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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인의 목소리 포럼: “리더 없는” 타운홀 미팅』 에 대한 주석: 무엇이 필요한가 아니 욕망하는가
    Column 2026. 7. 2. 13:56

    리더 없음에 대한 현안

     

    『예술인의 목소리 포럼: “리더 없는 타운홀 미팅”』 포스터[이미지 제공=예술인의 목소리].

    『예술인의 목소리 포럼: “리더 없는 타운홀 미팅은 다소 독특한(비문의) 또는 기이한(증상적)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술인의 목소리”가 주최의 이름에 해당한다면, 자연. 실제 포럼명은 부제의 자리로 옮겨지는데, 그런데 이는 “없는” 곧 부재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현장에는 실제 리더 곧 기관장이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그 이름은 실로 징후적인 이름이 된다. 정책 결정권자가 반대로 지역 주민을 초청하는 자리라는 ‘타운 홀 미팅’을 전유한 이 이름은, 그 역할을 전복하며, 그들을 리더 없음의 자리로, 곧 유령성의 신체에 입각하게 만든다―누구보다 ‘명확한’, 식별 가능하며 하게 된 그들은 마땅히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기관장의 부재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현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기관장의 존재를 끊임없이 복기하고 상기하는, 각각 비판과 상상의 차원을 대입함으로써 그 기관장을 수없이 시뮬레이션하는 과정이 곧 포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권력의 이양과 배분에 대한 논의의 절차이다―곧 가장 중요한 건 미래의 선취이다.

    곧 예술인의 목소리가 예술인과 결부된 제도 내에서 가시화되는 것, 더 구체적으로는 그것을 괴리된 이상―기관장의 이름―으로 수용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이 이름이 주는 함의일 것인데, 이때 그것은 시위이거나 연극인 하나의 매체적 형식이자 예술인의 목소리가 부인되거나 현장으로서 식별되지 않는 지점에 대한 자기 명명이자 증명, 현재성의 정위, 명분과 의미 없음에 대한 항변 등이 뒤섞여 있지 않을까.

     

    곧 ‘정동’ 자체인 이 명명이 기관장 문제를 ‘리더 없음’의 사태로 두었을 때, 그것은 대타자의 소거나 부인이 아닌, 역으로 대타자의 명명을 요청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번 포럼에서 가장 생동하며 특이하며 대표적이라 할 만한 말로서 “모멸감”은, 상대의 입장에서 내가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했다는 것, 곧 내가 투명 인간과 같이 배제되었음의 인식에서 오는 것, 곧 대타자의 응답하지 않음, 곧 부재로 소급되는 것 아닐까. 1부 첫 번째 발제자였던 우연 전 남산예술센터 극장장의 이 단어는, 그가 마지막으로 극장장의 사표를 내면서 자신이 예비군 같다는 생각을 하며 느꼈던 감정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설명되지 않는 정동, 이미 배제되고 소거된 주체로서 명목상의 주체로 임시로 자리를 수여받고 있는 존재의 부조리함에 대한 무기력한 저항 아닌 수용, 이 순간의 공백이 현장으로 연장되면서 다시 모멸감(들)의 횡단 작용을 만들어냈던 것, 곧 우연은 열린 결말의 문학적 형식을 빌려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어쩌면 우연은 기관장의 자리에 가상으로 다가가 있었고 거기서 다시 미끄러지고 있었던 셈이다.

     

    기관장의 자리, 예술의 너머 혹은 예술의 바깥

     

    포럼을 실제 체험한바, 현장은 뜨겁다기보다 뭔가 뜨뜻미지근했다. 이것들이 뜨거운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영역에서 사실은 이 자리에 없던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초반에 이르는 예술가들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그러니까 현장은 다시 구성되어야 하는가, 아니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일까.

    기관장 문제에 대한 온도 차이는 세대의 타락과 비정치성이 아니라, 이 문제 자체가 나와는 거리가 멀리 있는 일로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 문제의 시급함과 긴요함은 다시 한 바퀴 돌아, 그 반대의 차원에서 다양한 지위의 상대와 현장의 경험을 했던 이의 녹록지 않은 연륜을 가진 존재들에게 그것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가깝기 때문에 이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재명 정부의 보은 인사, 코드 인사, 낙하산 인사 등의 어떤 수식어들, 이로써 단행된 기관장이라는 하나의 서사를 상정해 본다면, 박혜진-서승만-황교익-〇〇〇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실제 (이 포럼이 열리게 된) 결정적 지점은 서승만에서 황교익, 그리고 그다음으로 국립극장과 국립현대무용단에서 각각 (비)가시화된 누구로 이행하는 흐름에 있다.

