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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쿼드 초이스, ‘다른, 춤을 위해’ Part2: 불균질한, 변증법적 대치의 흐름
    REVIEW/Dance 2026. 5. 11. 20:29

    이루다, 〈Nu Black〉: 기괴한 이미지 아니 신체로부터

     

    [사진 제공=서울문화재단](이하 상동).

    이루다의 기본적 양식은 보통은 검은 토슈즈와 상의 아래, 기괴한 펄럭임과 어긋난 스텝을 기초로 강렬한 캐릭터를 구축해 낸다. 바텐 앞뒤 여러 층차를 구성하는 프로젝션의 중층적 시각적 양상이 독자적인 군무를 시행하는 가운데, 이러한 공간에의 입자적 포석에 상응하여 〈Nu Black〉은 무용수들의 다양한 배치와 등장으로 입체화된다. 이는 사이키델릭한 이미지의 영도, 움직임과 배치의 끊임없는 변경을 통한 중첩된 이미지의 연쇄 작용을 경유하면서 오히려 캐릭터의 기괴함을 강화한다. 그것은 형해화된 캐릭터의 표층성을 지시한다.

     

    ‘기괴한 펄럭임’은 팔부터 몸통으로 번져가는 상체 전반의 움직임의 형태적 유사성을 가리킨다. 이는 움직임 전반을 관통하는 시작점이자 ‘어긋난’ 혹은 비정형적인 간격의 스텝의 보조 아래 하나의 단단한 신체 중심의 변환, 그리고 변환된 신체 중심의 단단함을 이끌어 낸다. 이러한 움직임 양식은 인물의 의식을 표현주의적 신체의 변화 양상 자체로 표층화한다. 결과적으로 전신에 퍼진 기괴한 신체 정념의 덩어리로서 무용수들은 존재한다. 그것은 주체의 형해화이면서 형해화된 주체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무빙라이트의 빛이 관객을 향했다가 바로 얇은 망 안의 웅크린 신체를 덮었다가 천이 쓰인 바텐 뒤의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걸어가는 신체의 그림자 이미지와 좌측의 L자 다리 자세를 취한 신체의 다리 움직임이 강조된 연쇄된 시작 장면은, 이미지의 편재와 충돌을 통해 그 연쇄 작용 자체로써 증발되는 의식의 강화를 보여준다. 〈Nu Black〉은 둔중한 사운드에 ‘흡입되는’ 신체를 보여주는 동시에 역시 그에 흡착되는 관객의 신체를 의도한다.

     

    발레를 뒤틀고 동시에 강화하는 독특한 움직임의 변화/다양성은 움직임의 실험적 형식이 갖는 심미적 양상에 대한 쾌감으로 관객을 몰고 가지만, 어떤 것도 명확해지거나 뚜렷해지는 건 아니다. 이는 물론 포스트모던적 분열의 양상과는 다른, 뒤틀린 발레의 형해화된 형식적 공고함의 결과를 의미할 것이다.

     

    금배섭, 〈닳아가는〉: 닳아가는 신체, 그리고 닮아가는 시간

     

    금배섭 안무가의 〈닳아가는〉은 오브제와 신체의 결착 혹은 간극을 전면에 내세운다. 푸드득거리는 비닐은 움직임의 잔여, 움직임이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과잉을 빚어낸다. 움직임과 오브제의 결착은 움직임의 오브제에 대한 요구가 온전히 해소되지 않고 생기는 주체의 결여를 빚어낸다는 점에서, 표면의 결착은 간극의 심층을 향한다. 어떤 음악도 따로 배치하지 않는 건 소리로 치환되는 비닐의 과잉, 또는 비닐이 가리키는 주체의 결여를 충분히 묘사하게 하는 데 탁월한 선택이 된다.

