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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랜디를 마실 것 같은.》: 회화의 어떤 분기점들, 그것이 시작되는 시점들
    REVIEW/Visual arts 2026. 5. 5. 21:08

    강예빈, 회화적 얼룩.

     

    강예빈 전시 전경. ©Eun Chun.[이미지 제공=하이트컬렉션].

    강예빈의 연이어 배치되어 있는 네 개의 그림, 고양이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여자를 그린 〈Moment〉(2025, oil on canvas, 162.2×97cm.), 모노크롬에 가까운 〈Turbidity〉(2023, oil on canvas, 65.1×53cm.)와 〈The Back of the Eyelid〉(2025, oil on canvas, 45.5×37.9cm.), 무희들을 부감 쇼트 시점에서 그린 〈Embers〉 (2025, oil on canvas, 130.3×97cm.)는, 모두 하나의 비가시적 원의 형상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공통되는데, 은밀하게 또는 명확하게 드러난 그 원형의, 각각 빛, 어스름함 또는 얼룩(2), 치마는 추상과 구상의 일반적인 구분을 내파하는 회화적 충동의 산물로 보인다. 그러니까 그러한 가설에 따르면, 이 원형의 무언가를 그리기 위해 네 개의 다른 회화가 그려졌으며, 그것이 유일하게 다른 이 넷의 회화를 묶는 비의의 코드인 셈이다.

     

    〈Moment〉에서 무언가 과투여된 조각은 여자의 얼굴로, 그것은 다른 것보다 정교하기도 하지만 다른 것보다 더 어둡게 처리되었다. 그 결과, 명확하지 않아지는데, 그래서 기이하며, 결국 시각적 수렴점을 만드는데, 그것은 내용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고양이와 동조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곧 고양이의 연장에서 혹은 고양이를 보는 여자의 감정에서 드러나는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해소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옆에 앞선 밝은 원형의 빛이 있는데, 그 빛이야말로 명료하며, 이 불명확한 여자의 얼굴과 고양이의 드러나지 않은 얼굴, 그리고 공간 전체를 기울이는 문틈으로 지지되는 여자의 포즈로 인해 더욱 좁아지는 배경과의 대비로 인해 불안정한 구도로 연장되는 회화에서, 그 원의 공간만이 위태롭게 균형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굳이 단순한 구분을 한 번 더 동원해 이야기하면, 옆의 두 추상 회화는 구상으로 점철된 그림들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그 노랗게 번져 나오는 원을 그 자체로 드러내기 위해 그려진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은 붓을 원형으로 돌리며 나오는 동세로서 그 움직임의 역동성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그려진, 그 옆의 구상, 무희들에서부터 분기한다.

     

    강예빈, She, 2025, oil on canvas, 112.1 × 162.2 ㎝. ©Eun Chun.[이미지 제공=하이트컬렉션].

    〈She〉(2025, oil on canvas, 112.1×162.2cm.)는 유리 상판으로 된 테이블을 그렸는데, 사선 방향으로 비틀린 이 테이블에서 실은 그 위에 비친 두 개의 액자에서 중앙부의 액자를, 그 안의 여자를 그리기 위해서, 그린 것이다. 곧 하나의 매체가 더해지면서 비물질적인 부분의 연장으로서 얼룩이 반영된 액자 옆으로 생겨나는데, 여자의 형상이 거꾸로 된 것보다 그 형상의 매체에 대한 물리적 지지체로서 테이블이 비틀렸다는 사실이 중요해 보인다.

    곧 전자는 후자로부터 유래하는데, 먼저 테이블의 다리가 드러남으로써 이 같은 가상이 실제에 기초한 것이라는 게 입증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여자의 하이 웨이스트 복장으로 길어진 다리 길이와 그것이 대응되면서 이미지의 기울어진 수직 계열의 선들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그 옆의 앞선 그림자의 수평 계열의 선들이 이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물리적 구도를 분절하며 그에 대응한다.

    여자의 얼굴은 마치 손에 의해 뭉개져 있는 듯 보이는데, 실은 그 손만 명확하게 드러난다. 갈색 계열의 배경과 가깝게 위치하면서 심연으로 침잠하는 듯한 이 상단부의 모호함은 하얀색 의상의 선명함과 투명한 탁자와의 대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또는 의미화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여자는 앞선 알 수 없는 〈Moment〉의 여성과 대응된다, 모호함의 강조 차원에서 오로지 색-빛의 대비 차원에서만 결정된다는 점에서.