    서승만에서 조금 요란해졌고, 황교익에서 폭발했고, 그 뒤의 인물들은 문제의 심각성으로 연장되었다. 이때 이미 임명된 둘은 기관장으로서 자질 이전에 이미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누군가라는 데 그 문제의 초점이 있는데, 적어도 그들이 가진 전문성이 (그 ‘우리’가 지닌) 문화/예술의 이미지와는 너무 괴리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단’이 모두 맞는다면, 이는 포퓰리즘적인 행정과 포퓰리즘적 대중 반응의 연쇄적 흐름에 있는 것 아닐까. 그 중간에 더 정확한, 적확한 어떤 다른 이미지, 언어의 제시가 있었는가. 가령 K-콘텐츠에서 한국 음식이 차지하는 바는 소홀하게 취급될 수 없는바, K-한식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맛 칼럼리스트, 더 정확히는 음식 문화 비평가로서 꾸준히 이야기해온 이가 문화를 대표할 자격이 없다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일까.

    오래된 희극인의 지위는 연극보다 더 대중적인 것이기에 불쾌한 것이 되는가―거기에는 비극의 심연과 깊이가 없으므로?―. 이런 식의 회의가 개인적으로는 지배적이었는데, 주변의 동료들이 화를 낼 때 그 본래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의 이미지는 사실 비어져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비판의 논리는 다소 성급하거나 솔직하지 못한 데가 있는데, 코드 인사이기 때문에 비판의 여지가 있다는 말을 물론 부정하지 않고서도, 코드 인사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 적합한 기관장을 찾는 데 대한 충분조건일 수 없기 때문이다―반대로 적합한 기관장이지만 코드 인사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 비판이 사후적으로 출현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곧 적합한 또는 올바른 기관장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 찾기는 현실에 대한 부인의 차원에서 비롯되는바, 그러니까 예술인의 목소리가 요청한 설문이 노리는 효과는 그 이상적 이미지를 찾는 것, 현실보다 나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실제 설문들을 들었을 때 그것은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가령, 그 리더는 대체로 예술에 대한 순수한 몰입과 현장에 대한 애정과 이해―그러니까 전문성의 명제는 이러한 현장 경험의 측면으로 대체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자기 권리와 이익을 내세우지 않는 희생정신에 입각한 인물이어야 했는데, 이런 사람이라면 그냥 예술계에 계속 있는 게 맞지 않는가―예술과 기관의 일을 분리하는 건 이들의 생각 안에 전제된 바다.

     

    더 정확히는 그와 같은 인물이 왜 더 질적으로, 강도적으로 저하된/재미없는 버전의 일을 선택하려고 하겠는가―‘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우리가 그에게 희생정신을 강요할 수 있는가―‘너는 그가 될 수 있는가?’―. 그나마/그럼에도 욕망의 기저에서 그러한 계통의 인물들이 있다(고들 한다). 기관장이 되는 몇 가지 방식이 실은 명목이라면, 그것이 욕망의 단계에서는 안정적인 수익의 직장, 경력 관리, 노후 보전의 투자적 성격 등이 그 기저에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인들의 분노에 어정쩡했던 나는 애초에 이 리더의 자리에 대한 (포럼에 대한) 스스로의 욕망이 전적으로 근접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의 이양과 배분

     

    문제는 상급 기관의 임명 방식 자체로 소급된다. ‘깜깜이 행정’, 아마도 예술에 내려질 커다란 지원과 예산 분배의 방향이 중차대하게 우리의 미래를, 삶을 결정한다라는 것. 따라서 “기관장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이라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민원 처리 답변으로는 해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권력의 이양과 배분을 지향한다. 권위주의적 행정, 하달식 명령 체계의 시스템 대신에,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거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는 행정, 곧 동-인격적 차원의 존재를 요청하고 있다.

     

