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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안무자창작공연] 홍은채, 〈텅, ( )〉: 존재의 균열 그리고 존재론적 차이REVIEW/Dance 2026. 5. 13. 20:09

홍은채, 〈텅, ( )〉[사진 제공=(사)대한무용협회](이하 상동). 홍은채의 〈텅, ( )〉은 무대 중앙 안쪽에 위치한 테이블을 두고, 정면을 향해 앉아 무언가를 적는 여자(이수연)의 모습에서 시작하는데, 뒤에는 다른 존재(홍은채)가 달라붙어 있어, 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물과의 어떤 관계들이 조종되고 어긋나는 현실을 보여준다. 가령 헐렁한 상의를 중앙 쪽으로 바싹 좁혀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며 거의 목을 옥죄기에 이르는 일련의 크고 급격한 동작의 반복은, 역설적으로 자기를 과잉 통제하여 타동적 신체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데, 이는 여자가 테이블 밑, 하수 쪽으로 털썩 떨어지고 나서 기포 소리와 함께 수면 아래로 잠겼음을 가정하는 상황에서, 네 발의 겹쳐진 신체 두 쌍이 확연해짐으로써, 겹-존재의 의지와 상관없는 조작이었음을 가늠하게 한다.
〈텅, ( )〉은 이 ‘두’ 존재의 떨어진 자리가 실은 현실 너머의 세계이며, 존재의 공백과 결여, 극단이 산출되는 전이점임을 어떤 소리, “텅”으로부터 환유되는 세계 차원에서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그곳은 괄호를 통해 반복해서 강조했듯 근본적으로 그 공간 자체가 비어 있음을 의미하며, 말 그대로 ‘텅’ 비어 있는 곳인 것이다. 그런데 일종의 텅 비어 있음을 알리는 이 반복은 한 번은 심리적 차원에서 다른 한 번은 사물적 차원에서 전개된다. 곧 하나의 옷을 입은 두 여자의 공여된 공간, 공통의 토대는 하나로부터 배가된, 하나에의 약분을 구성하는데, 이때 존재의 외양을 하는 여자는 그 과잉의 존재를 의도하지 못하며, 그로 인해 심리적인 곤경에 처한다. 반면, 그 바깥에 있는 존재는 가시화되지 않는 유령과 같으며, 곧 실재적으로 비어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제목은 텅을 의미적으로 그리고 즉자적으로 연계하며, 나아가 즉자적 차원에서 대자적 차원을 끌어내게 된다. 그런데 이는 앞의 가시화된 존재에 한정되지 않고, 오히려 비가시화된 존재의 드러남으로부터 극대화된다. 둘은 테이블이 있는 방 공간을 벗어나 환상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기 시작하면서 차 소리와 같이 일상의 거리 공간을 경유하여 무릎 꿇고 두 팔을 휘적이며 지나가기도 하고, 규칙적인 기계 박동과 울림통의 깊이가 꽤 있는 타악의 소리를 통과하기도 한다. 이때 거대 사이즈의 재킷과 바지는 서로로부터 헐거워지는 현상을 맞는데, 곧 공통으로 전유되려 하는 가운데, 상대로 건너가며 ‘잃어버림’과 헐거워짐이 동시적으로 구성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가시화되는 개체성과 그 개체성의 ‘헐렁함’, 곧 결여됨 같은 것이 함께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악착스럽게 옷을 차지하려는 엔트로피적 과정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는 상대로부터 미끄러지고, 존재의 터전을 결여로 확인하는 부정성의 결과를 더 극명하게 드러낸다. 특히 하의는 공유한 채 먼저 상의를 벗으려 하는 뒤의 여자가 딱 붙는 옷으로 살갗에 가까운 몸이 되었을 때, 반대로 가시화되었던 앞의 여자는 몸이 반대로 뒤틀리게 되어, 곧 뒤의 여자는 반쯤 뒤틀린 채 가시화되는데, 이때 허물을 벗듯 반쯤 이탈하는, 일시적으로 두 개의 머리를 지닌 하나의 신체적 분열 같은 장면이 만들어지며, 이는 심리적 균열과 존재론적 혼동이 만들어지는 〈텅, ( )〉의 결정적 장면이라 하겠다.

어쩌면 실재는 외피에 가려져 있었고, 그것을 마침내 뚫고 나오는 장면으로도 볼 수 있는 이 부분은, 그럼에도 그것이 현실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어떤 왜상을 보존한다. 어쩌면 현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왜상이 현실을 지배하도록 계속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곧 여자는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숨을 가다듬고 몸을 추스르고 물을 마시고 잠깐 푸닥거리를 했다는 듯 책상 앞에 앉는다. 이때 그 비워진 몫은 온전하지는 않지만 일정 부분 봉합되는 것으로 결말이 맺어진다. 그러니까 그 과잉을 마치 자연스러운 것인 양 자신을 속임으로써 말이다. 제목에서처럼 괄호 안에 놓인 것은 결코 비어 있지 않고, 존재만큼의 유격을 가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사물에서 존재로 변환되면서 탈구될 때 심리적 결손은 비가시화되지만 흔적으로 영속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끝은 최종 봉합에 결국 실패함을, 그것의 헛헛함을 보여주는 결말이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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