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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toko + 하상철, Marina, 《침묵만이 배반하지 않는, part. 1》(큐레이터: 윤태균): 예술의 조건(에 대한 이념)과 소리로써/로서 이념
    REVIEW/Visual arts 2026. 5. 6. 14:59

    Motoko + 하상철, Marina, 《침묵만이 배반하지 않는, part. 1》(큐레이터: 윤태균) 전시 전경 중 Motoko + 하상철의 작업으로, 동시에 두 작가의 작업을 촬영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출처=팩션 홈페이지](이하 상동).

    Motoko+하상철과 Marina의 《침묵만이 배반하지 않는, part. 1》에서 윤태균 큐레이터는 언어의 빈자리―‘침묵’―에 예술 자체의 목소리를 두려는 일종의 강령적 언어로서 서문을 발화한다. 이때 과잉되고 관념적이며 또한 주지주의적인 그의 언어는 하나의 결론을 향해 닫히면서 작품의 자리를 보전하는데, 곧 자신은 순수 언어로서 사라지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언어 자체만을 지시함으로써 또는 언어로서 닫힘으로써 그 ‘바깥’의 세계가 가진 역능을 상정한다. 이때 그것은 낭만적인 차원에서 전제되는데, 그곳은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미칠 수 없는, 미쳐서는 안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60년대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 식의 유사 논지는 한편으로 실제 현장에서 무차별하게 생산되는 언어, 그러니까 전시와 결부되어 생산되는 서문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도 보이고, 그것은 여전하기 때문에 유효할 수 있는데, 실은 명확하지 않다―글은 어떤 구체적 현실도 직접 언급하는 대신 관념을 통과한 차원에서 뭉뚱그려진다. 이때 두 가지 개념에 대한 반대가 나오는데, 하나는 “대리보충”이고 다른 하나는 “변증법”이다. ‘변증법’이 마르크스보다는 헤겔의 견지에서, 주체의 인식 경로 안에서 완성되는 예술의 차원을 부정하고 비판하기 위해 가져온다면, ‘대리보충’은 예술을 언어로 대체하는, 언어에 저당 잡히는 예술의 족쇄를 풀어주기 위해 가져오는데, 그것은 결국 예술을 언어 너머의, 어쩌면 언어 사이의 차원에서 갈음하기 위한 비판이다. 

    사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변증법적인데, 곧 비판을 통해, 그러니까 비판적 사물을 경유해 무언가가 바뀔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어는 사실 부정성의 근거로만 일관되게 다뤄지기 때문에, 마치 그 자신의 언어는 언어가 아닌 것 같은, 또는 언어의 반대편에서 부르짖는 것 같은 은폐 혹은 착각을 동반하게 된다. 그와 반대로 윤태균은 언어가 가진 예술적 효과를 본의 아니게 내세우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예술이 아니라 ‘언어’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태균의 언어―확성된 소음으로서 발화―는 일종의 언어화되기 힘든 소리들과 그 기원―장치―들, 거의 감지되기 어려운 이미지들로 구성되며 비언어의 전략을 감행하는 작품들과 함께 전시에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언어를 오프(off)하고 예술을 온(on)함으로써 그 이분법적 세계의 원환을 일자적 세계로 대체하려는 전략은 곧 마니페스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언어를 끄고 예술을 초대하여 환대할 때 언어라는 사물을 가져옴으로써 실은 변증법의 경로로써만 그럴 수 있다. 또한 비언어적 전략으로서 가늠, 갈음되는 듯 보이는 작품들의 경우, 오히려 더 ‘언어’의 매개 역량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언어에의 도달을 통해 그 비언어의 세계를 ‘더’ 감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덜 명확한 것일 수 있지만, 그리하여 작품을 덜 매개할 수 있지만, 작품으로부터의 탈선이 작품에의 탈선을 가져오는 것일 수만은 없으며, 관람 주체의 경험은 그것들의 참조와 교정, 접합과 비판의 경로 속에서 끊임없이 ‘재’형성되어 간다. 

    글의 전제를 따른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사물―작품, 글―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글이 말하는 것처럼 작품으로서 전시가 아니라 기존의 글들에 대한 직접적 메타 비평의 차원에서 전시를 구성함이 합당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글이 실질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작품이 절대 아니며, 그 언어들 아닌가. 따라서 무언가 자기 정체적 회의와 반성의 지점으로 전시가 소급될 수 있었다면, 비평의 언어에 대한 심문과 비평이 내재적인 변화의 계기로 나아가면서 그 안에서 닫히지 않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윤태균의 언어는 언어 너머의 언어가 있음을 실증하는 차원에서 예술 자체로서 기능하고 효과를 미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언어 너머의 외양으로서 예술들을 호출해오고 있는 듯 보인다. 