    사실 이미 우연의 발화를 통해 기관장의 실존적 상황에 우리는 처해 있게 되는데, 이러한 상상의 작용은 “결정”과 “판단”을 따르기만 하는 기관장(우연)의 실제 위치의 허수아비적/사이비적 삶의 체계―그것을 알고 있음에도―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또 다른 경로의 주체적 결정과 판단의 틈이 새어 나올 수 있음을 기원하는 데 있다! 그 선택의 기원(起原)을 상상케 함에 따라. 따라서 이 자리는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한 불신의 차원을 내비치지만 그와 동시에 기관장의 자리에 대한 사전 교육의 성격, 그의 인격적 시나리오를 발생시키는 차원에서 발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술인의 목소리라는 함의는 목소리를 내는 존재만이 예술인이라는 걸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의 전면에 나선 예술가의 행위를 상정한다. 그런데 이 예술인으로서 경로를 기관장의 몫으로 이전할 수 있을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 기관장의 위임된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고, 단독적인 선택의 자리에서 다시 그는 예술인의 한 자질을 반영해 낼 수 있을까. 그보다 부드러운 방식으로서 현장 공청회 혹은 대화의 여러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민의를 어떤 명료한 언어와 이념, 정책의 언어로 구분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은 효율성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다소 포퓰리즘적인 것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이러한 부분들이 암시적인 데 가깝다면, 현장의 요구는 더 직접적으로 기관장에 대한 자질 문제를 가시화된 과정 안에서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지에 맞춰져 있었다. 가령 한 참여자는 기관장에게 예술 작업을 보고 그것에 대한 감상을 대리하지 않는 차원에서 적어 내어 공공의 평가를 받는 방식을 상상해 보자고 했는데, 마치 포럼의 그 끝은 기관장의 자리 역시 불투명한 또는 불공정한 위임 방식 대신에 민주주의적 투표의 차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평가받는 것처럼 기관장 역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뭔가 민주주의보다는 소비자의 위치에 가까워지는 듯 보인다. 우리는 제대로 된 기관장을 뽑을 수 있을 것인가.

     

    따지고 보면,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지원금 심사의 자격을 어떤 우리가 추천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직접 뽑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의 임명은 추후에‘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아닌가―그러니까 아마도 이 ‘은밀한’ 임명의 방식을 가시화, 투명화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아니 인간적인 일일까.

    여기서 그 반대의 사례로서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마도 또 다른 집단적 우리를 형성했던 “블라인드 방식 동료집단 심의”로, 이는 엄청난 항의와 비판 아래 급격하게 가라앉은 바 있다―혹시 사회 곧 상징계는 결국 선택에 따른 기쁨과 슬픔의 차원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문제는 더 잘하는, 어떤 자격이 있는, 심의를 할 만한 전문가다. 그러니까 그 자격이 없는 이가, 상대적으로 나보다 낫지 않은 이한테 심의를 받을 때 나는 ‘모멸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기관장이라는 허수 혹은 환상

     

    ‘우리 스스로가, 동료인 우리가 서로를 평가하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자격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허용할 수 없다.’ 실제 그것을 뒷받침하는 저하된 언어들의 증거는 오히려 사후적 명목에 가깝다. 그리고 우리가 기관장에게 절대적으로 요구해야 할 것은 전문가적 소양과 경력, 철저한 희생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전자가 경쟁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시스템을 체현하고 있다면, 그리하여 유능함과 효율의 경제를 향하고 있다면, 후자는 기관장을 동료와 분리하여 신격화, 비인간화―자기 착취의 대상―하는 가운데 그 반대편에서 절대자의 시혜를 상정한다.

     

    우연의 유령적 몫에의 선택에서와같이, 이것이 비진정한 진정성의 몫으로 거듭날 때, 곧 실존주의적 갈림길에서 이것을 마칠 생각을, 상부와 절연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 다시 예술계로 돌아와 동료를 그전과 같이 마주할 수 있는 어떤 평범함, 소탈함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 앞서 언급한 이 같은 부분이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닐까. 그것이 결국 그 사람에게는 경력 쌓기의 도구이든 아니든 현실적으로 그것이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니 그것 자체가 속물이나 사사로움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건 이 일이 진정한 어떤 것이 되는 그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건과 같기에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던 건 아니다. 따라서 기관장 역시 우리가 완벽하고 완전한 이미지를 짚어넣는 데 반해, 그 역할의 연륜은 사실 시간에 따르는 부분으로, 어쩌면 더 많은 기관장의 경력을 통해 성숙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기관장으로서의 커리어’가 갖는 진정함.

    하지만 기관장은 다시 돌아오면, 결정을 결정하는 자이며 판단을 판단하는 자이다. 일종의 카리스마적 리더, 상징적 아이콘의 차원 너머에서, 우리는 기관장에게서 수평성과 동시에 절대적 차이, 진정함을 모두 요청하는바, 다시 반복하면, 그렇다면 우리는 제대로 된 기관장을 뽑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겐 요구만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 권리가 우리에게 이양된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한 갈린다. 그것이 더 큰 ‘우리’가 될 때 아마도 우리는 그 ‘우리’를 인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토록 기관장의 지배 영역이 절대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위험한 것은 아닐까―그러니까/그런데 우리는 그 힘을 마치 원하고 있다. 그런데 마치 잡스와도 같은 독창적인 기관장이 완벽하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면.

