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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리 포르탈 무용단의 〈폐허〉와 결부되는 현장의 시점에 대해Column 2026. 6. 10. 12:59
〈폐허〉: 숭고한 폐허 너머 ‘영점’으로서 폐허로

오를리 포르탈 무용단, 〈폐허〉[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상동). 〈폐허(Al-Atlal)〉는 이집트 시인 이브라힘 나지의 동명의 시를 이집트 가수 움 쿨숨이 부른 동명의 노래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그 내용적 차원과 함께 형식적 차원에 모두 관여하는 부분으로, 이스라엘 안무가 오를리 포르탈은 이를 전쟁의 장소에 투사하고자 하는 가운데, 무대 위에서 일종의 발화-몸짓으로서 노래를 하는 것 자체를 안무의 기전으로 삼고 있다. 그 독특한 몸에 조응하는, 아랍 현대 음악의 시초로 평가받는 움 쿨숨의 노래는, 이국의 전통적 향기와 절절한 목소리의 차원에서 무용수들의 신체를 지배하고, 거꾸로 그 신체는 그 음악과의 동화와 연장 속에 자리하는데, 이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상태에서 그 이질적인 음악이 어떻게 그들에게는 익숙한 화법이 될 수 있는지는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 및 아랍 공동체의 음악 문화의 영향과 관계의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이하 시댄스)의 ‘광란의 유턴’이라는 프로그램으로 구분된, 초청 작품인 〈폐허〉에 대해 프로그램북을 따르면, “두 나라 사이의 깊은 상처”는 “히브리어와 아랍어가 서로 얽히”는, 움직임의 근간이 되는 노래-발화의 구성 속에서 특정한 지역과 역사의 좌표를 가리키게 된다. 이는 그럼에도 호명하지 않는, 간접적이고 다소 불투명한 방식에 의해 드러남으로써, 곧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대립된 문화 코드를 직접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따라서 오래된 역사의 기원으로 환원됨으로써 첨예한 당면 현실을 유예하여 예술의 영역 아래 머무를 수 있다. 그러니까 〈폐허〉가 폐허와 함께 “치유”를 상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전쟁을 현재가 아니라 과거로 두었을 때 비로소 가능한데, 그 폐허가 전쟁으로부터인 동시에 전쟁 이후의 차원을 동시적으로 함입하는 경우, 곧 전쟁이 통시적 차원에서 역사의 상징 기호로 자리할 때만 그것이 가능하며, 반대로 공시적인 차원의 영향권 아래 있을 때 폐허-치유의 도식은 만들어질 수 없다.
‘두 나라의 전쟁’은 어떤 대등한 차원의 지위를 상정하는 반면,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구도는 2023년 이후, 전자의 후자의 집단 학살의 양상 아래 있다. 2025년 8월 13일, 시댄스의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주한 이스라엘대사관 공관차석 바락 샤인은 〈폐허〉가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 국민들과 더불어 오를리 포르탈이 깊은 트라우마에 빠져 있던 시기에 탄생”한 작품으로 소개하는데, 10월 7일은 하마스를 중심으로 여러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들이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를 침공하는 사건이 벌어진 날로, 이 같은 대응은 그 이전의 복잡다단한 역사적 맥락과 현재의 상황을 이스라엘이 지닌 기억의 트라우마에 대한 차원으로 매듭 짓는다.
따라서 이 말의 수용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세계 내의 독립적 자리를 보존 받지 못하는 국가적 인격체에 대해 닫힌 담론의 언어를 구사함을, 이스라엘의 폭력에 대한 암묵적 승인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축제가 표상하는 ‘세계’가 국가 간 외교의 차원에서 형식적이고 관례적인 차원에 입각한 언어의 형태로서 드러난바, 그 국가의 자격은 존중과 승인에 의거해 연장된다. 곧 승인된 국가의 지위로부터 그 국가의 위임된 자격의 발화자가 출현하고, 그것은 예술에 앞서 국가를 횡단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동시에 그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의 조건을 걸면서 그렇게 만든다.
