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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수윤, 〈무제: 쿠쿠〉: 현상학적 혹은 매체 특정적
    REVIEW/Dance 2026. 9. 8. 13:31

    음악의 부상과 강도

     

    박수윤, 〈무제: 쿠쿠〉©옥상훈[사진=크리틱스초이스댄스페스티벌](이하 상동).

    〈무제: 쿠쿠〉는 제목 없음에 대한 부제로써 형용모순의 상태를 만드는데, 이 자기 지시적 부정은 쿠쿠가 뻐꾸기의 울음을 나타내는 의성어이자 그로부터 연장되어 일상-문화적으로는 밥솥의 ‘울음’을 전유한 특정 밥솥 브랜드를 상기시키는 한편, 이는 안무가가 의도한 ‘미친’이란 뜻으로 바로 가닿지 않는다. 그러니까 실질적인 제목인 ‘미친’의 뜻을 직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하면서 “무제”는 그것의 정의할 수 없음, 정위 지을 수 없음의 사태를 ‘직면’하고 있다.

     

    이로써 ‘미친”을 “단순한 광기를 의미하지 않는”(박수윤) 것으로 정의짓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 작품을 추동하는 절대적인 힘은 음악의 리듬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속적으로 반복되는 뻐꾸기 울음, 혹은 밥솥의 울음이 연장된 결과이다. “수많은 외부의 자극과 관계”로써 음악은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무제: 쿠쿠〉는 쉽게 말해 음악과의 절대적인 동기화를 꾀하는 작업이다.

     

    음악은 멈추지 않고 강도를 높인다. 그런데 이는 현상학적 명제를 탐구하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다. 나의 감각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고찰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으로는 음악에 미친, 음악이 미치는 효과에 강박적으로 적용하는 주체의 광기를 주제 의식으로 현상하지 않는가. 또는 음악이라는 매체와의 연관성을 탐문하는 무용 자체적 실험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단순하게는 춤이라는 예외적/범속한 수행성의 차원을 극대화하는 것은 아닌가.

     

    실제 관객이 보는 건 이 춤의 열광됨이다. 분투하는 몸이다. 그것은 일견 대극장의 스펙터클을 충당하는 가장 쉬운 보법으로 보이는 바도 있다. 그럼에도 극장은 매우 충만함을 순일하게 지속한다. 이것은 무대 뒤쪽 밴드의 힘이다. 그러니까 양옆으로 치우친 스피커가 물리적으로 자신을 지시하는 극장의 체계를 벗어나면서 자신들을 라이브 밴드로 지칭함으로써 이것이 라이브 무대임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소진되지 않는 끝

     

    관객의 열광된 감각을 체현하는 움직임으로서 무대는 기능한다. 한편으로 박수윤의 지난 작업 〈죽 페스〉(2025)에서 철제 이동형 구조물을 동원해 신체와 공간 간의 밀착된 관계를 구성하며 근본적으로 공간 자체를 축의 전환 공간으로 바꾸었던 것과 같이, 〈무제: 쿠쿠〉에서 2층 철제 침대 프레임 4개는 신체적인 현상이며, 신체와 보조를 맞추는 또 다른 신체가 된다. 이는 집단적 지지체의 연장으로부터 집산을 가능하게 하며, 춤의 역동성을 장치에 따라 배가한다.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오라오는 침대 위에 엎드린, 검은색 슬리브리스 탑과 청바지를 입은 금발의 여자―김나형―는 막이 내린 이후의 등장으로, 아직 공연이 끝나지 않았음을 지시하기 위한 기능적 삽입물이지만, 그와 동시에 끝의 여운과 동떨어져서 그는 막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와중이라는 점에서 자신만의 맥락을 강화하며 공연을 지연시킨다.

     

    이 ‘의뭉스러운’ 이화효과로부터, 춤의 이격으로부터 우리는 감각이 재정렬되기 전의 상태를 들여다보고 관찰, 관음한다. 그는 숨을 몰아쉰다. 처음부터 잠은 예고된 것이다. 침대는 무용하게 또는 이동 장치라는 일차적 차원으로서만 도입되지 않았다. 〈죽 페스〉가 울퉁불퉁한 요철 위에서 꾸물러거리는 신체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반 자체의 이동으로 이행된다면, 〈무제: 쿠쿠〉는 반대로 이행으로부터 정지된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수 앞쪽을 닿지 않는 가상의 꼭지점으로 하여 직각 삼각형의 빗변과 아랫변을 각각 그리는 형광등의 조합으로 이뤄진 두 개의 열, 무대의 너비를 채우는 길쭉한 이 두 형광등의 열은, 막이 내려 가면서 빗변의 조명은 비가시화된다. 그리고 계속 춤을 멈추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끝까지 인장한다. 끝나지 않지만 끝맺음된다는 것, 끝은 단지 작위적으로 차단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아직 소진되지 않았다는 것.

