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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무회, 《김매자 춤의 연대기 - 춤결을 짓다(계승과 변주의 미학)》: 자연의 힘과 역량을 운용하는 몸REVIEW/Dance 2026. 7. 31. 20:44

《김매자 춤의 연대기 - 춤결을 짓다(계승과 변주의 미학)》는 순서대로 〈춤본 I〉, 〈일무〉, 〈광〉 세 작업을 모았는데―각각 김미선, 김성의, 손미정이 독무를, 김지영, 백주희, 고경혜, 황인정이 세 공연의 군무를 맡았다.―, 전통의 형식을 가져오고 활용하되 자연과 맺는 존재의 뜻과 숨에 대한 강조를 통한 세계관의 새로운 정립으로써 거대하고 극적인 세계 환경 내 존재의 체험 양식을 구성하고, 동시에 세계의 생성 구조 내 존재의 역량과 힘을 창발시킨다고 할 수 있었다.
일종의 ‘전통으로서 김매자’를 상정하는 가운데, “계승과 변주”라는 것은 내재적 차원을 벗어나게 되며, 일견 형용 모순적인 전제로 느껴지는데, “연대기”적 시간관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변주’보다는 ‘계승’에 초점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곧 변주의 우위와 공세, 누적의 층위는 “김매자 춤”의 영속이 아닌, 그 연대기적 시간을 보존하는 것의 한계에 다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현장은 김매자 실연의 압축 영상을 사전에 보여주며 무대를 시작하는 것처럼, 김매자 춤 자체가 계속 이어져 나가는 현장을 확인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계승과 변주’라는 두 개념은 시간의 전후 구조로 배분된다기보다 두 시간의 뒤섞임과 동시적 발생을 전제하는데, 계승 자체가 변주를 동반하며, 변주되는 것이 계승 이후의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계승을 향해 (거슬러) 가는 과정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계승이 순수 단독적인 차원에서는 무언가를 변화시키지 않음을 전제한다면, 시간과 존재의 차이에 의해 계승은 자연히 변주의 양상을 띠게 되고, 따라서 변주는 계승 자체를 직접 향하며 그것을 이어받는 부가적인 혹은 부차적인 또는 결정적으로 그 이후의 차원이라기보다 계승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며 계승과 동시적인 발생의 무엇이다. 곧 계승에 따르며 부속되는, 그리고 계승에 전제되는 무엇이다.
김미선의 〈춤본 I〉(1987~)은 땅과 하늘을 숨과 날갯짓으로 교직하는데, 땅의 숨으로부터 움트면서 동시에 세상을 듣고 읽어낸다면, 하늘에서의 날갯짓은 또 다른 숨이자 광대하고 풍부한 확장의 여정과 같다. 이는 거대한 시공간의 부피를 상정하며―그러니까 실은, 포스트극장에서 열렸지만, 실은 대극장에 걸맞은 작업이었다.―, 장소적 차원에 안착되기보다 서사적이고 극적인 시간 층위에 따른 공간 질서를 구성해 낸다. 땅과의 교감은 시간의 지속을 통해 또한 서사의 내용 층위를 획득하는데, 미세하고 점진적인 차이의 시간은 순수 형식이 아닌 존재의 의지와 뜻을 담아내는, 또는 그것으로 초과되며 극적인 시간성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숨쉼은 나는 것이기도 하고 세계를 수용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세계를 관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를 그 자체로 사유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먼저 땅에서의 숨 역시 비상을 향하면서 그 과정이 비상 자체를 의태한다, 곧 땅에서의 낢이다. 이 복합적 기호 계열은 한편으로는 세계를 정위지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에 대한 주체의 태도와 같은 세계관을 전제한다. 또한 기호의 역동성을 나타내며, 이는 하나의 동작이 다른 의미의 동작으로 분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동작은 숨의 운용과 같은데, 가령 두 손을 끌어오는 건 기도하는 모습으로 비쳐지면서도 숨을 좁고 긴요하게 보존하는 것으로써 이뤄진다.