     

    〈Missing Grand Piano〉(2022. oil on canvas, 97×162cm.)의 경우, 부감의 시점으로 본 무도회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데, 중앙부의 붉은색 그랜드 피아노 한 대는 이로써 일종의 형태적 윤곽으로 압축되며 좌측의 커플의 리드미컬한 춤이 이뤄지는 바닥의 배경색으로 전도된다. 이때 두 사람의 검은 구두는 그 앞에서부터 검은 곡률의 궤적을 피아노 위에 덧칠해 놓은 것으로 파악되며, 그 오른쪽에는 이 단면을 뒤집어서 투명한 유리로 비춰낸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이때 그것은 추상 회화의 비정형적 얼룩으로 환원되는 데 가깝다.

    그럼에도 그것은 과학적인데, 단지 180도 뒤집힌 시점이 동시에 덧붙여 있다는 차원에서 이것은 초현실주의적인 상상과 연결된 추상주의 그림이 아니라, 기계적인 시점을 추가하여 대입한 결과적 합산일 뿐으로, 이 모든 건 그랜드 피아노라는 걸 하나의 이미지로 환원시켜 유희적으로 여장한 결과를 따른다. 좌측이 그걸 원의 부드러운 곡선 자체로 소급되는 그 형태에 대한 주석이라면, 우측은 이 삭제된 질량적 차원의 무게에 대한 주석인 셈인데, 곧 좌측의 이미지가 가볍다면―운동성의 여정에 있다면―, 우측의 이미지는 무거운 것이다―정체됨의 순간을 보여준다.

     

    조은시, 인터페이스로서 회화.

    조은시 전시 전경. ©Eun Chun.[이미지 제공=하이트컬렉션].

    조은시의 작업들은 일종의 인터페이스 디자인으로서 회화의 가상 공간을 구성하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회화가 펼쳐지는 본격적인 스크린 위에 더해지는 여분의 영역들에 의해 그 공간이 재설정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곧 하나의 절대적이고 투명한 회화의 근본적인 스크린이 가상의 운용 논리를 드러내는 작동하고 있는 생성형 스크린의 단면으로 확장되는 것인데, 이때 헤더 바의 스크린을 매개하는 주석적 차원의 예시적 그림, 스크린 안의 요소들을 아이템으로 치환하여 디자인적 오브제로 재분배하는 사이드바 등이 대표적으로 스크린을 매개하고, 이 전체의 차원은 각재의 설치로 연장되면서, 외부의 사물과 관계를 구성한다. 결과적으로, 회화의 외재적 결속은 회화의 내재적 차원의 ‘접속’에 상응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속상한 날 Distressed〉(2023. 캔버스에 오일, 162.2×112.1cm.)의 경우, 중앙부의 짙은 초록색 나무 한 그루는 그것을 해체하는 그래픽적 경로와 아이템이 덧대어지고 있는데, 그 아이템이 우측 사이드바에 횡으로 정렬되어 있으며, 헤더 바에는 원근법적으로 숲을 조망한 흑백 스케치 이미지가 별도로 있다. 이때 실재적 나무의 질감은 그 위에 더해지는 게임성의 침범을 통해 훼손되기보다 그 개입됨의 디지털적 속성과 대비되는 차원에서 리얼리즘의 특질을 지속하는 데 가깝다. 일종의 배경 이미지로서의 진실성은 표층의 수행성으로부터 심층으로 밀려남의 현상에 대한 다른 정의이며, 결과적으로 스크린의 초록색 나무라는 중심적 이미지는 부차적인 이미지의 지위를 획득한다.

     

    조은시, 속상한 날 Distressed Day, 2023, oil on canvas, 162.2 × 112.1 ㎝.(사진: 작가 제공) .

    〈먼 친척 A Distansuty〉(2023. 나무 패널과 캔버스에 오일, 유채, 물, 유리 용기, 로프, 자작나무, 가변설치.)의 경우, 커다란 그림을 지탱하는 나무 구조물 뒤편에 부착된 작은 그림은 커다란 그림 앞에 놓인 원기둥 모양 용기와 그 안에 담긴 물, 그것이 놓인 자작나무 밑동의 설치에 대응하는데, 나무 밑동에서 깎아지는 표층의 질감을 가진 돌로 다시 표현되는 가운데, 돌이 있는 환경의 나무들을 가로로 잘라내며 큰 나무의 배경으로 덧대어진 화면 중앙부의 파란색 패널은 이 유리 용기 안의 물을 일종의 강이나 바다의 독립된 구역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밑둥은 또한 앞쪽 회화의 중앙부의 물이 안쪽으로 회오리치며 구멍을 만드는 이미지와의 형태적 유사성을 또한 그것의 모티브를 제공하는 셈이며, 좌측 사이드바에서는 절벽을 비교적 크고 가깝게 그래픽으로 치환한 이미지를, 우측 사이드바에서는 노란 배경 안에 원경에서 바라본 절벽의 이미지 혹은 파도가 집적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이는 좌측 사이드바의 절벽과 바디의 파도 둘을 절충적으로 결합한 이미지로 볼 수 있으며, 그래서 그 둘로 모두 확장 가능하며 그 둘을 연계 짓는다.