     

    그런데 예술의 앞선 전망을 제시함이 더 무용한, 의미 없는, 무가치한 어떤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 우리 중 누군가가 주장하듯 당연히 맞는 것이라면, 그런데/그리하여 그것이 ‘우리’가 아닌 특정한 일부를 향하는 것이라면, 우리 대부분의 이익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이 사실 무지해 보이지만 창조적인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면 어떨까.

    그런데/그럼에도 그것이 우리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것이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만드는 결과를 우리는 직시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우리는 원하는 것일까. 이 포럼은 현안에 맞서(고 있으며), 다양한 욕망과 미래를 논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욕망을 하나의 현실적 경로로 포집하고자 한다.

     

    실재의 윤리

     

    박혜진 국립오페라단 단장 임명식 현장(2026.04.06.)에서.(사진 왼쪽부터) 최희영 문화체육부장관, 박혜진 국립오페라단 단장.[사진 제공=국립오페라단].

    아마도 진정성의 자리는 임인자 전 서울변방연극제 예술감독의 말, 곧 서승만 이후가 아니라, 그 전의 진짜 기원을 되짚는 데서 출현한다. 그러니까 박혜진 국립오페라단 단장 임명 건으로 되돌아가는 말 말이다. 박혜진이 2023년 3월 그가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이던 당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서울시오페라단의 〈마술피리〉 리허설 도중 400kg의 구조물이 추락하며 발생한 故 안영재 압사 사건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는 것에 진정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진정 미래의 기관장의 위치 조정을 위한 실행으로서가 아니라, 이 과거로 소급된 자리에서 기관장의 윤리와 자질을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용역 계약서로 갈음하는 공공 기관 행정의 구조적, 형식적 차원을 단지 영혼 없음의 형식으로 연장하는, 인정하는, 허수아비 같은, 주체성 없음의 기관장의 면모를 수치 없이 드러내는 행위의 한 단면이라면, 가령 기관장의 낙착의 자리, 곧 하나의 기념사진, 기관장을 덮석/기꺼이/웃으면서 동시에 쩔쩔매듯 수여받는 모습, 거기에 어떤 하나의 틈도 의심도 없는 것, 절대적인 (힘에 대한) 수동성과 그 효과가 그로부터 기입되고 있는 것 아닐까.

    거기에는 타자의 고통도, 그 울타리 안의 인격적 현전에 대한 어떤 진정한 관계도 없다. 나는 단지 한 형식의 매개일 뿐이라는 것. 곧 오직 판단과 선택을 마치 나의 것인 양 대리 위임하는 형식만이 주어질 것이다. ‘그렇지만/그럼에도 나는 기관장의 그 자리에 분명 있다!’

     

    결국 기관장의 긴박한 현재와의 시차를 상쇄하기 위해, 조율하기 위해 마련된 이 자리의 성격은, 그것이 공론장의 차원에서 의미를 진정 얻기 위해서는, 역사를 구성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곧 앞서 말한 것처럼 미래를, 그리고 또한 과거로부터 고착된 현재를 동시에 진정 진단하고 비평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은 무언가 실용적이면서 포퓰리즘적 기조를 띤, 그리고 조율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아직 조율 가능한 시점에서의 이재명 정권이 아닌, 그 전 정부가 구성한 것들, 그리고 그 전 전 정부에서 구성한 것들 역시 불러와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참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떤 것이 더 큰 해악인지를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박혜진이 법적 책임 소재와 무관하게 기관장의 형식을 타락한 것으로 드러내었다면, 그리하여 실은 기관의 구조적 허점과 무능함에 대한 의제를 제공했다면, 곧 의제는 더 커져야 했다. 그것은 단지 기관장이 누가 되느냐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됐다. 하지만 그것이 대상을 특정하는 것의 중요함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면, 어쩌면 문제의 소지가 된 기관장들을 우리가 볼트모트로 다루지 않는 것 또한 합목적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결국 박혜진만이 문제선상에 올랐고, 또한 그것이 벌린 틈은 비가시화된 기관장의 물화된 형태로 갈음되었다. 그것은 곧 기관장의 쓸모가 아니라, 기관장의 윤리를 마주해야 하는 바로 그 지점이 오늘의 의제를 초과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소거된 연극in 그리고 담론, 미학의 실종

     

    연극in 홈페이지 캡처(2026.07.02.)[출처=https://sfac.or.kr/theater/main.do.].

