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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노 세갈, 《티노 세갈》: 티노 세갈이라는 경계로서 장치(물)
    REVIEW/Performance 2026. 5. 7. 16:24

    티노 세갈, 《티노 세갈》 포스터_포스터 디자인: 김영삼(Sam Kim).[제공=리움미술관].

    티노 세갈의 전시 《티노 세갈》은 간략하게 말하면 무언가 신체 움직임으로부터 ‘발생’하는 것들에 대한 것인데, 실제 전시명은 그의 이름으로 지어졌기보다 임시적으로 고착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소급적 차원에서 티노 세갈의 고유성을 준별하되 전시로써 발생하는 무언가의 ‘더’ 부가된 관념의 자리를 그의 이름으로 재처리하는, 메우는 구멍 마개의 차원에서 그를 전시로 부르‘게 된다’―기존의 전시를 그가 아닌 것으로 정의한다(그런데 개인전, 곧 그의 전시라고 하면 그것을 다시 보통의 관념으로 되돌린다). 그러니까 ‘티노 세갈’은 까다로운 대상인데, 그것은 전시명을 짓지 않음으로써 이것이 전시와 다른 무엇이며, 실은 전시가 아니지만 전시의 틀로서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모순을 일으킨다. 

    곧 이 전시가 아닌 것 같은 전시는 전시에 대한 관념을 재고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가 미술관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거나 생각이 없거나 한 차원을 굳이 격상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차원으로 바라보는 시점에서 그 부재가 작동하고 있음을 그 안의 내용물들로써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티노 세갈》은 티노 세갈의 작품들을 일차적으로 모아놓아 놓은 것이지만, 그 움직임들이 잇는 경로로서 드러난다. 이는 전시장 바깥을 벗어난 작품들의 배치로써 더 명확해지는데, 이미 전시장을 통과할 때 입구에서 들이닥치는 〈이건 너무 현대적이야〉(2004)―엄밀히 이야기하자면 〈This is so contemporary〉가 맞다. 그리고 이는 번역되지 않은 게 아니라 번역될 필요가 없음에 대한 인식에서 아마도 그러하다.―가 대표적이다. 

    정장을 입은 세 명의 퍼포머가 “Oh~! This is so contemporary.”를 외치며 관객을 마주하고 스쳐 가는 이 이벤트적 제의는, 관계의 차원이 아닌, 전시장을 초과하면서 전시장으로의 경로를 방해하고 교란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인데, 여기서 ‘초과’의 핵심적 매체는, 곧 더 넓은 범위의 지각은 그 소리이다. 이는 입구를 틀어 들어가는, 야외 정원의 퍼포먼스로도 확장되는데, 〈이 당신〉(2006)의 경우, 퍼포머가 관객을 마주할 때 노래 절편을 돌려가며 부르고 “This You / Tino Segal / 2006” 하는데, 이는 작품의 캡션을 변주한 것이다. 

    다시 전시장 로비로 돌아오면, 〈(무제)〉(2026)가 펼쳐지고, 파란색, 흰색 각각의 비즈로 만든 커튼인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무제”(시작)〉(1994)을 헤치고 나아가면, [〈이 입장〉(2023)-] 〈이 환희〉(2020)[-〈이 당신나나당신〉(2023)]―같은 공간에서 전시 기간 동안 총 2번의 작품 교체가 있다.―이, 다시 커튼을 열면 〈키스〉(2002)가, 1층으로 올라가면, 입구로 〈무언가 당신 코 앞에 나타나게 놔두는 대신 춤추는 브루스와 댄 그리고 다른 것들〉(2000)이 있는 식이다. 곧 이질적인 퍼포먼스들의 경계는 비즈 커튼과 같이 새어나오고 일정 정도 투명한 가시화의 영역 아래 있다.  

