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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단 적, 〈내가 살던 그 집엔〉(마정화 작, 이곤 연출): 여성의 역사와 여성의 글쓰기, 그리고 여성의 연대
    REVIEW/Theater 2026. 5. 6. 14:40

    극단 적, 〈내가 살던 그 집엔〉(마정화 작, 이곤 연출)©김솔[사진 제공=극단 적](이하 상동).

    〈내가 살던 그 집엔〉은 1970년대 후반의 격동의 시기에 각자의 질곡 어린 삶을 겪어냈던 ‘마마’와 ‘엄마’ 두 여성 인물―실은 두 명의 엄마인데, 마마는 화교로 중국어로 마마는 엄마와 같다.―을 주축으로 이 사이에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며, ‘마마가 살던 그 집’에 가서 베트남 이주 여성 꾸엔을 만나 마마와 엄마의 이야기를 마침내 완성한다. 1막이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로, ‘나’(곽지숙)가 엄마(정다함)에게 비친 상대역으로서 마마로 분한다면―엄마와 ‘나’가 내통한다.―, 2막은 마마가 들려준 이야기로, 마마(심연화)와 엄마의 이야기가 ‘나’에게 펼쳐진다―‘나’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3막은 꾸엔(전형숙)의 이야기이자 꾸엔을 경유해 엄마와 나나 그 둘을 다시 불러오고, 그 가운데 마마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마마의 남편(이상홍)의 이야기도 이제는 꾸엔의 남편의 과거로서 다시 풀려나온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엇갈려 위아래로 놓은 두 단 위에서의 고고 댄스와 함께 전면에 내세우는 것으로 시작되는 공연은, 그 음악을 통해 거짓말 ‘같던’ 시대의 풍광을 환기하는 한편, 거짓말‘로서’ 이야기가 하나의 예술적 효과로서 자리 잡는 지점을 예시한다. 음악적 정동이 음악 내의 발화를 ‘거짓말처럼’ 봉쇄하는 것과 같이, 〈내가 살던 그 집엔〉은 거짓말로 점철되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소구되는 지점에서 발화된다. 거짓은 진실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 

    두 개의 이야기가 분기되듯 갈라지는 무대는 두 단으로 분기되어 있다. 그리고 일부 겹쳐 있다. 구체적으로, 하수의 짧은 아래 단 위에 상수의 긴 위 단이 올라가며 포개진 두 단이 향하며 무대 안쪽에서부터 무대 뒤쪽으로 똬리를 펼치고 있는 형국으로, 이 무대 뒤쪽의 바닥에서부터 무대 안쪽으로 완만하게 상승하는 위 단을 따라 가면 열린 문을 낸 샤막의 경계가 무대 전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 뒤쪽은 조명에 의해 실루엣으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한다. 위 단이 중심인물과 중요 플롯이 주로 전개되는 장소라면, 아래 단은 또 다른 장소의 동시적 발생‘으로’ 지시되거나 화자의 시점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부가적 장소가 된다. 그 둘은 이어지면서 동시에 갈라지며, 화해할 수 없는 곳으로 환원된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다름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듣는 이와 들려주는 이의 두 층위로 나뉘며, 곧 이야기가 발생했던 시점과 이야기가 재현되는 시점의 간극 역시 노정된다. 그 갈라진 시간의 준거점으로서 ‘나’가 위치하는데, ‘나’는 결국 진실을 본다기보다 재구성하는 이이며, 거짓말 같은 진실에 다가서는 자이다. 시대가 마마와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거짓말은 사실 진실의 두 이름이다. 
    그리고 이 이중적 거짓 혹은 진실로부터 유래하는 ‘나’의 말 역시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정전화되지 못하고 시대를 배회하는 은폐된 여성 서사의 한 전략이며, 시대로부터 그 바깥의 출구를 찾는 착종된 여성의 이념이 현상화된 결과이다. 거짓말은 기록되지 않은, 나아가 기록될 수 없는 삶을 기입하기 위해 그리고 삶을 전복하기 쓰이고, 또한 반복되어 쓰이며, 그럼으로써 여성들은 연결된다. 

