것으로써 ‘잠재된’ 많은 것을 함입하는 것처럼, 다수의 양식적 연결이 질적 차원의 형식적 강도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작품이 아니라 창작자 자신을 지원하는 게 더 합당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곧 창작의 시간 자체를, 경로 자체를 존중하고 지지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 무용에서 필요한 건 작가로서 안무(가)인데, 그것은 무언가를 잘 구현하거나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과정 전반에 그의 생각과 사고와 태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가깝다―마찬가지로 춤을 잘 춘다라는 것과 춤이 무엇을 말하며 궁극적으로 추어 내고 있냐는 것은 미묘하게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이 무엇을 말하느냐라기보다 작품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라는 인상에서 추적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작품에 잠재하는 것, 작품을 초과하는 그 무엇이 있느냐라는 지점에서, 작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사실상 제도의 실패는 네이밍의 실패 자체이기도 하다. 반면 제도의 평범한 이름―그냥 ○○(분야)지원―은 그 제도의 공공성을 수여하기 위한 포용적 태도를 함의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창작산실이라는 그중에서 조금 특별한 이 이름은, 안정적 창작 환경이 실은 불가능한 지점에서 그것에 대한 베타 테스트 버전으로서 어떤 이상으로서 실험을, 그것이 정말 예외적으로만 실천될 수 있음을 발화하는 ‘역설’의 실험을 드러낸다―실은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가장 극단적 지점이 결정되는 부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 보인다. 이 지점에서 창작산실을 속지 않고 바라볼 수 있다면, 굳이 망작산실로서 그것의 완성도를 따져묻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제도는 무언가를 더하기보다 빼는 방식으로 더해야 하는데, 덜어내야 할 것은 행정 절차적 양식과 심사에서 소요되는 시간, 곧 증빙과 증명의 어떤 과정들 같은 것(이 창작 과정과 평행선상을 달리는 부분이)며, 동시에 더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리서치, 사유, 경험, 연결, 매개, 협업 등의 부분이다. 그러니까 예술의 여러 조건과 연관 지어 총체적인 창작 과정에 대한 고려와 배려를 제도적으로 구현해야 하는데, 그럴 때 비로소 산실로서 구색을 갖춘다고 하겠다. 창작산실의 연극 분야도 개인적으로 대체적으로 관람을 했는데, 두 작품을 빼고 다 관람했(고 모두 원고를 작성했)다. 반면, 연극 분야에서는 더 높은 타율로 좋은 작업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연고일까.

     

    두 배쯤 무용보다 더 많은 예산을 받기 때문인가.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다매체간 협업과 여러 전문가 간의 협력으로 이뤄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기술은 무언가 자본의 상승과 더불어 더 진작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에 반해, 한 명의 안무가가 빈 공간에서 자기가 고른 음악을 틀고 춤을 추는 작업을 결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물론 이러한 장면을 무용에 대한 근원적인 정초의 순간으로 두려는 건 아니며, 반대로 상상하기는 어렵더라도 실제 연극에서 모든 걸 혼자 가능하게 하는 1인 극단 시스템의 매머드머메이드가 있다.

     

    그러니까 무용은 이 협력의 차원이 어색하다거나 근본적으로 그와 다른 순수한 매체라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닌 차원에서, 다른 매체/장르와의 협업이, 그리고 그로 인한 규모의 확장이 불가능하다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닌 지점에서, 오히려 그것들을 순수 긍정하는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면, 곧 좋은 무용 공연의 발생은 어떻게 그것들을 소급해 가서 다시 그 영점의 무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단지 더하는 것이 아닌, 연합-연속-합성되어 기입될 수 있을까[각주:5].