    정진세 작가가 말한 연극in 관련해서 기관장의 담론 자체의 자립성에 대한 존중은 곧 예술에 대한 독립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곧 재단하거나 무언가를 새롭게 더 하는 것 이전에, 기존의 가치를 존중하고 보전, 보존하는 것, 중간자, 관찰자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 이 속에서 기관장의 위치와 자질, 또 다른 역량의 차원이 명시되고 있었는데, 사실 언급이 되어야 할 인물, 또 다른, 미래가 아닌 현재의 기관장은 곧 서울문화재단 송형종 대표였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당시 임명한 송형종은 또한 보훈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아마도 기관장 이전에 주요하게 연극계에서 비판적 담론의 초점이 되었던 건 바로 연극in을 폐간한 송형종의 조치였다고 하겠다―그리고 또한 블랙리스트 사건의 피해자 남인우 연출의 소식이 있었다.

     

    실로 우리가 목전에 두었던 비가시화된 그리고 봉인된 두 기관장보다 이 현재 진행형의 사태 자체가 훨씬 중차대한 문제 아닐까. 개관 당시 실험적 작업들의 기회를 열었던 쿼드가 이번에 가져온 프로그램인 ‘쿼드, 연극의 질문들: 진화하는 텍스트’라는 제목은 무언가 정합되지 않은 산만한 언어들의 분열 사태를 보여주는데, 다섯 명의 중견, 원로 연출의 정전이 그 “연극”이라면, 그 지위를 고스란히 수여받는 과거의 그 연극들은 어떻게 열린 차원에서 미래의 텍스트, 수용자 중심의 이 개념으로 그것도 ‘진화’해갈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진화라는 자의적 생명 이행의 방향을, 신탁적 이행의 차원으로 오역한 결과일까. 곧 이 연극들은 신화와 명성의 차원에서 발전과 완성의 차원에서 ‘진화하는’이 아니라 기-진화된 정전으로 선취되어 있었던 셈이다―“한국 연극의 미학적 진화를 이끌어 온”. 그런데 이 작업들의 작품성을 의문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한데 모으는 것, 도대체 이런 시대를 거스르는 기획의 언어는 가령 AI 시대를 부인하려는 노스탤지어에 대한 갈망인가. “기술의 홍수 속에서 인간성과 연극성의 본질을 다시 묻는 귀중한 여정”(송형종)으로서 말이다.

     

    “서울어텀페스타”라는 “브랜드”에서 우리가 아는 공연예술은 “순수공연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재기입되는데, 이 ‘순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매체적 협력의 소산물이라는 고유의 성격이 제한되고 축소된 영역을 말하는가. 순수하지 않은 공연예술은 뭐고, 순수해야만 하는 공연예술은 또 무엇인가. 그것이 시장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예술―“전달 방식과 유통 구조의 한계로 인해 그 가치가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거나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이라면, 이 외부적 매개가 ‘순수’를 훼손하지 않은 채 그것에 닿지 않았던 이와의 연결을 꾀하는 것은 반-순수한 일의 대리적 행위인가.

     

    그런데 막상 공연자에 대한, 관객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의 어떤 언어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이 공연들의 모음인 사이트는, 실은 “예술지원 선정작에 대한 홍보와 아카이빙부터 시작하는 정보포털”인 ‘스파크’, 곧 연극in의 자리를 포괄적 수용의 자리로 환원, 봉쇄시킨 이 사이트와 매우 흡사하다. 연극in에는 예술가들 개별의 언어가, 개념이, 현실이 자리하지 않았던가. 행정을 향한 언어, 제출과 증명을 위한 언어, 틀에 갇힌 언어, 타락하지 않은 언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방향 아래 순수한 것으로 압착되기 시작한다.

     

    핍진한 언어들 그리고 사유들

     

    서울어텀페스타 소개[출처=서울어텀페스타 홈페이지 https://www.sfac.or.kr/seoulautumnfesta/contents/brand.].

    서울어텀페스타의 워딩은 그저 예술인을 순수해서 현실 세계에서 도태된/밀려난 이로―예술을 현실과 연접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은 예술과 현실을 분리 구획한다.―, 관객을 정보가 닿지 않아 작품을 보지 못하는 이로 취급한다―실은 관객이 지닌 다양성에 대한 고려 없이 여러 예술을 하나의 형식 안에 구획하여 축제로 인장한다. 이 하나의 시스템은 순수한 예술인을 순수한 예술‘만’을 할 수 있도록, 그것을 바깥에서 접촉할 수 있도록 직항의 그 둘만의 순수한 경로―하나의 채널―를 개설한다.

