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안건형, 〈한국인을 관두는 법〉에 대한 주석: 냉소라는 형식
    REVIEW/Visual arts 2026. 7. 8. 13:55

    안건형, 〈한국인을 관두는 법〉(2018/2024. 2채널 비디오, 흑백, 사운드. 66분 24초. 오리지널 버전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커미션.)(이하 상동).

    안건형 감독의 〈한국인을 관두는 법〉(2018/2024. 2채널 비디오, 흑백, 사운드. 66분 24초. 오리지널 버전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커미션.)은 각각 이미지와 내레이션(좌측 스크린), 인용 문구와 사진(우측 스크린)으로 병치되는 2개의 스크린을 통해 “한국인”의 특정한 역사 문화적 DNA를 추상, 조감해 낸다. 기회주의자 한국인에 대한 강령 속에서 구분/분별의 방식을 통한 한국인 안의 경계를 내는 과정은 특정 한국인에 대한 범주와 그 바깥의 범주를 반드시 전제하므로, “한국인을 관두는 법”은 한국인임을 전적으로 포기하기보다 (기존의 것을 새롭게 범주화하고 바로 그것을) 선택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택의 주술은 한결같이 반어적인 데다 메스꺼움을 유래하도록 전면화되어 있고, 따라서 비가시적으로 그러한 한국인을 관두어야 하는 그 바깥의 한국인의 피드백을 축적한다. 이는 다시 태극기 집회를 보는 철저한 외부적, 객관적 시선의 거리를 확보하며 영화의 이전으로 돌아간다.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을 여러 단면으로 클로즈업하면서 〈한국인을 관두는 법〉은 “기회주의와 유토피아”에 관한 방송을 시작한다. 무채색의 장노출된 현장(ground)과 중앙의 공고한 ‘역사적’ 이미지/인물(figure)로 합성되는 하나의 화면에서, 그 배경은 시간 축과 이미지의 정지이면서 정적과 공백의 뚜렷한 환경으로서 또 하나의 대비를 불러온다. 곧 정적에 가까운 백색소음 아래 뚜렷한 것으로 각인되는 방송의 내레이션은 다시 집회 현장에서 마이크를 든 이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수많은 군중의 비가시적 존재와 결착되는 중이다.

     

    중앙의 동상은 일원화된 군중의 순간들, 사라짐, 공백, 진공 상태를 뒤로 하고 역사의 영원한 형상으로 자리하는데, 이는 기회주의 강령의 비가시적 목소리의 지지체의 자리를 희미하게나마 대신한다고 할 수 있을까. 소리의 출처는 이미지가 출현하는 현장의 그것으로, 독립된 무대 위에서 그곳의 청자를 가정하며 현재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화면 안의 대상을 향하기보다 그 대상을 화면 바깥으로 확장한다―그 안에는 소리가 없다. 그것은 슬라이드되는 이미지들의 지워진 목소리를 대신하며, 멈춰진 진공적 시간 ‘위’에 놓인다.

     

    이 목소리들은 군집을 이루는 동물의 특성을 인간의 것으로 가져올 수 있을 때 인간의 특별한 기회주의로의 성취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개체를 일원화하고 동질화하는 집체주의는 일종의 파시즘의 성향을 드러낸다. “사고”는 필요하지 않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온전한 개인의 영역 역시 필요하지 않다. 여기서 좌측 스크린이 역사를 박제화하고 영원화한다면, 우측 스크린은 역사의 파편들을 기워 기회주의의 실재를 완성해 나간다. 이는 크게 일제강점기의 천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 다시 박정희 정권 시기의 육영수 여사로, 각각 남산의 조선신궁에서 이승만 동상으로, 다시 남산 어린이 회관의 이미지를 반복하며, 동상들의 이미지와 같이―이것이 모두 현재의 것으로서 즉물적이며, 그것을 일종의 ‘장소’의 역사―시대의 전개라는 시간 축을 설정한다.―로서 보여준다. 동시에 천황과 육영수를, 그들이 지은 그 건물, 풍경을 둘러싼 예찬의 문구를 주로 끊임없이 나열한다.

     

    〈한국인을 관두는 법〉은 극우 우파의 세력을 대상으로 추출하여 단적으로 비판하는 대신에, 비판의 내부를 형성하는 것으로써 발화의 태도와 정신과 거리를 두게 만든다. 진화심리학적 차원에서 기회주의의 합목적성의 전거를 마련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애써 지워야 하는 건 울퉁불퉁한 역사의 형상들이다. 그것은 기념비적 차원으로 곳곳에 남아 있으며 고유한 것보다는 절대적인 것으로 두드러진다.

     

    따라서 숭고의 대상들은 시간을 넘어서, 시간의 솔기를 매끄럽게 하며 하나의 미래적 시간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그 표상들과 그것에 대한 체현적 몸짓들의 실제적 현실 속에서 ‘한국인을 관두는 법’은 그들의 명목에서 떨어져 나와 우리의 부인과 자조의 차원으로 변용되게 된다. 이 전이의 지점을 구성하는 것은 그 외부적인 것, 곧 실제적인 것 안에 놓인 한국인에 대한 냉소주의의 언어로의 소급됨을 역으로 피드백한 결과이다.

     

    김민관 편집장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