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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석 작/윤한솔 연출, 〈활화산〉: 재현의 경계에서REVIEW/Theater 2026. 4. 24. 20:05

차범석 작/윤한솔 연출, 〈활화산〉[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활화산〉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연극으로서 이는 예술이 현실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복무하려는 예외적 경로로부터의 산출이다. 그것의 부정성에 대한 물음 이전에 그것이 가능한가의 물음이 선행될 필요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예술의 자율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의 다의성 혹은 불가해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이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프로파간다 연극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을 반영하는 리얼리즘 극이라면, 후자는 전자의 목적을 위한 차원에서 온전히 조작될 수 있을까. 여기서 재현은 하나의 시대와 또 다른 하나의 시대를 보여주며, 그 둘의 뚜렷한 간극을 갖는다.
그 시차로부터 (또 다른) ‘목적’이 들어선다. 곧 이 둘의 간극은, 도약에 가까운 변화는, 둘의 차이에 대한 강조로부터 그 목적을 읽어낼 수 있다―이 ‘강조’는 윤한솔 연출이 선택한 하나의 주요한 예술의 형식이다, 곧 ‘목적’을 드러내기 위한 또 하나의 목적. 솔기 혹은 틈으로서 작품을 내파하는 지점, 그것이 드러날 때 작품을 목적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목적은 (숨겨진 그러나 유일한) 주제의식이며, 접합의 덜그럭거림이라는 예술의 형식은 사실상 예술을 부정하는 대신, 예술임을 부정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과적으로, 〈활화산〉은 이 솔기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목적극이며, 그 시대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에 부착된 하나의 시선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개입이 있다. 무대를 고립된 하나의 내부로 만드는 것과 무대가 무대임을 보여주는 것―동시에 이는 그 무대가 과거의 자취, 문화, 상징이라는 점에서 과거를 재현 절차에 의해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후자는 간단한 절차에 따라 이뤄지는데, 집을 들었다 놨다 하는 하나의 평면의 막 세트로 구성하는 것, 지나치게 커다란 이미지와 조각을 제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무엇보다 시종일관 무대를 밝게 지속하는 것은 그 무대를 현장의 그것으로 바꾸고 지켜보게 하는 시점을 만든다.

먼저 이미지로는 1부 끝에서 기와집의 평면 막 세트가 반쯤 올라간 것과 동시에 그 아래 바로 걸린 이노인의 커다란 초상과 (1부의 스펙터클적 잔향을 피드백하는) 2부 끝에 무대를 덮는 크기의 새마을운동 포스터가 있다면, 다음으로 조각으로는 정숙을 필두로 조직되는 새마을운동의 규모를 시각화하는 일종의 공공 구조물로서 연분홍색이 배어 있는 돼지 조각상이 있다. 그와 같은 예시들로서 후자가 표피적 이미지의 차원의 ‘도입’이라면, 전자는 내용적 세공이 들어간다.
집의 외부이자 무대의 끄트머리에 있는 정숙의 세 조카, 곧 일상과 분리된 채 결코 집으로 편입되지 않는, 세 아이의 유령적 코러스(이는 지문을 발화하는 것으로, 현실에서의 관계를 만드는 대신에, 그들 간의 관계로써 또 다른 현실, 곧 이중의 현실 속에 또 하나의 시점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의 외화면 목소리로서 내레이션, 무대를 분기하는 동물 탈을 쓴 동물 존재들, 그리고 무대를 가시화―한옥 세트를 천장에 매달아 허공에 띄우기 위해 한옥 세트에 와이어를 결차―하는 절차를 수행하기 위한 스태프의 난입이 그것이다.
전자의 마지막 예시는 또 하나의 개입, 곧 재현의 표피에 어떤 분절을 도입하는 것에 포함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곧 5막을 2부로 나누고, 1부와 2부 사이에 목적이 들어섬을 명확하게 가시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터미션으로, 확 달라진 2부의 공기는 이 내용의 분기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보여준다―연출은 곧 목적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에 복무한다.
전근대적인 농촌 사회의 스테레오타입, 곧 양반 가문에서 시집살이를 하는 며느리와 철없는 남편, 자식을 애지중지하면서 제대로 버릇을 들이지 못한 처가의 부모, 그 결과, 가세가 기우는 집안이라는 일련의 서사에서, 며느리 정숙의 명철한 현실 감각과 그 대응은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 억압적 측면을 타개하는 하나의 페미니즘적 서사로만 고착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경제와 정치의 분기가 전제된다.
방탕한 데다 무능력하고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남편 상석이 축산조합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지는 건 그 결정적인 순간을 드러내는데, 예정된 그 실패는 정숙의 문제해결사로서의 능력이 발현되기 위한 절차이다. 집안의 돈을 엄청나게 끌어다 쓴다는 현실적 차원에서 그의 행위는 문제적이지만, 정치적 초점은 가뭄이 오면 다리가 없어 조난 상황을 맞는 마을의 문제 해결이라는 의제와 겹쳐져 있다.