     

    또한 이 포집의 시스템은 결국 홍보가 하나의 언어임을, 예술에서 분화해 나온 개별-특수의 언어임을 간과한다. 그것은 하나의 채널에 담긴 메시지를 0의 상태, 곧 순수한 영도로 둠으로써 개별 메시지가 그대로 전달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을 한다. 하지만 채널이 단순해지면 메시지 역시 축약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안 그래도 복잡다단한 맥락을 가진 예술 작업을 간략화하는 것이 수신자에게 유효한 메시지로서 기능할 수 있는 절차인 것일까. 이 시스템은 결국 공기관의 통합적, 일자적 시스템의 양적 성과와 경제적 효율의 차원을 ‘순수’한 이념으로 바꾼다. 그 직항의 경로 자체가 예술가-소비자 사이의 간극 없는, 균열 없는 ‘순수한’ 매개가 될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결국 다양한 것의 울퉁불퉁함이 아닌, 하나 안의 정돈된 양식상의 구성이 순수한 것이다.

     

    2025년 시작된 쿼드의 “재연을 부탁해” 역시 공연의 레퍼토리 단계의 정교한 설계 차원보다는 민간에서 기존 성과를 이룬 공연을 고스란히 취해 오는, 그저 한 번 더 재연하는 데 그치는, 안이한 기획의 산물이다. 그 기획에는 어떤 독창성도, 새로움도, 실험성도 없다, 또한 ‘더’ 있게 만들지 않는다―그것은 단지 본래의 작업에만 귀속되는 부분이다/민간의 성취를 제 것인 양 전유하는 부분이다.

    또한, 서울예술상은 마치 백상예술상에 대한 샘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결과의 가치와 전문성의 영역과는 상관없이 그것의 전체적인 진행은 보여주기식 행정의 극치이며, 실은 서울문화재단의 개별 성과들을 재단의 상징적 업적으로 공치사한다, 그러기 위해 예술가들을 하나의 무대에 동원한다.

     

    서울예술상 홈페이지 캡처[출처=https://www.seoulartsawards.com/index.].

    대부분의 작업이 실은 대중문화에 비해 매우 극소수의 관람객만에게 소구되었으므로, 그것이 전 국민을 상대로 하는 대중 미디어 전파의 결과를 염두에 둔다고 할 때, 사실 그것을 목적으로 할 때, 그 안의 심사평들이나 평론가의 매개 과정이 사실상 더 중점적으로 드러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그것이 수면으로 가라앉는 대신―가령 평론가들의 명단이나 해당 평을 작성한 평론가의 이름은 기입되지 않는다.―, 그저 화려한 외양의 기존 방송 시상식장의 클리셰적 차원을 그대로 답습하려고만 한다.

     

    이 구태의연함과 강박적이고 빈한한 홍보의 언어, “진화”와 “순수”의 저하된 언어들, 담론을 무력화한 자리를 잠식한 촌스러운 포털의 형상. 그러니 다시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볼 부분은 기관장이 무엇을 더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그만큼 파괴하지 않고 자제할 수 있느냐에 있다.

    참고로, 여기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건 일종의 언어 자체로, 개인적으로 이 비판적 언어가 그것이 가진 어떤 성과와 결과를 모두 무력화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무력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와 무관하게 기획의 언어로서 너무 무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일지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문제는 이 언어가 필터링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홍보의 빈한한 언어들은 재단 내부에서의 의사소통 구조의 결손 같은 것을 드러내는 것 같지 않은가.

     

    따라서 기관장의 중요한 그리고 주요한 몫은 현장의 자생적 측면을 존중하며, 그 각자의 개별성과 구체성을 지워내지 않고, 양적 팽창과 효율의 언어 안에 예술을 사실상의 또 다른 기금 시스템 아래, 곧 기회의 땅 안에 밀어 넣지 말고, 행정식 기입의 언어를 강제하지 않고, 적어도 그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고, 현장을 인정하고 최대한 듣고 살펴내는 것 아닐까.

     

    ‘순수’에 대한 강박은 곧 스스로 사유하고 성찰하며 비판하는 주체의 행위성을 소거하고, 예술이라는 형식 안으로 수렴시키려는 강제성에 대한 열망 아닐까. 그런데 이 기관장이라는 공통의 논리, 연합의 차원에서 송형종의 이름은 왜 불리지 않았을까. 왜 리더 없음의 현재만이 이야기되었어야 했을까. 왜 공론장은 더 많은 이야기를 불러내지 못했던 걸까. 왜 우리는 기관장의 순수한 형상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현재의 기관장과는 싸우지 못하는 것일까.