    그리고 좌측 사이드바의 절벽 이미지 아래에는 독립적으로 붉은색 마디를 중앙부에 가진 검고 얇으며 화살 같은 운동성을 가진 길죽한 마디가 나무 패널 위에 곧장 그려져 있는데, 이는 밑둥 주변을 돌아서 회화 구조물과 직접 연결되는 붉은 로프를 변용된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때 다른 세 개의 이미지와 달리, 별도의 배경색 없이 그려진 이 이미지는 나무와 직접 닿는 환유로써 실제의 연결성을 치환한 것이라 볼 수 있다―그것의 배경 없음은 이 빨간 줄이 나무 ‘위’의 환유가 아니라, 접촉의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환유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실제 이 이 모든 이미지는 나무 패널 위에 곧장 그려져 있는데, 좌측이 패널의 표면에 상응하는 노란색과 어두운 회색의 2색의 대비 구조를 이루는 그래픽적 구성이고, 우측이 노란색 배경 위의 삽화적 이미지라면, 중앙부의 파도 안에서 그 이미지를 성립시키는 그려지지 않은 구멍들은 나무의 표층을 노출한다.

    그 비어있음에 색상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을 양옆의 노란색 배경 이미지로 본다면, 실제 파도의 구심이 되는 중앙 구멍은 그 밑의 ‘화살’에 대한 과녁을 상기시키는데, 곧 전자의 색채 대비의 유희적 대응과 후자의 형태의 측면에서 내용적으로 대응 모두 일종의 캔버스로서 나무라는 지지체 자체, 그것을 어떻게 볼 수 있느냐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곧 전자에서처럼 캔버스 자체를 하나의 (‘충만한’) 색으로 보는 데서 연장되는 또 다른 색의 연결이 있고, 후자에서처럼 캔버스 자체를 (색이) 비어 있음의 물리적 영역으로 보는 데서 연장되는 이미지의 연결이 있다.


    1. 캔버스 자체로 지시되는 나무: 나무의 색→배경색의 이미지

    2. 사물 자체로 지시되는 나무: 색이 비어 있음으로서 나무의 영역→또 다른 이미지의 결합부


    이오이, 지표로서 회화.

    이오이 전시 전경. ©Eun Chun.[이미지 제공=하이트컬렉션].

    이오이의 회화는 모두 무제인데, 이는 어떤 형상을 재현하여 완성하는 대신에, 그 과정에서 다다르는 어떤 형태와 질감이 거의 모든 것이기 때문으로, 이는 그것을 조감하는 시선이 아닌 근접한 시선과 접촉으로부터 그 회화가 일정한 거리를 벗어나지 않고 ‘손안에’ 있는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사실상 회화보다는 조각과 같은 느낌을 주는 건 이것이 나무 패널 자체에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마티에르적인 것이 거의 없고 실제 거의 평평한 데 가까운 건 물감을 덧대어 그것이 독립적인 신체성을 갖게 됨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데, 이는 나무 패널 자체를 하나의 온전한 신체성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곧 캔버스를 대신하는 이 나무 패널은 환영적인 무언가가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신체성 자체를 대면하여 드러내는 식으로 접촉되는 것으로, 어쩌면 이는 작가가 전에 타투이스트로 활동했던 경험이 직접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오이의 작업에서 회화가 평평한 면이 되는 건 2차원의 환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인데, 곧 그것이 신체의 표면이라는 점에서 애초에 3차원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물감은 덧대어지지만 두꺼운 층을 남기지 않고 일정한 압력과 함께 펴 발라지고 그것이 다시 긁힘과 파냄을 통해 물든 색의 일부, 착색된 나무의 긁힌 표면으로 수렴한다. 결과적으로 신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감산의 작용이 더해진다. 이는 궁극적으로 회화적 대상을 조각의 차원으로 인계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오이, Untitled, 2025, mixed media on wood panel, 162.2 × 130.3 ㎝. ©Eun Chun.[이미지 제공=하이트컬렉션].