     

    신촌극장의 반대편에 있는 산실, 창작산실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지만, 여기에는 제도 차원에서 창작 플랫폼의 스펙트럼이 줄어든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제작극장으로서는 이전 남산예술센터(2009~2020)나 LIG아트홀(2006~2015) 같은 실험적 작업들을 수용하던 기관에 대한 빈자리 역시 느껴지며―아마도 그 반사효과로 현재 두산아트센터의 공연 분야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서교예술실험센터(2009~2023) 같은 홍대 독특한 문화 권역 안에 상징성을 띤 공간이나 신진 미술 작가를 발굴해 온 인사미술공간(2000~2025) 공간 역시 그러하다.

     

    신촌극장[출처=https://www.facebook.com/theatresinchon/].

    사실 신촌극장이라는 하나의 수용적 플랫폼이 있다라는 사실―기획력이 강조된 축제 형태들이 있지만, 이것은 보다 임시적이고 상대적인 신체성을 갖는다.―이 중요하지 신촌극장이 어떤 플랫폼으로서 무언가를 ‘더’ 하느냐는 부차적이거나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무엇을 덜 하(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은 그저 1/2의 나눔 정도로 동등한 관계를 상정하는 정도의 부분으로 보인다.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된 정방형의 이미지를 흰색 배경으로 하고, 좌측 상단부터 신촌극장의 한 글자씩을 모서리에 배치한 후, 그 중앙에 대강의 이미지를 박아 넣는 포스터, 그 뒤에는 기간, 크레디트 등이 채워지는데, 이를 엽서 형태로 조금 변형해 뽑은 것이 티켓이 된다.

     

    구글 폼으로 예약 시스템을 운용하며 계좌 이체로 티켓 비를 받는다. 예매 업무도, 티켓 발권(과 동시에 검표)도, 관객 응대도, 시작 멘트도 전진모 극장장이 직접 한다. 그러니까 최대한 생략되고 단출한 방식으로 일을 줄이는 방식으로 한다. 그리고 팀은 공연을 만든다―공연의 수익 역시 반절로 나눈다고 이야기 들었다. 사실 기획의 경우, 따로 공모를 받지 않는 시스템이며, 운영위 같은 별도 기구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이는 어떤 내부 조건의 심사와 논의에 의해 작품이 미리 결정되어 출현함을 의미하지만, 블랙박스로 닫힌 부분이라 알 수 없다.

     

    따라서 신촌극장은 극장을 무상 대여하는 한편, 제작 자체에 대한 비용을 지원하는 대신에 추후 나눠 갖는 차원에서 조건부 커미션 작업에 가까워진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극장을 구성하지만, 제도 자체의 더할 것들이 줄어듦에 따라 그 역할의 부담 역시 최소한도로 줄어들(지만 거의 혼자 감당하기에는 쉽지는 않)게 되는데, 그 좁은 극장에 대한 사용을 거의 전적으로 양도하는 지점에서 일정 정도 개입의 여지와 소통, 교류가 발생할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기획 프로그램의 특징은 어떤 장르나 매체로, 주제로도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무언가 자신의 말을 조금 생경한 방식으로 해보려고 한다는 정도밖에는 없어 보이는데, 그 말의 진위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건 어떤 미소한 것들이지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외부의 도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완성도란 그 발화의 차원 자체이며 거기에 달라붙는 것들의 친연성, 자연스러움의 정도 등에 있다. 외부적인 차원의 보족됨의 솔기와 발화되지 않는 존재와 역할 등은 거기에는 현격하게 줄어들거나 부재하다. 신촌극장이 별도의 어젠다를 극장으로서도 그리고 참여 예술가들에게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탓에, 제작의 동시대적 의미를 추출하는 건 어려워 보이지만, 그것이 창작자의 선택 이후에 그에게 주는 자율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추정하는 한편 긍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꾸준히 해서 슥’ 2025 행사 기록 사진 ⓒ류진욱[사진 제공=꾸준히 해서 슥].

