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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의 직접성(이라는 조건): 이동하의 〈도파민네이션〉 사례를 경유해Column 2026. 7. 13. 14:49
사회라는 외부

이동하, 〈도파민네이션〉ⓒHanfilm[사진 제공=국제현대무용제]. 〈도파민네이션〉에서 중심적 오브제는 옥수수알로, 이는 프라이팬과 결합하면서 팝콘 튀기는 소리로서 연장된다. 그리고 또한 초반 여기에 입혀지는 휴대폰 알람 소리는 신경에 직접 미치는 효과로서, 소위 의식을 쪼아대고 나아가 튀겨내는 것과 같다. 곧 우리는 프라이팬에서 옥수수를 덜덜 볶으면서 그 프라이팬 안의 옥수수처럼 미결정적이고 불안정하게 의식이 난도질당하는 중이다.
〈도파민네이션〉은 도파민에 중독된 현대인의 일상을 비판적으로 지시하려는 의도를 갖는데, 두 번의 공연에서 중심적, 결정적 오브제가 대체되는 해프닝을 겪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사례로 기입된다. 곧 무대 하수 앞쪽에 놓인 직각의 통로 구조물은 일종의 단으로 자리하며, 그 위의 전자레인지가 자리하는데, 여기에 두 번째 공연에서는 빠지게 된 살아 있는 문어가 투여되어 실제 작동되었다는 것이다.
동물권의 의미를 수호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무분별한 쾌락 지향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비판하기 위한 ‘더’ 나아간 행위는 부차적인 대상을 결정적인 차원으로 전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데, 그것은 진정한 동물권에 대한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 된다. 이는 부차적이거나 부속적인 것으로 여겨온 대상이 가시화, 무대화될 때 일어나는 일차적인 효과로, 그것은 또한 그 반대의 차원에서 결정적 장면으로 또한 가시화되는데, 이 도파민 중독자들의 연장선상에서 그 바깥의 존재들을 사물화하는 결과를 관객들 역시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안무가의 전적이고 진정한 사과를 통해, 이 문어에 대한 상해와 가격의 과정은 극단적인 쾌락주의자로서 쾌락에 취약해진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려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그 안에 속한 대상 자체가 본래부터 중차대한 사안은 아니라는 것, 곧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려는 차원은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그 극단적인 실행이 변증법적이 아니라 내속적이었다는 것도 함께 드러나는 것이다.
곧 이 실행이 작품에서의 사유의 특별한 전제 조건으로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반성 없음의 사유의) ‘결과’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로써 안무가는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며, 자신 또한 도파민 중독자의 한 경로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고 자문하는데, 곧 그 반성의 차원으로써 작품의 의도를 결정적으로 완수한다.
몸의 직접성을 경유하는 (대)극장
하지만 이러한 환원적 차원에는 어떤 틈과 미묘한 맥락이 담겨 있(고 사실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무용이 곧 몸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매체, 장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을 그야말로 전자레인지의 어떤 은유로서 열정을 갖고 몸을 폭발적으로 불태우며 격정적으로 소진시키고 휘발시키고 격하시키고 하는 동작들을 최선과 진정성의 차원에서 달성하는 것이 곧 무용의 특별함이자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파민네이션’은 현대 사회가 아니라 더 특수하게 무용의 무대 자체에 대한 환유로서 자리하는데, 곧 그것이 도파민이 이룬 왕국인 것이다.
몸을 과도하게 소진시키고 영구적으로 퇴화하는 어떤 방식으로서 무용의 어떤 표현 방식들에 대한 언급은 공개적으로 잘 이뤄지지 않는, 곧 담론화되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무용단 내부의 사정을, 무용수들의 자기 발로적 결정의 여부는 블랙박스화되어 있고, 가시화의 근거로부터 그것으로 소급해 가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이는 공동체적인 집단의 차원이 배속되는 과정을 밟는 연극에서 극단의 경우에도 상응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그 원인에 따른 책임 소재를 밟아나가는/밟아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시화된 것만으로써 비판을 완수하는 것일 것이다.