     

    “닳아가는”은 신체와 시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즉물적 메타포이며, 오브제-신체의 연장이 하나의 시간을 통과하며 명백한 변화를 가져가고 있음을 지시한다. 금배섭의 몸짓은 또는 행위는 자신만의 실험실 또는 놀이터 안의 물리적이고 체계적이고 집적적인 순환에 기초하며, 이윽고 음악에 맞춰 정서적인 차원으로 변환되지만, 이를 다시 터치로써 화면이 해제되는 유형의 스마트폰을 발가락으로 켜고 동일한 노래를 틀고 그 노래에 맞춰 움직임을 닫는, 구조 속의 구조적 양식을 통해 장은 미션 해소의 정확한 행동-시간의 고안이 된다.

     

    한 번은 드라마적 구조로 다른 한 번은 구조 자체의 가시화를 통해 〈닳아가는〉은 뚜렷한 행위로서의 몸짓에서 쌓아간 시간처럼 불투명하고 추상적인 약호를 결국 물질화한다. 드라마의 시간은 물질적 잔향으로 변환하는, 바닥에 놓인 휴대폰 스피커 음악 아래, 두 팔을 상체로 집어넣어 두 팔을 대신하게 된 상의의 두 팔 부위의 옷 부분이 앙상하고도 기이하게 꿈쩍거리는 신체 양상은, 새로운 움직임의 질서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추동하고 이끌어간 행위의 우연적이고 무작위적인 몸짓의 결과에 가깝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이미지는 표면의 감각적이고 전이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기보다 어느 정도 표면의 세부를 더디고도 끈질기게 다듬어 나가는지를 보여주다 보니 ‘어떻게’ 그렇게 된 것임을 보는 것에 가깝다. 다만, 그 이미지의 결과가 단지 비닐이라는 분리-연결된 도구뿐만 아니라, 신체 바깥의 오브제로서 의상도 포함할 수 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과정은 더욱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닳아가는〉은 세부의 축적을 통한 장대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고, 이는 음악의 분기를 전후로 한다. 신체와 오브제로 쓴 행위들의 집적은 몸이 타당하고도 남김없이 사용된다는 인상을 준다. 정서적 표현을 대체하는 무심하고 끈덕진 신체 행위의 연속은 오히려 어떤 정서도 표현도 불러내지 못하는 현재의 시간성 자체를 소환한다. 다름 아닌 현재가 충실하게 드러날 때 그것이 과거적 잔여로써 밀려오는 실재가 되는 것임을 〈닳아가는〉은 잘 보여준다. 그것이 ‘닳아가는 시간’이라는 물리적 감각에 대한 인계일 것이다.

     

    장혜림, 〈이야기의 탄생〉: 단정적인 발화의 양식

     

    〈이야기의 탄생〉은 ‘이야기가 탄생하는’ 태초적 시간을 상정하고, 거기서 어떤 세계에 대한 의식과 움직임이 발생했을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공동체적 합주와 중심인물로 자리하는 원형적 이야기꾼의 두 층위가 일종의 숭고함과 경이로움의 차원을 향한다. “이야기의 탄생”은 탄생된 이야기라는 이야기의 한 속성을 절대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먼저 정의 짓고, 이야기의 탄생이라는 시점을 규정하는 것이 이 제목이 함의하는 바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의심이나 질문이 개입할 여지를 애초에 차단하거나 제외한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모든 걸 집어삼킨다. 세계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로써 모든 것이 구성되며, 모든 것의 엮음은 곧 이야기가 되는 세계가 이곳인 것이다. 여기에 주체와 사물 모두 귀속된다. 〈이야기의 탄생〉은 시원성‘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시원성 자체를 이미 하나의 이야기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는 그 시원성을 갈음하는 하나의 장치로서, (그것은 이미 절대적 신념으로 구축되었으므로) 그 시원성이 어떻게 현재와 만나는지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 “길어 올린 깊은 자각과 연결의 순간들, 그리고 “그리움”은 그 “과정”에서 생성되기보다 부차적인 감상의 몫으로 남는다.