이는 시댄스의 작동 방식과 언어 체계, 그리고 국가 간 교환 방식으로서 예술의 조건을 모두 드러내는데, 거기에는 특정하고도 공고한 인격체로서 그 국가에 대한 존중과 승인 시스템이 자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축제의 개막작과 관련해, 해당 국가의 대사관에서의 홍보와 리셉션 지원 등의 과정이 관례적으로 그 공연과 연계되어 왔음에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작은 민간 축제’라는 자기 지시적 발언은 따라서 형용 모순적인데, 모다페(MOdafe)와 함께 국내 2대 무용 축제로 꼽히는 시댄스는 여러 국가의 무용을 선보여 왔으며, 이러한 국가적 상징으로서 무용들을 통해 ‘세계’를 구성해 왔다. 이것은 규모의 차원으로 좁혀 볼 수 없다. 무용이 비대중적인 장르로서 협소한 영역으로 한정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이 ‘세계’에 대한 개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또한 상징적 표지로서 관념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질문을 이루게 되는데, 따라서 서울세계무용축제를 정체화하는 가장 주요한 개념인 ‘세계’를 재구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결정적으로 찾아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랄 베하리 팀의 취소 사유가 “‘아티스트의 개인 사정’이 아니다!”라는 문제제기는 아티스트 ‘개인’으로서 발화가 건드리는 ‘세계’라는 문제에 대한 차원을 다루기 위한 또 하나의 매개된 수사로 볼 수 있을 것인데, 작품 상연을 포기한 해당 아티스트는 이스라엘 작품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순전히 견디지 못했던 것으로, 곧 그것을 대외적으로 발화하려 했다기보다―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시댄스가 은폐한 진실은,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또한 또 다른 개입의 근거로 연장하기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치는, 말 그대로 포기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곧 예술가들 간의 협력적, 공통적 차원의 발화는 양적 차원으로 집산되는 게 아니라 철저히 질적 차원에서의 개인적 윤리이며 이념으로 봐야 하며, 운동의 언어로서 갖는 강도와는 별개로 진리의 언어로서 반성을 촉구한다. 따라서 두 번의 분절이 뒤따르는데, 외교상의 언어 너머의 언어, 국가 바깥의 여분의 언어는 마치 팔레스타인 현장의 언어가 이스라엘의 공식적 채널 속에서 은폐되고 기각당할 수 있음에 조응하는, 서울세계무용축제의 비가시화된 처리로서 그의 말이 숨겨지는 단계를, 그리고 다시 그것을 운동성이 언어로, 공식적인 차원의 언어로 그것을 소환하는 것이 다음 단계이다.유럽이 중심이 된 예술계로서 ‘세계’에서 이스라엘은 오히려 당연하게도 수월하게도 패싱되고 기각당하는 대상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서울세계무용축제는 단지 현안에 무지한 걸까. 어쩌면 이스라엘의 작품과 같이 이름을 올리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손쉬운 결정이다. 반면 진정 윤리적인 결정은 무엇일까. 그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우리는 더 풍부한 세계에 대한 앎을 구사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는 국가로 표상된 무용이 아니라 무용과 함께 국가, 세계에 대한 정의를 다시 회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그 긴급함의 현안이 왜 작은 틈새의 것으로 여겨지는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 문제가 왜 보편적인 차원이 아니라 특수한, 예외적인 하나의 사건일 뿐인지, 우리와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지, 팔레스타인은 왜 국가의 정의로서 우리에게 출현하지 않는지, 예술은 왜 국가의 범주를 뛰어넘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지, 국가의 지원 시스템과 그 시스템 안의 검열을 들여다볼 수 없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댄스의 대응은 국제 사회 내의 진정한 연대와 윤리의 모색이 불충분한, 불완전한 국내의 시점에서 관성적으로 고착되는, 면피하는 정도의 움직임을 띠는데, 그것은 그동안 현대무용의 새로운 움직임을 펼쳐온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여러 무용 단체의 작업이 소개되어 온 지난날의 영예로, 마치 모든 예술의 가치는 국가와는 별개로 순전한 것으로 치부하는 어떤 주의·주장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것은 분명하게도 자기 모순적 한계를 지닌다.
아울러 사회를 반영하는 예술의 자리에서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효과로 나아갈 수 있는 자리를 봉쇄한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폐허〉가 무대에 오르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 이스라엘 작업이 무조건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 또는 그로 인해 이스라엘 작업에 대한 보이콧의 목소리가 감추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또는 그것에 대한 담론을 촉발하는 계기로서 작업이 더 적극적으로 요청되며 그 같은 과정에 대한 매개로서 시댄스의 국가적 범주의 무용에 대한 플랫폼의 역할을 재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논쟁을 기피하지 않는 플랫폼이다. 따라서 이번 ‘광란의 유턴’이라는 개념은 그것을 표피적인 차원으로 갈음하려 할 때 일어나는 자가당착의 사태로 귀결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 사태 이후로 이 문제가 결정적인 것으로 부상하지 않았던 것은 영화계와 달리 무용계 내부에서 그와 같은 이념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 것과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니까 어떤 골방의 모티브, 사회로부터 격리된, 폐쇄된 연습실에서의 고된 훈육적-육체적 연습에 대한 매진이 삶-예술의 결합된 이상적 버전으로 여겨지는 그 세계 안에서 말이다―하지만 그것이 진정 중요한 부분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 역시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무대는 세계로부터 닫히는 그 자신만의 순전한 왕국인 것이다―이 무대의 절대성에 대한 기각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과정 아래 형성되어야 하는지가 물론 중요하다.
따라서 시댄스의 대응에 대한 현장의 뜨뜻미지근한 분위기는 무용 자체의 사회에 대한 무지/무관심의 차원을 성찰하고, 사회와 예술의 관계성을 고찰하며 안무의 방식, 아니 안무가의 작업 방식이 태도와 함께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무용계 전반으로 문제를 확장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예술의 순전함을 그리고 사회와 대응하는 예술을 담는 플랫폼으로서 시댄스의 자리 역시 영점에서 다시 고찰되어야 하는 시점임을 상기시킨다.김민관 편집장
〈폐허〉
09/26(금) 19:30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소요시간 : 50분
안무 Orly Portal
출연 Orly Portal, Artour Astman, Maya Tamir, Lal’el Pilorra, Noa Gronich, Daniel Costa
음악 Al Atlal, performed by Umm Kulthum, composed by Riad Al Sunbati, lyrics by Ibrahim Nagi
작곡 Ori Alboher
노래 및 보컬 Orly Portal, Artour Astman, Maya Tamir, Lal’el Pilorra, Noa Gronich, Daniel Costa
조명 디자인 Nadav Barnea
의상 디자인 Rossello Shmaria
그래픽 및 포스터 디자인 Itamar Heifetz
제작 Mor Messeri, Shalgee Sarit Kempler'Colu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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