무용의 모더니즘 의식의 재도래는 진짜 도래와의 시차를 갖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계속 반복해서 (변용되거나 굴절되어) 출현하며 사실상 진짜 도래로부터 지연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주장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몸의 적극적 활용에는 정작 몸에 대한 성찰이, 몸을 주어로 보는 진정한 입장이 역설적으로 빠져 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인식적 합의의 토대를 산출하고, 무대의 전제 조건 자체를 바꿔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무대라는 조건에 대한 검토나 인식은 신기할 정도로 사실 잘 이뤄지지 않았는데, 가령, 그 예외적 사례로서 윤푸름의 〈관객, 되기: 떨어진 감각을 이어 붙이기〉와 같이, 극장을 무대의 여러 경로들로 재편하는 것에서처럼 극장을 텅 빈 조건으로 사유하는 경우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극장을 재가설하고 관객을 수행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변용시키는 이 과정에서, 퍼포머의 빈/사라진 자리를, 극장 자체를 관객이 점거하게 된다. 하지만 극장의 물질성과 관객의 신체성은 재무대화되고 재가시화되며 그 서사는 근본적인 것에 대한 성찰보다는 승화 작용에 기울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는 (그 결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참조= https://www.artscene.co.kr/1996]) 극장이 가진 환영성을 입체적으로 강화하는 전략에 가깝지 않을까.
스펙터클을 위한
대극장 안의 안무는 어쨌거나 그 공간을 풍부하고 집약적으로 채운다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양적 차원에서는 많은 인원과 대규모 구조물이나 장치 등이 투여되며, 형식 차원에서는 집합적 군무에 가속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움직임들은 대개 되게 빠르고 순식간이며 군무가 아닌 경우, 퍼포머는 곧 대체되고 또 치환된다―이 과정에서 또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해 교체되는 게 아니라, 끝없는 새로움의 형식 안에 집어넣을 대체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체되는 전도된 현상이 벌어지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실은 (보통의 그 대주제가 되는) 실존에의 강박은 형식의 강박이 체현된 결과이다.
거기에 강력한 음악적 힘이 지지되는데, 음악은 움직임에 합목적적이기 위해, 곧 내속적이기 위해 갖은 스펙트럼으로 요동치며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복잡하게 꼬여가며 진전한다. 그것은 왠만하면 음악이 아닌, 노이즈 계열이 뒤죽박죽 섞인 비음악적 파편들의 콜라주이며, 철저히 비가역적이다. 그것은 산만함과 망각됨의 이중 효과를 가져온다.
되게 여기까지 의사-대극장 무용 공연의 표면적 차원을 체험할 때 어느 정도 공통되는 듯 보이는 외양인데, 이러한 보편적 규준을 의심하고 의문시하고, 그 모든 것들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차원에서 극장과 무용, 제도와 무용 사이에서 어떤 정초적 새로움을 가져오는 공연의 예시를 찾을 수 있을까.
대극장은 어떤 명확한 초점과 분기, 재단이 더 강하게 필요하고, 또 양적 확산과 팽창이 또한 중요하다. 그에 따라 거대한 장치가 들어오고 그것이 변주되는 한편, 집단적 군무의 일체화된 몸짓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장소의 부피가 생각의 자율성과 반비례하는, 전자가 후자를 제한하고 침범하는 형국인데, 이는 어떤 지루함과 비어 있음, 이행의 점진적 과정을 사유하고 감각할 수 있는 차원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의 회로가 단축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도파민에 찌들고 중독된 현대인의 징후를 감지하는 차원에서 그런데 그것을 더 선명하고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능사는 아님을, 사실 위험할 수 있음을 〈도파민네이션〉은 보여준다. 곧 우리가 진정한 비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보통 문제 자체를 직렬하는 게 아니라, 곧 진짜 문제적인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비판적 거리를 어떻게 포함시키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판단된다.
이동하의 〈Guernica Again〉

이동하, 〈Guernica Again〉(2016). ⓒ옥상훈. 그런데 이 비판성을 배치와 표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몸으로 직접 이전하면, 몸의 지연과 굴절, 정체의 차원에서 현상되는 건 아닐까. 이동하의 지난 작업,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에서 모티브를 얻은 〈Guernica Again〉(2025)는 마치 그러한 몸을 (먼저) 보여주는 듯한데, 동명의 그림에서처럼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무차별 폭격으로 죽어가던 스페인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반영하는 이 작업은, 2016년 16명의 무용수에서 이제 이동하 한 명의 출현으로 다시 재연되면서 대극장 공간과 신체의 대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사이렌 소리와 늑대 울음 소리는 전쟁의 신호와 야생의 비유적 상징을 동시에 도입한다. 곧 격하된 신체, 소리로써 감금되고 위협당하는 존재의 타자성을, 이동하는 오히려 광활한 공간의 여분 아래 뚜렷한 현존이라는 배치로서 갈음해 낸다. 명확한 춤의 표현보다는 반복해서 벽을 향해 부딪히는 모습을 통해 실존적 방황의 경로를 자의적이고 비예측적인 차원에서 그려낸다. 마지막 비를 맞으며, 마치 환희에 찬 것 같이 그것을 겪어 내는 남자의 모습은 숭고(의 음악으)로써 승화된 어떤 환상으로의 횡단을 보여준다.