    이 연결 강박적 차원의 전시 구성은 전시의 현상학적 체험의 강조를 전시장 너머로까지 확장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시화하는데, 이때 뚜렷해지는 건 개별 작품들의 ‘침투’와 난립의 상황이다. “구성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s)”―엄밀히 티노 세갈 자신의 용어로, 리움미술관의 “모바일 브로셔”의 작은따옴표는 틀린 것이다, 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이라 불리는 작업들은 그 경계부의 걸쳐짐 안에서 더 구성된 것, 곧 작품으로 단락 짓는데, 이는 오직 연결을 위한 차원에서 실천되기 때문이다. 곧 대위법적 병치의 차원이 아니라 미술관이 ‘동시’ 발생하는 것들의 집합소―연결망―로서 인지되는 시점에서, 작품들의 개별성은 전시를 침투하는 초과된 매체로서 재위치하게 된다. 

    〈이 당신〉을 제한다면, 이 작품들은 정확히 시작과 끝의 타임테이블을 퍼포머들의 규약 안에서만 인지되는 것으로 두는 듯 보이는데, 따라서 무언가의 끝나지 않고서 솔기 없이 반복되는 ‘구성’되는 상태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구성은 일종의 스코어의 전수 자체를 실현하는, 그것에 저당 잡힌 퍼포머의 규약에 대한 실천―어쩌면 정동 노동 혹은 감정 노동을 수행하는 것에 더 가깝다.―인데, 이는 ‘위임’된 형식이다. 그 퍼포머를 티노 세갈은 “해석자(interpreters)”로 명명하는데, 그것은 그 이름에 대한 충실한 정의로서 자리하기보다는 위임된 이전 존재자에 대한 대체된 현재의 위상을 ‘승인’하면서 또한 불안정한 것으로 둔다. 

    그것은 곧 원본에 대한 것을 전제하는데, 이때 사실 이 명명이 가리키(지 않)는 건 진정한 해석자의 자리이다. 곧 신체 매체가 가리키는 건 관객인데―어떤 사진도 찍을 수 없다는 원칙은 무엇보다 일회적 현존의 차원을 관객 스스로에게 수여한다.―, 관객이 해석을 통해 그것을 완성하지 않는가. 이 명명의 관객(의 자리)에 대한 침범은, 곧 관객을 대신함은 따라서 관객의 자리를 은폐하는데, 이는 역으로 그 둘을 등가의 차원으로 엮는 것이기도 하다. ‘관계미학적’ 전통―이 시대착오성 안에서 이 전시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가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이 거기에 전제되는데, 이는 퍼포머의 주권을 인식자의 차원으로 격상하면서 동시에 그 바깥의 불특정한 관람자의 차원으로 범속화한다. 퍼포머의 고유성은 관객 각자의 고유성이 실재적인 것으로 낙착되는 그 지점 정도만큼에서 보장된다. 

    티노의 전술은 미술관 제도의 차원을 미세하게 비트는 데 있는데―그것은 단순화/이상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생기는 국소 효과는 전시 그 자체의 문법을 이룬다. 전시는 공간 안 작품이 아니라, 공간 더하기 작품이며, 퍼포머와 관객은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분리된 대상으로서 관계 맺는다. 미술관은 발생하는 그 모든 것들의 궤적이며, 그것은 미술관에 대한 새로운, 그보다는 덜 특별한 사유이다. 연결에 대한 강박은 이 공간을 포함시키려는 행위이자 이 공간을 하나의 이념으로 메우고자 하는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다루고자 하는) 행위이다. 