네 존재의 군무가 중앙의 일자를 둘러싸면서 공간은 더 입체적이 되면서 역동적 흐름을 타게 되는데, 일종의 하늘 공간이 펼쳐진다. 곧 두 팔을 펼친 채 음악에 맞춰 한 바퀴씩 회전하며 내려앉고 한 번 까딱 찍고 되돌아 오는 일정한 분절의 몸짓들이 연이어진다. 이 강세는 몸을 뒤틀어 하늘을 보는 구조적이고 정태적 움직임의 찍힘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다시 땅 밑으로 깊이 가라앉는, 땅과 밀착된 일자를 둘러싸고 네 명의 몸짓은 마치 그를 위한 위무를, 기도를, 보호를 하는 것 같은데, 다시 ‘소생’한 존재의 표정은 슬픔을 삭이는 듯하다.
주체의 소생에 따라 넷의 굳건한 대형은 그 중심부로부터 용해되는데, 이는 다시 하나의 흐름으로 수렴한다. 곧 일자가 다시 옆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질 때 한쪽 다리가 부상하여 이번에는 깊숙이 회귀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솟구치는 생명력을 증명하는데, 그에 이어 네 명의 몸짓도 그를 둘러싸고 합치된다. 이 발을 서서히 내려놓고, 다시 그 역순으로 재생하여 일어나며, 앞서와 같이 몸을 뒤틀어 하늘을 보며 무대가 닫힌다. 이는 의식적 차원을 힘주어 신체적 차원으로 정박시키는 것과 같은데, 그로써 특이하게 결정화된 신체의 양태가 드러나면서 의식 역시 변성된다. 그것은 무언가를 직접 본다는 것보다 무언가를 다르게 보는, 볼 수 있는 신체 자체를 현시하는 것에 가깝다.
〈일무〉는 하얀 천 막에 투사된 해를 뒤돈 채 받쳐 든 일자의 모습에서 출발한다. 해를 받들고 해의 이지러진 작용을 표현함은 북춤을 의태하는데, 이는 자연스레 해의 도상으로서 상정되는 북의 의미화를 동반한다. 분절되고 격렬하며 정교한 동작들은 북춤의 세부 몸짓들을 각인한다. 이처럼 〈일무〉는 전통춤의 형식을 어떻게 형식 자체로 돌려줄 것인지, 하나의 윤곽으로 드러나게 할지의 측면에 닿아 있으며, 이는 서사적 전개의 차원으로 확장되고 재의미화된다. 곧 일종의 북춤은 해를 부리고 해의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존재 양식 자체로서 새롭게 정초된다.
이제 해는 하늘에서 내려와 몸의 반경 안에서 땅과 함께 노니는데, 일무가 日巫, 곧 “해를 부르는 무당”답게 초반 하늘을 향한 기도이자 동시에 해를 몸의 재형상으로 고스란히 떠 오는 몸짓으로 시작했다면, 이제 해를 보내고 가지고 노는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운용의 묘에 초점이 맞춰진다. 가령 두 손을 크게 교차하여 획 뿌리는 몸짓은 해를 하나의 공과 같은 대상으로 다룬다는 재현적 상을 추출한다. 무엇보다 해를 다루는 존재는 중의적이고 모호하다. 이는 감색과 검은색의 양면으로 된 치마를 뒤로 말아 묶어 앞과 뒤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틀려 닿는 의상 착용―거기에 감색으로 된 바지를 입었다.―으로 강화되는 인상이다.
어깨춤을 추며 박수를 유도하는 것으로 급작스러운 변화가 생기는데, 이는 해가 세계의 외떨어진 받들어야 하는 대상에서 내려와, 해의 보편타당한 공공적 차원의 증여가 세계로 연장됨을 그 자체의 축원적이고 긍정적인 차원으로 수용하면서 펼쳐내는 것과 같다. 또한 이 동작들에는 연행의 차원 뒤에 곧 시김이 있는데, 잦아든 반경은 더 압축적으로 고도화되며, 눈을 감고 상모를 돌리는 동작으로 이어진다. 실제 상모가 없고 그것이 상기된다는 점에서, 매우 미세한 표정에 초점이 맞춰진다.
