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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요찬, 〈부채〉: 억압을 부채질하기
    REVIEW/Dance 2026. 9. 8. 13:32

    내면을 투사하기

     

    강요찬, 〈부채〉©옥상훈[사진=크리틱스초이스댄스페스티벌](이하 상동).

    〈부채〉는 제목과 같이 즉자적으로 바람을 부치는 도구를 도입하는데, 이는 인트로에서 커다란 스탠드형 선풍기에서 이후 종이비행기같이 빗변이 긴 직각삼각형 두 개가 마주하며 접힌, 커다란 오브제로 이어진다. 이때 무대 안쪽에서 그것을 얼굴께로 들고 좌우-앞뒤로 기울이는 한 존재, 종이비행기-부채가 얼굴을 대체하는, 형용모순적, 역설적 존재가 계속해서 자리하며, 두 개의 화면 분할이 앞뒤로 구성된다.

     

    아마도 이 존재가 보이는 징후가 이 작품의 심층적 메시지를 호출하며, 〈부채〉가 부채춤이라는 비교적 ‘얕은’ 전통을 조망하는 것의 아이러니와 전통이라는 관념의 두께를 짊어짐의 곤궁을 동시에 나타낸다. 그것은 가분수의 머리를 지닌 채 방향 감각을 잃고 계속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버둥거리는 가운데 제자리에 고착된다.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면서 갈등하고 방황할 뿐이다.

     

    이것이 붉은 조명 아래 옷을 하나씩 벗어던지고 나서 마구 떨리는 몸들, 신음과 상징계적 잔여의 발화와 솟구치는, 욕동과 광란이 혼재하는 경계의 지대로 전환된다. 상징계와의 뚜렷한 대비로서 무의식, 전의식의 상태에서 존재를 갈음하는 건 내레이션이다. “나는 자꾸만 내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생각하는데…” 그런데 이 발화는 이들 안의 누군가의 내면이 아니라, 아마도 ‘강요찬’ 자신의 것처럼 느껴진다.

     

    처음 선풍기와 함께 등장해, 나머지 존재들을 그 선풍기로 조정하던 강요찬은 소극적 현실의 경계부에 위치하는 관찰자의 지위를 얼굴 없는 다른 무용수로 전이한 후, 그것과 외떨어진 분리 조각으로서 몸을 투여해 얼굴 없는 존재에 인격을 다시 부여한다. 이 대리 현전, 원격 현전의 방식을 경유해 발생하는 서술자는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내가 사고하기에 고로 존재하는 데카르트적 자아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된다.

     

    분열된 주체

     

    ‘진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이 분열된 주체는 나의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의 소위 이인증에서 나아가 나와 사회가 이격되어 있다는 실존적 차원의 곤궁으로 증대된다. 이는 매체적 차원의 효과를 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곧 마치 바람과 뒤섞인, 바람과 동시적인 신체들, 부채를 부치는 존재와 부채 자체의 엮임, 어떤 전이와 혼동 같은 것을 지시하거나 그것으로 현상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신체 만한 부채를 부칠 때 존재는 도착된다. 그것은 부채에 복속되며 기능 차원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 기울어지고 꺾이고 찔끔하는 부채 자체의 신체가 존재화된다. 마치 선풍기에 정향되는 존재들이 무각성하며 관성적이듯 의식은 무화되고 신체는 느슨하고 나른해지며 주체의 자율적 영도를 포기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감각으로부터 나의 흔들리는 실존, 유약한 의식으로부터의 실존이 구성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거대한 부채로부터 만들어지는 부채춤은 기본적으로 실존적 차원을 되새긴다. 신체는 그 매체로부터 버둥거린다. 그로부터 버둥거리는 또 다른 신체의 우세가 구성된다. 처음 선풍기에 따라 이동하던 존재들은 현실의 외양을 한다. 일상의 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있으며, 대개 정장이다. 몇 가지 역동적 행위 양상이 빚어지는데, 무대 상수 앞쪽 선풍기와 하수 뒤쪽 집단의 양상은 선풍기의 작은 회전에 따라 너른 시야각을 산출한다.

     

    선풍기를 눕혔을 때 이들은 그것에 근접하며 그것을 지켜보기도 한다. 선풍기가 멈췄을 때 그들이 향하던 동시에 그들과 거리를 벌리던 바람의 효과로부터 거리를 좁히면서 선풍기를 앞에 두고 강요찬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바람을 불어넣어 강요찬의 지위를 역전한다. 이 인간적인 곤궁과 미끄러짐은 또한 이후의 주체의 눈멂과 이격 현상을 예고한다.

     

    신체의 개량

     


    부채와 결합된 안무는 신체 전반을 개량하기에 이르는데, 그에 따라 몇몇 인상적인 동작들이 불거진다. 무대 좌우에서 퍼그가 뿜어져 나오고, 두 손으로 부채를 펴서 든 후 돌 때 사물과 신체가 교차되면서 그 둘의 간극이 발생하는데, 이는 신체가 사물 안에 기입되는 장면이기도 하고, 사물이 신체를 잠식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때 음악은 약간 미궁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무겁지도 또 가볍지도 않은 상태이다.