    곧 그것을 계승하고 추적해 나가는 ‘나’에게 마침내 그 두 개의 이야기가 ‘나’의 자신에 대한 기원적 시점으로 소급되는 지점에서, 두 여성의 연대로서 쓰인 역사가, 세 명의 여자로 묶인 대안 가족의 서사가 응결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의 기원이 재의미화된다. 마마는 엄마에게 팔찌를 주고, 엄마는 팔찌를 돌리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메시지를 같이 건네받는다―그것은 마마가 자신의 마마에게서 받은 것이고, 그 마마는 지금의 마마의 상황처럼 거길 떠나는 누군가에게서 또한 받은 것이다. 그것은 실천적 행위의 발화로 이어지는데, “이 아이를 좋아하기로 했어.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애니까.” 그리고 이 말은 곧 “그리고 나도. 우리가 있어.”라는 마마의 말로 종착된다. 

    따라서 마마가 엄마에게 진정으로 준 건 ‘나’이며, 나의 의미이다―물론 사후적으로만 확정될 수 있다. 그리고 엄마가 마침내 ‘나’를 수용함을 바깥으로 이전할 때, 또는 발화할 때, 엄마는 ‘나’와 마마를 자신과 합성한다. 그러니 아버지(로서 마마)가 ‘나’를 건네며 엄마와 ‘묶고’, 엄마는 ‘나’를 아버지와 ‘나’로 합성된 존재로 재의미화하여 그 존재를 나의 ‘바깥’으로 승인하며―그것은 나(=엄마)로서 끝날 운명이었다.―, 아버지의 부재하는 기원을 새로운 아버지의 출현으로 전도한다. 

    그로부터 쉬이 지워지고 지워져야 하는 여성의 형용 모순적 기원의 자리―그러니까 지워지지 않아 살아남은 자리―가 소급돼 매만져진다(1막의 마마의 엄마 역시 그러했고, 엄마의 엄마 역시 그러했다. 곧 엄마가 자신의 엄마가 자신을 낳지 않는 방법을 가져갈 수 없어서 낳게 된 것과 같이 말했음을 상기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나’-엄마-아버지라는 우리가 그렇게 그려진다. 그리고 극은 끝나지만 비로소 서사는 시작된다. 서사의 기원이 드디어 완성된다. 

    엄마의 서사에서 마마는 갈 곳 잃은 불안정한 존재, 가부장적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당해 멍든 얼굴임에도 밝고 상냥한 모습을 유지하는 불쾌하고도 과잉된 존재로 그려진다. 마마는 기본적으로 엄마에게 타자인데, 이는 마치 서사의 바깥에서는 마마가 엄마의 서사를 이야기하는 그 딸인 것처럼 운명적으로 엄마가 마마를 향해 처음 다가간다면, 이후 마마는 엄마를 끊임없이 붙잡고자 한다―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엄마에게 마마는 자신의 딸과 같지 않았을까, 그것을 거부할 수 없지만 자신의 삶에 비추어 쉬이 수용할 수 없는 존재로서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하얀 스카프를 두른 마마는 하얀 소복의 귀신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로 처음 인식되는데, 실제 그 얼굴은 폭력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이는 폭력에 의해 사라진 수많은 여성의 운명에 대한 기원적 신화―귀신 설화가 성립되는 기원―를, 그것을 뒤집는 여성적 연대의 서사를 동시에 구성한다(물론 이는 매우 희미한 단서의 확장에 불과하기도 하지만, 그 희미한 서사로서 여성 서사가 비가시화되며 또한 잘 식별하기 어려운 것이 되며, 언제든 다시 쓰일 수 있는 차원에서 〈내가 살던 그 집엔〉이 쓰인다는 건 분명하다.). 