    앞서 예외적으로 〈이 당신〉의 변용된 캡션 읽기 수행 역시 독특한 국소 차이로서/로써 작동하는데, 작품을 완성하면서 작품의 종료됨을 지시하기보다 지연시키는데, 이때 정보의 차원과 표현의 차원은 모호하게 배합된다. 그것은 작품을 초과하는 무언가를 지닌다, 작품을 지시함으로써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작품의 연장이 아니라 ‘작품’을 침범하는 무엇을 생산한다. 작품의 경계를 확정하는 대신 되묻는다. 작품이 그 경계 안에 온전히 닫힐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 환희〉(2020)는 작년 공교롭게도 《옵/신 페스티벌》에서 초청되어 상연된 바 있는데, 이때 두 명의 퍼포머는 훨씬 친밀하고도 내밀한 차원의 호흡을 상호 연결 짓는 모습이었다[각주:1]. 그러니까 미술관에서 행해진 퍼포먼스는 기이할 정도로 닫혀 있으며―그것은 그들 서로에게, 그리고 또한 일정한 경계 내에―, 마치 정해진 동선에 대한 틀을 정확히 완수하면서 모든 걸 수행한다는 인상을 준다. 거기에는 퍼포머의 자율적 역량이 현격하게 줄어들었음이 보인다. 

    당시 LDK라는 공간은 일반 사옥―대사관저―을 개조한 곳으로, 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두 명의 퍼포머는 공간 전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퍼포먼스를 수행했고, 점점 ‘소진’되어 가면서부터는 규칙의 실패를 어쩔 수 없음으로 받아들이고 변경하기도 했다. 반면,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는 일종의 노동으로서 수행되는 바이며, 그것은 적당한 수준의 노동이 일정하고 안정적으로 작동될 수 있도록 그중 일부를 계속 교환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것이 노동인 바는 명백했는데, 그것은 미술관의 극장성, 무엇보다 극장의 식역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관람 환경 자체가 시간 단위로 측정되었고, 관객의 지층은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흐름 안에서 또한 측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불안정한 관람객과 퍼포머의 대응은 긴밀하고 끈기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고 소거될 수 있는 편의적 차원의 관계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퍼포먼스는 일 대 일의 관계가 아니라, 관람 가능한 이미지, 그리고 미술관이라는 규약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것은 별도의 안내사항이 없는 한 안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별도의 안내사항이 없어도 여전히 퍼포먼스입니다.’라는 비가시화된 규약은 전시실의 암묵적 제도로서 체현되며, 무대라는 별도의 독립된 채널로서 작동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인지되고 식별되며 동시에 보호되고 보존된다. 곧 서로에게 안전한 경계로 작동하는 것처럼  산만함 역시 서로를 향하며 그것은 내적 강도의 감축과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수용‘들’이라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하지만 그 둘은 맞물리기도 한다. 이때 퍼포먼스는 작아지고 동시에 적어진다. 

    티노 세갈이 직접 리움미술관 소장품에서 고른 작품들이 1층 〈키스〉와 함께는 배경으로 자리 잡으려 한다면, 2층에 이르러서는 퍼포먼스를 상회할 때, 곧 퍼포먼스 자체를 주변화하기 시작할 때, 퍼포먼스는 작은 소품으로서 작아지고 집약되어야 한다(적어져야 한다)―〈키스〉의 오귀스트 로댕의 15개의 청동 조각들과 제프 쿤스의 1개의 채색 목재 작업 아래 두 퍼포머는 둘러싸이지만, 이는 오히려 무대의 경계로서 작동한다. 

    따라서 극장성은 물리적으로 소거되지만, 그것은 부차적으로 또는 부속적으로 티노 세갈의 의도에 힘입어 다시 일부 출현하기도 하는데―펠릭스 곤잘레스의 커튼 역시 공간을 닫고 구획하며, 무엇보다 〈키스〉의 무대 경계를 결정적으로 완성하는 오브제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이 ‘간이한’ 방식으로서 미술관 내 퍼포먼스는 극장의 부정성이라는 차원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버전으로 볼 수 있을까. 곧 이 같은 퍼포먼스들은 극장 내에서 더 잘 구현될 수 있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포기하거나 극장의 열화된 버전으로서 실행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반면, 티노 세갈이 형성하는 극장성은 공간 자체를 시간화하는 것에 가까운데, 이때 공간은 이미 시간의 (불)연속적 지층들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여분의 시간성 안에 개입하는 형식으로서 퍼포먼스는 성립하며, 〈이 환희〉와 〈키스〉와 같은 관객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작업들―〈이 환희〉는 관객 사이에 위치하고 관객을 넘나들며 관객에 침투하는 감각을 선사하기는 한다.―의 경우를 제하면, 〈이건 너무 현대적이야〉나 〈이 당신〉, 그리고 〈무제〉 같은 경우는 관객의 동시성 안에 침범하는 형식을 띤다―물론 그것은 작품으로서 최종 식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띠며, 그 잠재적 지대 안에, 곧 어떤 여전한 일말의 새로움 같은 것이 그 사후적 식별 이전에 자리한다.