곧 전통의 어떤 형식적 틀만 남았을 때 그것은 일종의 모더니즘의 어법을 차용하면서도 형식에서 나아간 색다른 변이의 서사를 가져온다. 상모 춤은 부재하는 상모를 대신해 또 다른 내용적 삽입을 요청한다. 그것은 눈을 감고 해의 이지러짐을 미묘하게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해를 쬐는 것일 수도 있으며, 해의 순환적 차원을 사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광〉은 양 옆으로 펼치며 반원을 이루는 두 팔의 너른 품의 기본 도상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그 형태를 유지하면서 좌우로 궁글리는 것과 같이 일정하게 커다란 어떤 부피의 무언가를 갸우뚱하면서 다룬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곧 빛이 근원적으로 오는 어떤 기원적 경로로서 해를 도상 차원으로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해 무릎으로 손을 모았다가 위로 펴고, 내리며 앞으로 펴 내며 동시에 앞을 가르는 일련의 흐름에는 결기가 보인다. 또한 손을 머리 위 허공에서 마구 이지러지게 할 때 그것은 일종의 빛의 산란이면서 매우 분열증적이고 산만한 날갯짓으로 보인다.
또한 멀리 조망하는 것과 같은 시선은 거대한 환경으로서 (서사적 차원의) 자연이라는 대상을 불러오며, 나아가 자연과 조응된 신체를 구성한다. 앞서 모으고 펴는 팔이 에너지를 잠재했다가 칼로 썰듯 급격하게 용출되었던 것과 같이, 움직임은 단지 숨의 자연스러운 연장이 아니라 숨으로써 무언가를 생성하는 지점에서 급진적으로 수행적이다. 곧 간청하듯 팔을 올리고 격발하듯 내려 치고 맹렬하게 휘젓고 솟구칠 때 푸는 일련의 흐름은 역동적이고 급변의 기조 아래 있으며, 어떤 힘을 실제적으로 운용하는 것에 가깝다.
이런 수행 그보다 결행의 차원에서 일자에게는 근엄함이, 카리스마가 있는데, 가령 하나의 팔 또 하나의 팔 각을 세워 유지하는 형세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두 손을 모아 옆으로 펼치고 기울어진 얼굴 채 회전하는 것과 같이 뒤틂과 그로 인한 힘의 효과는 〈춤본 I〉에서처럼 동원된다. 신체의 특이화와 함께 어떤 역치에 다다르는 몸은 자연 자체의 그리고 자연을 연장하는 신체의 역량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잡고 뿌리고 잡아 올리고 두 손을 겨누고 다시 뿌리는 일련의 동작은 연쇄 과정을 이루며 기호학적 놀이로 치환되면서 닫히는데, 이는 시작점을 연상시킨다.
세 개의 춤을 통해 본 김매자의 안무적 세계는 전통춤의 형식을 기저에 두되 그것을 움직임의 강도로 벼려 내고, 서사적 차원으로 연장하면서 안무가의 세계관을 제시하는데, 거기에는 자연의 투여가 있으며, 자연과 연결된 인간으로서 철학이 그로부터 산출된다. 곧 존재는 자연을 매개하면서 재연장하는 존재이며, 일종의 대무당인 것이다. 호흡은 내면의 차원에 머물기보다 자연의 순환 자체를 표상하고, 그 세계를 운용하는 기본적 단위가 된다. 이로써 현대인의 고독한 실존과는 다른 주체의 형상을 만들며, 그는 매개자인 동시에 힘과 의지를 지닌 강력한 주체의 형상으로 거듭난다.
김민관 편집장
4월 28일 오후 7시 30분, 4월 29일 오후 5시, 포스트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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