    엄마는 처음 과잉된 존재로서 마마를 싫어하고 경계하는데, 그것이 연대일지언정 어릴 적부터 여공으로 일하다 택시 운전을 하며 쭉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온 그가 부릴 수 없는 사치스러운 이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이는 표면적 이유, 싫어함에 대한 합리화에 가깝다. 엄마는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 갈 곳이 없고, 마마는 양아버지의 고향이 중국에 있지만 도망 갈 엄두를 차마 내지 못한다. 따라서 엄마가 보기에 마마가 여기 있는 건 형용모순적인 것으로, 그것은 그가 견딜 수 있기 때문이고, 진짜 절박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 

    마마는 남편이 자신의 엄마에게 받아 준 반지를 잃어버리는데, 여기에는 결정적으로 인철(안병식)의 농간이 자리한다. 『오델로』의 모티브를 가져온 〈내가 살던 그 집엔〉에서 ‘이아고’를 가시화하는 인철은 합목적적인 동기를 가지거나 특별한 유인 없이 기능하며, 『오델로』의 서사를 연장하기보다는 그 서사의 절취된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는 데 이르는 순전한 매개에 가깝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의 고향에 가기 전 남편에게 반지를 잃어버렸음을 시인하러 간 마마가 또 다른 마마―이때 곽지숙에서 심연화로 배우가 바뀌는데, 그로써 곽지숙, 곧 마마가 죽었음을 표지한다(이는 사후적으로 종합되는 부분이다).―로 바뀌어 등장하는 것과 함께 무화되는데, 이 저 너머로의 샤막의 뚫린 문이 서사가 소급되는 지점, 곧 모든 걸 꿰는 누빔점의 상징적 표지가 된다. 

    마마는 엄마와 함께 둘 만의 세계로 떠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필시 허락되지 않은 결말이며, 서사의 비약이다. 그리고 ‘사라진’ 마마에서 (서사의) “시작”을 묻는 ‘나’의 화자로서 재등장이 서사의 입구로서 각기 다른 “문”으로 갔을 때 다른 “방”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로써 직전의 마지막 방의 진실을 환기한다. 거기에는 몇 가지 서사가 사고 실험과 같이 전제된다―그때마다 이전의 문 말고 샤막에는 몇 개의 다른 문이 투사되며 하나씩 추가되고 사라진다. 

    엄마의 서사, 곧 엄마가 서울 구로의 공장 취업을 위해 상경한 이야기, 또 마마의 서사, 곧 마마의 마마가 마마에게 돌아가라고 했던 집(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마의 남편―실제는 아닌 “아버지”―의 서사, 곧 고향에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그리고 마마를 두고 돌아간 그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마마가 그로부터 놓여남으로써 마침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진정한 이야기의 시작은 엄마와 마마의 첫 만남이며, 그것은 이후 과거 엄마의 마마의 첫 발견과 그 이후의 관계와는 다른 서사가 기입될 것임을 예기한다. 

    엄마는 (여전히) 택시 기사이지만 인철과 연고가 있어 마마 남편에게 소개되었고, 그 남편 오순태―실제 극 중에서 그 이름은 3막에 가서야 언급된다. 그러나 사실상 모든 존재는 그저 엄마이거나 아빠이거나 딸이다.―는 마마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엄마에게 붙인 것이라는 것, 서사는 그렇게 마마의 시점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다르게 기입된다. 적극적으로 엄마에게 다가가고 엉겨 붙던 마마가 아니라, 엄마와 차갑게 거리를 두는 마마의 모습이다. 인철이 엄마를 이곳으로 이끈 내력에서, 앞선 인철의 동기가 (비로소/어쩌면) 명시되는데 그건 인철의 오순태에 대한 극렬한 질투로, 오순태가 인철이 먼저 일하던 가게의 점원으로 들어와 마마와 결혼해 가게를 차지했다는 것, 곧 마마와의 결혼을 통해 자기가 이 가게를 충분히 가질 수 있었음을 뒤늦게 상기시켜줬다는 것이다. 

    엄마가 택시 기사라는 건 그리고 둘이 함께하는 시간을 거리로, 장소로 치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무작정 간 명동성당은 마마의 산뚱에 있던 할아버지가 노동자 쿨리로 와서 지을 때 참여했던 현장으로, “만보산” 오보 사건으로 인해, 그가 평양에서 죽고, 마마의 마마와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가 돌아가지 못했고 그 뒤로도 마마의 마마와 마찬가지로 마마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이야기하는 그가 가려는 양아버지가 있는 곳과 그가 염원하는 마마의 실제 고향은 같은 중국이지만 다르다. 그리고 남편을 벗어남으로써만 중국이 아닌, 고향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은 남편이 준 반지를 잃어버림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가로막히는데, 2막에서는 그것이 인철의 행위임을 뒤늦게 엄마가 인지하고 그와 말다툼 끝에 엉겁결에 인철이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으로써 두 사람만의 여행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으로 굴절된다. 1막에서 마마가 가게에서 반지를 잃어버린 것 같고 인철을 의심하지는 않는데, 엄마는 그것을 되물으면서 인철을 응시하며 의구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본다―마치 인철의 음모를 유령처럼 지켜봤었다는 것처럼. 