     

    춤이 멎은 순간

     

    곧 막 뒤로 여전히 존재들의 소리가 들리고, 막의 관습성이 관객의 박수로 인계되고, 결정적 장면이 장치와 맞물려 스펙터클의 이미지로 되며 그것에 타당성을 부여할 때, 모든 것은 과잉 충족되고 있다. 타들어가는 춤의 충만함이 결정적인 이미지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꺼뜨릴 필요가 있고, 어떤 간극을 도입할 필요가 있고, 따라서 사그라든 무대로 전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곧 잠이다. 신체가 멎은 순간, 춤이 잠재워진 신체이다. 쉼 없이 달려가는 춤의 기세는 어떤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이 음악적 변전으로써 시도되어 왔다면, 심지어 무대 전체에 널브러진 집단의 정적 그리고 “아” 소리로부터 드럼이 음악의 중심을 새롭게 이끌고 감으로써 침묵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침묵―음성으로의 요청―과 음성―침묵의 연장―이 뒤바뀐 음악적 추동력을 합목적화한다.

     

    이 소리는 색소폰이 중심이 된 재즈풍의 음악과 결합하는 떨판으로서 신체 이후에 도착한다. 그 전의 EDM은 관능적 차원의 몸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 전의 기타가 주축이 되고 심연에 배어드는 색소폰의 기본적인 연주는 가장 수월하고도 평이하게 움직임을 음악으로 동조시킨다. 가장 처음에 오페라 같은 성악의 구음이 시작에 배치된다. 막이 오르면서 뒷문이 열린 극장은 현실을 노출하는데, 그 앞에 선 밴드는 그 잠깐의 열림과 함께 무대로 열린다.

     

    극한의 결정적 지점으로서 두 팔을 안쪽으로 둥글게 말고 위로 뻗었다가 털어내는 일련의 동작, 그 전에 오른팔을 옆으로 뻗고 왼손을 기타를 치듯 왼팔을 돌리는 일련의 동작, 그 전에 두 팔을 작게 툭툭 털고 크게 뒤로 넘기는 동작 등이 음악에의 적응을 대표적으로 시각화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역동의 지점들은 정동과의 차이를 벌린다. 거기에는 미묘하고도 모호한 것이 없으며, 끝없는 분투의 연쇄 작용이 불러일으키는 현재(에 대한 집중)만이 있다.

     

    음악의 라이브니스성

     

    집단의 제전은 음악의 라이브니스로부터 지지받는다. 음악은 이 모든 걸 정합된 것으로 만든다. 춤은 음악적이다. 그것은 음악에 열려 있다. 이 지점은 의외로 신선하고도 즐겁다. 그러니까 복잡한 심리적 차원의 미궁으로 인도하는 것 대신, “외부의 자극” 자체가 나를 동요시키고 움직이게 만든다.

     

    이것은 앞의 움직임에 심리적 차원을 보족하고 배가하는 배경음악이 지배하는 무대와 음악 자체가 연주되고 있음에서 기초하는 무대의 결정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바로, 후자는 움직임에 정합된 음악이라는 정확한 실행의 반복을 위해, 녹음된 음향/음악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무대가 시도하지 않는 부분을 수행한 것이다.

     

    이것 자체가 특별하다기보다 그것이 쉽지 않음에도 왜 시도되었는가, 그리고 그 시도 자체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가 중요할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들은 음악에 대한 열광의 사태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니까 이 열광의 움직임이 갖는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것의 차이를 융해시킬 수 있는, 단순하고 강렬한 강도 안에서의 몸짓들, 기쁨의 춤이 아니라 춤의 기쁨 자체에 근접하는 몸짓들.

     

    그런데 이는 외부의 자극 자체, 외부의 자극에 대한 지각 자체를 일방향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과정으로, ‘나’가 그 자극의 결과이자 합성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작품의 주제의식이, 결정적으로 주체의 자율적 차원과 판단의 영역 자체가 그것과 어떻게 역학적 관계를 이루는지를 보여주는지를 전제하지 않는다, 소거한다.

     

    현상학적 혹은 매체적

     

    실은 모든 게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 객체임을, 곧 현상학적이지만 실은 우리의 비주체성을 보여주는, 열정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수동적임을 〈무제: 쿠쿠〉는 단순하게 전제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실존 대신에 현상학을, 배경음악 대신에 실제 음악을 차용할 때, 결국 사라지는 건 그 현존―춤을 추는 몸―에 대한 내용, 의미 자체가 아닐까.

     

    곧 〈무제: 쿠쿠〉는 매체 특정적이지만, 그 의미가 비워진 자리에 대한 반문이 솟아나는 것이다, 또는 그 두 개가 교환된 부분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이 감관의 동물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곧 음악은 춤이다라는 단순한 사실을 입증하는 데 그치려는 게 아니라면, 자극과 비자극, 곧 음악의 유무, 음악과의 상호 작용 같은 더 복잡한 테스트가 가정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곧, 왜 매체 특정적인 몸으로의 환원이 필요한 것일까라는 것. 그것은 실은 완벽히 구조화되지 않는, 춤의 역량, 열광, 기쁨 자체를 추동하기 위함이 아닐까. 진정한 음악이 사라진 무대 자체에 대한 반문의 차원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우리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물로서 자리한다는 전제 자체는 이제 무색해지거나 그것의 비정치성을 사유하지 못하는 명제로 뒤집히게 되는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안무 박수윤

    조안무 김나형

     

    출연 박수윤, 김나형, 유지나, 강다솜, 윤나영, 김미소, 김윤지, 조수빈, 오아현, 유예리, 전현욱, 김민석

     

    무대감독 이도엽

    음악감독 이준호

    조명디자인 김건영

    세트디자인 조일경

    스태프 이세영, 김예원, 원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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