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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Connecting Bodies: Asia Women Artists》에 대한 메모: 통합과 신화화의 기제로서 고착되는 여성이라는 형상REVIEW/Visual arts 2026. 7. 8. 13:55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Connecting Bodies: Asia Women Artists》포스터[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이하, 《접속하는 몸》)은 타자의 형상으로서 여성과 아시아를 하나의 범주로 구성하는 거대한 기획을 전면에 내세우는데, 이는 이 두 범주를 담론적 차원에서 혹은 미술사적 차원에서 새롭게 갱신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괄호 치기의 방식, 곧 포함과 확장의 차원을 꾀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곧 아시아와 여성, 그로부터의 미술에 대한 차원은 각기 다른 범주에서 출발하는 하나의 교집합이 아니라, 처음부터 유기적인 하나의 형상으로 꾀어 있는 듯 보인다.
아시아의 여성의 미술가‘들’로 매끈하게 수렴하는 이 도식은 결국 다시 서구의 남성 미술(가들)이라는 도식의 변증법적 기술이 전제되었음을 가정한다. 곧 (제대로) 쓰이지 않은 역사를 쓰는 건 ‘다시’인가, 아님 ‘새롭게’인가? 이는 결국 담론적 차원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그보다 상징적인 차원의 진작으로 보인다. 어쩌면 다양한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을 소개하는 자리, 어쩌면 이미 익숙하고도 유명한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의 표본을 제시하는 이 자리는 그러한 담론적 차원에서의 세공과는 다소 거리를 둔다. 또 한편으로 배제와 축출의 논리, 그 반대편에서 저항의 목소리의 차원 역시 모호한 대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또 다른 축에서, 아시아‘의’ 여성 문화적 차이와 서구 미술사 바깥의 시간, 곧 시간적 축과 지리적 차원 모두에서 이 둘이 혼합되는 형상을 보임에 따라, 아시아라는 하나의 신화적 범주를 생산하는 미술가들이 여성이라는 간편하면서도 위험한 도식으로 수렴할 가능성 역시 생산한다. 물론 앞선 제목의 오류성, 또는 제목이 주는 오해의 여지를 다른 이름들, 제목들을 통해 상쇄하는 것이 가능할지 역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다음의 전시의 분류, ‘삶을 안무하라’, ‘섹슈얼리티의 유연한 영토’, ‘신체·(여)신·우주론’, ‘거리 퍼포먼스’, ‘반복의 몸짓‒신체·사물·언어’, ‘되기로서의 몸‒접속하는 몸’과 앞선 추상적인 특정 여성에 대한 도식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라는 전시 큐레토리얼에 대한 구체적 질문을 경유하면, 전시는 오히려 여성에서 미술로 환원된다는 느낌을 주는데―예컨대 ‘아시아 미술가들’이라는 부제의 성립!(왜 ‘여성’인가에 대한 당위성을 찾을 수 없는 것과 여성으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상응하며 또한 교차한다.)―, 이 범주들은 우선 통시적 차원보다 공시적 차원에서의 진술로, 이는 다분히 너무 많은 (것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을 포함해서 어떤 것을 말하려 하는지를 은폐하거나 망각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치적인 혹은 제도 비판적인 차원, 또는 대안적인 미술의 차원에서 여성과 일정 정도 결합하면서 동시에 여성을 혹은 정치를 서로로부터 고립시키는(정치를 배제하고, 여성을 신비화하거나 타자화하는) 진술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범주, 범주의 다양성은 곧 정치적 차원의 피해갈 수 없는 근본적인 명제를 흩트리는 전략쯤으로 보이는 것이다(반대로 그것을 긍정하자면, ‘아시아 여성은 이미 낡은 범주이고 따라서 그 함의가 아닌 다음 전개만이 필요한 것이 된 상황인 것일까.’). 따라서 전시는 흥미로운 작업들의 끝없는 나열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는데, 그보다는 의문을 남길 수밖에 없는데, 이 의문은 결국 그 다양한 범주와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의 사이 혹은 간극이 어떻게 해소되느냐 혹은 접합하느냐의 차원을 향한다.
“‘신체성’의 관점에서 1960년대 이후 아시아 여성 미술의 동시대적 의미를 새롭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 아시아 현대미술을 비교 연구·전시해 온 국립현대미술관의 아시아 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련되었다. 신체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상황이 교차하며, 차이와 다양성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주제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아시아 11개국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 130여 점이 모였다.”

정강자, 〈명동 Myeong-Dong〉(1973. oil on canvas, 162.2x130.3 cm.)[이미지 제공=아라리오갤러리]. 하지만 애초에 이 추상적인 진술과 그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분기는 의미적인 결정보다는 그 자의성과 임의성을 드러내는 산출이 아니었을까―“동시대적 의미”는 역사의 탈구를 보여주며 유행하는 키워드들의 나열을 뜻하는가. 곧 이 제목(들)에 대한 가상의 시나리오로,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은 일종의 일차적 아카이브의 토대를 나타내는 표찰이 확장된 것이고, 그것에 대한 ‘접속’을 꾀하는 데 우선하여 그것에 대한 명명이 필요하며, 그 절차에서 그것을 몸이라는 타자적 용어로 갈음하며 굴절시켜, 곧 ‘접속된 몸’을 고안하면서 연장하고, 이후 모음 혹은 모아진 자료로부터 이차 분류를 거쳐 (실제) 2차 제목(들)을 산출하는 두 번의 명명 혹은 과정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더 이상 제목을 유지할 수 없는 단계로 나아간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전제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실제 전시장은 비좁고 가득 찬 작품들의 과잉으로 자리한다. 이는 작품과 작품의 사이, 작품에 대한 거리의 불충분함으로 수렴하기보다는 작품과 작품을 되먹이는 데 어려움을 수반한다. 또한 이는 아카이브가 필요로 하는 공간의 여지 역시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분기되는 언어와 다양하게 수집된 작업의 혼란스러운 질서 속에서 그 어느 것도 우선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 어쩌면 이는 방대한 자료 정리의 차원에서 완성되는 후 도록의 제한된 일부의 시각적 엿보기의 산출은 아닐까. 곧 자료로의 또 다른 정리가 아닌 자료의 파편적인 양상들을 통한 미완성으로서 선취 말이다.
우연하고도 자의적으로 선택되는 몇 개의 중심된 이미지를 이어, 전시를 다시 구성함으로써 이 전시는 완성이 아닌 완결될 수 있다. 이 완결은 미완성으로서 전시 또는 너무 많은 것으로서 전시를 비좁은 틈에서 길어 올린 특이한 경로로 재산출하며 전시로 자리 잡게 만드는 것과 같다. 여기서 중심에 대한 선택은 임의적이어서 부적절하다기보다 효과적이며, 전시로서 가능성을 산출하는 행위이다. 다름 아닌, 정강자 작가의 〈명동〉(1973.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162×130.3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이 길어 올린 타자로서 여성의 형상이 그 첫 번째 이정표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2024-09-03 ~ 2025-03-0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지하1층, 5, 6전시실
주최/후원 국립현대미술관
(협찬) LG OLED, 무림페이퍼, 아시아나항공
(후원)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필리핀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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