    〈이건 너무 현대적이야〉가 너무 가깝지만 그 소리로부터 너무 멀리에서부터 작동한다면, 나 조금 더 내밀하게 소리치는 〈이 당신〉은 더 가까이에서, 그리고 〈무제〉에 이르러서는 거의 식별되지 않는 차원에서 관객과 마주한다. 그러니까 〈키스〉에 비견될 정도로 〈무제〉는 가까운데, 그 대상은 퍼포머가 아니라 관객을 향한다. 〈무제〉는 내밀한 퍼포머의 이야기를 전수하며, 또한 관객에게 질문을 던져 그것이 심적으로 발생하도록 한다. 아마도 티노 세갈은 이 비극장성의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것을 작품으로 규정하고 활용함으로써 일반적인 극장의 질서와 흐름 바깥의 어떤 시간을 창출하는데, 〈무제〉에서 그것은 거의 사적인 차원으로 전도된다. 

    〈무제〉는 미술관 로비와 같이 미술관이라는 가시성의 차원이 특정한 대상에 대한 식별을 낳는 곳‘과 맞물린’, 경계에 위치한 공간에서 ‘수월하게’ 작동할 수 있다. 그것은 전시장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전시장이어서 가능한 것은 아닌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장소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실천 양식에 따라 임시로 정의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따라서 티노 세갈에 대한 정의가 마치 미술관 안에서 무언가를 그가 하기 때문에 그가 미술 작가로(만) 분류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가 미술관에서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가 미술관에서 무엇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미술관을 미술관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미술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낳기 때문이다. 앞선 세 작업은 미술관의 경계를 지정하면서 시험하는 작업이며, 미술관의 시간 질서(를 전유하며 그) 위에 다른 시간을 올려놓는 방식이다. 무언가 그다지 특별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미술(관)의 시간을 규정하면서 어떤 체험으로 연장된다. 

    가령 이와 같은 인지적 사고의 결과물이 지닌, 그리고 퍼포머가 직접 관객과 마주하면서 발생하는 그 내밀함은 《옵/신 페스티벌》에서 위성희의 〈극장 흉내〉(2023)가 보여준 것처럼 극장을 벗어난 지점에서 다른/더 강도 높은 극장성을 창안해 내고자 하는 것에서 실천될 수 있는 부분이며, 이와 같은 실천들은 다시 극장(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티노 세갈은 극장의 바깥으로서 미술관보다는 미술관 바깥의 극장성(의 재출현의 차원)에서(만) 자신의 작업을 (긍정적 자의식으로) 기입할 (수 있을) 텐데, 바로 그런 지점에서 미술관은 (극장으로) 변경되며 (존재하지 않는) 극장은 재정의된다고 하겠다.

     

    김민관 편집장 

     

    전시명 티노 세갈

    전시 기간: 2026.3.3 ― 2026.6.28

    전시 장소: 리움미술관 M2, 로비, 정원

    기획: 리움미술관 김성원 부관장, 구경화, 김솔 큐레이터, 안무가 크리스 쉐러(Chris Scherer), 조화연

     

    1.  1. 당시 퍼포먼스에 대한 기록을 참조할 수 있다. https://www.artscene.co.kr/204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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