    신촌극장과는 다르지만, 극장이라는 하드웨어 자체의 고정성을 포기하고 임시적으로 유동함을 가정하고 출발하는 무용 쪽의 플랫폼들도 작년부터 유독 눈에 띈다. ‘꾸준히 해서 슥’의 경우, “결과 중심의 급박한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작업의 주제에 맞는 프로세스를 충분히 탐구하고 마침내 과감하게 실험하는 ‘장’”의 기능을 담당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곧 제도의 미진한 부분, 실은 제도가 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니까 산실-플랫폼의 기능이 제도의 대안적 플랫폼 기능이 축소되고, 또한 거시적이고 추상적이며 치열한 경쟁 체제와 자본주의적 양식의 경로를 따르는 제도 시스템의 비판과 그 너머에 대한 지향의 성격은, 단순히 공공과 민간이 대립적이거나 분리된 영역임을 말하기보다 민간의 자율성과 제도의 비효율성을 상관관계로서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러한 민간 플랫폼의 영역은 어떤 자격을 외부의 기준에서 논구하기보다 자발적 의지와 독립적 자세와 태도, 그리고 자신의 작업 자체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지향, 연대의 공동체적 장에 대한 의존과 갈망 등의 차원에서 자본(주의) 바깥에서 ‘내재적으로’ 무언가를 실천해 내고자 하는데, 거기에는 자기 자본이 물론 투여되어야 한다.

     

    ‘꾸준히 해서 슥’이 말하는 바는 앞서 말한 창작 과정 전반을 (재)점검하면서 가시화하는 차원에서, 과연 제도가 무엇을 본따 예술을 지원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거꾸로 제도 기반의 예술이 무엇을 누락하고 잃어버리고 있었는지를 교훈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꾸준히 해서 슥’ 자체가 새롭다기보다 그것이 ‘뒤늦게’ 도래했으며, 어쩌면 예술이 기회주의적 차원에서 이행되는 활동으로 격하된바, 오히려 그 반작용의 차원에서, 어떤 자정 작용의 측면에서 그것이 출발한다고 보이는 것이다. 곧 예술이 증빙 시스템 내에서 양산되고 물화되는 것을 피해서, 오로지 ‘하나의 이행 과정’ 아래에서 영속화되는 그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예술‘가’를 ‘재정의’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1. 1. 참고로, 26.04.18, 한 카페에서 열린 이 좌담은 《몸지》  5월 호에서, 김남수, 김민관, 김 향, 박성혜, 윤지현, 이진아, 지속적으로 재정의되는 의 추적과 비평: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총평」으로 실렸다. [본문으로]
    2. 2. 다음 링크에서 “2025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연극, 무용, 음악, 창작오페라, 전통예술 분야) 지원심의 결과발표”를 확인할 수 있다. [ https://www.arko.or.kr/board/view/4014?bid=463&cid=1809484&sf_icon_category=cw00000020.] [본문으로]
    3. 3. 그러니까 이후 등장하는 서교예술실험센터의 사례에서 제도적 실험의 새로움으로서 등장했던 《소액多컴》의 경우, 100만 원의 정액 지원이 예술가에게 지금에 이르러서는 곤궁을 주었다 또는 착취하는 것과 같다라는 의견은 사후적으로만 작동 가능하며, 실은 도착된 의견이다. 그것은 창작 이전에 제도가, 자본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걸 주장하는 지점에서, 진정 문제적인 의견이며, 어떻게 보면 제도가 예술을 완전히 잠식했음의 불길한 징후를 표기한다. [본문으로]
    4. 4. 2014년에서 2016년 사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당시로, 이때 미술에서도 신생공간의 현상이 일었으며, 무언가 공교롭게도 제도 안팎으로 새로운 실험적 움직임들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반대로 지금은 안정적이지만 예술계의 지체 현상, 혹은 퇴보 현상의 시기라 할 수 있을까. [본문으로]
    5. 5. 움직임과 대위법적으로 또는 움직임의 배경을 산출하는 음악 혹은 사운드의 경우, 대체로 일종의 배경음적 기능으로 저하되거나 은폐되어 사용되어 왔고, 그것은 다시 움직임에 대한 합목적적 근거를 자기 차단하는 부정성을 동반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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