    전시는 두 개의 방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원래 전시장 전체이고, 다른 하나는 사무실을 개조해 전시장으로 전용한, 별도의 소규모 공간이다. 전자에는 Motoko+하상철―Motoko는 하상철의 다른 이름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 둘은 같아질 수는 없지만 양립 가능하다.―의 작품이, 후자에는 Marina의 작품이 놓인다. 그 둘은 공간의 반향이자 공간에의 반향으로서 자리하는데, 소위 ‘시끄럽다.’ 기계 장치들은 자율적으로 발화하고 있으며, 공간은 사물로서 소급되고 분별되기보다 그야말로 사물로부터 증폭되고 반향되(는 가운데 그 사물의 기원을 ‘사후적으로’ 찾아가게 되)는데, 그것은 물론 시각적 질서보다 청시각적 체계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다양한 장치-기계들의 ‘결합’으로써 구성되는데, 이는 그것들이 하나의 네트워크의 부분으로 기능하며 용해되어 가는 과정 아래 놓임을 의미한다―그것은 일종의 시간을 연출한다. Motoko + 하상철의 〈Signal Scope Society〉(2026. 35mm 리버설 필름(135), 50mm 렌즈, LED, DC 웜기어 모터, 아크릴, 목재 및 금속 구조체, 커스텀 전자 회로, 모듈러 신시사이저, 표면 트랜스듀서, 콘덴서 마이크, 지오픈.)는 장치의 위치에 따라 크게 공간을 사분할하는데, 입구, 입구를 따라 그 위쪽, 그리고 그 다시 옆쪽―사선 방향―에 각각 일종의 간이 영사기, 곧 360도 회전하는 원판의 틈으로 35mm 리버설 필름이 16프레임으로 상영되는데, 그로부터 각각 “죽이는 자”, “죽어가는 자”, “죽은 자”의 이미지가 천장에서 출현한다. 

    상대적으로 뚜렷한 하얀 마스크 쓴 얼굴의 ‘죽이는 자’를 제하고는 다른 두 이미지는 흐릿하게 용해되는데, 이 세 이미지는 실제의 해당 영상들의 웹상 수집으로 가져온 것이며 앞선 규격으로써 재활성된다. 이때 원형 회전의 작동 방식은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굴절시키고 가의 번짐 효과를 만들어 내며, 이미지의 가시성/식별 대신 이미지의 출현 자체로서 양식을 도출한다―우리의 눈에 이미지의 넘어감으로 연출된다. 살인에 대한 서사는 실재의 차원을 형식으로 분해하는 과정에서 잠재된 내용으로 자리 잡고, 그 결과 작품은 실재가 주는 충격을 무의식적 차원에서 보존한다. 

    실제 세 개의 영상을 하나로 조망하는 것은 공간의 물리적 한계가 아닌 설치의 물리적 특성상 불가능하며 그것은 파편적 기호들의 편재로써 기입된다―그것은 의도의 차원에서 공간의 차원을 재결정하는 부분으로, 공간에 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을 그리도록 배치하거나 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이미지들은 각각의 출처를 지님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작가가 선택한 것은 이미지-계열들 자체의 보존이며, 그것은 하나의 프레임으로 혼합―가령 “죽이는 자”와 “죽어가는 자”를 숏-리버스 숏의 교차 과정으로 묶고, 그 결과로써 “죽은 자”를 병치하는 방식이겠다.―되지 않고 자리한다. 그로써 작가가 전개하는 건 어떤 구조적 차원의 사실(의 전개되지 않음)이며, 그 방식은 일종의 인식론적 몽타주이다. 

    그리고 입구 오른쪽 벽에 모듈러가 놓여 있는데, 이는 그 자체로서 작동되며 별도의 사운드를 주기적으로 생산한다. 그것은 “공기와 진동으로 수집된 공간의 물리적 조건”을 피드백 시스템 내에서 받아들여 그러한데, 이로써 세계는 불안정한 차원으로 반향된다. 그 구성적 질서는 공간을 잠식하는 고음역대의 소리로, 점멸하는 기계의 불빛으로, 영상의 상영 주기에 따른 영사 장치 자체의 소리와 비평형적으로, 비유기적으로 병치되며 발화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세계 자체의 물리적 조건, 또는 물리적 조건으로 가설되는 세계-공간의 구조와 같은데, 그것은 그 세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가시화한다. 

    Motoko + 하상철, Marina, 《침묵만이 배반하지 않는, part. 1》(큐레이터: 윤태균) 전시 전경 중Marina의 작업. [출처=팩션 홈페이지](이하 상동).

    마리나의 〈Behave〉(2026. 다채널 사운드, 믹서, 앰프, 트랜스듀서, 서브우퍼, 무전기, 마이크, 케이블.)는 하나의 공간 너머, 별도의 공간에 자리하는데, 이는 원래 공간의 사무실로, 작품으로써 일시 전유된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두 ‘혼란스러운’ 작품을 병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Behave〉가 ‘내부’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스피커 내부로서 관객의 신체가 연장되는 체험을 말한다. 작가는 통상적인 사운드 설치의 문법을 비틀거나 전복하고자 하는데, 가령 이는 일반적으로 사운드를 가시화하는 전시의 문법에서 스피커가 발화 주체로 자리할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시각적 대상으로 수렴하며, 주체-객체의 차원을 성립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운드의 조건, 사운드라는 공간적 체험을 제시하는 대신에, 본의 아니게 기능화되거나 동형론적 존재(의 차이)로 갈음되는 이 사운드 장치의 지위를 본래적 청취의 경험으로 되돌리고 타자화, 대상화, 또는 물신화하지 않은 모습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는 곧 거대한 스피커 안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진동은 합판 너머에서 바깥으로 소리로서 뻗어나가고 있으며, 그것을 듣기 위해서는 귀를 안쪽으로 가까이 대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소리(를 내는) 공간은 자기를 내재적으로 감각하는 공간을, 곧 일종의 자기 목소리를 자신이 듣는 것과 같은 차원을 구성한다―우리가 통상의 전시에서 들어왔던 건 외부(로)의 분리된 차원의 소리이다. 