     

    사라지는 매개자

     

    기관장이 상부 기관의 선택과 판단을 고스란히 ‘복붙’하는 존재라면, 책임 소재가 그 위로 소급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이 공모로부터의 책임을 혼자서는 짊어질 수 없으며, 둘이서도 분배할 수 없다. 따라서 부인은 그것을 우회하는 적확한 아니 유일한 경로이다. 최근 남인우 연출이 2013년 당시 국립극단에 의뢰받아 올리려던 작업에서 받은 검열, 〈구름〉의 대본에 그어진 빨간 줄과 첨삭 이후, 제기한 손해배상청구가 대법원 최종 판결로 인정되었을 때 손진책 연출은 자신이 그러한 사실과의 연관성을, 나아가 그러한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저는 특정 예술인을 정치적 이유로 검열하는 행위에 가담하거나 이를 지시한 사실이 없습니다. 저는 평생 연극을 통해 인간과 시대를 이야기해 왔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창작의 자유와 예술의 독립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정부와 결탁하여 예술인에 대한 검열이나 불이익 조치에 관여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제 기억에는 ‘붉은 밑줄 대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붉은 밑줄 대본이 수정과 삭제를 위해 하달되었다면 그것은 문화사적 중대 사건이고, 기억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일 것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빨간 줄을 친 감시자의 시선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자신을 부인하여야 하지만 말이다. 사실 손진책은 누구도 비판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잘못 알고 있음의 사회에 공감하며, 자신과 관련된 사실관계가 잘못 알려지고 있음에 대해 우려를 표할 뿐이다. 빨간 줄은 오로지 작품과 함께 소멸되었어야 하는 금제다. 비가시화되는, 예술 바깥의 임시적인 효과였어야만 했다.

    그것은 내가 전적으로 따라야 할 내가 아닌 ‘그’―어쩌면 신―의 관점이다(그런데 그것은 한편으로 예술의 언어에 대한 인식과 메타 인식을 모두 가진 이에게서만 가능하다, 곧 신을 대리하는 건 오직 인간일 뿐이다. 그러니까 언급되지 않은 누군가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막는 게 손진책의 글이 지닌 가장 큰 효과가 아닐까).

     

    그런데 예술이 이 미션 아래 최종 완수되지 못하고, 그때의 순간으로 되돌아갔을 때, 곧 시뮬레이션됐을 때 그것은 마땅히 존재할 수 없는 순간이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안의 관계에서 사라졌어야 했다. 나는 사실 ‘사라지는 매개자’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 매개에 대한 주체 자체는 엄정하게 알 수 없으며, 따라서 매개자의 위치를 발설할 수는 없다. 아니 사실 나는 사라지는 매개자임을 발설한다. 그런데 예술원의 답장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손진책 연출의 답장이다. 곧 예술인의 답장은 손진책 연출의 이 행위 자체에 대한 사전 승인과 그리고 그 이전 행위에 대한 사후 용인으로서, 손진책을 통해(서만) 체현된다.

     

    연극in 아니 연극인

     

    예술은 표현으로서 담론의 한 유형을 이룬다. 비평과 예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곧 자기의 폐쇄 회로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평적 언어에 응전하는 것이며, 비평 역시 예술을 대상으로 전락시키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의 언어에, 표현의 역량에 근접하려는, 그리고 어떻게 보면 매개하려는 어떤 불가능성의 시도이다. 따라서 담론을 막으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나의 영역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이기 때문에 실행되어야 한다. 담론을 포집하는 미디어가 예술의 외부라거나 부산물이라거나 나의 예술이 아니라거나 하여 관심이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부분 모두 안이하며, 비판의 여지가 있다.

     

    앞서 본 것처럼 송형종의 이름 아래, 일련의 서울문화재단의 시도가 지는 문제는 무엇보다 언어를 순수한 것으로 가정하려 한다는 것, 언어 자체를 일원화하고 다성성의 목소리를 그 가운데 소거한다는 것에 있다. 연극in의 소거에서부터 다시 기관장의 문제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예술(가)의 언어, 예술에 대한 언어 모두가 첨예하고 구체적으로 생동하던 플랫폼을 소거함은 비단 연극in이 아니라 연극인 자체를 모욕하는 행위 아닐까. 연극in의 존재들을 타자로 배제하고 축출하며 그렇게 연극인을 갈라치기를 하고, 그 자리를 다시 순수한 하나의 집단으로 상정하며, 몇 개의 단순한 거대 플랫폼 안에 배치, 구획함으로써 일정한 존재들로서 관리하며 시혜를 베풀며 길들이(려)는 것 아닐까.