     

    이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아카이브 플랫폼”의 하나로 상연되었던, 송주호의 〈유익한 수난〉(2015)에서 네 면으로 접혀 윗면과 아랫면이 없이 세워진 직육면체 형상의 하얀 종이 막 안에 퍼포머가 들어가 움직이는 가운데, 양자역학적 진리를 허구적 가설로서 재매개하여 존재를 우스꽝스럽게 비의화화는 장면을 상기시킨다. 이는 나아가 아카이브의 관점주의에 입각한 불안정성의 진리를 보여준다고도 하겠다.

     

    또한 그것이 얇고 불안정한 막인 만큼 결국 찢기고 파편화되면서 일종의 액체적 긴장을 일으키며 무수한 결정들로 이지러지는 효과도 있다. 이 가운데 존재의 사물화, 대상화의 차원과는 반대로, 〈부채〉는 존재(로부터)의 고착된 지점을 묘사한다. 그 안의 당황스러움이 목소리로써 외화된다. 매체―신체―와 지지체가 전복되는 지점에서, 미래로의 도약 대신에, 현재의 순간에 가없이 붙잡힌다.

     

    가분수의 머리, 대체된 머리로 인해 시각의 지배적 지위를 기각당한, 내가 있는 곳과 내가 느끼는 감각을 통합할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이 실존적 양상에 곧 숭고하거나 완전히 휘발되지도 않는 잔여적 화음이 동반된다. 전체적으로 조명을 깊게, 두껍게 쓰지 않음으로써 모든 현상은 너무 잘 보이는데, 그것은 앞선 일상의 장면에서 한 번 분기되어 내면의 읊조림으로 변화되지만, 그 자아에게 모든 것이 명확한 이미지로 가시화됨을 의미한다.

     

    오브제의 ‘무게’

     

    수행의 단면이, 부조리한 존재의 상황이 판명하게 드러남으로써 〈부채〉는 주체의 곤궁을 가시화하는 데 있어, 우리의 시점이 투사되는 지점을 체현한다. 곧 볼 수 없는 대상으로서 그들이 자리하는 게 아니라, 보지 못하는 나, 나 위의 가림막이 있다.

    마치 그 닫힌 막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강요찬이 목소리로 전이되면서 동시에 외부의 신체에 함입됨으로써 그 바깥에서 대상화의 효과를 낳을 수 있던 유일한 주체의 자리가 사라진 자리에서 하나의 주체가 솟아나는 셈이다.

     

    이제 변화는 주체의 웅얼거림에서 도상의 다변화로서 나아가는데, 부채를 겹쳐서 종이 공작의 감각을 마치 시험하거나 한 명의 여성 무용수가 위에 올라타며 집합적 신체로써 두 개의 별을 겹쳐 놓은 듯한 2층의 입체 도형을 만들기도 한다. 남자가 두 개의 부채를 겹쳐 들고 내리자 그 안에 여자는 그것을 받치고 위로 올린다. 이어 음악의 힘과 함께 풍류로써 무대는 승화되고, 무대 뒤편의 문틈으로부터 선풍기가 보인다.

     

    동시에 도착한 빛과 함께 두 팔을 벌린 채 존재들의 비인간의 형상이 부각된다. 앞선 부채를 부치는 동작들은 부채와 이접된 신체 단독의 부조리함이 아니라, 그 둘이 하나로 분간할 수 없이 하나의 이질적 생명체가 된다는 점에서 부조리해진다. 마치 나방의 펄럭거림처럼 그것은 환상적이고도 환영적이다. 거대한 날개로 확대된 존재의 꿈뻑거림에서 존재는 지지체로부터가 아니라, 지지체로 도치되고 연장된다.

     

    그것의 무게는 그것의 존재를 재구성한다. 부채는 심각한 사물이 된다. 덩달아 존재도 심각해진다. 이는 가볍고도 청량한 바람의 증폭된 효과로서 처음과 비교되며, 무겁게 가시화된 부채-존재의 차원에서 실존을 떠안게 된다. 그런데 이 실존이 향하는 의제는 무엇인가. 단지 나의 현상학적 이물감 정도에 그치는 것인가.

     

    부채춤의 전통에 대한 압박의 알레고리는 그로써 모호해지는데, 마치 앞선 입체적 결정이 지닌 본래 부채춤에서 원의 대형을 만드는 것과 같은 클라이맥스 장면을 연출하며 그것을 어느 정도 의태하지만, 오브제의 특이성 자체에 적응하고 실험하는 데 더 큰 비중이 주어진다고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전통의 무게, 전통에 대한 허덕임 같은 것일까.

     

    김민관 편집장

     

    안무 강요찬

    출연 김동욱, 정혜주, 강성배, 예영주, 양지수, 정하연, 이준, 이소미, 김재은

    무대감독 정승재, 조명감독 이승호, 음악 김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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