이는 어쩌면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독가스의 살포로 죽어가던 존재를 이동하 한 명의 존재가 표현하는 것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죽음의 순간에 꾸는 어떤 환각적 꿈과 같을 것이다. 이 무거운 사회적 주제에 선뜻 대응해 헐벗은 몸으로 맞서는 건 신체에 가해진 폭력성을 굴절시켜 반향하는 것으로써 이뤄진다. 그것은 비판적 거리를 형성하기보다 폭력이 어떻게 개인을 전도시키고 굴절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지점에서 사후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진단에 가깝다.
그렇지만 실제 폭력은 심리적이고 내면적이며 상상적인 차원으로 주로 소리로써 동조되고, 주체를 침략하고 내몰고 전이시키기에 이른다. 따라서 스펙터클의 무게는 다른 방식으로, 확장과 양적 팽창이 아닌 감산과 대비의 차원에서 이접적으로 획득되는 한편, 사회 비판적 성격은 존재의 체현적 경계로서 가늠된다. 신체의 헐벗음과 수치, 고통과 노동은 감내되고 체현되는 것에 가깝다. 적어도 무용의 언어 안에서 이것은 진실로서 양도된다.
몸에 대한 재사유
그렇다면 부차적인, 기능적이었을 이 문어의 도입―이 안에서 옥수수를 튀기는 것, 곧 첫 번째 원래의 버전과 문어를 튀기는 것, 곧 두 번째 변경된 버전에서 옥수수와 문어는 강도의 차이에서 분별될 뿐, 실은 근본적인 (생명의 유무에 따른) 차이를 지니지 않는 것으로 갈음되었을 것이다.―은, 신체의 이 기꺼운 하락의 또 다른 변용적 사태는 그 전에 어떻게 비판적인 거리로써 사유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거꾸로 우리는 어떻게 몸을 하나의 그 자체의 매체로서 사유하며, 기능화하지 않고 또한 움직임으로 연장하며, 무대로 재도입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문어의 기능성, 보조성, 하찮음이 체현하는 건 대극장 군무에서의 일반적인 신체의 기능적 차원에서의 채택으로, 근본적인 비판의 시점은 무용 내재적인 차원에 있으며, 이는 곧 직접적으로 타 종에 대한 생명의 멸시라는 안이한 생각(에 초점을 맞추며 예외적인 한 사건으로 이를 처리하고 마는 것)‘만’을 향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물론 포함하면서도 신체를 단순하고 투박한 것, 임시적으로 활용, 고착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대한 진정한 문제의식을 갖는 (것으로 의식을 확장하는) 데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문제는 전적인 무지의 소산이 아니라, 오히려 앎의 고착된 차원에 있지 않을까. 그것은 몸과 더 가깝고 그것에 더 유능하기 때문에 직접성의 매체로서만 그것을 활용하기 때문은 아닐까. 필요한 건 이 몸과의 거리이며, 몸에 대한 직접성과의 거리이다. 하지만 이를 반전시켜 볼 수도 있는데, 몸에 더 집중함으로써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으로서 몸, 더 직접적이지 못하는 것으로서 몸의 특질이 드러날 수도 있다1.
그리고 어쩌면 사회적 비판의 거리는 무용에서만큼은 조금 다를 수 있는데, 그것은 문제를 언어화하는 게 아니라, 또 언어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재현하고 또 체현하는 어떤 차원에서의 직접성을 가정, 전제하기 때문이다―이는 한편으로 사회적 토픽이나 의제 중심으로 문제들을 발빠르게 수용할 수 없는 한계도 분명 가정하는 듯 보인다. 가령, 연극이나 문학 등등, 또는 연극보다 문학이 다양한 의제를 조금 더 빠르게 받아들인다2. 그리고 이는 한계라기보다 또 다른 가능성의 차원을 예기하는데, 그것은 몸이 무언가를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도 더 혹은 덜 말하고 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무용이 어떤 것을 다르게 말하고 또 감각한다는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 2. 가령 김보라의 〈내가 물에서 본 것〉은 더 미시적인, 매우 다른, 파악할 수 없는 몸의 영역에 탐침해 들어가고자 한다. 이에 대한 참조는 https://www.artscene.co.kr/2319. [본문으로]
- 3. 다른 한편으로, 문학성, 연극성이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무용성이라는 말은 전무하는 듯 보인다. 이는 무용이라는 매체에 대한 재고를 요청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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