    이는 두 가지 차원이 맞물려서 발현되는 결과인데, 곧 스피커 유닛이 바깥을 향함으로써 소리는 확성(의 본래적 기능이 전도)되는 대신, 마이크 기능―입력 기관―을 수행하며, 진동을 수신해 전달하여 서브우퍼와 베이스 쉐이커―트랜스듀서―로 확성시켜 각각 내부와 외부의 진동으로서 소리를 만든다면, 소리를 진동으로 바꾸는 베이스 쉐이커는 스피커 유닛의 본래적 방향성으로서 역할―출력 기관―을 ‘바깥’을 향해 하는데, 이는 마이크로서 스피커 유닛의 진동과 기녹음된 4개의 사운드 파일을 수용한다. 

    사실상 공간 내에 스피커는 없으며―서브우퍼 역시 소리 자체로 출현되기보다 그것을 보조하며 특정 주파수 범위에서 공간 내에서 진동한다. 또는 공간 전체를 진동시킨다.―, 우리는 바깥과 안쪽의 진동을 소리로서 자각한다. 베이스 쉐이커 8개와 서브우퍼로 된 9개의 출력 시스템에서 녹음된 파일이 아닌 나머지 5개의 출력은 실시간으로 이뤄지며 이는 환풍구 위의 아마추어 무전기와 스피커 유닛을 통해 수신한 것을 별도의 오디오 하드웨어 프로세싱을 거친 결과이다. 

    또한 관객은 아마추어 무선 시스템과 연결되어 집게 모양의 스위치를 붙잡고 집고 폄을 미세하게 조종해 베이스 쉐이커로부터 발생하는 바깥의 소리를 변화시켜 들을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작은 모니터 안에서 주파수의 흐름으로 번역되는, 모스 부호의 송신 절차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Behave〉는 우리의 청취의 조건을 가시화하고 지시하는데, 복잡다단한 장치들의 네트워크-공간은 그 청취에 대한 행동 양식을 본래적인 차원으로 소급시키면서 드러낸다. 그것은 자신이 보유하는(have) 방식을, 근거를 명시한다(be).

    《침묵만이 배반하지 않는, part. 1》는 이후 어떤 형식의 전시를 수합해 갈지 알 수 없지만, 언어와 예술을 대비시키고, 침묵과 예술을 조응시키면서 비언어적인, 감각적인, 수행 발화적인 전시를 첫 번째로 수행한다―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일반적인 시각 위주의 전시를 거역하고 전도한다―그 말은 추상적이고 특정 사례를 벗어난 채 말하고 있고, 따라서 전시는 역설적으로 그 말의 사례로서 순전한 것으로 안착되는 듯 보인다. 

    두 개의 작품은 그 지점에서 공통되지만, 반면, 전혀 다르기도 한데, 제목 그대로 〈Signal Scope Society〉가 신호 처리 사회의 어떤 체계를 드러냄으로써 이미지화된, 관점화된 사회를 구성해 낸다면, 〈Behave〉는 본원적 차원의 청각 시스템을 구성함으로써 제도적 차원의 전시와 관성적 청각 체제의 이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전자가 시청각 체제의 역사적 단면을 포착(하여 그 조건을 구성)한다면, 후자는 내재적 차원에서 청각 체계를 설계(하여 그 조건을 실천)한다. 

    곧 두 개의 작품은 외양적으로 닮아 있으나 미묘하게 전적으로 다르다, 미묘하게 다름이 전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전시는 애초에 주제와 형식적 공통의 논거로써 합목적성을 띤 전시를 실천하려는 전제를 두지 않았고, 오히려 결과적으로 잠재태로서 다양한 실천의 양상으로써 언어를, 시간을, 합성을, 해석을 유예시키는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전시의 이념이 아니라 이념으로서 예술을 정의하려는 윤태균의 글은, 그 글과 평행하면서 단지 배가되며 증식되는 방식으로만 구성되는 그러한 전시‘들’을 통해, 공간의 이념을, 예술이 정초되는 장에 대한 조건(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곧 예술이 아니라 예술의 이상적 조건에 대한 어떤 이념이다. 곧 그것은 비어진 언어로서 윤리적 차원의 이상적 기획의 차원으로 수렴한다. 그것은 전시를 앞두고 사라지는 매개의 언어이기도 하다. 

    김민관 편집장 

    2026년 4월 4일 (토) - 4월 19일 (일) 13:00–19:00 *월, 화 휴관

    팩션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로6길 26 지하1층 @faction.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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