    그리고 여기서 회화적 대상은 어떤 대상을 회화 차원에서 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데, 그것은 단지 접촉을 통해 변경되기 전의 캔버스 위에 묻어 있는 질료의 차원에서 기능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예외적인 마티에르―〈무제 Untitled〉(2025. mixed media on wood panel, 65.1×65.1cm.)―가 있고 또 그에 대응하는 건 아예 처음부터 색이 가해지지 않는 나무 표면 자체로, 이 둘은 모두 예외적인 차원에서 형상적인 것의 정도를 더 가지고 있다. 특히 마티에르는 가공과 변형 대신에 처음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애초에 형상을 위한 회화적 결정인지, 조각적 차원을 덜어내는 조각적 결정인지, 아님 그 두 개의 결정이 상호 연관되어 교착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나의 예외적인, 2차 가공, 곧 조각적 행위가 더해지지 않은 작업, 더 정확하게는 그 조각적 행위 대신에 회화적 행위를 선택한 〈무제 Untitled〉(2025, mixed media on canvas, 72.5×60.5cm.)의 경우, 보통의 초록색 계열 위주의 표면을 일차로 가져가되 비정형적 사각형의 형상을 띤 중앙부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면적에는 별도의 보라색 계열의 물감들을 수직축으로 쓱쓱 내려 그리며 별도의 레이어가 더해지게 되는데, 조각적 긁음을 회화적 긁음으로 대체하면서 쌓이는 질감이 그 거대한 크기의 긁음의 흔적을 예시하게 된다, 곧 평탄해지는 것이 아닌 그 반대의 차원에서 말이다.

     

    조은형, 상상적인.

    조은형 전시 전경. ©Eun Chun.[이미지 제공=하이트컬렉션].

    조은형의 작업은 초현실주의적 환상의 단면을 그린 것들이 많은데, 가령 〈A Man〉(2025. oil on canvas, 117×73cm.)은 좌측의 검은 중산모를 쓰고 남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우측의 흰색 펄프를 책상인 양 세워놓고 그 앞에 사람처럼 앉아 있는 듯한 그 또 다른 펄프의 얼굴에 대응되는 부위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모습으로, 남자는 자신의 의상과 유사 계열의 치렁치렁한 긴 원단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그 원단 같은 형체의 사물에는 커다란 음표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일종의 커다란 악보의 흐물거리는 천은 남자의 오른쪽 손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 손의 형상은 거의 명확하지 않다.

     

    마치 이 커다란 악보로부터 남자는 변형되어, 그것을 남자가 들고 있기보다 그 거대한 사물로부터 남자의 형상이 일시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인상을 주는 데 가까운데, 물리적으로 그 무게중심이 결코 남자 쪽으로 이전되어 있지 않으며, 무엇보다 그 손과 사물의 경계가 모호한데, 전체적으로 명확한 형체를 간직하는 건 이 남자만으로, 펄프로부터 존재는 남자의 호기심 혹은 주의로 인해 일종의 인간으로서 의미가 부여되는 듯 보인다.

    이 안에서 주체적인 차원의 의지를 찾을 수는 없는데, 사물-존재의 물리적 연결과 시선적 연결의 두 차원은 모두 그 사물의 어떤 고착됨 자체를 반복하는 것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남자는 그런 의미에서 사물에 흡수되고 있고, 또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는 매혹의 대상이 지닌 매력 자체보다 매혹을 당하는 주체의 차원이 가진 무능력함에 방점이 찍히는데, 이는 곧 형해화되는 주체, 일시적으로 결정된 어떤 비의도적 주체의 모습이다.

     

    이는 〈안의 집 Amne's house〉(2025. oil on canvas, 65.1×100cm.) 같은 경우 완전한 애니메이션적 코드를 띠는 것으로 전환되는 것 같은데, 곧 상상적 현실의 차원이 의미의 해석 대신에 하나의 신비한 세계에 대한 이미지 자체로 결정되는 것 같은 것이다. 이는 클리셰로서 새로움을 산출하는 반면, 해석적 단초로 연결을 가하지는 않는데, 어쩌면 〈A Man〉은 그 해석적 지점이 무력해지는 과도기적 차원의 회화로 보이는 것이다.

