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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텐 스팽베르크 Mårten Spångberg, 〈나튼 - 홀딩 어 캐슬 Natten – Holding a Castle〉: 밤을 통째로 붙잡는 법 혹은 통과하는 법
    REVIEW/Performance 2026. 5. 5. 21:16

    마텐 스팽베르크 Mårten Spångberg, 〈나튼 - 홀딩 어 캐슬 Natten – Holding a Castle〉[사진 제공=옵/신 페스티벌](이하 상동).

    마텐 스팽베르크의 〈나튼 - 홀딩 어 캐슬〉은 옵/신 페스티벌 2025의 주제어인 ‘환상’에 대한 집요하고 더딘 탐구로, 그 장광설 같은 1인칭 시점의 내러티브는 일종의 사변적 소설에 가깝다. 스팽베르크 자신이 옵/신의 예술감독으로서 이 작품이 축제에 대한 그의 이념을 자신의 작품으로 증명하는 셈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문학이라는 매체의 토대를 확장된 형식으로 전파하고 있다―무대, 음악, 안무 모든 차원에서 〈훰닝엔〉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 작업의 독특함 역시 이 부분이다. 곧 그가 쓴 것이 확실한 하나의 소설이 김신우의 내레이션에 입각한 주로 이민진, 박진영 둘의 움직임이 만들어지고, 225분이라는 사전 계획된 시간을 완성하게 된다.

     

    여기서 화자인 ‘나’의 성별이 특정될 수 있는 건 번역에 따른 가산의 효과로, 이는 다시 김신우와 화자의 불일치, 곧 단지 번역자이자 매개자의 위치를 (그 바깥에서 스팽베르크의 목소리를) 그 문학 바깥에서 특정한다. 그 시점은 “누나”라는 호칭을 부르는 이의 성별을 특정하는 한국어의 문법적 특질이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에 대한 추정이 전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후반에 어떤 성별이나 국적 따위의 경계를 특정하지 않는 차원을 ‘나’가 설정, 주창하는 듯한 문장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전적으로 김신우가 한갓 매개자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김신우가 매개자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하여 실은 스팽베르크의 별개의 작업이 번역되는 것이 아니라, 번역 자체가 작업을 선취하는 점에서 〈나튼 - 홀딩 어 캐슬〉은 스팽베르크의 (내재적 차원이 그) 외부에 있다. 소설이 전적으로 나와 다른 외부만이 나를 살린다는 문장을 내뱉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 소설이 가리키는 ‘환상’은 환상을 직접 지칭하지 않은 채 여러 개념을 통해 경유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환상은 명확하게도 ‘실재(das Ding)‘이다. 마치 정신분석학적 강령과도 같이, 그것에 대한 묘사는 실은 그것에 대한 설명 혹은 주석을 대신하고 있는데, 일종의 ‘나의 내부에 있는 외부’인 그것은 마치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듯한 것이며 나와 독립되어 있는 듯한 무엇이다.

    이 ‘외부’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생명의 근원이라는 불가능성의 영점에 대한 사고와 만나게 되고, 이 행성 외부의 다른 생명 존재를 전제하게 되며, 지구라는 행성 바깥에 이르게 된다[각주:1].

    여기에 시간적 차원이 도입되면서 타자, 행성적 차원, 고대적인 것이 하나의 원환을 이루게 된다. 곧 “경험”의 전제 조건으로 ‘무언가가 (이미) 있어야 한다는’ 건 초반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 안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조응하는 듯 보이는데, 곧 미지의 것은 공간적 차원에서 그리고 다시 시간적 차원에서 각각 물리적으로 무한해지고 더 과거의 차원으로 소급해 간다.

     

    공간적 차원에서는 막바지의 공간 전체의 진동, 그러니까 바닥 가의 스피커만을 이용하다 천장 위쪽 숨겨진 스피커까지 총동원한 사운드의 물리적 공세 속에서 행성적인 것의 차원 이동을, 변경을 감행하는 것에 이르는 것인데, 이는 소설이 종료되고 또 회색 포―은박담요―라는 처음 경계의 산물로서 지위가 부여되던 것까지 모든 것을 암흑의 공간으로 바꾸는 것을 동반한다. 목소리를 대신하는 건 하나의 노래―Ásgeir - Going Home―로 어둠 속에서 넷은 그 노래를 따라부르며 새로운 행성에서의 ‘밤’을 지샌다.

     

    검은 옷 계열의 이민진과 흰옷 계열의 박진영은 어떤 분기점마다 옷을 하나씩 벗고 또 갈아입는데, 이 대비의 색조는 문장에서 검은 눈동자와 흰자위의 분할적 장소에 대한 코드에서 비로소 응결된다. 이 두 색의 경계가 흐트러지기보다 두 개의 위치가 마구 바뀌는 지점에 대한 공포를 토로하는 부분은, 그 두 개가 섞인 단일한 회색 평면에 대한 진술을 은폐하는데, 바로 그 같은 목적에서 현실을 경계로써 상정하는, 이 두 퍼포머는 거울상처럼 서로를 마주하며 따라 하거나 동일한 움직임이 분기된 듯한 양상으로 움직이는데, 이는 ‘심연’으로서 회색에 대한 은유 이후, 행성적 이전 이후에 하나로 합일된다.