    이 장면은 인철의 잘못에 대한 사실을 예기하고 있으며―그 사실의 틈새가 순간 벌어지는 순간이며―, 그것이 사후적으로 현실화됨으로써 인철과의 다툼이 벌어지기 직전에서 또는 그와 다른 판본으로서 그것을 통과해서 마치 미래로부터 되돌아오는 것과 같다. 그는 진실을 알고 있는 것과 함께 또 다른 미래의 판본을 알고 있는 것과도 같다. 곧 2막이 1막을 단순히 보충한다기보다는, 그리하여 1막을 (재)완성한다기보다는 2막을 다시 쓰는 것이 1막인 것과 같다. 서로는 넘나들면서 진실을 향해 분투한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2막은 1막을 반복하면서 결과는 더 안 좋아진다. 반지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인철까지 죽게 된다―그러니까 이 순간으로부터 엄마는 1막으로의 타임 슬립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 아닐까. 엄마는 ‘나’를 낳고 헤어진 마마를 그리워한다. 마마를 그제야 이해하며 1막에서 그를 생경하게 바라보던 자신의 태도를 교정한다―그렇게 시간을 거슬러 연대를 완성한다. 이는 환각인데, 그것이 일어난 장소가 그의 고향인 것처럼 제시되지만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염원의 꿈이 상상으로 응결된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꿈의 최종 목적을 은폐하는데, 곧 마마와 함께 하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이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라는 장소로서 은유되는 것이다. 또는 거짓 낙착되는 것이다. 이러한 꿈꾸기로서 엄마의 마마에 대한 일종의 편지 쓰기는, 환상일지언정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닌데, 그러니까 그가 인철을 죽인 형벌을 받는 것으로 구치소에 들어가는 것의 대안 서사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구치소 안에서 진정 벌어질 수 있는 꿈꾸기인 것인데, 마마를 실제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마는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으로 처리된다. 

    ‘나’는 구치소에서 키워질 수 없어서 나오고, 대신 엄마의 마마를 향한 가상의 편지 쓰기와 같은 형식으로써 둘의 만남―거꾸로 마마가 엄마에게 그 편지에 대한 답신을 보내며 그 둘의 대화가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은 아마도 계속된다. 명동성당과 같이 그들은 그들과 상관없는 불가능한 장소들로 멀리 멀리 돌아다닌다. 그리고 구치소에 나온 후 엄마는 ‘나’에게 마마를 데려온다. 엄마가 죽은 후 ‘나’는 마마의 집을 찾는다. 

    이야기된 적 없는 그리고 돌아감을 꿈꾼 적 없는 엄마의 고향이 아닌, 또한 “전쟁으로 국경이 닫힌” 마마의 고향도 아닌, 마마의 마마의 마마가 마마의 마마에게 다시 마마에게 물려준 서울 그 집 말이다―그곳이 오순태가 같이 살게 된 집이었음은 이때야 알게 되는 사실이다. 어쩌면 앞선 그에 대한 언급이 마마의 마마의 시점이 마마의 시점과 교차되며 서술되는 것처럼, ‘나’는 나의 정체성보다 화자로서 대상을 횡단한다, 또한 세계를 관통한다. 그리고 마마가 또한 ‘나’의 어머니이며 그래서 오순태가 ‘나’의 아버지이기도 한 것처럼, ‘나’에게 엄마와 마마는 특별히 가치의 위계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사라진, 그리고 죽음이 언급되지 않는 마마를 찾는 건 필수적이다. 앞서 세 개의 문의 마지막에 아버지의 서사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마마는 불가능성의 고향으로 구성되었고, 그것은 바로 마마에게서 온 서사가 연장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때 마마는 엄마로 대체되며, ‘나’는 마마를 향해 나아가며 부재하는 엄마를 체현한다, 엄마의 절박한 ‘편지’가 닿지 않았던 그 경계를 넘어서 보기 위해. 하지만 거기에는 전혀 다른 인물, 꾸엔이 살고 있는데, 간절하게 집이 필요했고―모두 안정된 삶의 자리를 희구한다는 점에서 마마-엄마-꾸엔의 계열을 완성한다.―, 그래서 오순택의 아내가 된다. 