    반면, 애니메이션적 상상력은 애니미즘적 생기로도 연장되는데, 이는 〈오래전에 Long Long Time Ago〉(2025. oil on canvas, 102×80cm.)에서처럼 나뭇가지들이 인간의 손처럼 위로 휘어 솟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는 드로잉 작업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형태를 고착하기보다 어떤 일정한 동선으로 혹은 그 축적으로 결정되는 에너지적 장의 상태로부터 출현한다.

     

    조은형, Delta, 2025, oil and charcoal on canvas, 367 × 160 ㎝ ©Eun Chun.[이미지 제공=하이트컬렉션].

    〈The Heart in the Heart〉(2024. acrylic gouache on light cotton, 112.5×73cm.)는 이런 동세를 가진 드로잉으로 연결과 연결부의 에너지적 출현을 붉은 색의 단일 톤으로 투박하고 대담하게 완성한 작업인데, 그로부터 2층 첫 번째 작업으로 마주하는, 예외적으로 창문에 걸려 풍경과 섞이는 〈Gochi, Mayu〉(2024. acrylic gouache on light cotton, 120×78cm.)의 내장의 형태로의 발전을 그려볼 수 있다.

    이는 내장에 대한 구체적 재현이라기보다 볼록한 느낌의 주머니 같은 도형으로 결정되는 동세를 살린 드로잉의 연습에서 확장되어 내장과 결과적으로 유사해지는 과정상의 한 이미지로 보인다. 다만 거기에는 분절된 색의 분배와 흐릿한 채색으로 인해, 그리고 약간의 심도를 형성하는 배경이 일부 예외적임에도, 초현실적인 환상을 거의 만들지는 않는데, 이는 그것이 그려진 얇은 천의 질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는 의도적으로 그 천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현실에 상응하는 어떤 정서적 차원의 강도를 산출하기 위한 예외적 공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내장 버전이 확대, 확장된 작업이 〈Delta〉(2025. oil and charcoal on canvas, 367×160cm.)로, 이 역시 실재의 단면을 갖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 크기로 인해, 캔버스 틀이 없이 일부 바닥에 작업이 끌리는 식으로 접히게 됨으로써 그러하다. 내장의 분화, 복잡성의 입체를 보여주는 회화는 형상 차원에서 그 캔버스 천의 단면에 조응한다. 그리고 아울러 그 치렁치렁한 천의 동세의 차원에서도 조응한다. 이 커다란 윤곽을 제외하면, 그 안의 세부는 각각의 독립적 기관으로서 자족적이며 결부되어 유기적인 형상을 띠기보다 유기적인 부분들이 우연하게 함께 배치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어떤 동심원적 파형의 축적으로서 그 단면의 표현으로 혹은 입체적 부피로 확장되는 차이의 양상들이 분배되고 있는 모습이라 하겠다.

     

    강예빈, Wedding, 2025, oil on canvas, 130.3 × 193.9 ㎝ ©Eun Chun.[이미지 제공=하이트컬렉션].

    조은형의 작업들 사이에 낀 강예빈의 작업 〈Wedding〉(2025, oil on canvas, 130.3×193.9cm.)은 회색 배경 아래 흰색 형상으로 분별되는 작업인데, 위쪽 반절이 집과 풍경을 이루는 가운데, 거기에 남자의 얼굴이 속하고, 그 아래쪽은 남자의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만 나와 있다. 이는 묘하게도 조은형의 초현실주의적 정서와 유사해지기 때문에 함께 배치된 것에 가까운데, 남자의 얼굴이 일종의 배경이 되는, 배경으로 사라지는, 배경으로 녹아드는 부분은 그러나 배경과 형상의 완벽한 대비를 위한 것에 가깝다.

    곧 앞선 〈A Man〉의 남자의 손과 천의 자루의 연결이 하나로 용해되어 있는 강도적 차원의 환상성과는 달리, 그것은 단지 더 명료화하는 과정으로서, 곧 어떤 형태를 강화하기 위해 그것을 비어있게 전도시킨 것에 가까운데, 그러니까 그 얼굴 크기만큼의 비어있음을 그리기 위해 거꾸로 배경이 동원되는 것이다―‘얼굴을 그리지 않기 위해 배경을 그렸다.’. 이는 철저히 회화적인 양상인데, 마치 〈Moment〉가 여자의 얼굴보다는 그 옆의 동그란 빛의 맺힘 현상을 그리기 위해 그 나머지 것들을 그렸다고 볼 수 있는 것과 조응하는 듯 보인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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