     

    우선 회색은 하나의 경계로 놓인다. 둘은, 셋은, 넷은 그것을 마주하고 다시 돌아오는 어떤 순례자의 여정을 재현하면서 정작 헛손질의 결과를 낳는다. 회색 공간은 어떤 불가능성의 경계를 상정한다. 그것은 무의미의 의미와도 같은데, 이후 이민진과 박진영은 다리를 벌리고 의사-성교의 행위를 벌이는데, 이는 일종의 자기 수행의 상호 의례적 차원의 연장선상에 있다. 곧 쾌락 자체에 대한 목적보다는 쾌락에 대한 온전한 제어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양상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는 대타자의 승인 아래 그것을 수용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내는 의례가 끝나고 나서 자의식적 문장의 서술이 이어지는데, 거기에는 본격적으로 어떤 개체의 의식이, 무의식의 심연을 향해 나아가는, 그러니까 그것이 근본적으로 전도된 상황에서 실재의 외부는 이제 더 이상 실재에 대한 충동의 바깥에 있지 않다. 외부는 “내 몸 안에 있”는 무엇이다. 그 직전 다운 템포로 음악이 안정화되고 서로를 비켜 보는 정지의 순간이 있다. 본다는 행위의 어긋남 혹은 관계의 비틀림으로부터 실제 보는 것 자체는 균열적인 것으로 정초된다.

     

    하나에 대한 다른 시점들은 아마도 극장의 관객에 대한 은유일지 모르는데, 이 실재의 경계에 대한 보기에서 차이에 대한 보기의 알레고리로 넘어가는 시점의 매개는 바로 “표”다. 표를 끊는 것, 곧 극장의 입구로 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인데, 그때 이후로 “밀려드는 현실”―이는 극장이라는 직접적 은유를 동반하지 않지만, 그것을 하나의 기점으로만 설정함으로써 오히려 극장이라는 장소 자체를 현실 너머의 장소로 구성한다.―은 이 안에 것들이 현실이 아님을, 현실과 유사한 무엇임을, 또는 현실을 초과하는 무엇임을 수용하는 존재로서 바로 관객이라는 불특정한 대상을 상정한다.

     

    표 역시 외부로부터 온다. 이 외부에 대한 강조, 초점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구를 하나의 행성으로 놓는 일, 그리고 그 행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행성을 벗어 내기를 감행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행성을 벗기 위해서는 그래도 가장 커다란 물리적 변혁의 감행이 필요함 역시 언급되었다. 그것은 직접적인 변화가 아니며 단지 그것을 추동하기 위한 하나의 형식적 절차일 뿐인데, 목소리-스피커와 움직임 모두 그곳으로 귀속되기 위해 멈춘다. 곧 이 모든 건 극장의 어둠이 당도하기 위한 절차다. 하나의 시작. 영원히 하나의 끝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시작인 그 끝에 이르기 위해서이다.

     

    또 다른 행성을 마주하는 건 회색의 경계를 단지 바라만 보는 것과는 달리 그 안에 있는 것이 된다. 전자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신경증적이고 멜랑콜리한 정서로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면, 후자는 진정한 꿈이 하나의 현실로 부상하는 순간이 된다. 무언가를 더 이상 보면서 거리를 띄우는 게 아니라 그 경계 자체가 되는 이 순간에, 때마침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모닥불과 같은 저 ‘너머’의 공동체의 흐릿한 형상을 제시한다.

     

    그것은 희미하게만 전파되는데, 그것은 회색 천의 위치와 실제로 가깝고, 회색의 경계가 마침내 뒤늦게 응답함에 가깝다. 스피커로 전달되지 않기에 그것은 멀고 실재적이며, 그 거리 자체를 실재화한다. 그 ‘너머’로의 흐릿함을 가시화한다. 그런데 그것은 이제 외부에 있기보다 우리의 내부를 진동한다―“집으로 가는 길”에는 내 마음이 담긴다. 한없이 반복되는 노래는 그 반복을 형식으로 만든다.

     

    〈나튼 - 홀딩 어 캐슬〉은 제목의 성, 그리고 회색 산, 그리고 노래의 푸른 산과 같이 환상의 숭고한 대리물로서 높이의 차원을 물신화하며 계열화한다. 그것은 밤의 여정을 이끄는 빛일 수도, 꿈일 수도, 계속해서 글이 경유하는 여러 환상의 단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붙잡는 것은 밤이어서 또 가능하고, 또 그것이 설사 부질없는 것이라고 해도 찬란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밤에 이토록 커다란 무엇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숭고함의 외설적 차원을 드러내지 않을까, 카프카의 『성』에서 도달 불가능한 실재의 경계로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행성적인 차원(에 대한 하나의 은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나튼 - 홀딩 어 캐슬〉이 붙잡는 건, 아니 통과하는 건 근본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밤이라는 어떤 매체 자체가 아닐까. 화자의 신체 너머가 아니라 화자의 신체에 어른거리는 언어라는 심연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누락되는 책이라는 메타포가 남는다.

     

    검은색과 흰색의 분리된 메타포들, 그것이 전제하는 그 둘이 통합되는 이념의 차원에서 회색의, 그 단 하나의 메타포가 존재한다면, 그 전의 대립의 두 메타포는 이 말이 멈추는 순간, 그리고 책이 덮이기 직전,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어둠으로 통합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검은 글씨와 흰 배경으로만 이뤄진 스팽베르크의 『나튼』과 같이, 책 자체에 대한 메타포를 처음부터 가리키고 있었던 건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1. 1. 아마도 이 결과의 차원에서는 장혜진의 〈흐르는〉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어떤 ‘무한한’ 확장에 이르는 점진적 이행의 과정에서, 그것을 전개하는 데 있어 마찬가지로 내레이션을 사용한 측면 역시 공통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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