정숙과 상석은 경제와 정치를, 가정(의 안위)과 (함께 사는) 사회, 곧 평행선상의 두 다른 가치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숙의 문제 제기는 가족이라는 좁은 반경으로 고립되는 반면, 그의 남편은 순수한 정치 행위에 대한 의지를 갖는 인물이지만, 그 중요성은 정숙에 가려져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정숙의 입장에 따라, 어려운 가정의 현실의 어려움이 가속화되는 환경 아래 외부라는 이념은 사치이며 파멸을 예고한다. 2부에서 새마을운동의 마을 지도자로서 정숙의 위상이 쇄신되면서 그는 마을에 다리를 놓는 문제를 마을 사람들에게 연설을 통해 합의를 구하게 된다.
이는 정치적 행위자로서 정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을’이 그의 수중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 지도자 역시 구습을 대변하는 자로서 쇄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곧 새마을운동의 여러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혁신적인 사업들을 단독 시행함으로써 구습에 따른 무기력한 시대상의 그 밖의 사람들은 정숙을 무조건적으로 좇는 가운데, 마을이 그의 수중 아래 자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가 곧 국가의 자리를 매개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정숙이 상상적인 국가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옥돌마을이 국가와의 교신이 끊긴 고립된 상황에서 독자적인 경로를 밟아나가는 것으로만 본다면, 국가가 아닌, 그리고 국가의 공식적 대리자를 통해서가 아닌, 자립적인 마을이 국가의 기능을 온전히 대신하게 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질 수 있다. 한 마을의 자립적 원동력이 국가의 근간으로 자연 흡수된다면 그것은 물론 긍정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는 새마을운동이 어떤 결과로 수렴되며, 어떻게 국가의 토대를 다시 구축하는지에 대한 후속 결과, 그것에 대한 가치 판단과 정교한 셈이 미완이라는 걸 보여준다. 곧 그것이 하나의 미래적 상이자 어젠다에 머무른다는 것. 실상 희곡이 현실에서의 다른 이념을 목적으로 삼을 때 그 현실이 지정하지 못하는, 언어로 변환할 수 없는 경제에 도달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 아닐까. 곧 목적은 미래를 위해 현실을 유예한다.

시대상의 급격한 전환, 근대에 대한 계몽적인 힘의 지배는 독특한 인물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이 정숙이라는 캐릭터에게서 잘 드러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라는 역사적 계기가 삽입되며 정숙은 현명한 며느리에서 자본주의의 화신으로 탈바꿈한다―정치는 경제로 대체되고, 경제가 곧 정치이다. 그 전환의 양상을 더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게 〈활화산〉의 의도이며, 이는 2부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커다란 돼지 조각상이 1부 후반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의 커다란 현수막이 아래로 펼쳐지며 무대를 잠식한 것과 견주어지는 특별한 효과를 가져가는 부분과 같이 시각적인 차원에서도 의도가 구현된다. 반면, 회전하는 무대 위의 돼지의 시선은 결코 누구와도 맞추어지지 않는다.
일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은 마치 포드시스템의 자동화된 생산과 같이, 인간이 기계의 부품으로 종속되어 감을 예기한다. 곧 인간의 노동은 기계와 같이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1부에 등장한 대부분의 주변 인물들의 부재는 서사의 급격한 단락을 증명하는 지점으로, 근본적으로 이는 현실 역시 컨베이어벨트처럼 평탄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사를 단순화하고 가속의 광경으로 환원함으로써, 그리고 더 이상 매개하는 목소리 역시 사라짐으로써, 궁극에는 정숙의 녹음된 음성의 연설만이 텅 빈 현실을 채운다―부재 자체의 현실―과거의 현실이 현재화된다는 점에서―을 보여주는 잔여가 그 변환된 목소리이다.
한 시대의 이념, 지도자의 형상은 왜상으로 기입된다, 기-기입된, 그래서 박제된, 그리하여 언제나처럼 재생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 이상 매개하는 목소리의 사라짐, 무채색의 무대에 행위자의 흔적들만 쌓여 나가는 것을 통해 〈활화산〉은 실은 사라진 주변 인물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인물이 더 이상 인간적인 무엇으로 작동하지 않는 세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마지막 목소리마저 재생 버튼을 통하며, 정숙과 상석의 긴 입맞춤은 그 둘의 분열이 봉합됨을 보여주는 동시에 무엇보다 그 둘의 말을 봉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념으로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세상을 잠식하게 된다. 그렇게 〈활화산〉은 지난 하나의 세계를 닫는다.
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4.05.24 ~ 2024.06.17
평일 19시 30분|토·일 및 공휴일 15시 (화 공연없음)
※ 6.3.(월) 공연없음
※ 6.6.(목) 현충일 15시
※ 접근성 회차: 6.8.(토)-6.10.(월) / 음성해설, 한국수어통역, 한글자막, 사전 대본 열람, 무대 모형 터치투어, 이동지원
공연 장소: 명동예술극장
만드는 사람들
작: 차범석
연출: 윤한솔
무대미술: 임일진
조명: 김형연
의상: 김지연
소품·분장: 장경숙
음악: 옴브레
음향: 전민배
조연출: 최귀웅, 정인혁
출연
김정숙役: 강민지
이상석役: 구도균
이노인役: 정진각
심 씨役: 백수련
이상만役: 이상은
박 씨役: 박소연
면장役: 강현우
환役: 이주형
원례役: 장호인
식役: 박은경
길례役: 서예은
인천댁役: 조승연
화선, 상주댁役: 유재연
종갑役: 홍선우
이 씨役: 최지연
삼보役: 이경민
윤수役: 이동영
길용役: 김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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