     

    이 순수에 대한 열망이 순수한 예술가에 대한 원형을 만들고 그것에 대한 침범, 강제 자체에 대한 욕망으로 전화되는 것이라면. 진부한 기획의 언어 역시 순수한 진정성의 차원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술가의 주체적 발로가 아니라, “~을 부탁해”와 같이 친근한 얼굴을 한 다정함의 제스처로써 순수한 행위로 봉합될 수 있는 것이라면. 나의 시대착오적 취향과 그 갈망이 미래적인 것으로 내세워질 수 있는 것이라면. 관객이 대중의 차원에서 순수한 하나의 집단적 원형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술의 가치가 휘황찬란한 쇼의 이미지로 재소환되어 포장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문화사적 중대 사건이고, 기억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손진책은 자신의 행위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가운데, 그리고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문화사적 중대 사건임을, 기억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임을 인정한다. 기억하고 인식하는 나를 부정한다. 결코 단순한 망각이거나 사소한 사건이 아닌 것을 손진책은 인정한다. 어제의 나를 부인한다, 미래의 나를 여전히 승인함으로써. 예술의 바깥이 아닌 자신을 포함한 또는 자신이 마땅히 포함되어야 할 예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공동체에게 자신의 이전의 부당함을 은밀하게 누설함으로써, 그것을 완전한 사실로 인정함으로써 말이다. 오직 하나의 서사만이 있고, 다른 서사는 없다. 하지만 언제나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고, 또한 있다. 손진책은 그것을 증명한다.

     

    기관장으로부터, 아니 기관장을 넘어

     

    결국, 기관장의 부당함이 있고, 기관장이 마주해야 할 부당함이 있다. 기관장이(‘라고’) 능사는 아니다. 부당함은 부당함을 낳고, 부당함은 부당함으로 이전된다. 우연의 선택이 있고, 손진책의 선택이 있다. 물론 더 멋진, 알 수 없는, 다른 선택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관장의) 동료라면, (기관장이 아닌) 우리는 그것을 같이 헤쳐나갈 수 있을까.

    반대로, 동료로서 예술가 집단의 차원에서 기관장의 자기 인식과 사명이 출발할 수 있을까. 상부를 매개하는 비가시화된 몫과 하부를, 전체를 매개하는 가시화된 몸짓 사이에서 우리는 그 본연의 선택적 몫을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적어도 우리는 전자의 차원에서 현재를 비판할 수 있지는 않을까. 기관장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 못지않게, 현재의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말이다.

     

    『예술인의 목소리 포럼: “리더 없는 타운홀 미팅』 은 결국 순수한 ‘예술인의 목소리’ 자체를 현상하려 했던 자리로 보인다. 따라서 예술인의 형상은 장르적, 분야적 다양성으로 2부에서 확장되었지만, 예술인에 대한 사유, 의미, 자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끌어내기에는 닫혀 있었던 것 같다. 담론적 자리라기보다는 운동적 차원에서의 결집이었고, 순수한 공동체의 열망과 함께 그것으로의 분별을 끌어내는 자리이기도 했다. ‘현재의 진정한 리더란 없다. 그러니 미래의 진정한 리더를 염원한다, 아니 주문한다.’가 이 자리의 근본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래를 예약하는 가운데, 현재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니까 ‘리더 없는’이 본래의 풍자에서 현장에서는 곧바로 성토로 이행되었지만, 실은 리더는 외부에 화답하는 자라기보다 외부를 호출하는 자로서, 또한 그가 명명하지 그가 의제와 결부되어 명명당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말은 ‘언제나’ 진리이다. 곧 이것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게 아니라, 그리고 무언가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명명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관장들이 오지 않은 건 분노가 아니라 유머로써 수용되어야만 했다. 결국 이 포럼이 공론장으로서 성격을 지향한다면, 기관장 없음의 현안이 아니라, 부재하는 기관과 그 목소리에 대한 반정부적, 비판적 주석으로 기능하고자 한다면, 이 이름이야말로 진정한 것일 것이다. 더 많은 예술인의 목소리들, 그들의 균열과 간극을 그 안에서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음에 드는 기관장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리더 없는 타운 홀 미팅을 열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계속 열어야만 하지 않을까.

     

    김민관 편집장

     

    『예술인의 목소리 포럼: “리더 없는 타운홀 미팅

    2026년 6월 22일(월) 14:00 – 18:00 

    씨어터 광장(서울종로구 대학로8길 7, 대학로예술극장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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