     

    결과적으로 〈이야기의 탄생〉은 의심 없는, 질문 없는 표현 양식을 통해 어떤 전형성과 상투적인 서사의 축을 담당하게 된다. 일견 모든 것이 동등하게 놓인다는 점에서 그것은 생태적 이념을 호출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 확장성이나 다른 경로로 나아가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평평하게 남는다. 곧 태초에 대한 전형적인 서술의 차원은 전형적인 서사로서의 태초에 대한 상과 손잡는다. 〈이야기의 탄생〉은 쿼드 초이스의 또 다른 작업, 정보경의 〈안녕, 나의 소녀: 디렉터스컷〉과 흥미로운 대구를 이룬다.

     

    후자가 특정 서사의 기원을 향하는 반면, 현실에 대한 재현과 인물들의 분투로써 그 서사의 개연성을 설계해 나간다면, 전자는 이야기의 제시와 그 이야기의 공고함을 뒷받침하는 의식의 매개물들로서 무용수들이 자리한다. 후자가 이야기의 현실을 향해 몸부림친다면, 전자는 이야기의 확고함 안에 포박된다. 결과적으로 후자가 이야기의 경계를 우스꽝스럽고도 자기 분열적으로 드러낸다면, 전자는 이야기의 경계를 봉합한다.

     

    〈이야기의 탄생〉은 전통적 표현 양식을 한편으로는 확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착오적으로 규정한다. 전자가 음악과 몸짓의 합일, 현장과 무대의 합치를 꾀하는 집단적 몸짓의 발화로 나타난다면, 후자는 시대를 재현하거나 호출하기보다는 거스르는 전략을 통해 드러난다. 전자에서, 오카리나와 구음의 집단적 공명은 어떤 특정 공간 자체의 반향 속에서 그 정동을 강화할 수는 있을 것이다. 반면, 쿼드의 (폭으로도, 수직으로도) 깊이감 없는 공간에서는 효과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그것은 목소리에 짓눌리며 독자적인 양식으로서의 자리를 만들지 않는다.

     

    ‘이야기는 왜 탄생되어야 하는가.’ 그 이야기는 어떻게 현재의 질문에서부터 출발하며, 현실을 반영하는가, 또 그럴 수밖에 없음을 상기하면서 그 이야기를 반성적 차원으로 갈음하는 하나의 축이 탄생의 시점에 놓여야 할 것이다. 〈이야기의 탄생〉은 전통의 자기 확장적, 자기 모색적인 하나의 실험이지만, 곧 어떤 동작의 첨예화를 통한 확장 대신에 구조 자체가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차원에서 그것은 패러다임적 변환 아래의 시도이지만, 움직임의 전제가 되는 서사를 한정적이고 단정적인 언어로 정의하고 제시함으로써 이야기의 개방성과 신선함을 구성하지 못한다. 나아가 움직임의 전개를 기약하거나 가시화하지 못한다―이야기와 움직임의 선후적이고 차등적인 지위가 전제된다. 따라서 〈이야기의 탄생〉은 일종의 언어적 실험이지만, 그 언어의 성사가 매체적으로든 움직임과의 관계 설정에서든 서사 그 자체로서도 아쉬운 결과를 낳는다.

     

    김민관 편집장

     

    7.11(목)~13(토) 목/금 19:30, 토15:00 대학로극장 쿼드

    이루다, 〈Nu Black〉

    출연 김홍인 노예슬 서동리 오한들 이소희 정민찬

     

    금배섭, 〈닳아가는〉: 닳아가는 신체, 그리고 닮아가는 시간

    안무 출연 금배섭
    음악 옴브레
    드라마투르그 김풍년

     

    장혜림, 〈이야기의 탄생〉: 단정적인 발화의 양식

    안무 장혜림
    춤·음악 김원영 김은이 박기환 송효영 이고운 이승아 이수경 장서이 추세령
    작곡·음악 감독 라예송
    드라마투르그 채민
    조안무 장서이 이고운
    의상 배경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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