    그는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다분히 모호하다. 그는 화교에 대한 혐오를 오순태에게 전가하려 했던 인철의 발화가 뒤늦게 오순태에게서 발현되는 대상이며, 그 지점에서 바로 마마로 소급되는 자리를 만들며,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기능하는 데 가깝다. 〈내가 살던 그 집엔〉은 이러한 이주민, 인종 혐오에 대한 부분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다루지는 않는데, 오히려 그것이 부차적이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는 건, 기본적으로 이 작품이 외부 혹은 바깥에 대한 수용이 타자에 대한 수용과 교환되는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고착될 위험을 차단하는 지점에서, 꾸엔의 나라는 어느 정도 예측되지만 언급되지 않는다. 오순태가 가진 마마라는 공백, 곧 꾸엔이 건드리는 걸 극도로 꺼려했던 마마의 죽음이 기입된 마당으로부터, 꾸엔은 오순태에게 마마의 불완전한 대체재 혹은 부차적인 대상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곧 오순태는 마마라는 절대적 대상을 잃은 것의 우울을 안고 여생을 마쳤다. 그러니까 집을 떠나지 못함―집(과 집의 사물들)에 고착됨―으로써 마마의 죽음을 끝내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꾸엔은 오순태가 마마를 죽인 것, 마마의 죽음을 자신이 처리한 것을 대화 속에서 드러낸다. 마마에 대한 비어진 세계의 기억을 그가 갖고 있음이 중요한데, 그는 일종의 증언자이며, 그의 기억-공간을 경유해 ‘나’는 마마를 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마의 이름은 ‘타오타오’, 도망가라는 뜻으로, 그의 마마에게 부여받은 이름이다. ‘나’는 그 반을, “타오”를 물려받는데, 그렇게 ‘나’를 자식으로 연장한다. 〈내가 살던 그 집엔〉은 결국 여성들이 끊임없이 그들을 속박하는 세계의 한계로부터 도망가야 하는, 그것이 그들의 꿈의 서사를 이루는, 상상적으로 내파하는 세계를 그린다. 시대의 한계가 불가능성의 시도를 낳는 것이다. 

    〈내가 살던 그 집엔〉은 두 다른 지층의 시간을 합성한다. 그들은 각각의 예외적 자리로서 서로를 만난다. 마마는 여공에서 택시기사가 된다면, 화교 3세대로 고향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이 둘의 만남은 우연하며, 그것은 차이를 지닌 존재 간의 연대로서 이념을 의미한다. 곧 이질적인 역사-이미지들이 하나로 흘러드는 지점에는 그 역사 자체에 대한 응시보다는 그 역사를 가로지르며, 그것들을 더 큰 원환으로 묶는 절대적 힘의 형상을 긍정한다―아마도 구치소 안, 엄마의 꿈에서 마마와 엄마는 ‘나’를 데리고 다른 여러 나라를 전전한다, 거기에는 어떤 시간이 있지는 않다.  

    〈내가 살던 그 집엔〉은 메타-문학으로 ‘나’는 화자이며, 나의 듣기를 재구성하기는 그 안의 ‘나’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마마와 엄마로부터 오는 여성의 말하기 혹은 글쓰기 방식이자 비가시화되는 여성의 역사이며, 역사의 다시 쓰기이다. ‘나’는 마마가 살던 그 집을 대신 찾아감으로써 제목의 과거를 현재화하는데, 이 방문을 통한 어떤 참여는 그 연대의 힘이 진정 가상적이며 자의적인 것으로서도 충분함을 전제한다. 곧 하나의 시대를 입체화하는 것과 분절된 역사를 연결하는 것, 이 둘은 (거시적으로는) 세계를 교정하는 동시에 (미시적으로는) 그 세계의 경계를 진정 다시 기입하는 것으로써 존재를 변화시킨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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